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3.12.06 22:0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I(31문) -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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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31문
문답내용 31문 : 왜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임명을 받고, 또한 성령 하나님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으뜸가는 선지자와 교사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과 뜻을 온전히 계시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몸을 단번의 희생제물로 드리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 안에 우리가 끝까지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강설날짜 2013-11-2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31-32문)(1)

 

그리스도

 

요절 : 마 3:16-17

 

31문 : 왜 하나님의 아들은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임명을 받고, 또한 성령 하나님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으뜸가는 선지자와 교사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과 뜻을 온전히 계시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몸을 단번의 희생제물로 드리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 안에 우리가 끝까지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구약시대 때 왕, 선지자,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 부어 세웠습니다. 기름을 붓는 의식은 성령께서 임하심을 상징합니다. 즉 성령께서 임하셔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그릇으로 변화시키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름부음인 것입니다. 자연인의 상태로는 무능하고 부정하고 불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합당치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셔서 그 사람의 연약함을 가려주시고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들을 구비하여 주셔서 하나님 앞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기름 붓는 것과 성령의 역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 16:13)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

 

그런데 구약시대 때 기름부음을 받은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다 근본 죄악된 인간이기에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림자 역할만 할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주구장창 외친 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장차 한 메시아를 보내주겠다는 것이죠. 모세는 말하기를 “나와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너희에게 보내실 것이다.”라고 말했고, 많은 선지자들이 다윗과 같은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특히 시편에서 그분은 주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다윗의 주님이시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왕 같은 대제사장으로 예언되었고, 다니엘에서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이면서 인자 같은 이로서 이 땅에 구름을 타고 오시며 온 세상 왕국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왕국을 세우시고 다스릴 자로 예언되었습니다. 이런 예언의 말씀들을 기초해서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오셔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분을 한 몸에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61)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1-6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 5:42)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기름부음 받으셨습니까? 기름부음 받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기름부음의 의식은 하나의 예표하는 상징일 뿐이고, 예수님은 그 실체요 성취로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습니다.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17)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즉 성부하나님께서 성령하나님을 예수님에게 기름 붓 듯 부으셔서 그리스도로 임명하시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힘입어 이 땅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 세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1. 선지자

 

먼저 그분은 우리의 선지자가 되십니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셨을 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세 세례 받으시고 성령을 받으실 때에도 동일한 음성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한 마디 말씀이 더 추가 됩니다. 그것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우리가 들으면 아무 말씀도 떠오르지 않지만, 유대인들이 들으면 구약의 한 말씀을 딱 떠오르게 하는 그런 표현인 것입니다.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 18:15)

 

이 말씀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죽기 전에 고별설교로 신명기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을 들어 알고 있고, 늘 이 모세의 예언이 실현되어서 그 선지자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세례주고 하니깐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보내어서 “네가 그 선지자냐?” 그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어보면 우리는 무슨 말인지 몰라도, 유대인들은 다 아는 것이죠.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약속된 선지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나는 아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다.”하고서 예수님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베드로가 이스라엘 회중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대로 인용합니다.

 

“(22)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행 3:22)

 

예수님이 바로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선지자로서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답변을 보십시오.

 

“우리의 으뜸가는 선지자와 교사로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과 뜻을 온전히 계시해 주십니다.”

 

그분이 오셔서 구원의 경륜과 뜻을 밝히 계시해주셨는데, 그러면 구원의 경륜과 뜻이 무엇입니까? 구원 혹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시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부분적인 것이요, 분명하지 않고 희미했습니다.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그러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는 바로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온전히 계시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약속의 성취요 실체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인데,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말씀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행동들, 그리고 손짓 하나까지도 다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삶, 존재 자체가 구원의 경륜과 뜻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할 때 기껏해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마이크역할만 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계시의 주체요, 내용이요, 주인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버지의 모든 구원의 경륜과 뜻을 자신의 삶과 가르침으로 제자들에게 다 밝히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

 

