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9.10 13:0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조회 수 163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108-109문
문답내용 108문 : 제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모든 부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혼인의 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순결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109문 :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간음, 또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죄만을 금하십니까?
답 :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과 영혼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는 그리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강설날짜 2014-08-1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109문)


제7계명


요절 : 마 5:27-28


108문 : 제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모든 부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혼인의 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순결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109문 :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간음, 또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죄만을 금하십니까?
답 :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과 영혼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는 그리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음란과 섹시의 코드가 대중문화를 뒤덮고 있습니다. 혼전순결, 성적인 순결을 주장하면 완전 미개인 취급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서 음란물이 범람하고 있고, 남녀노소 관계없이 다 음란에 물들어 있습니다. 물론 어느 시대고, 어느 사회고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를 조명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당대가 가장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라고 평가해왔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워낙 종말의 때까지 성적으로 타락한 상태로 지속될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어느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일 뿐이죠. 성적문란, 도덕적 타락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뉴스거리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교회가 이러한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성적 타락의 영향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는데요, 오늘 우리가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신 계명의 의미를 배우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회개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성관계의 신성한 의미


먼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성(性)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性)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수치스러워하는데, 사실 이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아름답고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식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 식물의 생식기인 꽃이듯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입니다. 아니 그것이 어떻게 보면 모든 피조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일 것입니다. 이 성관계는 본질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고 계시듯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여 서로의 몸을 섞으며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성관계입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이 하나로 연합하는데서 충만한 희락과 기쁨을 누리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부부간의 성적인 연합에 커다란 쾌락을 두셔서 연합의 기쁨을 충만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의 서로간의 충만한 사랑이 온 세상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남녀 간의 사랑과 기쁨의 연합을 통해 새 생명이 탄생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에는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부간에 성관계를 할 때, 바로 이러한 신성한 사실들을 기억하면서 그 의미를 좇아 성관계를 해야 합니다. 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운데 부부간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연합을 육체로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성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욕정에 휘말려서 아무 생각 없이 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성령충만함 가운데 이러한 의미들을 잘 반영하면서 성관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 성(性)의 타락


이렇게 성(性)은 본질상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성(性)이라고 하는 것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하게 된다는 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性)이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가장 더러운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룩함과 의로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은 성관계에 있는 모든 신성한 의미들을 지워버리고, 그저 쾌락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욕망을 좇아 끊임없이 쾌락만을 추구하다 보니깐 점점 더 변태적이고 패륜적이며 추악한 행위들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동성연애나 동물과 관계를 맺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다 그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고, 이제는 모든 음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3)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4)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5)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6)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3-8)


