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10.10 18:2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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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13문
문답내용 113문 : 제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4-09-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제10계명


요절 : 출 20:17


113문 : 제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1. 10계명은 모든 계명과 연결되어 있음


“(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10계명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집’은 단순히 사람 사는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뒤이어 열거되는 구체적인 예들을 보는 것처럼, 그 사람의 모든 소유와 재산, 더 나아가 그 사람의 권속들까지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가장 먼저 ‘아내’가 언급되는 것은 아내야 말로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소유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10계명은 바로 이웃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에 대한 탐심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면 7계명과 8계명의 반복입니다. 즉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 관계 맺으면 간음이 되는 것이고, 남의 소유를 탐내서 훔치면 도둑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10계명은 7,8계명을 범하게 되는 근본원인인 탐욕을 금하는 계명입니다. 더욱이 7,8계명뿐만 아니라 모든 계명이 다 인간의 탐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이 10계명은 1계명과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사도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1계명과 10계명이 동일한 내용으로 처음과 끝을 자리 잡아서 십계명전체가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모든 계명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행위를 문제 삼을 때, 유일하게 10계명만이 마음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10계명의 아주 독특한 측면입니다. 물론 제2계명도 사람의 마음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제2계명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은 어쨌든 우상숭배 행위입니다. 그러나 10계명은 계명자체가 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러한 죄악된 행위의 근본 원인이 되는 마음의 탐욕을 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10계명은 십계명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열 번째 계명이 십계명 전체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까지 말합니다.


2. 탐심이란?


그러면 10계명에서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 탐심이 무엇입니까? 10계명의 “탐내지 말라”에서 “탐내다”는 원어로 보면 “하마드”인데, 이 단어는 “(자기 눈에 아름다워서)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얻기를 바라다, 그것을 사랑하고 갈망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사람의 모든 욕구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모든 욕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아내를 보고 성적인 욕구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아내를 보고도 성적인 욕구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남의 아내를 보고 성적인 욕구를 느끼면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집에서 배고플 때 집에 있는 음식을 보면서 먹고 싶은 욕구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이 먹고 있는 맛있는 것을 보면서 훔쳐서 먹고 싶다거나 뺏어서 먹고 싶다고 욕구를 갖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욕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를 넘어선 욕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113문 : 제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고,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탐심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라도 어긋나는 지극히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욕구 자체를 죄악시 여겨서 금욕주의적으로 가는 경향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금욕과 독신으로 더 높은 경건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데, 그런 자들의 주장이야말로 우리가 배격해야 할 귀신의 가르침입니다. 정당한 욕구는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주신 선물로서 우리가 누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욕구가 없다면 우리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질서를 넘어서서 욕구를 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질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질서를 말하는데, 곧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따라 자신의 욕구가 통제되고 절제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탐심은 바로 이러한 질서에서 벗어난 욕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비단 남의 것만을 향한 탐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소유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 사랑보다 위에 있을 때 그것도 탐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청년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구하며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부자청년은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0계명인 “다른 이웃의 아내와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라는 계명도 참되게 지켰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청년은 매우 큰 부자였기 때문에 남의 것이 부러울 일이 없는 것입니다. 아주 10계명을 지키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10계명을 지켰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재물에 대한 애착으로 슬픈 기색을 띄고 그 자리를 떠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예수님보다 그 재물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은 남의 것만을 탐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재물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도 탐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들은 근본 하나님보다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맹목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기 자신이 앉아서, 자기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행복과 안녕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는데서 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배고프지 않고 배부르면 만족하는 것입니다. 또 단순히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맛있는 것을 먹어서 배부르면 더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또 여자랑 사랑을 나누고 성관계를 맺음으로 쾌락을 느낄 때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그냥 여자가 아니라, 아주 예쁜 여자랑 사랑하면 더 행복해 하는 것이죠. 그리고 육체는 고생하고 고통스러운 것보다 편안하고 안락하기를 원합니다. 모든 재앙을 피하고 건강하게 오래도록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즐기면서 만족을 얻고 싶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지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수많은 욕구들이 채워질 때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3. 자기 사랑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부패한 인간은 반드시 돈을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있어야 자신의 육체의 욕구를 계속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행복과 안녕을 보장해주시는 분이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출애굽기의 만나를 내려주시는 사건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거두라고 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명령을 어기고 더 거두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왜 더 거두었습니까? “내일 안내려주시면 어떡하지?”하는 염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바로 돈에 대한 축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돈 버는 게 쉽지 않고, 또 언제 어느 때에 갑자기 재난이 닥쳐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돈 벌 수 있을 때 최대한으로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재테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재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 든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맘모니즘입니다. 돈이 자신에게 행복과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하겠습니다. 돈이 결코 우리의 생명과 안녕과 행복을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안녕을 보장해주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모든 노력과 쌓아놓은 재물들은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13)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눅 12:13)


