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90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99-102문
문답내용 99문 :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저주나 거짓증거, 또는 불필요한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하거나 방관함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무서운 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100문 :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죄를 금하거나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진노하실 정도입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하라 명하셨습니다.

101문 :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경우, 혹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복을 위하여 신뢰와 진리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는데 꼭 필요한 경우에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그렇기에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도 이것을 옳게 사용해 왔습니다.

102문 : 성인이나 다른 피조물로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정당한 맹세는 오직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불러, 진리에 대해 증인이 되어 주시며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때에 벌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예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강설날짜 2014-07-2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102)

제3계명

요절 : 레 24:15-16

99문 :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저주나 거짓증거, 또는 불필요한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하거나 방관함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무서운 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100문 :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죄를 금하거나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진노하실 정도입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하라 명하셨습니다.

101문 :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경우, 혹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복을 위하여 신뢰와 진리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는데 꼭 필요한 경우에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그렇기에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도 이것을 옳게 사용해 왔습니다.

102문 : 성인이나 다른 피조물로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정당한 맹세는 오직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불러, 진리에 대해 증인이 되어 주시며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때에 벌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예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 소요리문답 54문 :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와 말씀과 행사를 거룩히 또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1. 제3계명에 대한 그릇된 이해

제3계명은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말하는 것과 관련된 계명입니다. 즉 제3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저주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거짓증언하거나, 또는 자신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거나 하는 것 등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제3계명을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실 많은 경우 제3계명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해서, 예를 들면 “오마이갓”, “오 지저스”, “갓뎀” 이런 말 안 하고, 하나님께 원망불평하면서 욕하거나 하지 않고, 농담할 때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 들먹이지 않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제3계명이 그러한 내용을 명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성경전체의 내용에 비추어서 볼 때 이 계명은 단순히 “오 마이갓”, “오 지저스” 이런 거 하지 말라는 계명이 아닌 것입니다.

2. 제3계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요구한다.

99문 :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저주나 거짓증거, 또는 불필요한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하거나 방관함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무서운 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것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것을 요구하는 계명입니다. 무엇으로요? 우리의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높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린다고 하지 않고, 그 이름의 영광을 높여드린다고 표현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영화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히 그렇게 영광스러우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이름은 이 땅에 있어서 사람들의 입에 불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불릴 수도 있는 것이고, 반대로 짓밟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누구한테 달려 있느냐 하면 바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똑바로 못살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 때문에 욕먹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거룩한 성도답게 살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높아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칭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3계명의 의미는 사실상 주기도문의 첫 번째 기도의 내용과 전적으로 동일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거룩히 여김 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거룩히 여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피조물과는 근본 구별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에게서 나오는 반응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이의 그 무한한 존재적 격차를 인식하면서, 영광과 위엄의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경외와 사랑의 마음으로 엎드리는 것이 그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적 격차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도덕적인 격차도 인식합니다. 그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인데,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 받았음을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언행을 통해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고, 그들로 선하신 하나님을 분명히 보도록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거룩히 여기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3계명의 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제3계명을 입술의 계명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을 입술의 계명으로만 보고, 그래서 열심히 입술로만 지켰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지켰느냐 하면, 일평생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필사할 때 여호와 이름 나오면 필사하기 전에 목욕재개하고 필사했고,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소리 내서 읽었는데, 그렇게 읽을 때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 단어를 발음하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발음했습니다. “불경건한 인간의 입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담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오랜 세월 말하지 않아서 결국 그 발음을 잊어 먹어버렸습니다. ‘야웨’인지 ‘여호와’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들이 이 제3계명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의도는 좋지만, 너무 쓸데없이 지나친 것입니다. 제3계명이 하나님 이름을 아예 부르지 말라는 계명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계명의 의도를 지나쳐서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제3계명 잘 지켰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하고 두려워한다는 자들이 무슨 짓을 했습니까? 참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하고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3계명 지킨 것입니까? 전혀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제3계명은 입술의 계명이 아니라 말과 행실과 우리의 총체적인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선택하셨습니까?

