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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88-91문
문답내용 88문 :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89문 :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90문 :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91문 :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한 것만이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강설날짜 2014-06-2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91문)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말씀 : 갈 2:20

88문 :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89문 :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90문 :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91문 :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한 것만이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1.  거짓된 회개

88문 :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88문의 질문에서 “진정한 회개”라고 표현한 것은 우리가 회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회개가 아닌 거짓된 회개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단순한 후회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자신이 죄 지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후회나 뉘우침은 사울도 행했습니다. 사울도 범죄한 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뉘우쳤고 또 심지어 울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이후에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후회와 뉘우침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나타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행을 행하는 것을 회개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또 감정적으로 슬퍼하기만 하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죄 짓고 나서 그 죄를 슬퍼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참된 회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론 회개에는 반드시 슬픔의 감정과 눈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변화된 삶이 없다면, 그래서 다시 옛적 삶으로 돌아가 똑같은 죄를 반복한다면, 그렇게 눈물 콧물 흘린 것은 회개가 아니라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많은 경우 회개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회개를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은혜 안에서 나의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사실을 모르고 스스로의 힘으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사람의 도덕적인 노력과 수행을 회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이 주로 이렇게 많이 생각하고, 그리고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성도들이 회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옛사람을 죽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고행을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결국 회개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회개에 대한 잘못된 생각 중의 하나는 바로 회개를 죄 용서 비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죄 짓고 나서 이제 그 죄의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진노하신다고 생각해서, 나의 잘못을 용서해주시고 다시 나를 용납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회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를 심판을 뒤집기 위한 또는 은혜를 다시 획득하기 위한 나의 행위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용서 안 해주시죠. 왜냐하면 회개가 잘못된 회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그렇게 용서를 빌었는데도 용서의 은혜가 없으니까 결국에는 절망에 빠지고 낙심에 빠져서 나중에는 자포자기 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회개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에 야기되는 심각한 폐해들을 우리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회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정리해서, 참된 회개를 하여 참되게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회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자, 그러면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다. 

88문 :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회개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란 한 마디로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고, 또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고 부활과 연합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복음을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그분이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반드시 믿음 안에서 해야 하는 것이고, 십자가 사랑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냥 아무데서나 죄 때문에 슬퍼 울고 애통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 울고 애통해야 합니까?

“(10)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여기서 “그 찌른바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회개는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믿는다는 게 뭐냐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으십니까? 많은 경우 믿는다고 말하는데, 회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음을 지적인 동의수준으로 또는 너무나 피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마음을 조명하셔서 우리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또 우리 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셔서 우리로 그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는 은혜를 받아야지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 안에서,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참되게 회개합니다. 이것이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확신하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나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죠.

3. 성경은 옛사람을 고치라고 하지 않고 죽이라고 한다.

계속해서 참된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참된 회개는 옛사람을 고쳐서 새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매우 논쟁이 되는 쟁점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예수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본성이 새로워집니까? 아니면 늘 그 본성 그대로 있습니까?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질문이 단순한 것 같은데,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고, 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고,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에 해당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양태가 완전히 갈라집니다. 이단이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구원론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심지어는 개혁신학을 똑같이 말하면서도 이 부분에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의로워진다. 날마다 죄가 정복되고 삭제되고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본성의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지는 의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로마가톨릭만의 이야기입니까? 우리도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들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것이 안 되는 것을 자꾸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 또는 옛사람을 어떻게 잘 뜯어 고쳐서 새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리하고 고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여 버려야 합니다. 좀 더 괜찮은 내가 되고자 하는... 개선되고자 하는 나조차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성화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없습니다. 육신을 벗는 그날까지 옛사람은 그대로 옛사람이고, 끊임없이 정욕으로 역사하여 우리를 죄의 굴레로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일체 기대를 가지면 안 됩니다. 지금은 내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나중에 은혜를 많이 받고 신앙생활 잘하면 그때는 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본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생각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죄악 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늘 십자가 은혜만을 붙들고 살뿐이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말하면 틀린 말입니다. 왜요?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난 ‘나 자신’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을 죽임으로써 새 생명이 활력을 얻게 되면, 우리는 죄를 정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때때로 개혁신학자들이 본성이 변화된다고 표현해서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만,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본성이 변한다기 보다는 마음이 변한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두 본성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있습니다. 두 본성이 싸워서 육체의 소욕이 죽고 성령의 소욕이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마음이 변화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변화, 주님을 사랑하고 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 인격과 성품의 성숙,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삶의 개선... 이런 것들이 분명히 신자의 삶에서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절대로 전적으로 부패한 옛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삶을 합리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오직 주님과 연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날 때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은혜를 우리가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 이어서 옛사람을 죽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옛 사람을 죽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또한 이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선지서 ‘악행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그들은 악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할 때에 육체를 완전히 멸할 것을 요구한다. 육체가 악과 패역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타고난 성정과 결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전부 다 씻어내지 않고서는 육체를 완전히 멸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따라서 육체의 모든 감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그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로 나아가는 첫 걸음은 바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부인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경은 자주 권면하기를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상과 육체를 포기하고, 우리의 악한 정욕과 작별을 고하며, 심령이 새롭게 되라고 하는 것이다(엡 4:22-23). 사실 죽이는 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의 예전 본성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고해주고 있다. 성령의 검에 우리 자신이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무가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게 되지도 않고, 경건의 기초적인 사실들을 배우게 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죽이는 일’이라는 단어 자체가 시사해주는 것이다.”[기독교 강요(중), 90-1]

