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7.24 16:0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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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96-98문
문답내용 96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97문 : 그렇다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답 :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표현해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그것에 경배하기 위해 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은 금지하셨습니다.

98문 : 그러나 평신도를 위한 책으로서 형상들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강설날짜 2014-07-1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98문)


제2계명


요절 : 신 4:15-19


96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97문 : 그렇다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답 :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표현해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그것에 경배하기 위해 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은 금지하셨습니다.


98문 : 그러나 평신도를 위한 책으로서 형상들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1. 제1계명과 제2계명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 관계


제1계명과 제2계명은 모두 우상숭배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강조점이 있습니다. 먼저 제1계명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고 하는... 예배의 대상에 관한 계명입니다. 즉 “누구를 섬길 것인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한편 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에 대한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렇게 예배하고 섬길 때 하나님을 형상으로 새겨서 섬기는 것을 금하는 계명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지 한 달이 되었는데도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죽은 줄로 알고 불안한 마음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여호와 신을 버리고 우리의 새로운 신 송아지 신을 섬기자”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이 금송아지를 두고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하고 섬긴 것입니다. 이것은 제1계명을 범했다기보다는 제2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북이스라엘의 초대왕인 여로보암 때에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예후 왕 때에도 똑같이 반복되죠. 특히 예후 왕 이야기는 제1계명과 제2계명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극치를 달린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거사를 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후 왕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아합 왕가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우상숭배를 완전히 제거하였습니다. 얼마만큼 이 일에 열심이 있었느냐 하면, 바알선지자들을 속여서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고 죽이기까지 열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제1계명을 잘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예후 왕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즉 제2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후왕은 제2계명을 범했지만, 어쨌든 제1계명은 잘 지켰으니 아합 왕보다는 나은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우리 생각에는 좀 더 나은 것 같지만, 주님 보실 때는 똑같은 것입니다. 제2계명을 어긴 것은 사실 제1계명을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형상을 새겨 섬기는 것은 결국 참 하나님을 버리고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지만, 실상은 자신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제1계명과 제2계명은 분명히 다른 계명인데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제2계명 자체만 보더라도 단순히 하나님을 형상을 새겨 섬기는 것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아세라든... 뭐든지 간에 형상을 새겨 신을 숭배하려고 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의한 모든 종교적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제1계명은 예배의 대상, 제2계명은 예배의 방식... 이렇게 두부 자르듯이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1계명과 제2계명의 경계선이 좀 모호한 것이죠. 그만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제1계명과 제2계명의 강조점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계명 끝에 나오는 형벌과 상급에 대한 말씀 역시 제2계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1계명에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통합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아예 제2계명을 제1계명의 반복으로 보고, 제2계명을 빼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실제로 로마가톨릭이 그렇게 하는데, 로마가톨릭의 십계명을 보면 제2계명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형상숭배금지 명령을 제1계명의 반복이라고 보고 십계명의 내용에서 빼버렸습니다. 그러면 9계명이 되니깐 10번째 계명인 탐심에 대한 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서(남의 아내에 대한 탐심과 남의 소유에 대한 탐심) 십계명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실 제2계명을 없앤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제2계명이 형상을 많이 만드는 로마가톨릭에게는 항상 아킬레스건과 같은 꺼림 직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제2계명을 단순히 제1계명의 반복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2계명은 제1계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분명한 강조점의 차이를 가지고서 다른 계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우선 제1계명은 “너는 ‘나의 면전 앞에서’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 편에서 우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한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제2계명은 “자기를 위하여 형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고 함으로써 우리의 우상숭배하는 동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제1계명은 다른 신이라고 말함으로써 대상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제2계명은 형상을 새겨 숭배하려는 예배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상숭배를 통합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로마서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25)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1-25)


여기서 언급되는 우상숭배의 죄악은 제1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입니까? 제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입니까? 분명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니깐 제1계명을 범하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표현하기를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왜곡된 신관을 가지고서 피조물의 형상을 새겨 신을 숭배한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제2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할 때 이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자기를 위하여


