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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86문
문답내용 86문 :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또한 선행을 행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열매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강설날짜 2014-06-0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86문)


신자가 선행을 행하는 이유


말씀 : 딛 2:11-14


86문 :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또한 선행을 행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열매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체 구조


지난주까지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부가 끝났고 오늘부터 제3부가 시작됩니다. 그전에 전체 구조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복습해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주제는 ‘위로’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는 바로 내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위로를 힘입어 여러 가지 고난을 견뎌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위로로 삼고 그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의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

2) 삼위하나님이 나를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속해주셨는지에 대해서

3)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①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날마다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기 이전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비참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지를 잊어버리게 되면, 결국 구속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게 되고,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복음이 항상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지금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끊임없이 폭로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이것 아닙니까? 누군가가 자신의 단점이나 자신의 죄를 폭로하면 굉장히 불쾌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신의 전적부패한 상태를 직시하고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신이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몸이 분명히 안 좋은데, 누가 병원에 가라고 하면 잘 안 가죠. 그런데 참다 참다 안 되어서 병원에 가면, 거기서 엑스레이 찍고 MRI 찍고 CT 촬영하면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의사가 “암 말기입니다. 몇 개월 못삽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그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좌절과 절망이 엄습해 오면서, 자신의 심각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비로소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접근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몸이 안 좋으면, “그냥 감기몸살일거야... 좀 쉬면 괜찮을 거야...”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충대충 치료하면서 살았지만, 그러나 병원에 와서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 상황에서는 결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치료에 내 생사가 달렸다.” 생각하고 목숨 걸고 치료에 돌입합니다. 오직 병 낫고자 하는 열망으로 모든 치료방안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모든 식생활 습관, 삶의 모든 환경들을 통째로 바꾸고, 또 병 낫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과 시간과 열정을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지금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 그리고 우리의 영적상태가 얼마나 병들어 죽게 되었는지 그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혼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헐벗고 눈멀어 있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데, 우리는 우리 영혼에 대해서 그냥 감기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지금 상황은 정말 자신의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울부짖으면서 목숨 걸고 구원을 부르짖고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예수님 만나기를 간절히 구해야 할 상황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씩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며 약간의 자책만 할 뿐, 정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은 전혀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대충 신앙생활 하는 것이죠. 주일날 말씀을 통해 대충 위로받고 대충 기도하고 그리고 일주일을 자기 마음대로 살고... 그러한 삶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간절한 갈망이나 열망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게 약간 아쉬울 뿐이지만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잘 사는 것입니다. 다 교회 나오고 예수예수 이름 부르는데, 그 마음에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들어도 마음이 냉냉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씀을 듣는데, 복음의 엑스레이가 우리의 영혼을 찍기 시작할 때, 성령의 MRI가 우리의 영혼을 조명하게 될 때에,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내가 감기정도가 아니라 죽을병, 그것도 영원히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예수님에 대해서 수도 없이 들었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거의 대부분이 심각한 환자들이었고 심각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심각한 결핍과 인생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하고 신앙생활 잘 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자에게 예수님은 쓸데없는 분입니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회 와서 예수예수 이름 부르며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 자는 실제 삶 속에서 그분을 쓸데없는 분으로 취급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도 하루하루 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으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늘 깨닫는 사람은 예수님 없으면 단 1초도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은혜를 구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참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자신의 전적타락한 본성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일이 날마다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매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모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복음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아무 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감격과 감사가 없으면 성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복음의 엑스레이를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매주일 정기적으로 MRI찍도록 의식으로 정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주일예배입니다. 그래서 매주일,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깊이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깨달아야 비로소 이런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바로 이런 순서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먼저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대해서 다룬 뒤에 제2부로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속해주셨는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②  삼위하나님이 나를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속해주셨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참된 위로를 덧입으며 살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주님께서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는 나를 어떻게 구속하여 주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구속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구속의 내용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도신경의 내용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성화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결국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도 두 가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의 방도는 말씀과 성례입니다. 말씀으로 믿음을 일으키시고, 성례로 그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부의 내용입니다.


