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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2-15문
문답내용 12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13문 : 우리 스스로 이 죄값을 다 지불 할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더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

14문 : 그렇다면 다른 어떤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해서 치러 줄 수 있습니까?
답 : 어떤 피조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서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줄 수 없습니다.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만 합니까?
답 : 참되고 죄없는 사람이면서 또한 모든 피조물보다 더 강력한 존재여야 합니다. 즉 참 사람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강설날짜 2013-09-2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주(12-15문)

 

우리의 중보자

 

말씀 : 시 49:7-8

 

12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13문 : 우리 스스로 이 죄값을 다 지불 할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더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

 

14문 : 그렇다면 다른 어떤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해서 치러 줄 수 있습니까?
답 : 어떤 피조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서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줄 수 없습니다.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만 합니까?
답 : 참되고 죄없는 사람이면서 또한 모든 피조물보다 더 강력한 존재여야 합니다. 즉 참 사람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전체 구조를 보면, 1-2문 총론에서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답하기를 그것은 사나 죽으나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위로 가운데서 살고 죽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2문이었죠.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는지를 알아야 하고, 세 번째는 어떻게 구속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는 지난 3주간에 걸쳐서 바로 첫 번째 부분,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부터 두 번째 부분인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는지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5주~31주까지).

 

1. 구원은 형벌을 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는 것

 

그 첫 번째 문답인 12문을 보면, 11문의 내용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11문까지 해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아담 안에서 타락했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현세에서 그리고 영원한 지옥에서 형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12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12문은 구원을 “형벌을 피하는 것”,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 두 가지 측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벌을 피하는 것은 구원의 수동적인 측면이라고 한다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은 구원의 적극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벌만 피했다고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죠. 형벌은 피했지만, 다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은 여전히 형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것 자체가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예를 보면 그것이 분명합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땅에서 저주를 받고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벌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깐 가인이 자신의 죄벌이 너무 중해서 자신이 길가다가 다른 사람이 만나면 자신을 죽일 것이라며 하소연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을 것이다”하고서 가인의 목숨을 보존해주셨습니다. 지금 가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그 죄의 벌로 쫓겨나면서도 자기 목숨에 대해서만 염려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 자체가 사망이요 형벌인데, 가인은 거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 육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후에 나단이 와서 책망하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을 말하니깐, 다윗이 자신이 범죄 했다고 실토합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할 것이다.”하고서 처음부터 죄 사함이 선포되는 것이죠. 그러면 죄 용서받고, 육체의 생명이 보존되었으니 다윗이 그것으로 만족하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 다윗이 아래와 같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1)

 

다윗은 죄를 이미 사함 받고 육체의 생명을 보존 받았어도 다시금 하나님의 호의를 입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 용서함 받았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신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도 자기의 생명만 유지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면전에 다시 설 수 있게 되기를 위하여서 기도한 것입니다. 형벌만 면하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의 관계가 회복되는 은혜를 받는 데까지 이르러야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고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문이 바로 그러한 구원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피할 뿐 아니라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것

 

다시금 12문을 보십시오.

 

12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satisfied)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데 값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가 지불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지불되든지... 공의가 요구하는 값을 치러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공의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법적 정의로서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으면 그 죄에 대한 대가, 곧 죄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값은 사망의 형벌로서, 죄 지은 사람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값을 우리가 형벌 받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지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을 다루는 것이 13문이고, 14문은 우리의 죄값을 다른 피조물이 대신 치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15문은 이도 저도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있는 중보자는 어떤 존재여야만 하는가 하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3. 인간 스스로 죄값을 지불할 수 있는가?

 

13문 : 우리 스스로 이 죄값을 다 지불 할 수 있습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더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

 

13문에 대해서 번역본마다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어떤 번역본은 이 13문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라고 했고, 어떤 번역본은 “우리 스스로 이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영어판을 보니 satisfactio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단어는 “만족, 충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채무, “빚을 갚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답을 보니깐 후자가 좀 더 괜찮겠다고 생각됩니다. 답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더 늘어나게 할 뿐입니다.”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판을 보면 “죄책”이라는 단어는 없고 “debt”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곧 날마다 빚만 늘어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2-14문까지 내용을 기술하면서 죄를 빚에 비유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주 죄를 빚지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이고,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옥합을 깨트린 여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 보면, 시몬이라 이름 하는 바리새인의 집에서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에 죄 많은 여인이 와서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발에 붇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 그때 이 시몬이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렇다 저의 사랑이 많은 것은 많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빚으로 비유하시는 것은 죄 짓는 것과 빚지는 것이 공통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르지만, 그러나 빚에 시달려본 사람은 빚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아는 것입니다. 빚진 사람들을 보면 매일 빚 갚으라는 독촉전화에 시달리고, 모든 재산과 월급이 차압당하며, 특히 사채를 건드렸으면 폭력배가 와서 횡포를 놓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로부터도, 친척들로부터도 외면을 받게 되고, 평생 무언가에 쫓기듯이 마음의 여유 없이 일평생 채무의 의무에 종이 되어 빚을 갚기 위해 평생 노동을 착취당하는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눈에만 안 보일뿐이지, 그의 발에는 이미 쇠고랑이 차여 있는 것과 같고, 완전히 다 갚기 전까지는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여기서 “호리”라는 단어는 두 렙돈에 해당하는 액수의 돈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500원, 1000원 정도 되는데, 그렇게 작은 액수까지 완전히 다 갚기 전까지는 결단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빚의 무서움입니다. 거기는 인정사정 봐주는 것이 없고 오직 원칙만이 있는 것입니다.