여기서 사도바울은 음행죄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자라 하더라도 매일매일 은혜생활을 못하고 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언제라도 이런 음행의 죄에 미끄러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음란을 버리고 거룩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단순히 음행죄를 짓지 않는 것만 제7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와 성관계를 즐기는 것도 제7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라고 명합니다. 색욕은 성적인 욕구에 대한 지나친 사랑을 말합니다. 성적인 욕구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절제 가운데 적절히 누려져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성적인 욕구를 채우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10)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 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출 21:10)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의복, 동침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입니다. 누구나 이 세 가지를 누리며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의 육체의 욕구를 채우는 것 - 곧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을 입고, 성적인 욕구가 생기면 성관계를 통해서 그 욕구를 채우는 것 자체가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 욕구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속에서 채우고 누려야 하는데, 사람이 그 질서를 벗어나서 그 욕망 자체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옷을 입고, 집을 소유하여 편안한 생활을 하는 것 등은 모두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분복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일한 것에 대한 분복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감사함으로 누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부패한 인간이 자신의 형편에 자족하지 않고, 더 큰 욕심을 부린다는 데에 있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사람의 욕심이 자꾸 그러한 차원을 넘어서서, 더 맛있는 것, 더 멋있고 좋은 옷, 더 편안한 집, 더 풍족한 것을 꿈꾸면서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을 사랑하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적인 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부간의 성관계를 통해서만 욕구를 채우도록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마땅히 서로간의 부부관계를 통해서만 성적인 만족을 누리고, 또 그것을 족한 줄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적 욕망 자체를 추구하다보니깐 자꾸 그 질서를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 때문에, 부부가 서로간의 신령한 사랑 없이 그저 육체적인 관계만을 지속하게 될 때 결국 상대방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부부관계를 통해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짜릿한 성적쾌락을 맛보기 위해서 새로운 이성의 상대를 자꾸 찾게 되는 것이죠. 즉 다른 여자와 간음을 행하고, 근친상간을 하고, 성매매를 행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예 결혼도 하지 않고 싱글로 살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며 일평생 성적쾌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을 신으로 삼고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고 한탄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동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동물은 질서도 절제도 부끄러움도 없이 욕망에 충실해서 살아갑니다. 사람이 그렇게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향 이러한 성적인 탐욕, 곧 색욕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기에 브레이크를 걸어두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또는 노아당대와 같이 성적타락의 극을 향해 달음질해서 도무지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브레이크를 걸어두셨습니까? 하나님은 먼저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해야만 입에 풀칠하고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즉 돈이 있어야 성적인 욕망을 원 없이 채우며 살아갈 텐데, 돈이 없으니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버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다 보내기 때문에 죄 지을 시간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죄를 억제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그리고 또한 각 사람에게 양심을 주셔서 성적으로 문란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하셨고, 또 그렇게 살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거나 처벌을 받게 하셔서 대놓고 음행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색욕을 좇아 살아가지만, 성적 타락을 향해서 마구 달음질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합니까? 공공연히 죄를 짓지 못하니깐, 밤에 은밀히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남몰래 바람을 피우거나 성매매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걸릴 가능성이 많으니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밀하게 인터넷 음란물을 다운받아서 자위합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타락의 수준에 비하면 아주 약과이지만, 그러나 동물이 되어 욕망에 충실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은 바로 이 색욕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그들만의 모습입니까? 솔직히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3. 음행은 저주를 자초하는 부정


사도바울은 거룩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아 살아갈 때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7)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8)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 4:7-8)


사도바울은 음행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버린다’는 말은 ‘폐기처분하다, 거부하고 무시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음행으로 부정케 되는 자는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곧 자신 안에 있는 성령을 소멸함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7계명에 대한 관점입니다.


108문 : 제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모든 부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혼인의 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순결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음행으로 부정하게 되면 반드시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사실 구약의 레위기의 정결 사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핵심 주제는 이스라엘의 거룩과 정결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진영 한 가운데 있는 성막에 임재하셔서 그들과 동거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매우 은혜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자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면 곧바로 죽임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3)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민 19:13)
“(20)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민 19:20)


레위기에서 부정이란 하나님 앞에서 더러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바퀴벌레를 혐오하고 무서워하는데, 그 이유는 그 바퀴벌레가 생김새가 혐오스럽고 또 실제로 위생상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퀴벌레를 보는 즉시로 발로 밟아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부정한 채로 있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혐오의 대상으로서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결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사함과 정결함을 얻게 하는 정결예법과 제사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극적으로 이 은혜의 방도에 집착하여 때를 따라 돕는 정화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과의 충만한 교제 가운데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정결하고 거룩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부정하게 살면서, 그리고 그 부정을 씻을 수 있는 은혜의 방도도 거부하면서 자신의 죄와 부정을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결국 백성의 총회에서 제명당하는 것입니다. 제명은 곧 저주의 형벌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러한 거룩과 정결의 의미는 신약백성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높고 완전한 차원의 거룩과 정결이 요구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려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룩의 등급이 있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레위인들이 더 거룩했고, 레위인들보다도 제사장이 더 거룩했고, 제사장보다도 대제사장이 더 거룩했습니다. 대제사장은 가장 높은 등급의 거룩의 지위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에게는 가장 높은 수준의 거룩과 정결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신약의 백성들은 대제사장들보다 더 높은 등급의 거룩의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완전히 거룩하고 정결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간 자들이지만, 우리 신약백성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성령님께서 영구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그림자에 불과한 성막의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지만, 우리 신약의 백성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성령이 거하시는 참 성전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조금도 부정함이나 죄가 없는 완전히 거룩한 상태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성령의 임재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구약의 백성들보다 더 거룩하거나 뛰어난 것도 아닌데, (똑같은 죄인인데)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재 하셔도 우리가 죽지 아니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씻음 받고 온전히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히 10:14). 그래서 이 은혜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은혜는 완전하여 구약처럼 반복해서 제사와 정결예법으로 부정을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은혜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의 씻으시는 은혜는 우리의 죄책과 신분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이 은혜가 우리에게 미쳐서 우리의 본성이 날마다 변화되어 실질적으로도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욕은 반복될 수 없지만, 그러나 발을 씻는 것은 날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모든 음란과 부정한 것을 버리고, 또 때때로 음행죄를 지었을 때는 즉시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붙잡아서 다시 정화되는 은혜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값없이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로 성령의 전을 삼으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부정한 것을 미워하고, 싸우고, 버리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충만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와 부정의 상태를 고집하는 것은 곧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신 성령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음행죄로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자꾸 떠나가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님의 거룩하신 성전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그분 자신을 침입해 들어가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구약백성들이 받았던 심판보다 더 큰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2)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히 2:2-3)
 
