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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24-25문
문답내용 24문 : 사도신경의 조항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조항은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해서, 둘째 조항은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셋째 조항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 다룹니다.

25문 :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오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강설날짜 2013-11-0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주(24-25문)

삼위일체 하나님

말씀 : 마 3:16-17

24문 : 사도신경의 조항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조항은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해서, 둘째 조항은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셋째 조항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 다룹니다.

25문 :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당신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말합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오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난시간에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믿음은 곧 성경전체를 하나님의 참 계시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일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내 마음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이만큼 좋은 표현을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정리해서, 이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결국 믿음에 있어서 핵심은 내가 믿는다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가 하는 믿음의 내용에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전체인데, 성경전체에서 나타나는 복음의 핵심을 최대한으로 잘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몇 주간동안 이 사도신경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오늘 문답을 보면 사도신경이 몇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가 하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24문 : 사도신경의 조항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조항은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대해서, 둘째 조항은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셋째 조항은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에 대해서 다룹니다.

세 조항은 각각 라틴어 “크레도(credo, 나는 믿습니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물론 예수 그리스도 부분에서는 “그리고(Et)”라는 단어로 대신해서 표현되고 있음).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설명들은 다 앞선 credo 부분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각각 어떻게 믿는가 하는 것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특히 한글번역본에서는 세 번째 조항에서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렇게 해서 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도신경의 원문을 보면 이 후반부전체가 “성령을 믿사오며” 한 문장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딱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게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창조와 섭리를 이야기하고, 성자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구속사역을 설명하며,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교회와 성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신경이 표현한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창조와 섭리는 성부하나님만의 독자적인 사역이고, 구속은 성자 하나님만의 독자적인 사역이고, 교회와 성화는 성령님의 독자적인 사역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도 성부성자성령의 합동사역이고, 구속도,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창조의 사역에 대해서는 그 대표격으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으로 돌려드리는 것이죠(‘전유’라고 함).

오늘은 사도신경의 전체 구조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계신다는 사실을 배우고자 합니다. 

25문 :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왜 당신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에대해서 말합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오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6장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은 한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성부성자성령 삼위 하나님을 말하는가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답은 정말 간단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어렴풋이 계시되었지만,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러한 진리가 밝히 계시되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한분이심이 많이 강조되어 있고,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가 희미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약을 다시 읽고 해석하는, 즉 신약의 빛에서 구약을 새롭게 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구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종교가 바로 유대교와 이슬람교인데, 그들은 절대자 유일신을 고백하지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슬람교는 AD 500년경에 아라비아 근방에서 무하마드라는 사람이 구약성경(모세오경, 시편, 선지서)에다가 자기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계시를 짜깁기해서 코란을 만들어서 생성된 종교인데, 그들은 구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되 다만 무하마드가 받은 계시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유대교와는 다르지만 그러나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는 유대교와 같습니다. 흔히들 ‘알라’와 ‘하나님’은 다른 신에 대한 호칭이 아니냐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알라’라는 말은 아라비아 말로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영어로 “God”이죠. 지금도 아라비아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라”라고 부르고 예수를 ‘알라’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만, 그러나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것이고, 특별히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동일하게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알라)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여기고,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해 관대하게 보아서 알라의 선지자로 봅니다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암만 구약에도 삼위일체가 희미하게 계시되었다 하더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빛에서 구약을 보지 않으면, 도통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신약이 없고, 구약만 가지고 신앙생활하면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조점은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주변이 다 다신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기 전에 살았던 애굽도 다신적이었고, 가나안도 다신적이었으며, 포로로 잡혀가는 바벨론도 다신적인 것입니다. 사방이 전부 하나님에 대해서 다신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는 것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시를 따라 하나님을 한분으로 믿고 있는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3년간 같이 사시고 그들과 생활하시는 가운데 중대한 생각의 전환이 있게 됩니다. 바로 유대인 제자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 고백을 하는 것이죠. 더구나 부활하셔서 그들 앞에 서셨을 때에는 모든 제자들이 입을 모아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바로 이 예수님의 신성을 담대하게 증거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하는 구절은 아래 구절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셨는데, 이 호칭 자체가 예수님의 신성을 증거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신성모독이라며 비판하였습니다. 늘 드는 비유지만, 개의 새끼는 개요, 고양이의 새끼는 고양이이고,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와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계시록 4장을 보면 천사들과 교회가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그런데 5장에 보면, 어린양이 나오는데, 이 어린양께도 동일한 찬양이 돌려집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계 5:12)

