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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14-115문
문답내용 114문 :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라도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 단지 몇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따라서 살기 시작합니다.

115문 :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 첫째, 평생 동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강설날짜 2014-09-2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115문)


십계명과 성화


말씀 : 롬 7:14-25


114문 :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라도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 단지 몇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따라서 살기 시작합니다.


115문 :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 첫째, 평생 동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1.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 앞에서의 성도의 자기 인식


오늘은 십계명 전체의 내용이 우리의 성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십계명을 배웠는데, 십계명은 한마디로 말해서 철저하게 마음에서부터 자기 사랑을 깨트리고 이기적인 모든 탐욕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심지어 예수 믿고 거듭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사랑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의 계명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은 자신이 이 율법 앞에서 철저하게 범죄한 죄인이라는 사실이고,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 앞에서 사람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아래에서 자신이 전적타락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고, 그래서 살 길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는 줄 알고, 그리스도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이죠. 물론 예수를 믿고 성령 받아 변화된 신자는 불신자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우선 마음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를 사로잡아 이끄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성화된 삶이 나타납니다.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또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주님을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팔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있다고 곧바로 천사처럼 변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예수 믿는 즉시로 획기적인 삶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분명하지만(술 끊고, 죄짓는 것을 그만두고, 전도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이 즐겁고... 등), 그러나 곧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복음과 진리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화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까지 깊이 있게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에 계속해서 말씀을 배워서, 은혜를 받고, 더 깊이 주님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이 원상 복귀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말씀 없이 살아가면 오히려 이전보다 형편이 더 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음을 받은 후에 다시 더러운 구덩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벧후 2:22). 처음 귀신을 쫓아내었는데, 그 깨끗해진 방에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인데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의의 도를 알고도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의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가고 깨달아 가는 일이 목숨보다 소중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배우는 만큼 그리고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만큼, 성도 안에 있는 지성의 어두움이 조금씩 물러가게 되어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주님이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그리고 주님의 뜻이 보다 선명하게 깨달아지면서, 그리고 어떻게 그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성화의 길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면서, 경건의 의무에 힘쓰고 은혜를 받아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변화되기 시작하고 삶이 성화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화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성화의 길을 걸어갈 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정말 가히 따라갈 수 없는 높은 거룩의 경지의 삶을 사는데, 본인은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더욱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주님의 뜻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그리고 예전보다 더욱 자신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선명하게 보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온전하신 뜻에 비하면 이제 겨우 성화를 시작한 아주 초보적이고 유치한 수준일 뿐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14문이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114문 :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라도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


이 말을 “뭐야~ 그렇게 순종하려고 몸부림치더니 이제 고작 한 발짝 뗀 거야? 나랑 별 차이가 없구만... 결국 몸부림치며 사나 나처럼 평범하게 사나 다 똑같은 것 아니냐? 그러니깐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는 거야...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어...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사는 거야... 신앙생활은 이 은혜를 깨닫기 위해 늘 자신의 연약함을 더 깊이 발견해가는 과정일 뿐인 거야... ” 라고 말하면서 지금 죄에 상습적으로 넘어지는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114문의 답변을 굉장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114문은 신앙의 열매가 없고 죄를 지속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이라고 알려주는 문답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성화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과 벗하면서 신앙의 뒷걸음을 치는 자가 “그래 나는 죄인일수밖에 없어...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고 연약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하고, 정말 성화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는 성도가 자신의 그 순종들이 온전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부족하고 연약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114문의 답변은 바로 후자의 경우를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한 사람이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사도바울의 고백에서 잘 나타납니다. 로마서 7장에 14절 이후부터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저는 이것이 신자로서 바울의 현재적인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1-24)

사도바울이 막 죄 짓고 살아서 이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거룩함과 경건함과 의로운 삶,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는 다 박수를 치는데, 정작 본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말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문제는 자기 마음속에 그렇게 살기 싫어하는 죄악된 본성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모든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면 칠수록 무엇을 강하게 느끼느냐하면, 자신 안에 있는 이 죄악된 본성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잡아 이끄는 것을 강력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거기서 엄청난 영적인 곤고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그 영혼이 탄식하는 것이죠. 이러한 탄식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는 일기 내내 계속적으로 자신의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서 자책하고 고뇌하며 괴로워합니다.