그러면 왜 인간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려고 합니까? 특히 형상을 만들어 신을 숭배하려고 합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제2계명은 다 “자기를 위하여” 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신이요 자기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당연히 그 우상을 숭배하는 방식도 사람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숭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좋아하는 숭배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형상을 새겨 숭배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신을 형상에 새겨 숭배하는 것이 형상 없이 신을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여러 가지 면에서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첫째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믿고 경배하라고 하면, 막연하고 막막합니다. 절을 하고 싶고 정성을 표하고 싶어도 어디에다가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보이는 것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만지고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형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형상을 만들면서 그 물질 자체가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도 법당에 있는 불상이 부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상은 부처를 생각나게 하는 하나의 도구이며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도, 결코 하나님이 금송아지 모양이라고 믿었거나 또는 이 금송아지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모세가 안보여서 불안하니깐 눈에 보이는 뭔가가 필요했고, 그래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권능과 신성을 송아지의 모습으로 묘사하여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표현이고 수단이라고 말을 하는데, 결국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바로 그 물질 안에 신의 영혼과 영광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데로 반드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형상 앞에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형상을 새기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형상이 있으면 그 신과 교통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냥 아무것도 없이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십시오.”하는 것 하고, 참혹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림이나,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형상을 보면서 “십자가 사랑을 묵상하십시오.”하는 것 하고 어느 것이 더 은혜가 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보면서 묵상하는 것이 더 은혜가 될 것 같고 신과 더 가깝게 교통하게 될 것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형상을 새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이 자신들을 신에게 더 가까이 인도해 준다고 믿습니다.


셋째로 형상을 만들면 그 신을 가까이에 둘 수 있고, 수호신으로 간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들이 만든 형상들이나 장식품들이 특별한 영적인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작은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비치해 놓고, 드라빔도 비치해 놓고, 좀 부자들은 아예 집을 신전으로 만들어서 온갖 잡다한 신의 형상을 비치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적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신을 곁에 갖고 있음으로 해서 집안에 있는 나쁜 기운, 액이나, 재앙이 물러가고, 풍요와 번영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과 싸우면서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있으면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 자체를 부적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을 숭배할 때도 형상을 새겨서 숭배하는 것이 형상 없이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방종교들이 다 형상을 새겨서 그 앞에 절하는 것입니다. 제2계명은 바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자기를 위해 이러한 죄악된 종교적 본성을 도입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형상으로 빚어 섬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이 그러한 유혹에 많이 넘어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6문과 97문을 보십시오.


96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97문 : 그렇다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답 :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표현해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그것에 경배하기 위해 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은 금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형상을 빚어 섬기면 안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로 표현되실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 되심을 포기하는 것은 곧 참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의미로 피조물의 형상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배와 묵상의 목적이 아닌 예술의 목적으로 피조물을 그리거나 형상을 새길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 찰흙으로 송아지를 만들 수 있고, 물고기나 새를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피조물의 형상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려놓고서는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그림이나 형상을 보면서 예배하고 묵상하고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가증한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가톨릭이 이렇게 예배하고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실제로 성당 가보면 성화, 성상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그림으로 그려놓기도 하고, 또 예수님 그림, 예수님의 십자가 형상, 성모 마리아상 등... 이런 것들을 보고서 교육을 받고 묵상하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이것이 평신도를 위한 교육용 교재라고 핑계를 댑니다. 98문을 보십시오.


98문 : 그러나 평신도를 위한 책으로서 형상들이 교회에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답 : 허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형상을 통해 교육하면 효과가 더 좋다는 것을 몰라서 그것을 금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교육에 대해 지혜가 부족하셔서 딱딱하고 어려운 말씀강설을 통해서만 교육받도록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시청각교육, 실물교육이 훨씬 교육적 효과가 높다는 것을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는 성찬식을 통해서 감각적인 표로 시청각 교육으로 가르침을 받고 은혜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일체 양보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깨닫고 체험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특별히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그리고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예배합니다.


로마가톨릭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서 성경을 줘도 못 읽으니깐,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상이나 성화를 이용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글을 몰라서 성경을 배울 수 없다면, 글부터 가르칠 것을 주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걸려도 정도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들의 형편과 편의를 위해서 제2계명을 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그릴 수 있나?