옛사람을 죽이라는 말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칼 갖다 놓고 자살하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자살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것이 생명의 본성입니다. 잡초에서 보는 것처럼 생명력은 죽음의 능력보다 강력합니다. 모든 어려움을 따 뚫어내고 끝까지 살아남고야 마는 것입니다. 옛사람도 생명과 같습니다. 주님 뜻대로 순종하려고 해보십시오. 주님이 명하신 작은 계명 하나도 자기 부인 없이는 불가능한데,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마음속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옛사람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물살이 매우 센 거대한 급류를 맨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힘으로 최선을 다해도 단 1m도 전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죽여야 하는 옛사람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우리로서는 스스로는 살 생각이나 하지 도무지 죽을 생각을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죽기 싫어서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죽일 수 없고, 성령께서 죽여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해서 주님과 함께 죽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4. 옛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새사람이 죽는다.

그러면 이렇게 힘든 작업을 우리가 꼭 해야 하나요? 안 하고 살면 안 됩니까? 이 점에 대해 바울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옛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결국 새사람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은 우리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놓고 목숨 걸고 싸웁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마는 그런 치열한 싸움입니다. 특별히 이 구절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에 대한 해석이 학자들마다 엇갈립니다만, 앞뒤 문맥을 보면 그것은 영적 생명의 사망, 곧 사망의 형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언급이 사실 성도의 견인교리를 믿는 우리에게 매우 큰 혼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성도의 견인교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도 일차적으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지금 초기 암입니다. 지금 수술하면 완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치하면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의사의 의도는 “당신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이 죽기를 바란다.”고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빨리 수술해서 살도록 하라”고 강권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니... 어떻게 내가 죽을 수 있지?”하며 혼란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각한 상태를 깨닫고 그 병의 치료를 위해 무조건 수술대에 올라가는 우리의 반응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아... 내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구나.”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을 살아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줄로 알고 날마다 옛사람을 죽여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옛사람을 죽이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죽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옛사람을 죽이는 삶, 곧 회개와 성화의 삶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의무이고, 바로 이 목적으로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4,6)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옛사람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 종노릇하지 않고, 새사람으로 새 생명답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 옛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므로 우리가 그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5. 옛사람을 죽이는 삶 & 새사람으로 사는 삶 -> 마음의 변화

그러면 본격적으로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지 배워보겠습니다.

89문 :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옛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합니다. 즉 내면적인 죄의 본성을 죽이는 것과 외적으로부터 오는 환난 또는 핍박을 당하여 겉 사람이 후패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사실 옛사람의 죽음을 총체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이 두 가지를 다 말해야 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회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일단 내면적인 죄의 본성의 죽음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러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말하는 옛사람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 ‘마음의 슬픔과 미움’입니다. 그리고 90문을 보시면...