이 구절의 상황은 잡히시던 날 밤에 유월절 만찬을 위해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이어 나오는 긴 강화의 말씀 중의 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듣고 있다가 베드로가 “그렇죠. 예수 친구야...”라고 말하면서 맞먹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례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를 때는 친근함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서 친근하게 잘 대해줄 때, 그러나 아랫사람은 여전히 예를 갖추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윗사람이 잘해줄 때, 자기 분수를 모르고 까부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해주면 사람을 우습게보죠. 예수님이 친구라고 하니깐, “예수 우리 친구”하면서 너무 친근하게만 생각한 나머지 경망스럽게 예수님께 대해 가져야 할 경외심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반복되는 잘못입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십니까? 아버지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다 알려주셨다는 면에서 친구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에게는 다 알려주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만 알려줍니다. 그러나 친구에게는 비밀 다 터놓고 속마음을 다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친구로 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친구지, 정말 편하게 생각해도 되는 친구로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요 창조주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는 표현을 감사함과 황송함으로 받되 늘 예를 잃어버리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역은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이심을 가르치시고, 또한 친히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으뜸가는 스승이 되셔서 구원의 길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다.” 그렇게 말씀하니깐, “저 예수가 우리가 아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느냐..”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또 오병이어 기적 후에 사람들이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할 때에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깐, 백성들이 “어렵다. 저가 요셉의 아들인데 어떻게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고 말하느냐...” 그러고서 다 떠나갔던 것입니다. 참 선지자로 오셔서 구원의 경륜을 밝히 보여주셨어도 그것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선지자의 가르침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신 자는 다 그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 병자들, 세리와 창기들... 그 당시 천대받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무라도 아버지께서 내게 이끌지 아니하시면 나에게 올 자가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참된 것으로 여기고 이렇게 나와서 배운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분이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과 계시들을 제자들이 따라가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 편에서 볼 때 예수님은 의문투성이의 말씀과 행동들을 많이 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는 예수님을 꾸짖어가면서까지 제지하려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시대적으로 아직 구약과 신약의 과도기적인 경륜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혼동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수건이 덮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잘 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자기가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들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이죠. 그들이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어야 하고, 또 그것을 적용하실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12)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7)

 

그래서 깨닫든 못 깨닫든지 간에 가르치셨고, 또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그냥 안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언제 다 가르쳐주십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구원의 경륜들을 밝히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때에도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여전히 하지만, 그러나 성령이 오셨을 때는 이제는 일체의 의구심도 없이 확실하게 밝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행동들이 한꺼번에 확 깨달아지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수많은 말씀들이 다 기억나면서 이것이 하나로 딱 꿰어지면서 구원의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이 확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사를 기억나게 하시고 그 의미까지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영감 가운데 그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유익을 못 얻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고 교회에 세운 목사들을 쓰셔서 우리에게 지금도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참 선지자로 고백한다면, 바로 이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가는 데 힘써야 합니다.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말은 해놓고서 별로 말씀 배우는 데는 관심 없고, 주일날도 자주 빠지고, 수요모임은 아예 안 오면... 그것은 믿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모임에는 잘 참석했다 하더라도 옛날의 성령받기전의 제자들처럼, 어떤 자기 생각이 딱 자리 잡고 있어서, 말씀을 자꾸 팅겨 내고, 또 내 식대로 이해하려고 하거나,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것도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성경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 다 내려놓고, 이 66권 전체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하고서, 무슨 내용이든지 다 받아들이고, 겸손히 배워가는 것이 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2. 대제사장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몸을 단번의 희생제물로 드리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구약에도 대제사장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저 실체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진짜 대제사장은 딱 한명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참 사람이시면서 참 하나님으로서 죄 없으신 온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자신이 온전한 대제사장이시고, 또 자신이 온전한 제물이 되셔서, 영단번의 십자가 제사로 모든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말고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를 십자가 제사로 구원하시고, 그것으로 대제사장의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의 길을 완주할 때까지 중보자가 되셔서 항상 우리를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1)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우리가 범죄할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님 앞에 면목 없다. 이제 나는 소망 없다. 이런 나를 주님이 받아주실 리가 없다. 나를 버리실 것이다.” 그러고서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 통분히 여기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주님이 버리실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단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을 피도 눈물도 없는 재판장 이미지로 보게 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까?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보여주신 죄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예수님이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이죠. “아버지 이 불순종하는 아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실 때, 성부 하나님께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하십니다. 왜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긍휼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를 힘입어 다시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짓고 나서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은혜를 받아 회복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죄 지었을 때 곧바로 자신의 악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입니까? 죄짓고 넘어져도 금방금방 은혜 받아서 다시 회복되고 하는 것은 아주 높은 수준의 성화를 이룬 신령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 말은 쉽게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전혀 안 느껴지게 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과 대적하려는 마음이 서서히 득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를 토설하기 싫고 회개하기 싫은 마음이 차츰 생겨나는 것입니다. 때때로 정신을 차려서 회개기도 하려고 하고 은혜를 구해도, 마음이 차갑고 오히려 냉담한 거절감 같은 것이 느껴지죠. 절망과 좌절이 엄습해 옵니다. 특히 우리의 죄가 반복되었을 때, 이런 현상이 더 심합니다. 그렇게 쓰라린 마음과 고통의 긴 시간이 흐른 뒤에 회개가 되고 은혜로 회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6)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3-6)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죄로 신음하다가 참회하고자하는 소원이 생기고 그때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만나주실 때, 기회를 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짓고 나서 바로 회개하고 바로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일정기간의 쓰라리고 냉담한 기간을 거친 후에 다시 회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시는데, 왜 곧바로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현실은 주님으로부터 차가운 거절감 같은 것을 느낍니까?


