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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91-95문
문답내용 91문 :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한 것만이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92문 :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답 : 신 5:6-21

93문 : 십계명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 :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치며, 둘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94문 : 주님께서 첫째 계명에서 무엇을 명하십니까?
답 : 나의 영혼의 구원과 축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마술과 미신적인 의식,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버리도록 내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올바르게 알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만 복종하고,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에게서만 기대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가장 작은 일에서조차도 그분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십니다.

95문 : 무엇이 우상숭배입니까?
답 : 우상숭배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고안하여 소유하는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4-07-0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95문)


율법과 제1계명


요절 : 신 4:13, 5:6-7


91문 :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한 것만이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92문 :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답 : 신 5:6-21


93문 : 십계명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 :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치며, 둘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94문 : 주님께서 첫째 계명에서 무엇을 명하십니까?
답 : 나의 영혼의 구원과 축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마술과 미신적인 의식,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버리도록 내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올바르게 알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만 복종하고,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에게서만 기대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가장 작은 일에서조차도 그분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십니다.


95문 : 무엇이 우상숭배입니까?
답 : 우상숭배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고안하여 소유하는 것입니다.


1. 선행이 무엇인가? - 믿음, 하나님의 영광, 율법


91문 :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답 :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한 것만이 선한 행위입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행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착하고 선한 행동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선행관을 가지게 되면 여러 가지 혼란을 직면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누군가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은 구원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고 질문해 올 때 대답하기가 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이점에 대해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성경이 인정하는 참된 선행은 그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착한 행동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거기에 3가지 내용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하나님의 영광, 율법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면 다 죄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혹시 기적적인 경로를 통해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 믿었다면 모를까 결코 그들이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행위가 선행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은 선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자신을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해 계명을 좇아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순종했을 때, 결국 우리의 최고의 선행에도 죄의 찌꺼기가 붙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온전하지 못한 선행을 기뻐 받아주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 덮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계명을 좇아 순종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행으로 기쁘게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그렇게 순종할 때 율법을 따라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실 율법무용론 또는 율법폐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배울 필요도, 그것을 지킬 필요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참된 믿음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on/off 스위치처럼 on해서 사랑의 불이 켜지기만 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치 생물처럼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서 더 알기 원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더 많이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는 만큼 그 사람을 더 기쁘게 할 수 있고 그래서 그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주님을 사랑하기를 시작했으면, 이제 더욱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율법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은 율법의 형벌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지, 율법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신 뜻마저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는 바로 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배워 알아서 그것을 목표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고 그저 내생각과 내 기준을 따라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답 : ... 따라서 선한 행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인간이 만든 규율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동들을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울이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남김없이 진멸하라고 명하셨을 때, 사울은 그 말씀에 순종해서 아말렉과 전쟁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 진멸하려고 보니깐 막상 짐승들 중에 쓸 만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튼튼하고 실한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비록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이런 훌륭한 동물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큰 불순종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와서 그를 다음과 같이 책망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의 생각이나 선한 행동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울이 범한 오류를 우리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하는데 아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선행을 행하려 할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늘 성경의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식 없이 열심만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롬 10: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써야 하고 열심히 성경 공부하여 성경지식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내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율법을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율법을 아는 만큼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인간이 만든 규율을 지키는 것이 선행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만든 규율을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지킨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구전율법을 만들어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구전율법을 너무나 중요시한 나머지 율법의 본의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 규례의 참된 의미는 안식이 없는 인생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안식을 주신다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을 더 잘 섬기려고 교회 내에서 어떤 규율이나 규범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간적인 규율을 만들고 지키는 것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서 열심히 잘 지킨 것에 대해서 스스로 선행의 공로로 삼거나 또는 그것을 지키지 못한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바리새인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인간적인 규율을 지키는 것을 선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규율이 더욱 하나님 보실 때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2. 십계명 서문에 대하여


이제 십계명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십계명 앞에 있는 서문입니다. 십계명 서문에서 하나님은 먼저 이 십계명을 명하는 자신이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을 스스로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신 5:6)