“자신에 대해 지금처럼 수치스럽고 혼란스럽게 느낀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이, 내가 가엾은 원주민들 속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위해 사역을 하려고 (적어도 그런 체라도 하려고) 이런 황무지에 와 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은 내가 열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오, 사실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마르고 감정이 없는지를 깨닫자 마음이 혼란으로 가득찼다! 오,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나를 안다면, 분명 하나님을 향한 내 열정과 결단을 지금처럼 높이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랑이 없고 결심이 약한 자인지 차라리 그들이 알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들이 속지 않고서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하지 않도록’말이다. 그들이 내 메마름과 신실하지 못함과 하나님을 향한 용기와 결단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게 된다면, 즉시 그리스도인들 속에 함께할 가치도 없는 자로 여기며 나를 문 밖으로 내쫓아 버릴 것이다.”(426)


“아침에 방황하는 헛된 생각으로 인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무나 슬펐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책망했는지! 비참함을 느꼈다.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다니! 10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원주민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도중에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려고 했으나 불안하고 흔들리는 마음이 몰려와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수치와 혼란으로 가득 차서 극도로 불안정하고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 비해 나 자신이 짐승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나만큼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기에 마땅한 자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270)


이러한 탄식은 결국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옵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이 있는 자만이 이런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즉 성화의 길을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 또는 죄 가운데 있었더라도 이제 회개하고 다시 성화의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만이 탄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죄와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에게서는 이런 탄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는 거듭나지 않았든지 또는 지금 영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탄식이 없다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옛죄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과 우리를 향해 두신 거룩하신 뜻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탄식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정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장례식에서 설교했던 아래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브레이너드 목사는 평생 다음과 같은 것들로 인해 고뇌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이고 순결한 사랑, 세상과의 분리, 세상의 헛됨에 대한 자각, 깊은 겸손, 자신의 비천함에 대한 깊은 인식, 내주하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 은혜 안에서 자신이 이룬 빈약한 성취물로 인해, 자신이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상한 마음, 자신이 너무나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온 애통함, 거룩함을 추구하는 영혼의 갈망과 진지한 성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되기를 바라는 뜨거운 갈망, 그 모든 것을 위해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을 통한 구원의 길에서 누리는 기쁨, 참된 거룩함을 풍기는 자들과의 대화에서 맛보는 달콤한 만족, 영혼들에 대한 깊은 긍휼, 영혼들을 위한 은밀하고도 간절한 중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커다란 포기, 빈번하고도 가장 분별력 있게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새롭게 포기하는 마음, 영혼과 몸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 자신의 마음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 죄와 죽음의 몸에서 온전한 구원을 받은 뒤 하나님과 완벽하게 연합하고 그분을 닮아갈 것에 대한 갈망,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완벽히 영광스럽게 할 것에 대한 갈망, 실제로 몸 밖에 있어 또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자처럼 영원한 세상을 명확히 보는 것, 끊임없이 깨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 죄와의 내적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진지함, 깊은 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시간을 사용하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이런 것들이 그의 마음을 끊임없이 차지하고 있었다.”(714, 설교내용의 각주부분)


한마디로 말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열망, 그리고 예수님처럼 온전해지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죄악된 본성에 대한 한없는 미움과 증오의 마음... 이런 것들이야말로 영적생명의 본질입니다. 모든 거듭난 신자는 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이런 마음이 반드시 있습니다. 물론 영적 상태나 사람에 따라서 이러한 소원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듭난 사람 중에 이런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소원이 없는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 믿는 그 순간서부터 목표가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사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못 살아서 문제이지만... 아래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십시오.