민수기 12장에 이에 대한 해답이 나옵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니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이때 모세가 그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13)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민 12:13)

 

이 모세의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다만 뭐라고 하십니까?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았을지라도 그가 칠일간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민 12:14)

 

하나님은 다시 고쳐주실 것과 진 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칠일간의 자숙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로 아비가 아들을 징계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비가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고 하는데, 아들이 얼마나 못된 짓을 했으면 부모가 그 아들의 얼굴에 침을 뱉겠습니까? 그러나 침 뱉었다고 해서 “이제 내 자식 아니다 집 나가라.” 그런 의도입니까? 부모에게 자식은 사랑스러워도 내 자식이고 미워도 내 자식입니다. 다만 침을 뱉을 정도로 아주 모독적으로 징계해서라도 그 나쁜 버릇을 고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두 가지를 하면 안 됩니다. 첫째로 “아버지가 나를 버렸구나... 집 나가야 되겠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람의 심리가 죄로 신음하다가 회개하려고 해도 주님의 은혜가 아닌 차가운 거절감을 느낄 때, 우리는 소망 없다고 좌절하고 낙심해서 절망에 빠지고, 더 나아가 자포자기해서 “애라 모르겠다...”하고서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반대로 아버지가 날 버리실 리 없고, 당연히 용서해주실 것으로 믿고서 경망스럽게 다음날 아버지 앞에 가서 실실 웃어가면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버지한테 장난치고 그러면 그것이 제정신입니까? 그러면 침 뱉는 정도가 아니라 다리몽둥이 부러집니다. 일정기간 자숙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서 그 후에 아버지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와서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하면 값없이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 지으면 우리가 회개하기도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중보기도하시고, 하나님이 들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곧바로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부어주시고 우리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암의 경우처럼 일정기간의 자숙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십니다. 일정기간 은혜롭고 사랑스러운 자기의 낯을 가리셔서 우리에 죄에 대해 징계하시고, 우리로 아주 쓰라린 고통을 맛보게 해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게 하셔서)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즉각 즉각 은혜를 주시고 다시 받아주신다면 우리 죄악된 본성은 그것을 악용해서 더 겁 없이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그리고 죄짓고 와서는 죄에 대한 진지한 뉘우침 없이 경망스럽고 뻔뻔하게 용서해달라고 하면서, 마치 예수님을 [내 죄를 지워주어서 다음에 보다 쉽게 죄를 지을 수 있게 해주는] 지우개로 생각하는 그런 불경스러운 자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바르게 고치시기 위해 적절하게 우리를 거절하시고 죄의 쓰라림 속에서 신음하게 하심으로 우리로 진실로 죄를 무겁게 생각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에게 다시 회복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늘 나아가야 하지만, 그러나 은혜는 아무 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내가 원하는 타이밍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시는 주님의 타이밍에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범하고 넘어졌을 때, 주님이 주신 징계의 고난 속에서 쓰라린 마음을 안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고, 자신의 죄에 대해 진지하게 자숙하면서, 한편으로는 낙심이 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리고 주님이 나를 위해 지금도 중보기도 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주님의 은혜주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20)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21)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3)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25)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19-26)
“(17)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말씀 읽고 기도에 힘쓰면서, 그리고 진실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은혜 달라고 기도해야 할 때, 주님이 응답하셔서 은혜를 주시고 회복해주십니다. 우리가 때로는 죄짓고 넘어져도 우리의 신실하시고 자비로운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여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주님의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충만히 받고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왕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 안에 우리가 끝까지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구약에서 왕의 직무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다스리는 일이고, 두 번째 전쟁하는 일입니다.