③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러면 제1부에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제2부에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알게 된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 수밖에 없습니까? 그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말미암아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3부의 제목이 “우리의 감사에 관하여”입니다. 결국 우리의 거룩한 순종의 삶은 감사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까? 없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다면 오늘부터 제3부를 배우지만 3부를 배우기 전에 다시 1부와 2부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그 내용을 숙지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제3부의 구조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제3부를 배우기 전에 제3부의 전체구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3부는 먼저 오늘 86문부터 해서 그러한 성화의 삶을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루고, 88문부터는 성화의 또 다른 이름인 회개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회개는 옛사람이 점점 죽고 새사람으로 점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그것이 선행을 행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선행은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십계명을 길게 다루죠. 그리고 십계명 끝부분에 참으로 거듭난 신자라도 이것을 다 온전히 지켜 행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에 대해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고 답하면서, 순종의 노력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탄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게 되고 또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문답과 주기도문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해설이 끝나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마치게 되는 것이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기도를 제3부, 곧 감사의 규범에 넣은 이유는 기도자체가 감사의 표현임과 동시에, 우리가 감사의 순종을 해나감에 있어서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은혜와 성령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매우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제 86문부터 해서 제3부의 내용을 배워보겠습니다.


3. 왜 우리가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86문)


86문 :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왜 또한 선행을 행해야 합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 열매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86문의 질문은 로마가톨릭이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은 예수님도 믿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수양하고 공덕을 쌓아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행함이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깐 로마가톨릭이 “아... 그러면 선행을 행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그런 가르침을 하면 사람들이 다 불경건하고 방탕하게 살 것이다.”라고 우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실없는 비판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불경건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던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헐렁헐렁하고 느슨하게 신앙생활 하는데도 “나 구원받았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다.”라고 생각하면서 영적인 긴장감 없이 쉽게 믿고 편하게 신앙생활하는 일들이 교회 안에 비일비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도덕률폐기론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바르게 대처해야 하는데, 잘못 대처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알미니안입니다. 결국 로마가톨릭의 말대로 은혜만 가르치고 행위를 안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행위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은혜만 가르쳤기 때문에 교회가 세속화된 것이 아니라, 값싼 은혜를 가르쳤기 때문에 세속화된 것입니다. 참된 은혜를 안 가르친 것이죠. 참되게 은혜를 받으면 성화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행함이 아닌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뭣 때문에 애써가며 선행을 행할 필요가 있겠느냐” 라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자신이 참된 은혜를 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변을 한 마디로 하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성과 열심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정성과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하늘의 종교가 땅의 종교가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선행을 행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열매를 보고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또 사람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면서 도전을 받아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전도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행의 이유로 5가지를 말하는데 사실은 하나가 빠져있습니다. 이 부분이 조금 아쉬운 부분인데, 그것은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입니다. 그럼 하나하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셔서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셨다.


답 :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자신의 영으로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


참으로 거듭난 신자가 이렇게 선행을 행하며 살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막 살 수 없게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바꿔먹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의 본성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단번에 천사로 변화시켜주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성화의 역사를 일평생 점진적으로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신자가 때때로 죄에 빠질 수는 있어도 반드시 회개하여 성화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필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②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


두 번째 이유로 구속의 은혜에 감사해서 선행을 행합니다.


답 :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고, ...


그런데 이것을 말하기 전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빼먹은 한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의 이유를 단순히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고만 말한다면... 그러면 구원 안 해주시면 순종 안하겠다는 말입니까?