사도바울도 이 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6)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5-20)


다른 죄들은 다 우리 몸 밖에 짓는 죄들입니다. 물론 다른 죄들도 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부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일단 다른 죄들은 그 주된 공격의 포커스가 나 ‘바깥’에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살인, 거짓말 등은 모두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 피해를 입히는데 주된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행은 어떻습니까? 음행죄의 모든 공격방향은 오로지 자기 자입니다. 성전으로서 자신의 몸과 영혼을 더럽히고 무너뜨리는데 ‘올인’하는 죄가 바로 음행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행죄를 다른 죄와 구별하여 보다 심각한 죄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음행죄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엇보다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직접적으로 훼손하고 더럽히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 끝까지 음행죄를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7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음행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회개치 아니하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모든 음란을 회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음행죄를 짓는 것은 에서와 같이 망령된 행실을 하는 자입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17)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에서는 육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우리는 결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의 귀중함을 몰랐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서는 결코 장자의 명분을 늘 쓸데없는 것처럼 생각하다가 야곱이 달라기에 그냥 준 것이 아닙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아무 때나 와서 그냥 팔라고 했으면 절대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교묘하게 에서를 속이고 그것을 팔도록 유혹했는데, 무엇으로 유혹했느냐 하면, 바로 강력한 식욕을 가지고서 유혹한 것입니다. 에서가 당장 죽을 것 같은 배고픔에 있을 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하며 아무렇지 않게 팔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육신의 욕망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의 강력한 욕망은 사람으로 하여금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시야를 흐리게 하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채워줄 달콤함만을 보게 만들어버려서 그것을 무조건 선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음행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음란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이 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인 것입니다. 음행죄가 주는 육체의 쾌락이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고 영적인 시야를 눈멀게 만드는 것입니다.


“(3)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4)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5)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잠 5:3-5)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 그랬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 그 입술에서 꿀을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달콤한 유혹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 달콤함을 취하기 위해 천국의 명분을 팔아넘기기를 서슴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 기자는 분명히 그 결과를 경고합니다. 죄를 범하는 그 순간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지만, 그러나 그 후에는 쑥같이 쓰고 두 날같이 날카로워서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음행죄의 무서움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음행죄의 진정한 무서움은 중독성이 강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밥을 한번 먹는다고 해서 영원히 배부른 것이 아닌 것처럼, 성적인 욕구도 마찬가지로 한번 쾌락을 느꼈다고 끝이 아니라, 좀 있다가 다시 성적인 욕구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음행죄를 범하여 그 달콤함을 맛 본 사람은 또 다시 욕구가 생겼을 때, 그 짜릿한 쾌락을 다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계속 가면 심판받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에 가면 결국 죽고 말 것인데도 그것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6)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잠 5:6)
“(22)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23)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24)아들들아 나를 듣고 내 입의 말에 주의하라(25)네 마음이 음녀의 길로 치우치지 말며 그 길에 미혹지 말지어다(26)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잠 7:22-26)