“(5)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신 12:5)

이 구절은 성전에 관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전에 자기 이름을 두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성전을 모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에 어떤 신성모독적인 사건이 있었느냐 하면, AD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이 반역한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성전에서 돼지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은 대놓고 성전과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물론 이미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건물성전과 제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까무러칠만한 일이고 경악할만한 일인 것입니다. 더럽고 부정하고 가증한 것을 성전에 세우는 것 자체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신성모독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14)

이것은 일차적으로 앞서 말씀드린 티투스 장군에 의한 성전에서의 신성모독적 사건과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말씀은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을 최후의 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무후무한 신성모독적인 사건이 있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세상 끝이 왔음을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렇게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영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왜요? 신약의 성전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여러분들을 왜 택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여러분에게 두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표를 달고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두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름이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이름이 ‘그리스도’로 다 개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에 가증한 것이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부정한 것이 서 있으면 그것이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나의 몸에, 나의 삶에 무엇이 서 있는 잘 보십시오. 혹시 돈에 대한 탐심이 있습니까? 음란한 마음이 있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자기 인정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고 일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우리 마음에 자꾸 들어오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죄로부터 도망을 쳐야 합니다. 그래서 멸망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어서 성전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 삶속에서 예수님의 인격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디에 처하든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체요 계시전달자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름을 두신 증거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에게서 그분의 이름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나옵니까? 없다면 주님으로부터 이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잘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제3계명은 예배에서의 우리의 자세에 대한 계명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우리가 제3계명과 관련하여 또 생각해야 할 점은 이 계명이 결국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한 계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주일동안에 언제 가장 많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 때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예배드릴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가 하는 것을 제3계명이 문제 삼는 것입니다.

답 :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정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는 그분의 영광과 존영에 합당하게 그분을 두려워하면서 또 존경하면서 또 사랑하면서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명색이 부합해야 합니다. 금으로 만든 잔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이 세상에서 최고로 귀한 잔이 있다면, 그것을 어디에 쓰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렇게 귀한 잔은 당연히 왕실에 두어서 왕의 잔으로 써야 명색이 부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사람이나 와서 오줌이나 싸는 요광으로 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명색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명색이 부합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서, 그에 합당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온 우주를 지으신 두려우시고 위엄과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의 무게를 의식하면서... 무겁게, 진중하게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베푸신 그 한량없는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담아 즐거이, 그리고 모든 최고의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니하고,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릴 때, 그냥 냉냉한 마음으로, 차가운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믿는 마음도 없이, 무성의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하고 찬양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1~4계명이 다 예배와 관련된 계명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1계명-예배의 대상
제2계명-예배의 방법
제3계명-예배의 자세
제4계명-예배와 안식 

이것은 비단 찬송이나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를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졸고 딴 생각하고 지루해하고 목사님 설교 잘하나 못하나 판단이나 하고 앉아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요리문답은 이점에 대해서 이렇게 잘 해석했습니다.

소요리문답 54문 :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제3계명이 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와 말씀과 행사를 거룩히 또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만 거룩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부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 거룩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사용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14)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4)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의 규례를 행하면서도 눈속임이나 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음구절을 보십시오.

“(1)(다윗의 시,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시 9:1)

하나님이 이 세상에 행하신 일이 많고, 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 참 많은데, 그 하신 일들, 그 행사를 우리가 잘 알아서 거기에 합당하게... 시편말씀처럼 전심으로 감사하면서 그의 행사를 말해야 하는데,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아무런 감정 없이, 마치 남 이야기 하듯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대할 때 우리는 경외심과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말의 뜻만 봐도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망령되다”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텅빔, 헛됨, 거짓말, 무의미, 무가치”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텅비게, 헛되게, 거짓되게, 무의미하게 일컫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텅 비었고, 하나님은 무가치하고, 하나님은 헛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인격도 없고 감정도 없는 우상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배당에 와서 예배한다고 하는데, 하나님한테는 아무 관심이 없고, 그냥 목사님 앞에서 예배한다고 생각하니깐... 목사님 설교가 지루하면 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보멍청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상대방의 인격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다리꼬꼬 앉았다가도 목사님이 오시면 자동적으로 펴고 앉는 것입니다. 특히 상대방이 아주 중요하고 높은 사람일수록 우리는 주의를 더 기울이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하물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예배드리죠? 졸음이 오면 그냥 졸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각하고, 딴 생각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빨리 안 끝나나?” 시계나 보고 있고... 그것은 하나님을 마치 인격도 없는 것처럼, 마치 목상을 깎아서 세워놓은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우상인 것처럼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존재의 위엄, 그분의 베푸신 은혜를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냉담하고 차갑게 형식적으로 불경건하게 예배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예배당 와서 하나님 예배한다고 앉아있는데, 예배의 모든 순서 순서가 다 끔찍한 신성모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끔찍한 사실은 그렇게 아무 감각 없이 불경건하게 예배드리는데도 사람들이 별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냉냉하게 예배드리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를 사소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이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노하신다고 말합니까?

