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81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116-119문
문답내용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117문 :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까?
답 : 첫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며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18문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까?
답 : 우리의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것을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19문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강설날짜 2014-09-28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

기도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117문 :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까?
답 : 첫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며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118문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까?
답 : 우리의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것을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19문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무엇입니까?
답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난주까지 우리는 십계명에 대해서, 그리고 십계명이 우리의 성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결국 철저하고 엄격하게 십계명을 배우고 실천하는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과 무능력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구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고 배웠습니다. 이렇게 십계명과 기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바로 그 기도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1. 기도는 감사의 표현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소요리문답보다 기도에 대해서 균형 잡힌 내용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기도를 “은혜를 받는 방도”로 이야기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은혜와 성령을 받는 방도 일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서 은혜의 결과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기도가 감사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은혜를 먼저 받고,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아무 불신자가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직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감사의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은혜의 결과로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마디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기도를 하는데, 이렇게 기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명시적으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감사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도 감사입니다. 즉 근본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 바탕에 깔린 상태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은혜만 생각해도 감사로 충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구한 것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우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8)

그러므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참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분과 대화 나누고 교제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그 구하는 것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을 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고자 할 것이고, 그렇게 살고자할 때 자신에게 있는 영육간의 결핍을 채워달라고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결국 감사의 순종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내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내 필요를 구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를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쓰는 것은 기독교를 이방종교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구절만 딱 떼어서, “구하면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는가?”하며 자기 소원을 구하는 것은 완전히 말씀을 곡해해서 이해한 것입니다. 뭘 구해야 할지를 앞에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버전에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고(마 6:33,7:7-11), 누가복음 버전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9-13).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가지고서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 그리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돈에 대한 탐심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기도는 내 정욕을 위한 소원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한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2.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러면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공부하겠습니다.

116문 : 그리스도인에게 왜 기도가 필요합니까?
답 :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도가 왜 기도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는 앞서 배운 것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만 은혜와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오해하면 은혜와 성령은 인간의 소원이나 간구, 노력이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은혜와 성령이 사람의 간구나 노력, 애씀이 공로가 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모든 공로를 배제합니다. 구원과 은혜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물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구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구절과 같이 우리의 간절한 간구와 노력과 행위에 하나님께서 조건적으로 반응하신다는 말씀들도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6-8)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충돌되는 것 같은 두 가지 측면을 조화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주권 100%, 인간의 행위 100%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동급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이고 토대입니다. 인간의 책임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아름답게 복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그 은혜의 결과로서 인간의 행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오직 택하신 자만을 강권적으로 부르시고 그 사람의 귀를 열어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눈을 열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입기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은혜와 성령을 간절히 찾고 구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찾고 구할 때, 만나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왔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각색병자들, 귀신들린 자들, 세리와 창기들... 모두 각자 나름대로의 심각한 인생문제와 결핍을 가지고서, “예수님만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각오로 모든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분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심각한 인생문제를 주셔서 예수를 간절히 찾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신비롭게 조화되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이고 토대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때때로 극명하게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구하지 아니했는데도 친히 찾아가셔서 은혜를 주시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죠.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찾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찾아오셨는데도 그를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자기 불평이나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강권적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주권적으로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천국비유의 밭의 감추인 보화비유도 이런 맥락에 있습니다. 즉 사람이 보화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일하다가 우연히 보화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교회에 와서 말씀 듣다가 갑작스럽게 은혜가 쾅하고 임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처음 예수님 믿을 때 바로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신자에게도 이런 식으로 은혜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이런 식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를 인격으로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 취급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비유도 밭의 감추인 보화비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주비유가 있는 것입니다. 진주비유에서는 일평생 값진 진주를 찾아 헤매다가 그 진주를 만나매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은혜와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신자를 대하실 때 통상적으로 취하시는 원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갑작스럽게 임하는 은혜도 사실은 우리로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하나의 시발점으로서 은혜인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 성령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구할 때 주십니까? 첫째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 필요를 채워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긴밀한 인격적 사귐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을 우리도 이 세상에서 맛보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자식을 키워보면, 그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배고프면 울면서 젖 달라고 하고, 똥 싸면 찝찝하니깐 귀저기 갈아달라고 울고, 심심하면 옆에서 놀아달라고 웁니다.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틈만 나면 울고불고 하면 무언가를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그리고 요구할 때마다 부모는 자식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렇게 할 때 부모는 굉장히 힘들고 괴롭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행복감이 있는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빨고 있고, 엄마는 미소를 지으면 그 아기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만일 자식을 낳고 키우는데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자기 앞가림 다 하고, 모든 것을 부모 도움 없이 홀로 척척 해낸다면, 부모로서는 참 편하겠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자식 같지 않고 남 같고 사는 게 재미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엄마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부모는 그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렇게 부모와 아이 사이에 긴밀한 생명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온전히 의지하고, 모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여 그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것에는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간절히 구할 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그렇게 간절히 구할 때 은혜를 주셔야지만 우리가 감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보면 감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말이 좀 어렵습니다. 원문을 고려해서 전체 문맥에 맞게 다시 의역하면 이렇습니다. 