이전에 제가 성화의 동기에 대해서 3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왕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고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를 십자가로 구속하여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감사와 감격으로 복종합니다. 셋째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지속적으로 걸어가지 않고 죄에 머무르고 죄를 고집하게 될 때에 결국 버림을 받고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9:23,27). 특히 이 세 번째 부분은 굉장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인데, 다음 주에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 동기가 서로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서가 있고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와 왕 되심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동기에서 토대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워낙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안 해주셨어도, 우리를 지옥 보내셔도 우리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과 모세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모세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탄원하며 기도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나는 지옥가도 주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내 구원보다도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 생각이 먼저 토대에 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구속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토대에서만 그리스도의 구속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우리가 그분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다 그렇게 안 살고, 행위가 부패하여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심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자기 피로 값 주고 우리를 다시! 사셨습니다. 처음으로 우리를 값 주고 구입하신 것이 아닙니다. 원래 자기 것이었는데, 도둑맞았다가, 그것을 다시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워낙 하나님의 것인데,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더욱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구속으로 죄 사함 받고 다시금 원래위치로 돌아와서 주님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속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깐 구속을 단순히 예수 믿고 천국가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한 것입니다. 구속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분께 복종하며 그분을 나의 왕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피조물로서 워낙 순종해야 하는데,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제는 더욱 즐거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결국 이것으로 구원받는 믿음이냐 구원받지 못하는 가짜 믿음이냐 하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일기』를 보면 그가 죽기 직전에 어떤 사람과 치열하게 논쟁하는데,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에 대해서 논쟁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논쟁한 사람은 참된 믿음의 첫 번째 행위는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죽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짜 믿음이요, 거짓된 믿음이요, 그렇게 끝까지 믿고 가면 지옥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믿음의 첫 번째 행위는 하나님의 왕 되심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입니다. 그 토대 위에서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어주셨다는 복음의 사실이 받아들여져야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자신이 여전히 왕이면서도 얼마든지 예수님이 날 위해 죽어주셔서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셨다는 사실로 인해서 소위 은혜를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않았어도 얼마든지 복음을 듣고 마음이 고양되어서 눈물을 흘리며 여러 가지 신앙적인 정서를 나타낼 수 있고, 또 감격할 수도 있고, 감사한 마음이 생겨서 얼마든지 열심히 교회 나와서 봉사도 하고 선행도 힘써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내가 왕이라는 것이고, 또 내 행복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또 내 구원이 최종적인 목적인 것이고, 예수님은 단지 나에게 내가 원하는 혜택을 주신 고마운 분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가기 위해 예수님 믿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천국가게 되었다가 아니라 그 십자가 구속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아래의 누가복음의 한 사건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12)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13)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14)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5)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16)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17:12-19)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사례했다는 말은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참된 감사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고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건강한 몸으로 일평생 꿈꾸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가 아닙니다. 참된 감사란 먼저 그 병 고침을 통해서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생각되는데, 그러한 질병을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치셨는데, 그러면 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는 성령의 조명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바로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달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문둥병자는 이제 다른 무엇도 생각나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가 문둥병이 나으면 반드시 제사장에게 가서 그 나은 몸을 보이고 적절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는 율법을 따라 성전으로 가지 아니하고 곧바로 예수님께로 다시 돌아와서 그 발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병을 고치시고 건강한 몸을 주셨으니 이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영광 내 행복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습니다.”하고 피조물의 본래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머지 아홉 명도 예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정말 고마운 마음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된 관심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자신이 고침 받고 건강한 몸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된 감사이며, 거짓된 믿음이며,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렇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십자가 은혜 감사합니다. 천국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데, 예수님 앞에 엎드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영광을 포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아무리 감사하다고 고백해도 다 가짜 감사입니다.