법은 그 법을 내신 분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그 중요성이 달라집니다. 먼 이웃이 지나가면서 한 말이면 무시해도 크게 손해를 당하지 않겠지만, 부모님 말씀이면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만일 나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절대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훨씬 더 긴장해서 들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빽빽한 구름과 우레와 번개로 시내산에 임재하셔서 친히 음성으로 십계명을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위엄의 광경과 두려운 음성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서 이 법을 명하는 자신이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깨달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십계명을 명하시면서 이러한 두렵고 엄위로운 모습만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도 계시하여주셨습니다. 서문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하심으로 출애굽의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십계명은 “그냥 착하게 살아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옥가기 싫으면 순종해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언약을 맺어서 “그 언약관계 안에서 순종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로 지키라 명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 4:13)


십계명은 단순히 행동을 규율하는 법조문이 아니라, 언약의 관계를 맺으면서 서로 약조하는 것입니다. 언약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언약관계의 예로서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아들, 왕과 신하, 목자와 양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 모든 언약관계의 공통점은 그것이 사랑과 신뢰와 헌신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만일 전쟁에서 져서 노예로 잡혀 와 일평생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매우 부담스럽고 무거운 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결혼식 할 때, 주례자가 “신부는 신랑을 일평생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고 죽을 때까지 남편을 존중하고 순종할 것을 서약합니까?” 라고 물으면 신부는 억지가 아닌 자원함과 즐거움으로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법은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이고 오히려 그것이 참 자유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모가 “너 오늘부로 우리 자식 안 해도 돼. 옆에 부잣집에 가서 다른 부모랑 살아.”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옆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 붙잡고 앞으로 말 잘 듣겠다고 하면서 울고불고 할 것입니다. 부모가 계속 이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부모 아래에서만 살아야 된다는 법이 자녀들에게는 속박이 아니라 안정감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언약을 제대로 알고 이 율법을 배우면 계명에 나타난 수많은 금지들에서 자유를 경험하고, 속박에서 안정감을 찾습니다. 그러나 은혜언약을 모르면 십계명은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이 됩니다. 은혜언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의 압제 하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크신 손과 편 팔로 애굽을 징치하시고 출애굽 시켜 주신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특히 어린양의 피로 그들을 죄와 사망의 형벌에서 구원하여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모든 율법순종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 십계명의 분류 & 계명의 영성


93문 : 십계명은 어떻게 나뉩니까?
답 :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부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치며, 둘째 부분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십계명은 일반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4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생각할 때, 단순히 십계명의 문자만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제1계명을 생각할 때, 단지 다른 신만 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출 20:6). 그리고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 역시 단순히 사람 찔러 죽이는 것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미운마음조차 가지면 안 되고, 더 나아가 미워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살인하는 것입니다(요일 3:14-15). 이렇게 한 계명 안에 그 마음의 동기와 근원, 그리고 부정적인 금지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순종의 의미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서 이 십계명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계명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요약됩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즉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는 오직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형제 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얼마든지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 안 빠지고 나오고 열심히 교회 헌신봉사하면 누가 봐도 신앙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경건의 모양만을 갖추는 외식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향한 사랑은 흉내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손해와 희생과 섬김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두 번째 부분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둡니다. 예수님도 새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사랑을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율법의 두 번째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형제 사랑이 온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롬 13:8,10; 갈 5:1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선행의 기준이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의 요약인데, 그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4. 제1계명과 자기부인


이제 제1계명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 라는 제1계명은 모든 계명의 토대입니다. 우상숭배는 여러 가지 짓는 죄들 가운데 하나의 죄목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죄는 우상숭배적입니다. 우상숭배에서 모든 죄가 시작되며 범해집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에서 벗어난 우리의 모든 마음과 말과 행실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매우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고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참으로 거듭난 신자 안에도 육체의 본성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본성은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몰두, 세상을 사랑하는 욕망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욕이 발동해서 우리로 이 세상을 미친 듯이 사랑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본성상 이 세상을 노예처럼 사랑하는 경향으로 충만합니다. 우리가 이 죄악된 본성을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 모든 우상숭배는 자기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적인 죄악된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하는 제1계명은 우리에게 먼저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철저하게 파괴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1계명은 일차적으로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짊어질 것을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제1계명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1계명이 순종이 안 되면, 결국 모든 계명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613개조의 수많은 율법 중에서 작은 계명 하나를 순종하는데도 순교의 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17)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3)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24)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25)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26)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17-27)