답 : “...신자가 간절히 탄식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그래서 신자는 그 응답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게 감사하는 신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배고픈 자에게는 맨밥도 꿀처럼 달콤합니다. 그러나 배부른 자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산해진미를 가져다줘도 별로 맛이 없습니다. 그리고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는 말처럼 간절히 구하지 않았는데도 은혜가 계속 주어지면, 우리는 그 은혜를 귀히 여기지도 않고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그 필요를 절실히 깨닫고 간절히 구할 때 주시면 우리는 그 은혜 귀한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구할 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과 그분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이런 은혜를 받는 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혁신학을 강조하면서 말씀을 중요시하는 반면 기도는 별로 터부시하는 경향이 늘 있어왔는데, 그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는 개인경건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꼭 보십시오. 기도에 관한 이보다 더 좋은 책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3. 진심으로 간절하게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함

그러면 어떻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성령을 주십니까?

답 : ...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와 성령을 오직 탄식하는 마음으로 쉬지 않고 구하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에게만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영어판으로 보면 “who with sincere desires continually ask them of him...”라고 되어 있는데, “with sincere”은 “진심으로, 전심으로”라는 뜻이고 “desires”는 “간절하게 바라며 구하다”라는 뜻이고 “continually”는 “지속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이 3가지 단어는 바로 기도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대충 이런저런 기도제목 나열하는 것은 사실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내면의 탄식으로부터 나오는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며칠 반짝 기도하고 그 이후로 안 하는 그런 지속적이지 못한 기도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잘 돌아보면 간절함과 탄식함도 없고, 또 기도가 지속적이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 간절함과 탄식함이 없다는 말은 마음이 부유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간절함과 탄식함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므로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후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결국 간절함과 탄식함은 자신에게 심각한 결핍이 있을 때, 그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상황에 있을 때에만 나오는 것입니다. 즉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배은망덕한 자이며 비참한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 그리고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며 멸망 길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때,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처절하게 깨달을 때 비로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탄식함이 일어나면서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이 부한 자는 간절함과 탄식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부하다는 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암매가운데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여 우리로 영혼의 싫증과 게으름에 빠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싫증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호감이나 애정, 관심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없어졌다기보다는 다른 데로 그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의 애정이나 관심사가 돈, 세상, 죄의 쾌락을 향해 있게 되어질 때 그 영혼은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 싫증을 느끼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 신령한 것들에 대해 반감 같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기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또 기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려고 해도, 영혼의 입맛이 이미 변해버렸기 때문에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하다가 그만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싫증에 빠진 자의 가장 뚜렷한 현상은 영적인 게으름입니다. 세상을 위해서는 정말 힘쓰고 애쓰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경건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말씀과 기도를 아예 내려놓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적 냉담함에서 벗어나 은혜를 받기 위해, 그래서 참되게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 육체의 게으름을 대적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으로 기도생활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도해서 은혜 받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오직 은혜 받은 자만이 할 수 있고, 은혜 받아 마음이 변화되어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또한 기도는 역으로 은혜 없는 자가 비로소 참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위해 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은혜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은혜를 받는 방도입니다.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두 가지 일을 하셔서 반드시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오게 하시는데, 첫 번째는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은혜를 갑자기 쏟아부어주셔서 우리 마음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이 그 첫 번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도 무시하고 살아간다면,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매로 우리를 징계하셔서 그 어려운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매 맞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또는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임하는 그런 은혜를 무조건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듣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의 자리로 지금당장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한 성도들은 말씀이 달고, 기도가 즐겁기 때문에, 말씀 읽고 기도에 힘쓰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일에 자원하여 힘씁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하고, 또 숨 쉬는 것이 자연스럽고 자동으로 됩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식욕도 없고 숨도 스스로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링거 꽂아서 억지로 영양을 공급해주어야 하고, 또 인공호흡기를 붙여서 억지로 숨 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병자는 그러한 인위적인 조치를 취하여 먼저 병을 치료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되면 그때는 자연스럽게 식욕이 회복되고 인공호흡기를 떼어도 스스로 숨 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생활과 말씀생활의 회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식어지고 오래도록 죄와 영적침체에 빠져있는 성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우선 억지로라도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자동차 시동 걸 때, 엔진을 보면 멈추어진 피스톤에 곧바로 기름 쏟아 붓고 스파크를 일으킨다고 시동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세루모터가 억지로 엔진을 돌려주면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 억지로 돌려주면서 동시에 불을 계속 붙여주다 보면, 얼어붙은 엔진이 서서히 따뜻해지면서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다음부터는 세루모터가 없이도 자동으로 잘 돌아가는 것이죠. 교회가 영적으로 지금 침체에 빠져 있는데, 가만히 자원해서 하도록 놔두면... 소위 은혜가 임한 자는 기도하게 된다라고 하면서 놔두면 성도들이 알아서 은혜 받고 알아서 기도합니까? 거의 그렇게 안합니다. 그냥 그대로 쭉 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가 약해서 늘 결심해도 작심삼일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이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치하지만) 교회가 여러 가지 방도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방도는 바로 다른 성도와 약속을 정해서 함께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는 수요모임이나 새벽기도 모임, 철야기도 모임을 갖는 것이 매우 좋은 것입니다. 