오늘날 한국교회 예배당 안에 있는 십자가 형상이나, 창문 혹은 복도에 그려져 있는 여러 가지 성화들이 사실은 예배당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예배당에 있는 십자가 형상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는 예배나 묵상을 위한 목적이 아닌 예술이나 교육을 위해 예수님에 대한 그림이나 형상, 영화를 이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 예수님 그림을 걸어놓은 경우가 많고, 또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예수님 사진이나 그림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주일학교 때에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에니메이션도 보았고,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영화도 본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보이는 말씀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을 입으셨기 때문에 그릴 수 있지 않느냐...” 하고 주장합니다. 한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 우르시누스는 이 점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이 없고, 또 칼빈은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명시적으로 언급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는 어떤 개혁신학자들은 예수님도 형상이나 그림으로 새겨지거나 그려질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즉 이 점에 대해서 개혁신학자들의 입장이 양분됩니다.


1) 가능하다는 입장


먼저 가능하다는 입장은 예배나 묵상의 목적이 아닌 그냥 예술을 위한 목적이라면 괜찮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교육할 때도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영화나 에니메이션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셨던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예술의 목적이나 교육의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그려지거나 형상으로 새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실제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경우라든지, 그래서 기도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그런 그림이나 형상이나 사진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그것이 가증한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거의 대부분의 신자의 집에 걸려있는 예수님을 우연히 찍었다고 하는 그 흑백 사진...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이 예수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린 그림... 또는 로마가톨릭 성체성사중에 우연히 찍힌 예수님의 얼굴사진 등은 확실히 사단마귀에 의한 신성모독적인 장난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의 문제점은 교육의 목적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림이나 영화로 교육하면, 사람들이 그 그림과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묵상을 하게 되고 또 거기서 은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육과 묵상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과연 이 입장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술품으로서 예수님의 그림을 보고, 또 교육을 목적으로 예수님 그림을 보여주었는데도, 나중에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그림들이 자꾸 떠오르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러한 난점에 대해서 분명히 정리하지 않으면 이 입장은 사실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는 것입니다.


2) 안 된다고 하는 입장


두 번째로 불가하다는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을 형상을 새기지 말라는 계명은 삼위 하나님을 새기지 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거나 형상으로 새길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설사 예술이나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아이들에게 시청각교육을 통해 더 잘 가르치려는 우리의 열정과 아이들을 향한 배려가 제2계명보다 중요시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입장의 난점은 성경에서 형상을 새기지 말라고 명하는 이유와 관련해서 볼 때 약간의 충돌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상을 비겨 새기지 말라고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에도 보면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때 하나님의 참 형상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그분은 역사적 인물이고, 참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성부와 성령은 그 존재양식이 영이시지만, 그러나 성자는 신성(영이심)과 인성(물리적 피조물)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는 상태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예술의 목적이나 교육의 목적을 위해 형상에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분명한 이유를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그림으로 그려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아이들이 이 그림의 모습이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그림임을 알고서 받아들일 때는 이 입장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심각한 오류나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절대로 그릴 수 없다 라고 한다면, 신약에 나오는 수많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은 그림으로 전혀 그려질 수 없게 되고,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은 구약은 그림책으로 배우지만 신약은 오직 설명으로만 들어야 하는 이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입장이 더 타당한 입장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깊은 연구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이런 입장들이 있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4. 잘못된 예배방법


이제 두 번째로 제2계명의 또 다른 의미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제2계명은 단지 형상 숭배만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자기 좋을 대로 자기 취향대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모든 잘못된 예배방식을 또한 금지합니다.