젊은 부자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그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관원이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결여한 그 ‘한 가지’는 바로 “전 재산을 팔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전 재산을 팔아라”는 말은 돈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깨트리라는 말이고, 그것은 다시 말해 자기 사랑을 깨트리고 자기를 죽이라는 말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사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율법준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 앞에서 부자관원은 심히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 부자 관원이 자기 부인이 안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모든 율법순종이 사실 문자만 지킨 것이지 참된 순종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한 셈입니다. 그런데 근본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이기적인 사랑을 깨트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부자만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사실상 모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반문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로날드 웰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칼빈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자기의 영혼을 강력하게 끌어내려 악한 굴레에 얽매이게 할 수 있는 바 현실 세계에 대한 이 사랑을 사람이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는 바로 이와 같은 어려움을 가리켜 말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들이 본성적으로 이 세상에 아주 집착되어 있고 세상의 쾌락과 염려에 질식되어 있어서 우리들은 영원의 즐거움을 맛볼 수조차 없다.”(칼빈의 기독교생활 원리, 161)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때에만 우리가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서, 우리 마음에 율법이 새겨져서, 우리가 자원하여 순종하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1계명을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또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히 성령 의존적이어야 합니다. 성령 없는 율법순종은 절망밖에 없습니다.


5. 제1계명이 명하는 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4문을 보십시오.


94문 : 주님께서 첫째 계명에서 무엇을 명하십니까?
답 : 나의 영혼의 구원과 축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온갖 우상숭배와 마술과 미신적인 의식,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피하고 버리도록 내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올바르게 알고 그분만을 신뢰하며, 모든 겸손과 인내로 그분에게만 복종하고,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에게서만 기대하며,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말하자면 가장 작은 일에서조차도 그분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나의 영혼의 구원과 축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라고 말하면서 문장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제1계명의 엄중하고 위중한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반복되는 가르침은 우상숭배를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행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 계명이 매우 엄중하고 위중한 계명임을 알고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자신의 구원의 축복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제1계명의 의미를 바르게 잘 알아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내가 우상숭배가운데 있다면 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1계명이 명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6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제1계명을 통해 우리로 온갖 외적인 우상숭배를 피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즉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를 믿는다든지, 여러 가지 마술이나 미신을 믿는다든지, 또는 점집에 가서 점을 친다든지, 또는 로마가톨릭처럼 성자에게 기도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다 하나님 앞에 가증한 우상숭배의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외적인 우상숭배는 의문에 여지가 없는 우상숭배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내용부터는 좀 심각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두 번째로 성경에서 계시하는 참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갈 것을 제1계명이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리고 계속해서 바르게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지 아니하면, 결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예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거짓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비성경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은 모두다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상숭배의 죄는 비단 이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정통교단에 소속되어 있어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잘못된 신관이나 구원의 교리에 대한 오류가 조금씩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처럼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파괴적이고 심각한 오류는 아닐지라도, 언제나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말씀의 가르침을 항상 받아 나아감으로써 우리 생각 속에 있는 잘못된 신관과 교리적인 오류들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제1계명을 통해 우리로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만을 신뢰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신앙의 본질은 우리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충족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즉 오직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제1계명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가 이 은혜에 복음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하여 단순히 교리적으로 부분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는 행위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져버리는 우상숭배의 행위로 보았던 것입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행위구원론이야 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악한 우상숭배이다.” 사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구약성경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조금 상황이 달라져서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에 대한 책망이나 경고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많이 안 짓게 되었느냐? 그것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대상과 방식이 바뀐 것입니다. 다른 신이 우상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물이 우상이 되고, 사람이 우상이 되고, 쾌락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우상은 바로 ‘자기 의’라고 하는 우상입니다. 우상숭배의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우상숭배가 바로 행위구원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쾌락’이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교묘하면서도 가장 악한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계속해서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부정하는 이단 사상입니다. 거짓 교사들과 그들이 가르친 다른 복음이야말로 신약의 저자들에게 있어서 초대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의 거의 모든 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그리고 아주 강력하게 비판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장 싫어하고 비판했던 사람들이 세리나 창기들이 아니라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는 바리새인들이었음을 우리는 유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모든 축복과 관련하여 삼위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지 않는 모든 행위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오직 삼위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제1계명은 모든 겸손과 인내로 복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을 주요 왕이요 구세주로 모신 자의 마땅한 삶은 바로 감사함으로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피조물은 그렇게 헌신하며 복종하는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낍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렇게 복종하며 살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 내면에 남아있는 육체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마음에서부터 교만한 마음이 올라와서 자신의 복종을 공로로 삼고 자랑으로 삼으려는 유혹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선줄로 생각하고 그리스도 없이도 잘해낼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통할 때, 배부르고 등 따실 때, 사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교만의 상태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러한 죄악된 본성을 꺾고 늘 겸손해야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로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과 사단 마귀는 우리가 순종하는 것을 미워해서 우리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고자 할 때 여러 가지 고난과 환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 때가 이르매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복종과 관련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답 : ... 말하자면 가장 작은 일에서조차도 그분의 뜻을 거슬러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피조물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제1계명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느니 차라리 물질적인 손해,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이 짓밟히는 조롱과 멸시, 건강을 잃고, 심지어는 순교당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한 마디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순종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참으로 알게 될 때에, 그리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시고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이신지 알게 될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그분의 아름다운 영광을 목도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배설물 이상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를 기꺼이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근본 이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며 사는 자이기 때문에 반대로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배설물로 여겨 세상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포기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시고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적인 삶입니다.