개혁교회들 가운데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비판하면서 새벽기도 안하고 철야기도 안하는 것을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런 생각들이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오늘날 교회가 모여서 새벽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철야기도 할 때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새벽기도나 금식기도 철야기도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모르고 교리를 모르고 기도가 뭔지도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새벽기도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참된 개혁교회들, 칼빈부터 해서 청교도들도 새벽에 기도하고 밤에 기도했습니다. 아니 초대교회 때부터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사건이 나오는데, 거기 본문을 자세히 보면 3장 1절에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가다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도 아침점심저녁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매일 새벽과 밤에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는데(눅 22:39), 이것은 무슨 일을 하시다가도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기도하러 나가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도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시간을 정하여 함께 기도모임을 하는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새벽과 밤 외에는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혼자서하면 작심삼일이 되기 때문에 서로가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기도시간을 공적으로 정해서 새벽기도하고 철야기도 하는 것만큼 좋은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이 기도모임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에는 냉담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인내하면서 은혜를 기대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실질적으로 말씀과 기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서서히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죄와 세상의 것들로 온통 혼잡스러워져 있는 우리마음을 차분하게 정리해주시고, 하나님과 영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세상을 향해 있는 우리의 입맛을 고쳐주셔서 영적인 것에 대해 소원과 간절함을 갖게 하시며, 또 우리로 자신의 영적인 어두움을 더 밝히 깨닫도록 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여 우리로 간절함과 탄식 속에서 겸손하게 주님의 얼굴을 찾고 구하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함과 탄식 속에서 겸손하게 은혜를 부르짖어 구할 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신앙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간절히 탄식하며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은혜와 성령을 주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우리가 이 기도생활을 회복하여 참되게 은혜를 받아 우리의 신앙에 영적각성의 은혜가 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이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17문을 배워보겠습니다.

제117문 :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까?
답 : 첫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며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셋째, 비록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결국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데, 곧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해야 하고, 겸손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만 합니다. 각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해야 함.

답 : 첫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그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진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

기도는 성경이 계시하는 참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소원이나 빌어서는 안 되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뭘 기도해야 할지가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을 압축적으로 요약해서 아예 기도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입니다.

118문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을 구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셨습니까?
답 : 우리의 영혼과 몸에 필요한 모든 것들입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그것을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아무렇게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을 잘 배우고 또 말씀을 계속해서 바르게 배워가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 말씀에 무지하면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잘못된 기도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한 것입니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수 없고, 또 처음부터 주님의 뜻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점차로 배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사람이 한국으로 이민 오면, 한국에 왔다고 해서 곧바로 한국말을 술술 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말하는 족족 다 영어로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부터 한국말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다 옛날에 절간 다니고, 점집 다니고, 헛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어 교회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바른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기도를 합니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절간 다니던 식으로, 점집 다니던 식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이런 초신자의 무지와 연약함을 무조건 정죄하시고 물리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리고 말씀을 배워가면서 기도에 대해서 새롭게 배워가야만 합니다. 마치 완전히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기존의 기도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처음부터 새롭게 하나님께 어떻게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단번에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나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볼 때, 완전히 다 배우고 나서 비로소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말하고 연습해보고 하면서 자꾸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부터 완벽한 기도를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아니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기도하면서 평생 배워가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해고 연약해도... 신앙이 어려도 기도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옹알이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도 부모는 틀렸다고 하면서 말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꾸 거기에 응답해주면서 단어를 가르쳐주고 또 계속 말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말을 못하니 전혀 부모와 의사소통 할 수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표정으로 울음으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냥 우는 것, 그것도 의사표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려고할 때, 참으로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가슴이 차갑고 냉담하고 답답하고...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어떠한 느낌도 없고... 그저 무슨 말을 해도 허공에다가 외치는 것 같고...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연약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를 모를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십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과 함께 그냥 우는 것입니다. 그냥 성령님과 함께 고통을 느끼며 아파하며 탄식하십시오. 그것도 기도입니다. 꼭 무슨 말을 해야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계속 성령 안에서 탄식하다보면, 그리고 말씀을 배워 가다보면 조금씩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깨닫고, 기도의 말문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늘 내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서 이 탄식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높은 거룩의 경지에 이르렀어도 매일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거룩한 사람도 이제 겨우 성화의 한 발짝을 뗀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또한 겸손해야 합니다.