참된 감사에는 자신의 피조물 됨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나의 창조주로 모시고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사랑과 그 은혜의 영광을 진정으로 체험한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멸망 받아 마땅한 피조물인 자신을 멸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용서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 창조주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더욱 감사함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의 은혜에 대한 참된 감사의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감사가 있습니까? 주님의 발아래 엎드리고 왕 되심을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으면 심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눈물 콧물 쏟았어도 이것이 없으면 그것은 진정한 십자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인 우리를 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구속하여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천국가게 되었다는 것 자체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나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누구신지, 내가 얼마나 비천한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우신 왕이신지, 예수님 그분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체험하고 그래서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감사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입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외치는 립 서비스도 아닙니다. 감사는 우리의 몸으로 하는 것이고 삶 전체로 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답 :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고, ...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너희 마음을 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바칩니다.” 고백하고서 얼마든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체’를 다 바치라고 했습니다. 지체는 팔 다리 몸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위해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에 항상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만 하고, 우리의 귀를 바쳐서 참된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눈을 바쳐서 주님이 보라는 것만 보고, 우리의 뇌를 바쳐서 늘 말씀으로 생각을 채우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해 나가고, 우리의 소화기관을 바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우리의 생식기를 바쳐서 음란을 버리고 거룩하고 순결하게 성생활 하며... 그렇게 우리의 모든 지체를 다 하나님께 바쳐서 우리의 모든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의 순종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을 보십시오.


답 : ...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찬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하여 선행을 행합니다. ...


이것은 우리의 선행의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선행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행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전에 우리가 소요리문답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 바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행위로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행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소요리문답 1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하여 제일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은 영원불변하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의 측량할 수 없는 무거움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온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고 비가 내리며 천둥이 치고 온 세상이 어두컴컴하다 할지라도 구름 위에서는 변함없이 찬란한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아도 하늘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영원히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슨 행위를 해서 하나님을 이전보다 더 영광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발산적인 영광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본체적인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 그것을 우리가 발산적인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 영광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왕이시고, 자신은 티끌과 같은 피조물임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그 무한한 격차를 인식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한한 존재적인 격차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비참한 죄인으로서 자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무한한 은혜로 용서해주십니다.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더욱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거저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 두려워 떨면서, 그리고 그분께 감사하면서,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즐거워하면서,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은혜의 영광에 합당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발산적인 영광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의 세 번째 국면인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3)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은 성도들의 착하고 선한 삶을 통해서 사람들 가운데서 드높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훌륭한 아버지가 있는데, 그 아버지의 아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 아들로 인해 아버지가 욕을 먹고 아버지의 이미지와 명예가 실추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영광스러우시지만, 그분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못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사람들 가운데서 드높아집니다. 이렇게 성도의 행실을 통해서 이 땅에서 드높아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 효과적인 영광은 주로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용어와 함께 사용됩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 12:28)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않으시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래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거룩하시기를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이름이 이 땅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이름은 이 땅에 있어서 사람들의 입에서 불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짓밟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한 삶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짓밟히고 있습니까?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라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부족함과 허물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현실 앞에서 진실로 참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롬 2:24). 그리고 다시금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와 감격으로 선행을 행하는데 힘써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 목적은 세상의 소금이며 등불입니다. 소금은 우리의 거룩한 행실을 말하며, 등불은 사람들에게 비추는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5:8)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 1:10,11)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④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또한 우리가 선행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자신의 신앙에도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답 : ... 또한 우리는 그 열매를 통해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