114문 :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신자라도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계명들 가운데 단지 몇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에 따라서 살기 시작합니다.


참된 신자는 죄악된 본성으로 온전히 순종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목표는 언제나 온전함입니다. 술 담배 끊고 나쁜 짓 안하고 교회 열심히 나오고 세상에서 적당히 착하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부터 모든 삶의 양태까지도 주님의 모든 계명을 좇아 완전히 뜯어 고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 굳은 결심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마지막 문장에서 “살기 시작합니다.”라는 부분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듣고 결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러한 실천의 몸부림을 통해서만 우리는 참된 신앙을 따라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이 교회와 가정에서 엄격하게 명해져야 하는 이유


이 점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5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15문 :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그렇게 엄격하게 설교하게 하십니까?
답 : 첫째, 평생 동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여기 질문에 보면, “엄격하게 설교하게 하셨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지 주일날에만 십계명을 엄격하게 설교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까지도 이 십계명을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엄격하게 순종하도록 명했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그리고 특히 청교도 시대에 이러한 분위기가 교회와 가정을 장악했습니다. 물론 십계명을 강조하고, 엄격하게 순종하도록 하는 분위기가 때때로 부작용을 낳을 때가 있습니다. 17세기 1차 영적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전 청교도들은 청교도적인 신앙심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영적으로 냉담했고, 지극히 외형적인 교회생활에 얽매여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의 엄격성만을 강조했는데, 그 당시 청교도 신앙 분위기를 호손작가의 ‘주홍글씨’ 소설이 잘 보여줍니다. 율법에 대한 강조가 아주 어둡고 준엄한 율법주의와 종교적인 편집증, 강박증과 같은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반발로 오늘날 교회 가운데 율법을 터부시하고 무시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것은 몹시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러한 부작용들은 그 당시 청교도가 십계명을 너무 엄격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리새인처럼 믿음이 없이 은혜 없이 율법적인 엄격함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으로 거듭난 신자에게는 율법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쳐서 그 율법을 따라 살도록 돕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1) 자신의 전적타락을 더 깊이 깨닫고 십자가를 의지함


첫째로 이를 통해서 신자는 자신의 전적부패와 타락을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악 되기 때문에 예수님 믿고 거듭났어도 은혜가 떨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치고 올라와 우리를 교만하게 해서, 결국 우쭐한 마음으로 자기 의를 붙잡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놓아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구제불능의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새롭게 깨달아가야만 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매일의 삶속에서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속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신자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므로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이 나를 구속하기 위해 피흘려주셨으므로 그 구원의 은혜가 감사하여 그 감사의 표현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셋째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뜻이고, 불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기 때문에 그 진노가 두려우므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땅함으로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자 할 때, 우리는 즉시로 그렇게 살기 싫어하는 내 마음의 죄악된 욕망과 씨름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 감사함과 자원함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눈물겹도록 자신의 내면의 이기적인 본성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이러한 처절한 몸부림과 실패와 좌절과 또 다시 일어섬과 은혜를 간절히 구함과 결단과 노력과 애씀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차로 자신의 죄와 비참함, 그리고 무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은밀히 의지하고 있었던 자기 의가 깨어지고,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된 것임을 절감하며 의지하며 감사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율법을 참되고 엄격하게 강조하고 가르치면,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더욱 믿고 의지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십자가를 더욱 붙들고 의지하게 된 성도는 그 은혜가 감사해서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 더욱 주님께 온전히 복종하며 살고자 하는 데로 또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선순환하면서 성도는 십자가 붙들고 성화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성화의 선순환이라고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답 : 첫째, 평생 동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선순환을 모르고 율법을 도외시하고 오직 십자가 은혜만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 마을’입니다. 이근호 목사를 리더로 한 십자가 마을은 계명을 지키기 위한 성도의 모든 노력과 애씀을 아주 죄악시하고, 그 반대로 십자가의 은혜만을 매우 강조합니다. 그들은 언약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만을 강조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교회에서 십계명 가르치면서, “착하게 살아라, 선을 행해라, 계명을 지켜라, 전도해라, 헌신해라...”라고 가르치는 것은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우리를 대신하여 다 지키시고 모든 율법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는데, 왜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고 율법의 행위로 다시 돌아가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신자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모든 행위는 은혜에 역행하는 ‘자기 의’에 해당하고, 복음을 버리고 율법을 다시 도입하는 것에 해당하며, 그것은 결국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보편적인 종교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마을이 말하는 성도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성화는 도덕적으로 좀 더 나은 ‘내’가 되려고 하는 ‘나’조차도 죽여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성화이며,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성도의 참된 순종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자신의 죄악됨을 율법 앞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적인 입장만을 취합니다.