죄가 바로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공의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으며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생을 쇠고랑 채워서 그 죄값을 다 치룰 때까지 절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빚을 우리가 다 갚아내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대신 지불해주든지 해서 빚을 다 청산해야지만 형벌을 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13문이 묻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 빚을 갚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굳이 중보자 없이도 우리 스스로 지불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법정에서 죄 지은 사람을 처벌할 때, 가벼운 죄일 때는 벌금 좀 내게 한다든지 사회봉사를 얼마간 시키든지 해서 죄값을 치르도록 합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이 죄값을 스스로 지불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돈이나 재물을 많이 바쳐서 죄값을 지불할 수 있다든지, 아니면 개과천선해서 열심히 선을 행하면서 살면 이전의 죄들에 대해서 만회할 수 있든지, 그런 길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7)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8)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시 49:6-8)

 

이 구절에 보면 돈이 암만 많아도, 능히 형제를 구속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생명의 값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다 합쳐놓아도, 천하를 준다 해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영혼의 값어치가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으로는 영혼을 살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공의는 그 사람의 목숨에 해당하는 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니, 그 무엇으로도 이 생명을 구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찬양에서도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 개과천선해서 열심히 선을 행하고 살아도 예전에 지은 죄들을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죄 지은 것이 꼭 일만 달란트 빚진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14조에서 많이 보면 24조 정도 되는 액수인데, 정말 죄값이 24조정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만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액수다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액수이지 수치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암만 본인이 평생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서 돈을 벌어가지고 갚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액수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개과천선하고 열심히 도를 닦고 암만 착하고 선하게 살아봤자, 그것으로는 도무지 자신의 죄값을 치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사람이 열심히 도를 닦고 선을 행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열심히 율법 지켰다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 공로로 자기가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들이라고 깔보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죄가 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실상에 대해 욥기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15)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16)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4-16)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일까요? 옳은 말일까요? 옳은 말입니다. 다만 잘못 적용했을 뿐이죠. 적용까지 잘해야 진정으로 옳은 말이 됩니다. 그러나 적용을 떠나서 이 말 자체만 놓고 보면 진리입니다. 우리는 죄악만 물먹듯이 범할 뿐이지 그 어떠한 의롭다 할 만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킨 것이 본인들 볼 때에는 의로운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은 하나님 보실 때는 열심히 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지키는 게 왜 죄가 됩니까? 왜냐하면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인간은 그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죄만 더 늘어날 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빚만 더욱 늘어간다고 가르쳐줍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언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죄를 끊고 평생 온전한 의를 행하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범한 죄로 인해 형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살아가는 동안 계속 죄가 더 많아지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진노만 더 쌓인다고 하니 이것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죄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4. 다른 피조물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있는가?

 

14문 : 그렇다면 다른 어떤 피조물이 우리를 대신해서 치러 줄 수 있습니까?
답 : 어떤 피조물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이 범죄한 것을 가지고서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러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다른 피조물은 사람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의미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사람의 범죄는 사람이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피조물과만 독점적으로 언약을 맺으셨고 법을 명하셨으며 사람에게만 그 법에 따라 상벌을 주시기를 원하시지, 그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을 수 있는 탁월하고 고귀한 지위를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하신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이 지은 죄의 무게를 동물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하고 수준 높은 피조물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약하고 수준 낮은 피조물한테는 생사를 결정지우는 엄청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인생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무겁고 무한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형벌하실 때 가장 잔인하고 무한하게 형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이 영육간에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그것을 임하게 하시는 것인데, 그러나 사람도 결국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의 짐을 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형벌을 유한한 인간이 한 번에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형벌 받는 시간을 무한히 늘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지옥이죠.