나. 겸손해야 함.

답 : ... 둘째 우리의 가난하고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아무것도 숨기지 말며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잘 설명해주셨습니다.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2)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바리새인은 사실 세리와 똑같은 죄인인데, 자기 속을 숨기고 겉을 포장해서 하나님 앞에 자랑했습니다. 세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숨김없이 인정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였습니다. 아니 인정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세리는 만인 앞에서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는 포장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참한 것이지만, 또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진리가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기 위해 일부러 죄지으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세리는 바리새인과 달리 겸손했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겸손은 예수님의 겸손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심은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이신데도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신, 하늘로부터 땅으로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겸손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 모습을 알고, 포장되어 있던 포장지를 벗겨내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겸손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바로 우리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 곧 죄인의 자리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지를 알고,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은 그저 티끌이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에 불과하며, 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부정한 죄인임을 깨달아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 그분 앞에 엎드려서 두렵고 떨림으로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이러한 겸손한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응답하십니다. 이런 기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 함.

세 번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답 : ... 셋째, 비록 우리는 무가치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금식하고, 철야하고, 울부짖고 자기 머리채를 지어 뜯고 옷을 찢으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내가 열심과 정성을 들이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이방종교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정죄하셨던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이 엘리야와 더불어 누가 참 신을 섬기는 것인지를 대결할 때 그들이 했던 기도방식입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울부짖고 자기 머리채를 지어 뜯고 옷을 찢으면서 자학하면서 했던 기도입니다. 이방종교의 기도가 다 그렇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반복해서 정성들여 많이 말하면 그렇게 안 할 때보다도 하나님이 더 내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만한 기도요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의 이방인의 기도를 심히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싫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했던 말 또 하는 사람 아닙니까?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억력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무지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기도이죠. 그리고 하나님을 마치 우리를 못마땅해 하시는 분으로...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하늘에서 팔짱끼고 나의 기도의 정성을 제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시고, 또 간절히 그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지고서 많은 시간 기도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고, 반복해서 하는 기도는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한번만 기도해도 다 들어주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또한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신 것은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을 금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는 기도를 금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음으로 마음에 있는 소원을 진실되게 아뢰야 하는데, 이때 한번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간절히 탄식하며 반복적으로 아룁니다. 왜 반복해야 합니까? 그것은 기도란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은 반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뜻을 꺾는 것이 매우 어렵고, 또 한 번 꺾었다고 다 꺽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똑같이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정성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분량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분의 공로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비참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시간을 기도에 사용해야 합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한다면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말씀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좋습니다. 성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도 사실은 매주해야합니다. 원칙적으로 은혜의 방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기도는 무조건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모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살인적인 하루일과를 수행하시고 나서, 밤늦도록 오랜 시간을 기도하셨고, 두 세 시간 정도 주무신 후에 새벽 일찍 일어나 또 오랜 시간을 기도하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매주 토요일 하루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전념했습니다. 참으로 영적 대각성은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자주 금식하며 온 하루를 기도하는데만 사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떨 때는 기도원 가서 하루 풀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에 힘써서 은혜와 성령을 날마다 충만히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5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문,128문,129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file 127-129문 최상범 1597
5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ile 126문 최상범 1271
5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0주(125문)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file 125문 최상범 1421
5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124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file 124문 최상범 1468
5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8주(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file 123문 최상범 1287
5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주(122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ile 122문 최상범 1631
5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1636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1813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1817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205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151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067
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1616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207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209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124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1928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473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643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09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