물론 그들이 피를 토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신칭의 복음을 모르고 십자가를 도외시하고 바리새인처럼 로마가톨릭처럼 자기 의의 교만만 쌓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공로와 이신칭의 복음을 강조하는 것은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라도 성경적인 가르침의 균형을 일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 없이 이신칭의 복음이 선포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율법에 대한 강력한 선포, 곧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성도의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서 이신칭의 복음이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되게 이신칭의 복음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십자가를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참으로 십자가 마을의 신학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사에서 늘 반복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어떤 잘못된 것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반대로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한쪽으로 치우쳐 가드레일을 박게 되면, 운전자는 그 반대로 핸들을 꺾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자동차는 그 반대 가드레일로 돌진하여 결국 사고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마을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칭의 받은 성도의 마땅한 성화의 의무를 그들의 가르침에서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들은 로마가톨릭이 칭의를 성화에 포함시켜 칭의를 제거했던 것처럼, 거꾸로 그들은 성화를 칭의에 포함시켜 성화를 없애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오직 거듭난 성도의 경우에만 해당됩니다.)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흘려 떠내려가는 사람은 그 물살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암만 “우리는 전적타락한 죄인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 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만 붙잡아라” 그렇게 외친들 성도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습니다. 사람이 그런 말만 듣고 자기 죄를 깨닫고 십자가를 붙잡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성도가 참 안목이 있고 바른 의식이 있고 지혜가 있어서 그렇게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붙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십자가 마을 신학이 백번이고 옳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게 됩니까? 안 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성령이 짠 임해서... “정말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죄인이구나...” 깨닫고 십자가를 붙드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은 교만해서 절대로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강물의 흐름을 거슬러서 단 1m라도 전진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물살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닫고, 또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동아줄을 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마을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아주 강조하는 신학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교만이 얼마나 교묘하고 대단한 것인지를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오류입니다. 물론 십자가 마을 신학을 접하고 복음을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 마을의 신학을 접하기 전에 이미 율법 아래에서 오래도록 신음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마을 신학을 들었을 때, 복음을 깨닫고 큰 감격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마을 신학의 치명적인 약점은 그 이후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성화의 선순환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지속적으로 자기 의의 교만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교만을 깨트리시기 위해서 율법의 짐을 지우셔서 율법 아래에서 신음하게 하시는데, 십자가 마을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그러한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율법이냐 은혜냐 하는 흑백논리의 잣대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재단해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볼 때 율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규범일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기 의의 교만을 깨트리는 가시가 되어 우리로 계속해서 그리스도만을 붙잡도록 도와주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가르침만이 아니라 권고도 필요한데, 하나님의 종은 이 점에 있어서도 율법에게서 유익을 얻는다. 곧, 자주 율법을 묵상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깨움을 받으며, 그 안에서 강건해지며, 미끄러운 범죄의 길에서 다시 돌이킴을 받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리 성령을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도, 냉담한 육체가 언제나 그들을 짓누르기 때문에 정상적인 열의를 갖고 전진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육체에게 마치 게으른 나귀를 때리는 채찍과도 같아서, 육체를 일깨워서 행하게 한다. 신령한 사람이라도 아직 육체의 무게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지 않으므로, 율법이 그 사람을 끊임없이 찔러서 그냥 나태하게 있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기독교강요, 2권 7장 12절)