“(15)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16)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 24:15-16)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0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0문 :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죄를 금하거나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진노하실 정도입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하라 명하셨습니다.

제3계명은 사형죄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율법에 보면 다른 모든 죄는 희생제사를 통해 다시 용서받을 수 있지만, 용서받지 못하고 곧바로 사형에 처해지는 죄목들이 몇 가지 언급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 접신, 간음, 살인, 안식일을 범하는 죄, 하나님 훼방하는 죄, 부모 훼방하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지으면 다시 용서 받을 수 없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돌로 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가 우상숭배만큼이나 큰 죄입니다. 그래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매우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모여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실 때 죽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리를 향해 말씀하실 수 있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야! 일주일동안을 네 마음대로 살았으면서 어떻게 뻔뻔하게 주일날 와서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느냐? 부끄럽지도 않냐? 차라리 예배 나오지 마라... 누가 교회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희 예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다. 내가 지기에 곤비해있다. 너희가 예배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인데, 사실은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이 예배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는 않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존영에 합당하게 그분께 예배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길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헛되고 망령된 예배를 책망하시면 그 해결책으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할 것을 명하시고, 와서 서로 변론하자고 하셨습니다.

“(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이것은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것도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으로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회개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망령된 예배는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 영적 무지는 게으름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영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를 통해 영적으로 각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상적인 회개가 아니라 특별한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일상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특별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각성이 우리 모임에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각성된 뒤에 비로소 일상적인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영적각성의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이 영적각성의 은혜는 성령님의 주도권 하에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은혜이니깐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느냐... 그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이 일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먼저 지금 말씀 앞에서 우리의 문제가 진단이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러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말씀을 읽고 배우는데 힘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성화는 성령님의 전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은 알미니안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적은혜의 교리를 잘못 오해하면 피동성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전적은혜의 교리는 성령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지,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게 많습니다. 뭘 해야 합니까? 뭘 해야 하는지 야곱의 회심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언제 회심했냐 하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회심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씨름을 통해 회심했을 때,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야곱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는 사건입니다. 즉 야곱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바꾸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 곧 구약의 교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한 회심의 역사가 야곱이 아무것도 안하는데 하나님이 야곱의 옆구리 툭 치면서 “야, 너 이름 바꿔줄게, 너 이스라엘 해라...” 그리고 하늘로 쑥 날라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도록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환도뼈가 위골되니깐, 이제는 어떻게 할 수밖에 없냐 하면,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시면 내가 당신을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고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도무지 이길 수도 없고 또 떼어놓을 수도 없음을 아시고, “그래 내가졌다. 니가 이겼다” 하고 복을 주시고 이름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야곱으로 하여금 이렇게 간절히 자신에게 매달려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는 상태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싸움을 걸어오셨던 것이고, 그 싸움 가운데서 환도뼈를 치심으로 자신에게 간절히 매달리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그렇게 은혜를 주실 때 먼저 우리와 씨름하셔서 우리로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리게 하신 후에 주시는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이름도 ‘새 이스라엘’인데, 이것은 참된 성도의 표지가 바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간절함”임을 잘 보여줍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끊임없이 호소하여 결국에는 그를 이김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려 기도함으로써 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냥 헐렁헐렁하게 교회만 왔다갔다 하면서 절대로 회심할 수 없습니다. 처절한 씨름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을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까지는 회심될 수 없습니다. 