유산 분배하는데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공평하게 분배가 되도록 예수님께서 좀 도와주십사 하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탁하는 것입니다.


“(14)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15)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4-15)


예수님은 그런 일 하러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 사람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가 유산 상속을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라 돈에 대한 탐심이라는 것을 아시고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권면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분명히 생명과 안녕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하십니다. 즉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자 비유를 가르쳐주십니다.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이 부자는 자신의 온갖 지혜와 재능을 동원해서, 열심히 일하고 경영했고, 또 그로 인해서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매들을 새로 곳간을 지어서 거기에 저장해두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오히려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열심히 돈 벌고, 그리고 그 번 돈을 축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쌓아둔 재물로 인해서 마음이 든든해진 부자가 이제 편안하게 여가를 보내려고 하는데,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맘모니즘은 반드시 재물을 축적하고 그 재물을 의지해서 사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어리석음은 바로 불연 듯 찾아오는 죽음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전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주님이 오늘밤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면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우리가 열심히 적금 들어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암만 미래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도, 주님이 부르시면 그 공부한 것이 말짱 도루묵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죽음 앞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인들은 주를 위해서 열심히 돈 벌고 때때로 저축도 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 읽고 기도할 시간도 없이 공부에만 매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일예배 빠져가면서 직장 일에 매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한테 베풀어야 하는 주님의 뜻을 거부하면서까지 저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 공부하고 주를 위해 돈을 벌고 주를 위해 저축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즉 내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오늘을 위해 충분하리만큼 공급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의 양식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까지 살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죽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깐 우리는 마치 오늘 하루가 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필요한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줄 수 있습니다. “이거 다 나눠주면 내일 나는 뭐먹고 사나?”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막 퍼주면, 내일은 머먹고 살지? 직장에서 짤리면 이제 뭐 먹고 사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이 구절은 번역이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정개역판에서 제대로 다시 번역했죠.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할 것이요


이것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미래의 필요와 안녕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그냥 하루하루 충분히 공급된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그것을 족하게 여기면서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타락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만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7)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28)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25-33)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시고, 창조만 하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작은 새 한 마리도, 하찮은 개미 한 마리도,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께서는 때때마다 먹이시고 입히시고 그 생명을 친히 보존해가십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대적하는 악인도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야 얼마나 더 보살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겠습니까? 얼마나 그의 백성들의 생계와 안녕을 책임져주시겠습니까? 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피심을 우리가 안다면 “무엇을 먹을까? 내일이 어떻게 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반드시 먹이시고 입히실 줄을 믿고,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주님을 신뢰함으로 우리가 먹고 사는 것 염려하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4. 탐욕 ↔ 자족


“(6)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8)