90문 :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것 역시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과 좋아함’이 핵심입니다. 결국 회개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회개는 한마디로 말하면 좋던 것이 싫고 싫던 것이 좋아지는, 사랑하던 것을 혐오하고 혐오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의 ‘기호(嗜好)’의 변화인 것입니다. 찬송가 493장에 보면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라고 고백합니다. 옛날에는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워했지만, 이제는 죄를 지어도 기쁘거나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도리어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죄를 한없이 싫어하고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교회 목사님이 주님 뜻대로 살아라고 그렇게 말해도, 교회 헌신 봉사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순종 안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아주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동안 말씀 거의 안 보고, 기도도 담 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나니 이제는 예수님이 너무 좋고,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로 그분과 교제 나누는 것, 그분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그분의 인격과 삶을 닮고 싶은 소원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낙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입니다.
겉을 바꾸는 것을 회개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제 거짓말 안 하고, 예배도 안 빠지고 잘 참석하는 것을 가지고서 스스로 회개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교회 열심히 나와서 봉사하고 헌신하게 되었다고 해서 회개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근본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하지 않았다면, 암만 겉모습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바뀌어도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자주 빠지는 오류가 마음의 기호는 그대로인데, 자기 스스로 죄 안 지으려고 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안 되는 것을 하려는 것이죠. 그렇게 하다가 자꾸 실패하니깐, 나중에는 “워낙 신앙생활은 이런 거다. 우리는 늘 죄인일수밖에 없다. 주님의 은혜만 붙잡고 사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 죄를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신앙생활 똑바로 안 하니깐 교회개혁을 외치면서 자꾸 시스템을 바꾸고 구조를 바꾸고, 프로그램을 바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들이 다 헛짓입니다. 결국 교회개혁이 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근본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변화가 인간의 힘으로 됩니까? 세뇌를 통한 교육을 됩니까? 제자양성 훈련으로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철드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한테 아무리 공부해라고 야단을 쳐도 안 하는 것입니다. 맨날 TV보니깐 TV 못 보게 하려고 리모컨 숨겨놓기도 하고, 컴퓨터 게임 못하게 하려고 제한 시간 걸어놓기도 하고, 매일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고, 성적 떨어지면 매를 들어서 때리기도 하고, 성적 오르면 갖고 싶은 것 사주겠다고 달래보기도 하고...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어찌하든지 공부시키려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가며 씨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왜 효과가 없는 것입니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앉혀서 공부시켜봤자 공부한 내용이 머리에 들어가지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놀면 안 되고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그것이 동의가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공부가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바뀌는 시점이 있습니다. 이제 마음잡고 공부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철들었다고 말하죠. 즉 자기 스스로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하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한 각성을 통한 행동의 변화에는 이전에 강제적으로 공부시킬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과 실천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잔소리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가 좀 쉬엄쉬엄하라고 말해도 듣지 않고 밤새워가며, 코피 흘려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고, 또 공부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공부를 억지로 열심히 하는 사람은 절대로 공부를 즐기는 사람을 따라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은총 영역에서 세상사는 것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기는 것도 세뇌를 통한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제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어떤 체험과 계기가 필요하고 각성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목사가 암만 설교 잘하고, 책망하고, 회개하라고 해도 안합니다. 물론 교육을 잘하면 머리로는 압니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구나...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교육을 통해서도 죄가 뭔지 알고, 성령이 조명하지 않으셔도 계속해서 교육시키고 세뇌시키면 어느 정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 각성과 참된 회개까지는 유발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변화는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른 말씀이 선포가 되어야하고, 또 그 말씀 위에 성령이 역사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영광이 밝히 드러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종일 그물을 내려도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시니깐 베드로가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은 것입니다. 그 순간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았는데,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베드로의 눈이 열려서 그리스도의 신성의 위엄과 영광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이며 심각하게 파괴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도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도다”라고 하며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이키는 회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회개를 통해서 근본 마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분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고자하는 자원하는 심령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변화되면, 이전에 율법과 규율로 강제해서 순종하게 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힘과 생명력과 변화가 그 삶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90문을 보시면...