 

가. 다스림

 

어느 나라든 왕이 없으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해서 나라가 개판이 됩니다. 그런데 왕이 딱 있어서 다스리면 교통정리가 딱 되죠. 왕이 어떻게 다스립니까? 일차적으로는 법과 공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통제함으로써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쁜 짓하면 벌하고, 착한 일하면 상을 주어서, 공권력으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강력한 권력으로 국민을 통제하기만 하고, 압제하기만 했던 전제국가들은 결국에는 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민심을 얻어야 합니다.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왕의 인자하고 선한 마음, 섬김의 마음을 통해서 국민의 민심을 얻어야 진정한 백성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워낙 이 세상에 나쁜 왕들이 많이 있어 와서 오늘날 왕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있지만, 그러나 세종대왕과 같이 백성을 사랑하는 훌륭한 왕이라면 얼마든지 왕정제도도 대 환영입니다. 그런 왕이 있다면 누구라도 기꺼이 충성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고, 만일 그런 분을 옆에서 왕으로 모시고 충성하는 신하로 살아갈 수 있다면 더 없이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종대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비교가 불가한) 온전히 의로우시고 선하신 왕이십니다. 은혜와 자비와 진리가 충만하신 왕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백성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시고자 하는 그런 선하고 의로우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분 앞에서 자연스럽게 무릎 꿇게 되고, 기꺼이 충성하고 싶고, 복종하고 싶은 그런 분이신 것입니다. 그분의 위엄과 존엄과 능력과 영광이 무한해서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으로 인해서 더욱 무릎 꿇고 복종하고 싶은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은 부담스러운 게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이고, 그의 충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인자하시고 선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공의로우신 왕이시고, 법과 권능과 위엄으로 온 세상 위에 군림하셔서 다스리시는 지존자이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상을,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공의의 재판장이 되십니다.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이러한 법과 공권력으로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 다스리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굳건히 세우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위엄과 권능은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 초림하여 오실 때는 잠시 숨겨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는데,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니깐 당연히 왕궁에서 영광스럽게 태어나실 줄로 알고 예루살렘 왕궁으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베들레헴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라고 하는데, 무슨 권력이나 군사나 아무 힘이 없고 약하고 천대받는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 무서운 줄 모르고, 예수님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핍박했습니다. 보통 왕 같으면 그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바로 죽는 것인데, 예수님한테는 욕하고 저주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짓으로 모함하고 핍박해서 십자가에 죽이려고 했는데, 힘없이 죽임 당하셨습니다. 무슨 왕이 그런 왕이 있는가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심으로써 바야흐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지존하시고 두려우신 엄위의 왕이 되셨습니다만, 그럴지라도 이 사실이 믿는 자들에게만 보여지도록 감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경륜적인 측면에서 은혜의 왕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욕하고 저주해도, 무슨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든지, 무슨 천벌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 무서운 줄 모르고 더욱 예수님을 훼방하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하시게 되면, 더 이상 그럴 수 없죠. 주님이 온 세상의 왕이심이 모든 사람에게 눈에 보이게끔 밝히 드러납니다. 드디어 왕으로서 법과 공권력과 천군천사의 군사력의 혁혁한 위엄으로 온 세상 앞에 드러나시는 것이죠. 그때 모든 무릎이 그 권세 앞에 꿇어지고 복종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벌벌 떨면서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왕국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신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다스리시는 방식이 각각 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법과 공권력으로만 다스리십니다. 율법대로 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며 일반은총을 내려주시지만)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일말의 은총이나 자비도 없고, 무한한 분노와 공의의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는 신자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습니다.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주님이 교회를 다스리실 때에, 법과 공권력으로 강제해서 우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십니까? 헌금 안하면 벌주시고, 주일예배 빠지면 벌금 매기시며, 구약시대처럼 우상숭배하면 돌로 쳐 죽이십니까? 아니죠. 은혜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물론 무법주의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아래 있고,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은혜를 토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하나님께서는 바로 법과 공권력과 공포정치로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칼 들이대면서 “너! 이 말씀 순종해! 안 하면 죽을 줄 알아!”하시면서 강압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감화감동하셔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주셔서 우리로 기꺼이 주님께 충성하며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께 충성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충성하는 것입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말씀을 잘 배워가는 것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를 의지하거나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도리어 날마다 육체의 욕구를 죽이고,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왕이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라고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전쟁하는 일