물론 이 말이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갈 3:25).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된 본성, 옛사람의 잔재는 여전히 우리로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로 인해 우리는 죄책감과 정죄감 속에서 신음합니다. 사단 마귀는 그 죄를 빌미로 우리를 율법 아래로 사로잡아 우리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도리어 우리의 교만을 깨시는 방편으로 선용하시니,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은혜로 성도는 그러한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발견하고 그분의 그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설의 내용을 가지고서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 이신칭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으로 돌아가자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지는 이신칭의 복음을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그와 더불어서 율법에 대해서도 매우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계명을 엄숙하고 철저하게 가르치고 또 그렇게 순종하려는 분위기가 교회와 가정을 장악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감사의 규범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노력을 통해 늘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는 은혜가 있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복음적 순종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답 : ...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십계명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명함으로써, 사람들은 그 십계명을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두 번째 문장의 영어판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that we constantly endeavour and pray to God for the grace of the Holy Spirit”


‘endeavour’는 “모든 것을 쏟아 붓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십계명을 계속적으로 엄격하게 가르치는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순종하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십계명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게 될 때, 결국 신자들은 방종과 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져 교회의 모든 경건이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므로 매년 정기적으로 십계명을 한번 이상 배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자주 명함으로써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계명들을 중하게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분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노력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적 순종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순종의 노력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에 점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답 : ...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114문에서는 성도의 순종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에 비하면 한 발짝 뗀 것에 불과한 아주 유치한 수준이지만,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서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는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의 노력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그린 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걸어놓고, 온 방에 붙여놓곤 하는데, 잘 그려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죠.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림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의 그림이기에 부모입장에서는 피카소의 그림보다 더 값진 그림인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성도들이 순종하려고 애쓰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칭찬하시고 격려하시면서 상이 있으니 더욱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계 2:8-11). 참으로 성도의 순종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순종의 노력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어 육신의 몸을 벗을 때에야 비로소 죄와 완전히 결별하고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몸과 영혼이 온전해지는 때는 주님의 재림의 때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서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죄에 대한 결벽증을 가지고서 완전을 추구하며 날마다 싸우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상태를 사도바울은 목표로 삼아 살았습니다. ‘잡히다’는 단어는 “소유가 된, 지배를 당하는”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예수님께 완전히 지배당하는 그런 소유가 된 상태를 소유하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끊임없이 좇아갔습니다. 이미 이룬 것도 아니고 또 이룰 수도 없습니다. 다만 좇아갈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얼마나 좇아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좇아감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좇아가고 있든지, 뒷걸음질 치고 있든지... 끊임없이 달려가야지만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자전거처럼, 이 좇아감을 멈추면 신앙생활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러한 신앙의 경주를 힘써 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기도의 동기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배워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답 :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에서 십계명을 엄격히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명하신 이유는, 그러한 순종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성도가 오직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달은 자만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간절히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답 :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하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핵심은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더 깊이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겸손한 기도, 심령이 가난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율법 순종의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결국 다음 주부터 기도에 대해서 다루려고 하는데, 오늘은 그 기도의 서론에 해당되는 것이죠. 참으로 거듭난 자가 왜 기도에 힘쓸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114문과 115문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사의 규범으로서 율법 순종이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기도에 올인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전적타락을 깨닫고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들고 사느냐 안 사느냐는 기도하느냐 안 하느냐로 확실히 구분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 기도의 행위로 “나는 주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도 거의 안 하는 사람은 그 기도하지 않는 행위로 “나는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힘써 기도합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도무지 하루를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일주일 내내 거의 기도 안하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참으로 회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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