96문 : 제2계명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답 :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으면, 교회 나와도 반드시 돈을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예배의 방법도 변질시키기 마련인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당시에 목적론적 윤리설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목적만 옳다면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그 개념이 그대로 들어와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몇 유능한 목사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교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회중들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도들이 뭘 원하는지를 알아서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순서나 프로그램 중에서 사람들이 싫어하고 지루해 하는 부분은 빼거나 간소화하고, 대신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는 적극 예배에 첨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까지도 배려하여 불신자들이 교회에 오기를 싫어하는 모든 요소와 장애물을 제거하고,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그들이 좋아할만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예배에 적극적으로 추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위 열린예배나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설교말씀을 간소화하거나 감동적이고 위로가 되는 예화 위주의 설교를 하고, 영상과 연극을 곁들이며, 음악이나 경배와 찬양에 보다 많은 강조점을 두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코미디 쇼프로를 보는 것과 같은 그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교회에 경배와 찬양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경배와 찬양 집회 동영상을 한 번씩 보면, 옛날하고 다르게 매우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방방 뛰고 춤추고 소리 지르고 아주 난리도 아닙니다. 그러면서 찬양 인도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기쁜데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 자기 만족입니다. 우리가 좋으면 하나님도 좋아합니까? 이스라엘이 황금송아지 놓고 춤추고 방방 뛰고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때, 하나님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셨습니까? 우리는 기쁘고 즐거울지 몰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목회자는 회중들이 기뻐하는 것, 회중들의 욕구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순교당한 선지자들의 관심사였습니다. 만일 구약의 선지자들이 회중들의 욕구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부합하는 설교를 했다면 그들은 돌에 맞아 죽기는커녕 오히려 큰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수많은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어야 하고 온 교회의 관심도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제2계명은 오직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지는 것을 통해서만 실천이 가능합니다. 앞서 제2계명을 범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위하고자 하는 자기 사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2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사랑이 깨트려져야 하는 것이고 내가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우리 마음속에 예배를 내 입맛에 맞추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하면 훨씬 은혜가 넘칠 텐데... 목사님, 이렇게 우리 예배를 좀 바꾸면 좋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과 생각을 죽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러분 이 예배를 통해 뭔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예배드리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복 받기 위해, 천국가기 위해, 소위 은혜 받기 위해 예배드리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두고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대로만 예배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고, 그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우리도 참되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아래의 출애굽기 말씀을 보십시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23)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24)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25)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 20:22-25)


하나님은 예배를 위해 형상을 새기는 것을 금지하시면서 그와 연관하여 돌단을 쌓을 때도 그 돌조차도 정으로 찍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정으로 찍는다는 말은 금속재질의 칼로 돌을 조각하고 다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배에 인위적인 것을 가미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손길이 가해져서 변형을 가하는 것은 모두 자기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긴 우상을 만드는 것도 결국 자기가 원하는 모양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으로서 자기 취향을 집어넣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예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배의 방식을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흥미에 맞게 연령이나 성별에 맞게 고안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제2계명을 범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명분 아래서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신대로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도 아무렇게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식양대로 정확하게 만들어야 했고, 또 그 성막에서의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대로만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신약시대는 구약시대보다는 꽤 유동적으로 각 교회가 예배형식을 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해주어야 하는 초등학교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보다 수준 높은 대학교에 해당되기 때문에 원리만 가르쳐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보면 예배에 있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가 무엇이며 어떤 원리와 자세로 예배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가르쳐주지 구체적으로 어떤 순서와 형식으로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과 기도, 찬양, 성찬이 예배의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러한 예배의 요소를 가지고서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자율적으로 순서를 배치하여 예배의 방식을 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잘 연구해서 예배모범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크게 벗어날 자유가 없습니다.


5.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2계명의 뒷부분을 전혀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일단 십계명 가운데 계명 뒷부분에 이러한 형벌에 대한 경고와 상급의 약속이 있는 경우는 단 두 계명 밖에 없습니다. 곧 제1,2계명과 제5계명이 그렇습니다. 이를 통해서 제1,2계명과 제5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두 돌판의 대표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두 계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5계명을 언급하였지만, 사실상 2계명이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5계명은 이웃사랑의 첫 번째 계명임과 동시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두 돌판을 연결시켜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계명입니다. 왜냐하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에는 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5계명은 제2계명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5계명을 잘 지킬 때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은 그 부모가 먼저 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은혜를 받게 되는 제2계명의 약속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5계명할 때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형벌의 경고와 상급의 약속이 제1,2계명 뒤에 있다는 것은 이 두 계명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위중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경고와 약속의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먼저 제2계명을 명하신 후에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질투는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무한히 사랑하시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여 다른 신을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은 무한히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이 무한한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6)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7)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아 8:6-7)


솔로몬은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며, 둘 다 홍수가 엄몰해도 꺼지지 않는 지옥불과 같고 죽음처럼 강하며 음부처럼 잔혹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배신하게 될 때 있게 될 복수의 불길이 얼마나 극심할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남편 되신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결국 예수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24)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25)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26)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신 4:23-26)