우리는 너무나 자주 현재의 삶이 살기가 힘들고 빠듯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대단히 부유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위생시설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깨끗한 물 조자 마실 수 없으며, 먹을 것이 부족해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60억 인구 중에서 12억이나 되고, 그중에서 6000만명은 굶어죽기 직전에 처해 있습니다. 자기 차가 있고, 집이 있고, 컴퓨터가 있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대학졸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 세계 6천만명 밖에 안 됩니다. 우리가 서민이라고 하는데,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우리는 사실 전 세계 상위 1% 안에 드는 부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형편에 자족하거나 감사하거나 하지 않고, 우리는 늘 “살기 힘들다, 형편이 너무 빠듯하다”하면서 거머리의 두 딸처럼 “더 다고 더 다고”를 외칩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돈을 많이 벌면 족한 줄로 알고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될까요? 탐욕의 무서운 점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15)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거머리는 족한 줄을 모르고 피를 빨아먹습니다. 적당히 빨아먹고 눈치 보다가 알아서 떨어져야 하는데, 눈치 없이 “부족하다, 부족하다” 그러면서 막 미친 듯이 빨아먹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모기와 대조됩니다. 모기는 이리저리 눈치 봐가면서 위험하다 싶으면 중간에 끊고 얼른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거머리에게는 사전에 중단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머리는 한번 피를 섭취하면 거의 1년을 버텨야 할 때도 있기 때문에, 한번 먹을 때 1년 치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머리는 실제로 자신의 몸무게의 10배에 해당하는 피를 먹습니다. 그래서 4-5 마리의 거머리면 30분 동안 토끼 한 마리를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입니다. 옛날에 우리 부모님들은 어렸을 때 “하얀 쌀밥만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 하얀 쌀밥 먹습니다. 그러면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합니까? 아니요, 여전히 불행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즉시로 또 다른 소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끝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족한 줄을 모르고 더!! 더!!를 외칩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물질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러면 많은 경우 “목사님... 지금은 제 코가 석자라서 헌신할 수가 없어요... 일단은 돈 좀 더 벌고, 그 다음에 여유가 좀 생기면 그때 헌신할께요...” 이렇게 대답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평생 헌신 못합니다. 인간에게 “이제는 족하다.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때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물질의 헌신은 여유 있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계없이 지금 내 형편에서 힘에 겹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헌신은 오직 믿음으로 자족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족은 탐심의 반대말입니다. 자족은 사도바울의 말처럼 오늘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족이란 바울처럼 빈에도 처할 줄도 알고 부에도 처할 줄도 아는 일체의 비결을 깨닫는 것입니다.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이 세상 사람들은 사업이 망하고 빚잔치하고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겨우 사는데, 그날 하루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야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것이 바로 부에는 처할 줄을 알지만, 빈에는 처할 줄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빈에도 처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심지어 식사 몇 끼를 굶었다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불쌍하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배고프고 굶어도, 그것으로 자신이 비참하다거나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에 처하면서 그 믿음이 자라가면서 부에도 처하고 빈에도 처할 줄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굶어도 감사, 배불러도 감사, 항상 자신의 형편에 자족하면서 살았습니다. 먹지 못해 굶어도, 온갖 고난을 당하고 거지처럼 길바닥에서 자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볼 때 부자처럼 살고 거지처럼 사는 것은 삶에 있어서 하나의 양상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풍부에 처하면 좋겠지만, 비천에 처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과 그분께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목숨 건 사람입니다. 그래서 돈 없어서 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데, 사역이 잘 되지 않고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렇게 서글프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그 반대죠. 사람들은 본질이 아닌 것에 울고 웃고, 본질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을 위해서는 백방으로 손을 쓰며 밤잠을 설치며 많은 일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조금도 수고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 일이 너무 바빠서 간신히 식사할 겨를은 있지만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말씀을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돈을 잃으면 막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이제는 망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 2:21)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고 전부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의 하루 일과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루 종일 뭐하면서 사십니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직장생활하고, 학생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공부하고, 집에 와서는 취미생활하고, TV보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러나 하루 일과 중에 주를 믿는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으면 그것이 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탐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5. 탐심의 무서운 결과