이 세상에서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강하고 가장 수준 높은 피조물인 인간도 이 진노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무한히 형벌 받아야 할 만큼 그 진노가 크고 무거운 것인데, 하물며 우리보다 약하고 그 존재의 가치가 못한 동물들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동물들이 우리를 위해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할 수 있겠습니까? 동물들이 만일 우리의 죄짐을 짊어진다면, 짊어지자마자 그 무게를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폭삭 주저앉아버릴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 때 율법에서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는데, 그것은 모형이고 그림자이고, 예표일 뿐이지, 죄를 사하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배웠습니다.

 

5. 그러면 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러면 누가 우리의 이 죄값을 대신 지불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해주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는 자를 중보자라고 하는데, 그러면 중보자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15문입니다.

 

15문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만 합니까?
답 : 참되고 죄없는 사람이면서 또한 모든 피조물보다 더 강력한 존재여야 합니다. 즉 참 사람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므로 그 중보자는 참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죄가 있으면 자기 죄값이나 치러야지 다른 사람의 죄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자는 반드시 온전히 의로워야 합니다. 완전히 순종하는 의로운 자라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참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이기만 해서는 단 한 사람의 죄밖에 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질 수 있으려면 사람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훨씬 강력하신 분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중보자의 죽음으로 모든 인생들의 죄값을 다 치르려면 그 중보자의 존재의 가치가 무한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람보다 강력하고 존재의 가치가 무한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는 죄없는 참 사람이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통 중보자라고 하면 둘 사이를 화해시켜주고 화해가 되었으면 중보의 일을 마치고 물러서는 것이 상식입니다. 더 이상 끼어들면 양쪽에서 눈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 시키신 후에 뒤로 빠지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관계의 중심에 계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제 삼자로서 서로를 화목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의 머리가 되셔서 자기 안에서 이 둘의 화목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함으로 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그분의 것이 된 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위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 받고 형벌을 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입게 되어서, 그분과의 거룩한 교제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주의 문답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가 형벌을 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죄값을 지불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이 예수그리스도 한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평생 기억해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처음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 믿고 의지해야 하지만, 그 이후는 내가 열심히 수양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우리는 이미 믿음에서 떠난 것이고 믿음에서 파선한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않고 회개치 않고 끝까지 그렇게 간 사람들은 중생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그 값을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로로 우리가 완전한 죄사함과 구원함을 얻었고 영원한 영생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교제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빚이 있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 오해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거룩하고 경건하고 의롭게 산자만이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보면 공통적으로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구원영생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지금 치열한 싸움가운데 있는 그 싸움에서 이기는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지고 사단마귀에 지면 그 사람은 영생 못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도리어 버림이 될 까 두렵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킨다. 두렵고 떨림을 너희 구원을 이루어라.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받지 말아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탐심, 곧 우상숭배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볼 때 선한 삶이 없으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이런 말들이 꼭 처음 믿는 것은 은혜로 되지만, 그 이후는 우리가 열심히 수양하고 달려가야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행위 = 구원” 인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은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고 싸워 이김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우리의 행함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그러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아름답게 행함으로 꽃 피워낼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 같은 구절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런 구절들 앞에서 일차적으로 우리는 정말 그러한 줄 알고, 죄에 지고 사단에게 지면 결국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나태와 방종을 찔러 죽이고, 더욱 깨어 기도하며 신앙의 경주를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조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완전하고 확실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은혜의 사실에 아름답게 복속되어 있습니다. 말이 어려운데, 이것을 언젠가 다룰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펠라기안이 되고 알미니안이 되고 율법주의가 됩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잘못하면 망할 수 있다는 긴장감으로 우리의 나태와 방종을 찔러 죽여야 하는 것이고, 더욱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된 완전한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붙잡고 의지하여 더욱 믿음과 감사와 확신 속에서 영적전쟁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려우신 공의와 엄위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아는데서 오는 참 사랑과 감사가 하나로 결합된 상태를 칼빈은 경건이라고 불렀고, 이러한 경건에 이르기 전까지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께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또한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그의 권위를 찾는 것을 합당한 권리로 여겨서 그의 위엄을 높이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기에 진력하고 그의 명령들을 복종한다. 하나님을 악을 엄히 처벌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보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항상 그 앞에 두며, 그를 두려워하여 그의 진노를 촉발시키지 않도록 언제나 자기를 가다듬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열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위축될 정도로 하나님의 심판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악인을 벌하는 분으로 보는 동시에 또한 경건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불경건한 자들과 악인들을 벌하는 일과 의인에게 영생의 상급을 베푸는 일이 똑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경건한 자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자기를 가다듬는 것은 그저 형벌에 대한 끔찍스러운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기리기 때문에, 또한 그를 주로서 경배하고 높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이다. 순결하고 순전한 신앙이란 바로 이것이니, 곧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진지한 두려움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기꺼이 공경심이 나타나고 또한 율법이 제시하는 정당한 예배가 생겨나는 그런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1권 2장 2절 후반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이러한 죄와 비참함에서 건져주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온전히 의지해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하며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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