특히 여기서 우리의 선행을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열매’라고 표현한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선행을 열매라고 표현한 것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열매라는 표현은 우리의 선행이 우리를 지으시고 구속하신 목적임을 말해줍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싹 나는 거 보려고 농사짓는 것입니까? 무럭무럭 자라서 잎이 무성하게 피는 것을 보려고 농사짓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농사짓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구속하여주신 것도 다 우리로 이 땅에서 선행을 행하며 살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구절들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11)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12)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13)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러므로 우리를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목적은 바로 우리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열매라는 표현에는 그 열매가 맺히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식물은 자판기가 아닙니다. 식물은 돈 넣으면 곧바로 결과물이 나오는 기계가 아닙니다. 생명은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는 신진대사의 작용을 통해 자라고 영양분을 모아 마지막에 열매로 표출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처음 믿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성령 안에서 회개하면서 점차로 거룩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잘못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 어린 자는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열매란 한참동안 없다가 마지막에 탁 열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들깨를 생각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먹는 깻잎이 사실 들깨 잎입니다. 그런데 들깨를 심어서 싹이 나면, 신기하게도 그 떡잎에서부터 벌써 깻잎 맛과 향이 납니다. 모양은 다른 잡초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 깻잎의 특징이 벌써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자라면 우리는 그 잎을 곧바로 따서 먹을 수 있고, 또 계속해서 자라 나중에 들깨를 맺으면 그 들깨도 따서 먹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거듭나는 즉시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만 처음에는 뚜렷하지 않고 희미할 뿐이지, 그리스도의 향기와 냄새를 분명히 나타내는 특징들은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통해 우리는 열매로서 선행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신앙을 잘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세 번째 열매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와 연결됩니다. 열매를 통해 우리는 그 나무의 어떠함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아름다운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열매가 단 하나라도 맺혔다면 그 나무는 100% 포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선행을 행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유익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참으로 거듭난 자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확신하고 싶을 때,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가 희미한 신자는 늘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려야 합니다. 성화의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야 정상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야 고통 가운데서 은혜를 부르짖으며 회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열매들이 맺히고 있습니까? 만일 원망과 불평, 불의, 미움, 불경건함, 게으름, 죄의 정욕들을 따라 사는 삶이 맺히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가 과연 좋은 나무냐 하는 본질적인 의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래의 말씀을 보십시오.


“(14)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4-15)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는 무엇을 확신하게 됩니까? 내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 마음에 형제를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삶, 선행의 열매들이 우리 신앙을 점검하고 확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선행의 열매들이 맺힐 때, 우리는 거기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은혜와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거룩한 열매들이 실제 삶속에서 풍성히 맺혀서 큰 위로와 확신 가운데서 신앙생활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⑤  전도를 위해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선행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답 : ...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합니다.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벧전 3:1-2)


이 말씀에 보면 신자인 아내가 불신자인 남편과 살 때, 그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행위를 하면 그 남편이 그 아내의 행실을 보고 복음을 영접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뭔가 자기를 넘어 자기 위에 누군가를 두려워하는 아내의 그 언행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한 행실은 사실 다른 사람들의 죄악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어두움은 빛이 가까이 오면 자신의 악한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의 선행을 미워하여 도리어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는 우리의 선행을 통해 도전받아서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선행을 행해야 할 중요한 목적이 바로 우리의 선행을 통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복음으로 나아오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가족과 친척과의 관계에서 많은 희생과 손해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평소에 성질부릴 거 다 부리고, 욕심 부릴 거 다 부리고, 그러고는 만나면 교회가자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낳는 전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전도 안 하는 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늘 손해보고 양보하고 착하고 선하게 사는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전도의 기회를 노리면서, 나의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행을 행해야 하는 이유 6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요 왕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는 반역한 피조물인 자신을 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구속으로 다시 사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와 감격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 자신의 영으로 우리 내면을 변화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는 우리의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높여드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 우리의 선행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는 유익을 얻습니다. 여섯 번째 우리의 선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서 감사함으로 그리고 마땅함으로 선행에 힘써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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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9주(78문,79문) - 성찬론에 대하여(화체설,공재설,기념설,영적임재설) file 78-79문 최상범 2872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Ⅱ(76문) - 성찬의 의미(Ⅱ) file 76문 최상범 2084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75문,76문,77문) - 성찬의 의미 file 75-77문 최상범 3005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72문,73문,74문)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 file 72-74문 최상범 3337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주(69문,70문,71문) - 세례와 성화론 file 69-71문 최상범 5445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65문,66문,67문,68문) - 말씀과 성례 file 65-68문 최상범 2659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Ⅱ(64문) - 성화는 칭의의 열매 file 64문 최상범 2606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Ⅰ(62문,63문) - 성경적인 성화론 file 62-63문 최상범 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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