여러분 우리는 탐심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며,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초래하는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탐심의 무서움은 육신의 만족과 달콤함에 속아 세상의 유혹을 택하지만, 결국 그 뒤에는 살이 간을 뚫기까지에 이르는 치명적인 결과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그 마음이 믿음에서 떠나 그릇된 길로 가게 되는 것이고 결국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여러 가지 고통, 슬픔, 비통으로 자기를 찔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데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사는데 나중에 눈 떠보니 지옥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심의 무서움입니다. 하와가 어떻게 범죄 했는지 보십시오. 하와는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실과를 보고서 그것을 먹고자 하는 탐심에 빠졌을 때, 그녀는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탐심의 무서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적절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시야를 흐리게 하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채워줄 달콤함만을 보게 만들어버려서 그것을 무조건 선택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와와 같이 망령되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취하기 위해서 스스로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심판받는다고 이야기해도 그것을 듣지를 않습니다. 아니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 가시떨기 밭입니다. 말씀의 씨가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생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것입니다.


6. 탐심은 마음의 호감의 문제


참으로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탐욕에 물들어 있는 것이고, 거기서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탐심을 회개하고 탐심에서 벗어나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탐심, 곧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아무리 끊어내려고 하고 버리려고 노력해도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은 이성과 강제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 아닙니까?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의 강력한 반대로 헤어지고, 부모의 계획대로 다른 남자와 약혼하게 되었다고 해서, 이 여자가 이 새로운 남자를 사랑하게 됩니까? 설사 여자주인공이 스스로 현실을 인정하고 이제 이 새로운 남자를 사랑해야 되겠다고 결심한들 그것이 마음대로 됩니까? 부모가 아무리 강제적으로 상황을 그렇게 만들고, 억지로 결혼시켜도, 심지어 본인이 결단하고 노력해도, 이 여자의 마음은 여전히 예전의 남자를 잊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로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어떠한 반대와 장애물도 다 극복하고 결국 그 남자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를 미워해야지, 세상을 미워해야지, 주님을 사랑해야지...” 암만 마음속으로 결단해도, 죄를 끊어내기 위해 어떠한 금욕의 노력을 기울여도, 속된 말로 별의 별 짓을 다 해도 우리는 결코 우리 안에 있는 세상과 돈에 대한 사랑을 끊어낼 수 없습니다. 이 내 마음은 나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은 그 마음이 일향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인간 스스로 그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그가 “전재산을 팔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라는 예수님의 명령 앞에 심히 부담을 느끼고 결국 예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자는 천국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런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부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천국 갈 수 없다라는 말씀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가 탐심을 버리고 탐심을 이기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의 기호의 변화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만이 우리를 탐욕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7. 회개는 탐심의 제거가 아닌 탐심의 방향성의 변화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이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마음이 놀랍게 변화되면, 우리 마음에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소욕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소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소욕’이라는 단어가 ‘에피뚜미아’로서 ‘탐욕, 욕구’를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탐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탐욕의 방향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전에는 없었던 성령의 소욕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소욕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육체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향한 탐욕,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욕망, 성령의 소욕으로 가득차서 성삼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죄를 심히 미워하게 되고, 또 이전에 즐기던 세상의 것들이 이제는 배설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난번에 배웠던 마음의 호감의 변화인 ‘회개’인 것입니다.


답 : ...언제든지 우리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받으면 돈을 의지하지도 추구하지도 않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전재산 팔아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도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냥 전재살 팔아라고 하면 그것에 대한 애착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팔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밭에 감추인 보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그 보화를 향한 애착이 전재산을 향한 애착을 능가하게 됨으로써 전재산 파는 것이 도리어 즐거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중독은 중독으로만 치유할 수 있고, 세상에 대한 애착은 주님께 대한 애착으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성령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늘 연약하여 세상에 대한 탐욕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무지가 우리로 하여금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말라오는 헛된 세상의 우물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깨우침을 받고, 기도로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주셔서 우리로 이 세상의 헛됨을 보게 하여주시고, 주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탐욕을 허락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을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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