다섯 번째로 제1계명은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에게서만 기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모든 좋은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물질적인 풍요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닙니다. 신자의 유일한 소망은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행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자 할 때 있어야 할 물질적인 필요와 일용할 양식, 세속적인 만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신하기에(약 1:17; 롬 8:32) 그분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받기를 기대하며, 자신의 필요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으로부터 모든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돈이 자신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추구하고 돈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상숭배를 피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여섯 번째로 제1계명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존경하도록 요구합니다. 사실 이것이 제1계명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내면의 태도에서부터 앞서 말한 모든 신앙과 복종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알아서 그 앞에 두려워 떨며 부복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은혜의 영광을 알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든 신적 속성들의 무한한 탁월함과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꼬박꼬박 나와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경외의 마음이 없다면 여전히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제1계명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란 이 여섯 가지 내용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6. 우상숭배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5문을 보십시오.


95문 : 무엇이 우상숭배입니까?
답 : 우상숭배란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 대신, 혹은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어떤 것을 신뢰하거나 고안하여 소유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상숭배에 대해서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는 참 하나님을 빼버리고 하나님 자리에 다른 하나님을 올려놓고 섬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것을 올려놓고 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뭐가 더 나쁩니까?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해보겠습니다. 만일 여자가 어떤 남자와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바람이 나서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떠나 그 여자랑 사는 것 하고, 그 남편이 바람을 계속해서 피면서 자기를 떠나지 않고 같이 계속해서 사는 것 하고,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나쁩니까? 다른 여자와 바람났어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같이 살아줘서 그나마 좀 나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더 가증스럽습니다. 차라리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는 것이 낫지 미지근한 것은 역겨울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서 우상숭배 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것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많습니까? 후자가 많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리거나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바알숭배가 절정으로 창궐했던 아합 시대 때도 아합에게 조언해줄 여호와의 선지자 400명이 그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종교의 말살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도 바알도 함께 숭배한 선지자들은 다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우리가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많은 성도들이 핍박 받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핍박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핍박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황제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도 하나님도 섬기고 황제도 섬기는 자는 핍박 받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무엇이 참된 신앙입니까?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때 그 수많은 교회들이 있었지만, 고신 교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교회가 다 신사참배 했습니다. 오늘날은 안 그럴 줄 아십니까? 오늘날 순교의 위협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택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까요? 아마도 극소수일 것입니다. 그 숫자가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교회 암만 많이 나와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4문도 ‘하나님만을’, ‘그분만을’, ‘그분에게서만’이라는 표현을 통해 ‘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5sola(오직)를 주장했는데,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 다섯 가지를 모토로 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5가지의 ‘오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 당했습니까? ‘오직’이 없으면 핍박도 없습니다. 반대로 ‘오직’ 하나님만 섬길 때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직’이 있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도 돈이냐 하나님이냐 에서 돈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면 이 세상에서 고난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신앙생활이란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삶이다”라고 하는 진리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헐렁헐렁하게 그리고 쉽게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미워하고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려고 해보십시오. 인생이 가시밭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이 길이 좁고 협착하니깐 다 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망하는 길입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는 특별히 자식 교육하는 것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자식으로 하여금 돈을 좇아 살아가도록 교육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식한테 신앙을 가르치면서, “너 예수님 믿어야 해. 예수님 믿어야 천당 갈 수 있어...” 그렇게 가르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해야 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야 하고, 세상에서 복 받기 위해서는, 즉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세상 신을 섬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주일날 교회와서는 1시간동안 신앙을 교육받고, 나머지 일주일동안은 집에서 돈을 교육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돈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을 교회에서 책임져주기를 기대하고, 일주일에 한번 있는 주일학교를 통해서, 그리고 가끔 있는 수련회를 통해 확 뒤집혀 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요행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결국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하나님을 먼저 섬겨야 한다고 말해도, 실질적으로 부모 본인이 돈을 섬기는 삶을 살면, 자식들도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계속 귀에다 대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실정을 이야기해주면서 “뭐가 돈 되는 직업이다. 뭐가 안정된 직업이다.” 자꾸 말하면서 그길로 자꾸 가도록하면, 그래서 자식으로 하여금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 돈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면, 교회 주일날 나와서 성경공부 해봤자 소용없는 것입니다.