솔로몬은 창밖을 보다가 어리석은 한 소년을 보았는데, 그 소년이 유부녀의 유혹의 말에 넘어가 결국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목격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그것이 마치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일반이라고 말합니다. 새가 잡혀 죽을 것을 모르고 그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심판과 죽음의 길로 스스로 들어서지만, 본인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눈앞에 있는 달콤함에 매료되면 뒤에 있을 치명적인 결과는 생각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론적으로 이 죄에 엎드러지고 이 죄로 인해 멸망당한 자가 허다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란죄의 위험성은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어렵고, 필경은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증명되어온 진리이며, 지금도 지옥에서 아우성치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이 이 사실의 증인들입니다. 혹시 우리가 지금 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4.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길


그러면 우리가 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7)그런즉 아들들아 나를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8)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하라 그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잠 5:7-8)


유혹이 될 만한 상황에... 아니 아예 그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유혹이 될 만한 상황에 안 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만 합니다.


“(9)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우리가 어떻게 모든 부정에서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품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중독되는 길만이 음행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중독은 중독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중독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음행의 달콤함이 배설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유혹에 빠져야만 음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음행죄는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우상숭배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5)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여기서 더러운 자는 음탕한 자를 말하고, 탐하는 자는 앞뒤 문맥에서 보면 성적 탐욕에 몰두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음행을 행하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 음행죄가 결국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간음은 영적인 간음에서 나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하는 제5계명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것이 우리의 참 부모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었듯이, 제7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라고 하는 제7계명에는 “참 남편 되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짓을 하지 말라, 영적으로 간음을 하지 말라”는 명령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그분게 대한 정절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이라면, 우리는 둘째 하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예수를 믿는 믿음에 나오는 샘솟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이미 세상으로 기울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간음이고, 거기서부터 온갖 죄들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쾌락을 사랑하고 색욕을 좇는 것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제7계명 역시 그 순종의 본질이 자기를 사랑하는 우상을 깨트리고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5. 마음에서부터 모든 부정을 미워해야 함.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리고 음행죄에 있을 심판을 생각하면서 이 음행죄와 싸워야 합니다. 어떻게 싸워야 합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시면...


108문 : 제7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모든 부정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혼인의 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우리는 어떤 부정이라도 마음으로부터 미워하고, 순결하고 단정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거룩한 혼인의 관계에 있든지 독신으로 있든지 항상 이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제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라는 명령은 원어로 보면 유부녀들 간의 간음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면 결혼 안한 청년이나, 독신으로 사는 자들은 해당사항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7계명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결혼했든지 안했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모든 음행을 금하시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외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모든 부정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109문에 더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109문 :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에서 간음, 또는 그와 같은 부끄러운 죄만을 금하십니까?
답 : 우리의 몸과 영혼이 모두 성령님의 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몸과 영혼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는 그리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 뿐만 아니라, 음란한 생각이나 욕망까지도 음행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27)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그러므로 결국 마음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고, 또 마음이 이 음행죄를 미워하면서 때때로 성적인 욕망이 올라올 때마다 성령을 의지하여 그것을 대적하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 있으면, 겉으로 성적으로 순결한 삶을 살아도 이미 간음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을 모든 부정한 것에서부터 지켜야 합니다.


“(23)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가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말씀을 품고 있습니까? 돈을 품고 있습니까?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다 머리로는 아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왜 마음이 지켜지지 않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마음은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호감이라는 것은 내가 사랑해야지 하고 의지하고 결단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 사람 마음대로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내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결코 죄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결국 성령님이 변화시켜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8)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9)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7-12)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회개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그 음행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정결하게 씻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끗이 씻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 마음컨트롤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다윗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소서”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기호의 변화가 회개라고 이전에 배웠는데, 그것은 오직 성령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성령님을 의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절대로 이 음행죄와 싸워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혜로 근본 우리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음행죄를 미워하고 혐오하는 마음으로 바뀌어야만 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구하여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유혹이 되는 것도 간음을 행한 것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또한 제7계명이 모든 음란한 생각, 말, 행동, 몸짓을 금할 뿐만 아니라, 유혹하는 것도 금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답 : ...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부정한 행동이나 몸짓, 말이나 생각이나 욕망, 또는 그리로 유혹하는 모든 것을 금하십니다.