마틴 루터의 회심을 보십시오. 그가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은혜가 임해서 회심했습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회심했습니까? 야곱과 똑같이 씨름하는 가운데 회심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회심했던 것입니다. 루터만 그러했습니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참으로 회심하기까지 6년 동안 씨름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참된 성도들은 다 이러한 씨름하는 과정을 겪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민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습니까?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회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각성의 은혜, 회심의 은혜를 주시기 이전에 제일먼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로 자기 영혼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시고, 그 씨름하는 과정을 갖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왜 이토록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왜 나는 이토록 내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하며 절망과 좌절 속에서 고민하게 하시고,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며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비로소 성령님께서 빛을 비추어주셔서 깨닫게 하시는데, 무엇을 깨닫게 하시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내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거 지식적으로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성령님 의지 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지식으로는 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자기 자신이 의지하는 은밀한 환도뼈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을 생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씨름의 과정을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우리의 은밀한 환도뼈를 드러내시고 그것을 부서뜨리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바로 회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환도뼈가 부러져야만 야곱처럼 “당신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하고 주님께 매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매달 릴 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맨날 똑같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오늘 말씀을 듣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정말 내 영혼의 심각한 문제를 부여잡고 매일매일 성령 안에서 씨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씨름하는 마음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니, 이 씨름을 통해 우리에게 간절한 마음을 주실 분도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씨름하는 역사가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영적으로 각성되는 역사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참되게 알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 신성모독에 대해서 침묵하고 방관하는 죄

99문 : 제3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저주나 거짓증거, 또는 불필요한 맹세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침묵하거나 방관함으로 우리가 그와 같은 무서운 죄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만 사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부르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에서 그분이 영광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100문 : 맹세나 저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죄입니까? 그래서 그 죄를 금하거나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진노하실 정도입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크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죄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죄를 사형으로 벌하라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독특한 표현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지을 때, 옆에서 그 죄를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것도 그 죄에 동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제3계명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계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관점입니다. 소요리문답 할 때도 배웠지만 십계명의 모든 계명들은 자기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계명을 어길 때 그것을 방관하는 것도 똑같이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엘리 제사장 때,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막에서 간음을 행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간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장소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막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간음죄 이전에 심각한 신성모독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이 아들을 불러놓고 그냥 몇 마디 말로 나무라고 끝내는 것이죠. 이것은 엘리 제사장도 그 죄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도 똑같이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3)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4)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나 영영히 속함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노라”(삼상 3:13-14)