신앙인 부모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공부시키고 좋은 학교 보내고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부모가 “네 재능과 은사를 생각하면서 어떤 길을 가야할지 잘 결정해라... 어떤 길은 박봉에 고생스럽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가야 한다. 어떤 것은 그 시대 속에서 잘 환영받는다. 돈 많이 받는다. 그렇다고 거기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자식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돈을 추구하면서 공부 열심히 할 때는 정신이 바짝 들도록 책망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말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그런 정신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대부분의 부모는 잘되었다 생각하고 가만히 내버려둡니다. 일단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부터 가고, 신앙은 하나님의 때에 나중에 생길거야 하는 생각으로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돈을 좇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면 나중에 신앙이 생깁니까? 신앙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아예 신앙을 포기하고 교회도 안 나가고, 그리고 믿지 않는 자매와 만나서 결혼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일단 좋은 대학부터 가고 신앙은 나중에 생길거야”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 아닐 수 없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식의 생명을 담보로 위험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어려서부터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도록 가르치면, 결국 자식도 그렇게 배운대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이를 통해서 부모의 죄를 드러내시고 그 부모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는 그 인격이 서울대학이 무슨 소용이 있고, 의사가 된 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삼성이라는 직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이 다 헛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고생해서 생명을 이 땅에 나아놓고, 그 생명조차도 신앙생활을 먼저 우선시 하도록 교훈을 못하고, 전도를 못하고, 믿음을 지키도록 못하면 그것은 인생을 완전히 잘못 산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하나님과 돈을 나란히 섬기는 우상숭배적인 삶이고, 그 길은 자신도 망하는 길일뿐만 아니라 자식도 망하게 만드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고 거기서 돌이켜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최고이고, 돈이 있어야 살고 돈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합니다. 통장에 돈이 없으면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통장에 돈이 많으면 든든해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야 하는데, 그런 근심이 아닌 세상의 근심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돈이 없으면 없는 데로 많이 벌려고 돈을 숭배하고, 돈이 많으면 또 많은 데로 돈이 주는 즐거움에 파묻혀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런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나란히’ 신앙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반드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도 진실하게 사랑하고 돈도 진실하게 사랑하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적인 성격은 서로가 서로를 독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돈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중히 여기면 돈을 경히 여기게 됩니다. 여기서 “중히 여기다”는 말은 “고집하고 주장하다, 확고하게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히 여기다”는 말은 “경멸하다, 얕보다, 멸시하다, 작게 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다, 헛것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고집하고 확고히 붙잡는 사람은 돈을 위해 사는 것을 아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또는 헛된 것처럼 여깁니다. 반대로 돈을 고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아주 헛된 일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든지 재물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중간지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 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까? 경멸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쯤 되면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공부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직장생활해서 돈 벌지 말라는 말입니까? 성경에 보면 세속적인 은사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야기하고, 또 우리가 그것을 감사함으로 향유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속적인 은사들은 우리 육신의 필요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인 사랑을 나타내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 세상의 가족, 돈, 사회, 문화, 정치, 과학, 기술, 학문, 예술 등을 통한 세속적인 혜택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누리고 또 향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향유하는 것 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좇아 세상을 즐기며 향유하는 것 하고는 우리가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둘 사이의 경계가 아슬아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으로 세상과 돈에 대해서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로 일하며 먹고 살도록 하신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복이므로,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여 공부하고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번 돈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감사함으로 향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 세속적인 분복의 양이 다른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야 합니다. 작다고 불평하지 말고, 많다고 절제 없이 그것을 향유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속에 늘 정욕이 발동해서 그것을 사랑하고 추구하게 만들고, 이 세상 행복을 추구하면서 안주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가차 없이 죄죽임을 통해 그러한 마음을 끊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근본 헛된 것이요, 돈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배가 뜨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물이 배 안에 들어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또 적절히 사용해야 하지만, 그러나 돈을 숭배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돈을 혐오하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쓸데없는 것이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세상을 혐오하고 경멸하면서 세상을 향유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마음이고 자세인지 시편의 말씀이 잘 보여줍니다.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4)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8)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9)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1-9)