그리고 이어서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을 동시에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예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와 성령을 도구삼아 성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을 의지하여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곧 삼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밤에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약속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보혜사이시기 때문이며, 자신이 하늘로 올라간 후에 오실 그분 역시 자신과 동일한 영광과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거역하고 훼방해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한 자는 영영히 죄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령님을 높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영,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동등하게 같이 열거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그 하나님이 계시는 방식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깐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한분이라고 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상황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그만 이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양태론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시니, 성부가 곧 성자이시고, 성자가 곧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이름과 모양만 달리 했을 뿐 동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이죠. 동일한 물 분자가 얼음과 물과 수중기로 변화되듯이, 동일한 사람이 집에서 아빠요, 직장에서는 사장으로, 교회에서는 장로로 불리듯이, 동일하신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성자 예수님으로 그리고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인데,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서로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이신 분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 것에서 보는 것처럼, 만일 동일한 분이라면 둘이 함께 있는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요절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시에 등장하신다는 사실은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가 아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단으로 3세기 아리우스는 성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피조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다른 이단인 양자론은 예수님께서 그냥 사람이셨는데,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신격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단으로 삼신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구별에 너무 주의한 나머지 하나님이 세분이시라고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성부성자성령이 구별되심을 갖다가 이성적으로 해결하려다가 다 이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그것을 다 정죄하면서 성경적 진리를 그대로 선언했는데, 바로 구별된 삼위로 계시면서 한분이시다 하는 의미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쓴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성부성자성령이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며 서로 구별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하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파악의 태도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하는 태도로 믿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로 계신 경이로우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 삼위일체의 신비와 깊이를 완전히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배워나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이 자라고 주님과의 교제가 점차로 깊어지고, 성숙해짐에 따라서, 딱 그 성화된 만큼만 깨달아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성화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조차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데는 영원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 신앙생활의 근간을 이루는 복음진리라는 것입니다. 신학적 잡동사니도 아니고, 목회자 교수만 알면 되는 그런 교리가 아니라, 이것을 모르면 구원이 없고,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는 그런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이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구원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우리가 알고, 이 삼위일체 교리의 그 깊이와 넓이를 날마다 깨달아 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삼위일체 교리를 알아 가는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만 알 수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묵상하고, 더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이론적으로만 적당히 정리해놓고 평소에 이 점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안 하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이 삼위일체 교리가 어렵기도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제적인 신앙생활과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고관념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로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 얼마나 본질적인 문제인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잘 나타납니다. 