금하지 아니하고 죄 짓도록 침묵한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벌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내용이죠. 그래서 “벌 안 받으려면 침묵하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 꼭 벌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벌이 없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침묵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분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다시 높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내 마음의 성전이 부정한 것으로 더럽혀져 있음으로 인해서, 그러한 신성모독적인 상황으로 인해 분노가 치밀어 올라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혐오하며 그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내가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렇게 냉담하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불경건하게 예배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분노하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도가 회개해서 경외와 사랑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서 전심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기독교가 욕을 먹고, 특별히 한국교회가 잘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을 때, 그것을 나 몰라라 할 것이 아니라, 분노가 치밀어 올라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땅한 사명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님이 욕하면 기분 나쁜 것이 인지상정이지 않습니까? 남자 같으면 주먹 날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 부모를 욕하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다고 한다면... 아무렇지도 않다고 한다면... 그러면 나중에 부모가 와서 그것을 알았을 때, 누구를 먼저 패겠습니까? 자기 자식부터 패는 것입니다. “야! 너는 다른 사람이 아빠 욕하는데도 가만히 있냐? 아빠 욕먹어도 아무감정도 없어? 너 내 자식 맞아?” 부모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고 속 터질까요? 자식인데, 자식 같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모습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골리앗이 나와서는 입에도 담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을 하는데, 아무도 나가서 그 자식을 꺾어 입을 닥치게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짓밟히는데도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왕이 대표로 나가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이 무서워서 못나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이 잘 있나 확인 차 왔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좀 전해줄 겸 해서 찾아왔는데, 거기서 우연히 골리앗의 망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니 할례도 받지 않은 자가 어떻게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고 하나님의 사시는 군대 이스라엘을 훼방하는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직접 응징하기 위해서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다윗 본인이 골리앗보다 더 세다고 생각해서 나선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신도 골리앗에게 잽도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무슨 믿음이 있었냐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셔서 친히 저 망령된 골리앗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짓밟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자신의 안녕보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면서 나갑니까?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그래서 믿음으로 골리앗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의 마땅한 모습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사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참된 신자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이 이름의 영광에 대한 치열한 갈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위해서 전심전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 내가 몸담고 있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받을 때, (다윗처럼 주먹지고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다시 높여드릴 수 있는지 고민하고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언행을 조심하고, 선을 행하며, 때로는 손해를 당하면서, 또 때로는 억울한 일도 감수하면서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면서 살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저놈은 진짜야...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고 싶어...”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3계명을 진정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5. 정당한 맹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특별히 제3계명에 대해서 2주를 할애하면서 맹세하는 것에 대해서 비중 있게 다룹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제4계명의 경우는 딱 1주 1문으로 끝내면서 제3계명에 대해서는 2주 동안 총 4문에 걸쳐서 배우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신학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당시는 맹세하는 것이 매우 논쟁이 되는 뜨거운 감자였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로마가톨릭은 맹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천사나 마리아나 성자의 이름으로 맹세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그러한 잘못된 관습들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혁하는 와중에 또 다른 극단주의인 재세례파가 출현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맹세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만일 재세례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취임식 할 때 서약하고 맹세해야 하는데, “아 나는 성경대로 맹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대통령 못하는 것이죠. 결혼식 할 때, “신부는 신랑을 일평생 사랑하고 존경하고 순종할 것을 서약합니까?” 하는데, 맹세할 수 없다고 하면서 대답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 못하는 것이죠. 신학교 3년 교육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는데... “이러 이렇게 주와 교회를 섬길 것을 서약하고 맹세합니까?” 물을 때, “아... 나는 성경대로 맹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 못하는 거죠. 법정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의 결정적 목격자로서 증인으로 채택되었는데, 증언을 하기 전에 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해야 하는데, “나는 못합니다.” 그러면 증인으로 설 수가 없는 것이죠. 과연 하나님이 이렇게 되는 것을 원하셨는가 의문이 드는 것이고,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맹세와 관련하여 하신 말씀의 의미가 과연 이런 것인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35)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36)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3-37)

이 말씀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뭔가 사사로운 일에 자신의 진실 됨을 증명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되니깐, 부담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말고 다른 뭔가 권위가 있는 것을 두고서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니 제3계명에 저촉되지 않고, 또 맹세하고 보증했으니 자신의 억울함을 또한 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얄팍한 논리에 대해서 공박하신 것입니다. 맹세할 때 하늘로도, 땅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자기 머리로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맹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찮은 일, 사사로운 일, 자기 정욕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끌어들이지 말고, 그런 맹세는 도무지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이지 모든 맹세를 금지하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로운 개인의 욕망을 따른 맹세가 아닌, 국가와 교회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정당한 맹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도 진실되게 거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 하에 이루어지는 맹세는 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도 자신의 말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령과 하나님이 증인이시다.”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롬 1:9; 9:1, 고후 1:23; 빌 1:8; 살전 2:10).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1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1문 :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맹세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답 : 예, 그렇습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경우, 혹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복을 위하여 신뢰와 진리를 보존하고 증진시키는데 꼭 필요한 경우에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며, 그렇기에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도 이것을 옳게 사용해 왔습니다.

정당한 맹세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오히려 정당한 맹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102문을 보십시오.

102문 : 성인이나 다른 피조물로도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정당한 맹세는 오직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불러, 진리에 대해 증인이 되어 주시며 내가 거짓으로 맹세할 때에 벌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예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다 아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자신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벌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온 세상 가운데에서 진리를 드러내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수 있는 유일한 참 재판장이 바로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당한 사유로 거룩함과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주요 왕이며 재판관으로 인정하고 그분을 가장 존귀한 자리에 모셔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맹세는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이 만연한 이 세상 속에서 그러한 맹세들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 거짓말에 대해 책임을 묻게 함으로써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증진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5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문,128문,129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file 127-129문 최상범 1570
5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ile 126문 최상범 1252
5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0주(125문)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file 125문 최상범 1400
5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124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file 124문 최상범 1446
5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8주(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file 123문 최상범 1258
5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주(122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ile 122문 최상범 1619
5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1623
5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1791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1807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197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140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049
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1604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193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195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106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1909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450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608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07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