 

두 번째로 왕의 중요한 직분은 전쟁하는 일입니다.

 

“(19)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20)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9-20)

 

왕은 자신의 권력과 공권력과 군사력을 이용해 적군의 공격에서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고, 때때로 백성들이 적국의 포로가 되었을 때는 적국을 공격해서 자기 백성들을 포로된 것에서 구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일종의 왕으로서 애굽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다윗도 왕으로서 골리앗과 블레셋 사람들을 쳐부수어서 백성들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해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왕적 통치를 예표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사단마귀의 포로된 데서 구출해내시기 위해 사단마귀와 싸우신 것입니다.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22)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0-22)

 

사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 사단마귀는 한 주먹거리도 안 됩니다. 사단 마귀는 그에게 어떤 해도 가할 수 없고, 단지 그 앞에 무릎 꿇고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단 마귀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만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그냥 천군천사 대령해서 싸우시면 얼마든지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단 마귀의 권세와 인간에 대한 지배권이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사단 마귀의 권세의 근원은 죄와 사망과 율법에 있습니다.

 

“(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단 마귀를 멸하시는데 어떻게 멸하십니까? 천군천사 대령해서 전쟁해서 싸워 멸하심으로 우리를 마귀의 권세에서 건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십니다. 십자가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와 율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이죠. 그러므로 사단 마귀의 권세가 완전히 박살났고, 더 이상 사단 마귀는 믿는 자들에 대해서 손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로 승리하사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4-15)

 

그런데 사단 마귀가 그렇게 권세를 잃어버렸고, 패배가 확정되어 있지만,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을 이용해서 어떻게 좀 신자들을 구워삶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그러한 공격에서 보호해주시고, 우리가 끝까지 구원의 길을 완주하도록 힘과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자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나아가 우리를 위해 얻으신 구원 안에 우리가 끝까지 머물러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찬이 해석자의 집에서 여러 가지를 보는데 불타는 화로를 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화로가 있고 불이 타오르고 있는데, 그 옆에서 사탄 마귀가 찬물을 끼얹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길이 확 사그라지긴 했는데, 그러나 완전히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보니깐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는 것이죠. 그러니깐 사단 마귀가 죽을 지경입니다. 크리스찬이 이 광경으로 의아해하는 동안 해석자가 그 화로의 뒤편을 보여줍니다. 그 뒤를 보니깐 예수님이 그 뒤쪽으로 계속 기름을 들이붓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로 이러한 전쟁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단마귀의 도모와 계획을 무마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이런 상황에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무관심하면 안 되고, 전쟁 중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힘을 의지하여 죄와 사단 마귀와 싸워 나가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게 하셔서 구원의 길을 완주하도록 은혜주시고 힘주시고 능력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과 주의 백성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암만 죄가 득세하려고 해도 결국 죄의 불이 꺼지게 될 것이고 은혜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도의 견인(견디고 인내하게 하신다는 의미) 교리라고 합니다.


바로 이런 왕이 우리에게 계신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아닐 수 없고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분을 우리 왕으로 모신 우리로서는 이 은혜와 사랑을 감사 찬양하면서 그분께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 그러고 보니, 세 직분이 모두 십자가에서 하나로 완성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구원의 계시가 절정으로 드러났고, 십자가가 대제사장으로서의 영단번의 속죄 제사였으며, 십자가로 죄의 권세를 무너뜨려 사단 마귀를 무력화시키시고 왕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왕, 제사장, 선지자의 삼중직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아서 이 예수를 우리의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고백하며, 우리 마음에 모시고, 순종 헌신 충성하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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