90문 :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온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한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게 되면, 마음에서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 삶의 형편은 결코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너무 달콤해서 늘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말씀을 사랑하며, 예배드리는데서 최고의 기쁨을 느낍니다. 그리고 거룩하고 순결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고 싶어 하는데,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로 말미암아 그것이 잘 안 되니깐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어찌하든지 온전히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하루하루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을 세상 물욕 다 버리고,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형제자매를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수준은 자연적인 육신을 입고 있는 사람이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헌신하는 겉모양은 따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동기는 절대로 따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함께 모여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갔을 때, 그들은 온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죄 용서함을 받았을 때, 그녀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불타올라서,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과 머리털로 씻어 드리고 그 발 위에 자신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부어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회개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 마음에 이런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이런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의 마음이 있습니까? 주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아갑니까? 만일 우리에게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회개가 안 된 것입니다. 회개가 안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불신과 외식 가운데 자기를 사랑하는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했고,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심각한 상황을 깨닫고 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습니까?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7-19)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영적 감각이 무뎌져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의 심각성을 스스로 감각하지 못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육신을 좇아 살면서도 자신은 괜찮다고 스스로 자만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명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18절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영적으로 각성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영적으로 각성되기 위해서 스스로 눈뜨고 스스로 부요하게 하고 스스로 옷 입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안약과 금과 옷을 구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 각성의 은혜를 공짜로 주지 않으십니다. 뭔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무엇을 지불해야 합니까? 19절에 나오는데 그것은 “열심”입니다. 열심을 내어 영적 각성이라는 회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최대의 적은 게으름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놔두면 자동적으로 어디로 갑니까? 열역학 제2법칙에서처럼 자동적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신의 삶에 방치하지 말고, 은혜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의 욕망을 꺾고 게으른 본성과 싸우면서 부지런히 애쓰는 노력과 열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흔히 은혜라고 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강권적으로 은혜를 주셔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대안했는데 주권적으로 은혜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그렇게 안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늘 그런 식으로 은혜를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를 비인격적인 기계로 대우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하지 않았는데도 은혜를 주시면 죄악된 우리는 그 은혜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데로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서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은혜를 주십니다. 물론 이때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구하는 조건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과 기도를 자신의 방도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에 근거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은혜를 기대하면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영적각성 될 수 있기를 위해서, 참된 회개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근본 개혁되기를 위해서, 우리가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게 하시고 우리로 열심을 내어 회개에 이르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되어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6. 옛사람을 죽이는 것 & 새 사람으로 사는 것

계속해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89문을 보시면...

89문 :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죄를 더욱더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될 때 우리의 마음에는 89문이 말하는 것과 같은 4가지 변화가 있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비로소 감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 것임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의문이 있는데, 그러면 이 말이 신자가 죄를 지었을 때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죄는 법을 어기는 것이고, 법을 어기면 형벌이 있는데, 신자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형벌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죄 짓고 나서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칭의의 은혜를 불신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절망에 빠져서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비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율법주의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지옥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반대로 신자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 지어도 하나님은 웃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것은 재판장으로서의 진노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진노입니다. 마치 매우 큰 잘못을 했을 때, 부모가 자식에게 분노하면서 매질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지옥 가는 것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고, 또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진노를 느끼면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죄를 지었으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음을 알고 자신을 미워하고 후회하며 슬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영원히 지옥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다시 한 번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신자는 범죄 하였을 때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되, 재판장으로서의 진노가 아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진노를 느낍니다. 즉 은혜 가운데 깨어 있는 신자가 이따금씩 연약함으로 범죄 할 때는 바로 아버지의 진노를 느낍니다. 이것을 칼빈은 통상적인 회개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칼빈은 회개에는 통상적인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회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별한 회개는 영적으로 오래도록 잠자고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즉 오랫동안 말씀이 막힌 채로 하나님을 떠나 불신과 외식의 삶을 지속한 상태에 있을 때 하는 회개를 말합니다. 이 경우에 느끼는 하나님의 진노는 아버지로서의 진노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심각한 영적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아버지의 진노가 아닌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즉 성경은 계속 그렇게 가면 지옥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쯤 되면 그냥 회개하라고 해서는 도무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수찬정지와 출교의 권징인 것입니다. 수찬정지와 출교의 권징의 목적은 그 사람을 잘라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지금 그리스도 밖에 있고 지옥 갈 운명에 있습니다.” 하고 명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처지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극약처방이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이런 특별한 회개의 경우에 대해서 성경은 자주 회개를 촉구하면서 심판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는 바로 이러한 통렬한 경고들을 통해 각성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지옥을 향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유일한 구원의 방도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찾고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회개를 할 때에도,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 스스로 형벌 집행자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경건한 자는 부끄러움과 혼란, 탄식, 자기에 대한 불만, 그리고 죄를 생생하게 인식함으로써 생겨나는 이런저런 감정들 속에 형벌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절제를 발휘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심이 우리를 온통 사로잡게 해서는 안 된다. 양심이 두려워할 때에 가장 빠지기 쉬운 위험은 바로 절망인 것이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 있는 사람을 향하여 바로 이런 궤계를 써서 그 사람을 그 깊고 깊은 슬픔과 근심의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어서 절대로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려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를 낮추는 데로 이어지고 또한 용서에 대한 소망에서 벗어나지 않는 두려움이라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의 교훈에 따라서 죄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이 지나친 두려움과 근심으로 이어져 지쳐서 낙심하게 되지 않도록 언제나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기독교강요(중), 101]