음란한 욕망을 품도록 유혹하는 옷차림, 모든 몸짓이나 행동도 다 음행죄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대중문화가 이러한 음행죄를 선도하고 있는데, TV프로마다 야한 옷을 입고 야한 춤을 춤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음란한 생각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야한 옷차림을 멋으로 알고 입고 다니고, 학교에서 장기자랑만 했다하면 걸그룹들의 야한 춤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쳐도,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만 간음 안 행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유혹이 되는 것도 음행죄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내가 야하게 입고 다니든 말든 나는 아무 잘못 없다. 쳐다보고 음흉한 생각을 한 저 사람들이 잘못이지...”하는 변명을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아무리 다른 사람을 유혹하려고 하는 악의가 없고 단지 나름대로의 패션을 위해 입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유혹이 되었다면, “나는 영원히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겠다.”라고 결단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권한도, 먹지 않을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것입니다(고전 8:13).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서로를 성적으로 보호해주고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성은 남성을 어떻게 보호해줄 수 있습니까? 성적인 자극을 주는 옷을 입지 아니함으로써 남성을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남성은 성적으로 희롱하거나 무력행사를 하지 않고, 여자를 대할 때 자매를 대하듯 함으로써 여성을 보호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서로 서로 책임감 있게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7. 성적인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


마지막으로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고 적절히 처리할 수 있는 몇 가지 지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결혼하는 것이 성적인 욕망을 절제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9)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


결혼은 성적유혹에 시달리기 쉬운 연약한 우리를 위한 하나의 구제책으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혼을 통해서 그러한 유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욕을 절제할 수 없는 피 끓는 청춘들은 빨리 결혼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성적 유혹이 있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사실 길거리 전광판이나 인터넷 광고들... 이 세상이 온통 성적인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을 최대한도로 피해야 합니다. 특히 아이들에게 인터넷을 못하도록 하고, 스마트폰을 안 사주는 것이 좋은 방도가 될 것입니다. 음행죄는 정면으로 싸우는 죄가 아니라, 멀리해야 하고 절제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요셉이 정면승부하지 않고,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처럼 음행죄는 피해야 하는 죄입니다. 누구든지 어떤 상황, 어떤 장소에서 죄 짓기 쉬운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 약하면 그 장소에 안 가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부부의 사랑을 굳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바람피우는 것이 보편화된 이유는 바로 부부관계를 통해서 충분한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육체만 섞으니깐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다른 대상을 찾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먼저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충만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령한 사랑가운데 육체적으로도 서로가 서로에게 매력적인 상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성적으로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꾸미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퇴근하고 집으로 왔는데, 아내가 몸빼바지 입고, 머리는 부스스하고, 살쪄서 배는 나와 있고, 화장 안한 쌩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면 남편의 기분이 어떠할까요? 물론 그럴지라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남편은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이 아닙니다.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아내를 사랑스럽지 않게 바라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이러한 남편의 연약함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자신을 예쁘게 꾸며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보다 남편을 더 사랑하여 너무 과하게 꾸미는 것은 문제지만, 적당하게 꾸미는 것은 오히려 부부관계를 더욱 윤택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관계를 할 때에는 서로가 만족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내 욕구를 위해 성관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관계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데, 자기는 피곤하다고 거절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사랑인데, 그 사랑은 반드시 배려와 섬김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배운 제7계명의 의미들을 마음에 새겨서 정말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에서 예수님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고 이 음란죄와 싸우며 정결하고 거룩하게 성의 순결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5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문,128문,129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file 127-129문 최상범 1644
5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ile 126문 최상범 1297
5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0주(125문)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file 125문 최상범 1442
5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124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file 124문 최상범 1502
5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8주(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file 123문 최상범 1311
5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주(122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ile 122문 최상범 1654
5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1664
5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1849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1844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231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177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092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1634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234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240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161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1956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504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705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12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