이 시편 말씀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통한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시온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했을까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에 와서 경제활동도하고 학교도 가고 돈도 벌고 바벨론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았겠지만 근본 그 마음에 어떤 마음이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정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은 바벨론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포로된 백성으로 잠시 있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을 원수로 여기고 근본 혐오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세상을 원수로 생각하고 근본 혐오하는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잊지 못하고, 70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소망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70년이라는 우리의 생애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며 성화되는 삶을 살면서, 오직 주님의 재림의 때에 있을 참 본향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 점과 관련하여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죽을 인생을 생각하며 그 비참한 상태를 깨닫는 동시에, 내세의 영원한 삶을 사모하는 일에 더 깨어 있고 더 열심을 내어야 할 것이다. 장차 올 삶과 비교할 때에, 현재의 삶은 무시해 버려도 무방할 뿐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경멸하고 싫어하는 것이 마땅할 정도다. 하늘이 우리의 본향이라면, 이 땅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유배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 속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충만한 자유를 얻는 것이라면, 육체가 감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누리는 것이 행복의 가장 높은 정상이라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상태는 비참한 상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법이다(고후 5:6). 그러므로 이 땅의 삶을 하늘의 삶과 비교하면, 이 땅의 삶은 멸시를 당하고 발밑에 밟히고 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삶이 우리를 계속해서 죄의 속하게 만든다는 한 가지 사실만 제외하고는, 절대로 이 땅의 삶을 혐오하거나 증오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런 점에서 혐오심을 가지더라도 이 땅의 삶 자체에 대해서는 그런 혐오심이나 증오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기독교강요(중),크리스챤다이제스트,23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근본 혐오하는 마음, 그리고 이 땅에서 빨리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경제활동하고 세상의 문화를 향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세로 살면 어떤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까?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되고, 내일이라도 당장 이 세상을 떠날 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이 땅에 쌓지 않고 주와 복음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함으로써 하늘에 재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살고, 돈 많으면 많은 대로,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사는 것이고, 거기에 목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단 세상을 경멸하는 자세가 먼저 되어 있지 않으면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정당하게 향유하는 삶도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일단 경멸해야만 그 다음에 바르게 향유할 뿐만 아니라 돈을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들, 직장생활들도 비로소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직장생활을 세상과 하나님께 봉사하는 의미로... 즉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순종하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렇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항상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위해 염려하며 이 세상에서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욕망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육체의 정욕이 남아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희생하며 수고하면서 어렵게 사는 것보다, 편안하고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의 소욕을 좇아 돈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의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면전 앞에서 그러한 우상이 있게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 앞에 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줄로 알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생각하고, 미래의 천국생활을 오늘 맛보며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나그네의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의 포로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돈을 오히려 다스리면서, 주안에서 돈을 향유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힘쓰고 애쓰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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