그래서 성령이 조명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때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긍휼과 자비를 바라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것은 오히려 사단 마귀의 궤계에 속아 넘어간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되, 그와 더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또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울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될 때, 우리는 죄를 슬퍼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될 때에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감정입니다. 그러한 비통한 비통의 감정은 반드시 상하고 통회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세리가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면서 애통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눈물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오직 자신의 죄와 비참함에 대한 비통한 심정만 있는 눈물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비통한 심정으로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없었습니다.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과 슬픔은 오직 십자가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참혹하게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죄 지으며 살았던 것에 대해서 무한히 후회하고 한탄하게 되는 것이고, 또 그런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받았는데도 배은망덕하게 주님을 거역하여 다시 죄 지은 것을 생각할 때 더욱더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죄에 대한 혐오와 미움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슬픔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서, 이미 새사람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새사람은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충만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 있어서 죄가 그것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계속해서 그 일에 실패하게 만들기 때문에 신자는 그 죄로 인해 미칠 지경에 이릅니다. 죄가 너무 싫고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완전히 결별하고 싶은데,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니깐 빨리 육신을 벗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죄를 피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와의 실질적인 싸움을 의미합니다. 즉 새사람으로 살게 된 신자가 아직 남아있는 죄, 끊임없이 내 안에서 치고 올라오는 죄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대처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죄는 정면승부로 맞부딪쳐야 하고 어떤 죄는 피해야 됩니다. 정면으로 맞부딪쳐야 할 죄는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희생하고 헌신하고자 할 때 그렇게 하기 싫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다룰 때는 정면으로 맞부딪쳐서 우리의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을 꺾어 주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주님도 너무나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그러나 자신의 의지를 주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임을 분명히 아는데, 그렇게 하기 싫은 마음이 내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과 씨름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자신의 의지를 꺾어 주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죄는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안 되고 피해야 할 죄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적인 유혹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자락을 붙잡고 유혹할 때 정면을 맞부딪쳐서 이겨보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거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그 자리를 피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잘 넘어지는 죄가 조금씩 다른데, 잘 넘어지는 죄에 대해서는 그 근처에도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죄 짓기 쉬운 상황에 기웃거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꾸 그 근처에 기웃거리면서 그 죄를 안 지으려고 하는 것은 불씨에 기름을 끼얹으면서 그 불이 꺼지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죄들에 대한 올바른 대처는 유혹이 되는 환경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더 이상 미혹이 되지 않을 때까지는 그것과 완전히 단절하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TV 드라마에 빠져 있는데, TV를 켜놓고 “이겨야 돼. 이겨야 돼.” 해봤자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TV를 없애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그리고 죄 짓는 환경에 있으면서 경건의 훈련이 쌓아지는 법이 없습니다. 죄를 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죄의 유혹에 대한 대처방법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은혜를 받아서 죄를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슬퍼하고, 또 실질적으로 도망치고 싸우고 하면, 죄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영양분이 공급이 안 되어서 빼빼 말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우리 옛사람을 이렇게 죽이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옛사람이 생명력을 잃어가고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반대로 새생명은 급속도로 건강과 활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마치 몸속에 암을 제거하면 건강이 급속도로 회복되고 활력이 넘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며 싸우는 삶을 살아갈 때, 그와 더불어서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삶이 불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자신의 유일한 낙으로 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옛적 삶은 어느 정도 청산하는데 거룩한 삶의 즐거움을 모릅니다. 이것은 제대로 죄 죽임이 안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진짜 회개한 사람은 주님께 대한 사랑, 헌신의 마음이 있고, 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옛 삶과 전적으로 단절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새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옛사람이 죽은 사람은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자아의식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교회아 의식으로 살아갑니다.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입니다.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했던 괴짜 같은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믿고 세례 받는 그날에 자기 친구들에게 전부 부고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시커먼 편지에 “최상범 사망”이라고 적어 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보낸 사람이 ‘최상범’입니다. 친구들이 굉장히 당황스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길가다 그 친구를 만나면 “아니 살아있는데 왜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내느냐?”물어보면, “옛날의 나는 죽었어.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괴짜 같은 행동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님이 전부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 회개를 날마다 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죄 때문에 매일 울고, 또 주님 때문에 매일 웃는 일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조울증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일생의 특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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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1664
5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1849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1844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231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177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092
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1634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234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240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161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1956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504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705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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