우상숭배 계명 뒤에 이렇게 준엄한 심판에 대한 경고가 있는 것은 그만큼 이 계명의 엄중함과 위중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1,2계명을 어기는 것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면서,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불경건하게 예배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근본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신지를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도 결코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느끼는 못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시고 위엄의 영광의 하나님이신지,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죄인으로서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암만 십자가 복음을 들어도 감격스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설교시간 졸거나 혹은 말씀을 들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정말 만났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정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참된 신자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가지는 가장 첫 번째 인상은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경외의 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대로 두려워하게 될 때에 비로소 복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든 우상숭배적인 삶이 얼마나 큰 죄인지, 얼마나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질투하시는지를 깨닫고 참회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실 지금 다 멸절당하고 심판당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숭배하면서 제2계명을 범했을 때, 그들은 모세의 중보로 살아남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을 돈과 세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정말 하나님을 즐거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6. 불순종 3대 저주, 순종 1000대까지 은혜


다시 출애굽기 말씀을 보겠습니다.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여기 보면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는 벌하시고, 제1,2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상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표현을 주목해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를 “나를 미워하는 자”라고 표현하시고, 또 순종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순히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첨가하셨습니다. 이것은 십계명 자체에서부터 벌써 외적인 행위만이 아닌 마음의 문제까지도 언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우상숭배만 안 하면 이 계명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형벌로 갚으시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를 사랑하며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놀라운 상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체적인 형벌과 상급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의 죄에 대해서는 그 죄를 갚되 우상숭배자 당사자만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여손 3-4대까지 벌하시는 것이고, 반대로 자기를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대목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합니다. 소위 이것이 연좌제라고 하는 것인데, 개개인의 행복과 권리, 인권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칼빈의 해석의 관점에서 받아들입니다. 칼빈은 여호와의 의로우신 저주가 너무 위중하여 악인의 머리뿐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에 임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증조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4대가 같이 한 가문을 이루어 한집에서 살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유기적인 섭리의 원리 하에서 한 가문을 하나의 단위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문의 대표인 가장이 범죄하면 그 가문 전체를 벌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범죄의 형벌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실상을 잘 생각해보면, 그러한 원리가 이 세상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가족을 살해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만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미운감정이 그 사람의 자식들에게도 미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하는 자를 철천지원수처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만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진노하시고 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불의하신 것 아닙니까? 부모가 우상숭배행해도 자식이 의롭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면 하나님은 그 자식을 기뻐 받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모 죄 때문에 의로운 자식까지 형벌하시는 것은 공의롭지 못한 것 아닙니까?” 이 질문을 정확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겔 18:2)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조상들의 죄 때문에 심판받아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항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에 대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 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그러므로 하나님은 조상이 비록 불의해도 자식들이 의를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심판받는 것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상숭배하면 3,4대까지 저주하시겠다는 말은 기계적으로 부모가 범죄하면 그 의로운 자식까지 무조건 벌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보편적인 유기적 섭리의 원리 속에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편적인 유기적 섭리의 원리 하에서 부모가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면 그 부모로부터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자녀들도 똑같이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늘 그런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가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삶을 살면, 자식들도 그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 부모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음으로써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은 순종하면 1000대까지 은혜를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1000대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꼭 숫자대로 1000대까지만 복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순종에 대해 벌하실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순종하는 자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무한히 복을 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물론 십계명의 심판의 경고와 축복의 약속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여전히 그 정신은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부모가 이 세상에서 돈을 사랑하고 돈을 좇아 살아갈 때, 자식들도 똑같이 그렇게 가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이며, 징계임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자식으로 하여금 돈을 좇아가도록 교육하고서는, 신앙은 교회에서 어떻게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주일날 하루 성경 공부하는 것으로, 또는 여름에 한 번씩 있는 수련회를 통해서 확 뒤집혀 오기를 기대합니다. 또는 신앙은 나중에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좋은 대학부터 보낼 생각만 합니다. 그래서 일단 좋은 대학부터 보냈는데, 신앙이 생깁니까? 대학가서 이제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도 안 나오고 불신자와 결혼하면서 세상을 좇아 가버리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제야 후회하면서 “애가 어떡하다가 이 모양이 되었나...”하면서 한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로 하여금 돈과 세상을 좇아가도록 일부러 내버려두심으로써 부모의 죄를 드러내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식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를 실패했다면, 부모는 먼저 자녀의 불신앙적인 삶이 자신의 우상숭배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 일평생에 있어서 최고로 중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목표로 자녀 교육할 때, 우리는 신앙이 제일인줄 알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본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아이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신앙을 위해 피눈물의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명 앞에서 부모인 우리가 먼저 우상숭배적인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참되게 사랑하고 올바르게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참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게 하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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