“(21)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하나 됨을 근거로 우리 교회의 하나 됨을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 되자, 서로 사랑하자.” 암만 외쳐도, 이것을 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깨닫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참된 하나 됨과 사랑의 실천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해봤자, 그저 이 세상의 동호회에서도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는 그런 수준의 외침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구별 되시면서도 서로의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면서 서로 사랑하여 하나로 연합해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이 영원히 서로 깊이 하나가 되시고 충족한 사랑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밖으로 흘러넘쳐서 나타난 것이 바로 피조세계의 창조입니다. 우리가 지성적으로 궁금한 것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배운바 있는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우연입니까? 필연입니까? 만약에 만드실 수밖에 없는 필연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모자람을 입증하는 것이요, 만드실 필요가 없는데도 하나님이 만드셨다면, 즉 우연이라면 그 또한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니,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실 수 없다는 논리가 됩니다.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어떻게 답을 해도 틀리게 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모든 사물들, 예를 들어 모자, 탁자, 옷, 안경... 이 모든 것들은 필요해서 여러분들이 만들어 내었거나 사거나 착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위대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사물의존적인 존재일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자의 등받이는 허리가 불편하지 않도록 등을 기대기 위해서, 여기 있는 강대상은 책이나 강의안을 얹어놓고 설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마이크는 저의 작은 목소리를 키워서 크게 듣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이 완전함으로 꽉차있을수록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술가적 창조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 연주회 입장료가 얼마 하는지 아십니까? 비싼 것은 30만원 정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피아노 연주의 예술성과 가치가 엄청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때문에 30만원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탁월한 선율을 우리는 수십 년이 흘러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음악가들은 어떻게 그런 것을 작곡해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음악에 대한 생각들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으로 그려내고 싶어하고, 그것을 연주해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작곡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음악 혼이 가득 차서, 악보를 그리고, 연주함으로써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음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의 부족 때문에 생겨나는 그런 종류의 필연성이 아닙니다. 밥상 없이는 밥을 먹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밥상을 만들어야 하는 그런 종류의 부족함의 소산이 아닙니다. 도리어 완전하기에 그것을 표현해내기 위한 필연성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안에 가득 찬 예술가적인 혼이 이 세상을 창조하게 한 것입니다. 그 필연은 하나님 자신도 강요당하는 그런 종류의 필연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워낙 완전하시기 때문에 확 하고 드러내실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안에 무엇이 가득차 있어서 무엇을 표현해내고 싶어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삼위 하나님 간의 사랑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서로 깊이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이 흘러넘쳐서 표현해 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삼위 하나님처럼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한 사람으로 지으시지 아니하시고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입니다. 일종의 관계성, 또는 사회성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는데, 분명 둘인데, 한 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 간에는 역할과 질서가 다릅니다. 남자는 머리로서 사랑으로 다스리는 역할을, 여자는 사랑으로 순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할 속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이 또한 흘러넘쳐서 자기 형상을 닮은 또 다른 새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 패턴이 삼위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 태어나서 결국에는 커다란 하나 된 사회를 형성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공동체인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해내는 유일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물론 이 세상도 일반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측면을 어느 정도 반영합니다. 사람들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서로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사회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관계성을 형성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나라들은 사단마귀가 권세잡고 있기 때문에 마귀적인 요소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을 궁극적으로 참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는 바로 교회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부르셔서 다 하나가 되게 하시고, 자기 뜻대로 각 사람마다 독특한 은사를 허락하심으로써 서로 조화롭게 섬기며 연합하여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방금 읽었던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예수님이 유언적으로 하신 기도로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바람과 목적과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의 핵심은 간단합니다. 아버지의 영광, 그리고 아들의 영광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무엇을 통해 영광을 얻느냐 하면, 바로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며, 어떤 교회가 될 때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인데, 곧 거룩한 공동체, 그리고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 된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의 목적이고, 교회 공동체의 존재 목적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영광을 반영하고 표현해내야 할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을 우리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무엇을 목표로 해서 살아갑니까? 우리 마음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공부 열심히 해서 스펙 쌓아서 좋은데 취직할 목표를 세우셨습니까? 올 한해는 열심히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 계획을 세웠습니까? 좋습니다. 다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것들은 결국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잠간이면 없어질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 영원한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소망사랑이 영원한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고자 목표를 세우고 이 사랑을 인생의 목적을 삼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최상의 길, 아니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고린도교회가 우리 인생들의 본질을 잘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교회가 서로 어떻게 합니까? 서로 싸우고 다투고, 분란을 일으키고, 서로 대접받으려고 하고, 서로 높아지려고 경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에는 은사 대결로 나타났던 것이죠. 누구의 은사가 더 높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제일 좋은 은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랑은 자기 유익이나 야망을 구하지 않고 낮아져 자기를 희생해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또한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성부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영원히 낳으시는 분이시고 그러므로 사랑으로 다스리고 아들에게 명령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태어나시는 분으로서 자기를 낮추고 아버지에게 복종하시는 분이시죠. 그 복종이 전혀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는 그 복종하는 아들을 높여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셔서 자기를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오직 아들의 영광만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광을 드러내며 서로가 서로를 높이며 각자의 독특한 역할 속에서 온전히 하나 된 모습을 바로 교회가 반영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가장 낮은 자가 높은 자요, 높은 자는 낮아져 섬겨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배려해야 하며, 우리 모두는 남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형제자매를 존귀하게 대해야 하며,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야 하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며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각 사람마다 서로 다양한 은사를 주셨으므로, 사랑 안에서 그 다양한 은사를 존중하면서, 교회에 두신 여러 가지 질서 속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근본 이기적이고 악하기 때문에 그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의 모습이 모든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고린도교회 공동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거룩하신 목적을 잊어버리고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대접받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큰 분란이나 싸움은 없어도 그저 적당하게 웃으며 대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참으로 애통하며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죄악된 본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력으로 인해 절망하며 그리스도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성령님께 속한 것으로서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됨이란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사도바울이 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힘써 지켜나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교회의 연합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서 본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아야만, 참된 회개가 나오고, 그러한 은혜 속에서 우리 육체의 욕심과 이기심이 많이 죽어져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진실되고 정직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삼위일체 교리가 우리 삶의 얼마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까?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부부관계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속에서, 직장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교회 형제자매와의 관계 속에서 바로 이 성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을 표현해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말씀과 기도 속에서 이 삼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게 하시고, 교제해가게 하시며 삼위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 같이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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