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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20-121문
문답내용 120문 :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셨습니까?
답 :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의 말문을 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께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에 기초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도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는 더더욱 우리의 믿음의 요구를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121문 : 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덧붙여졌습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4-10-0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121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요절 : 갈 4:6


120문 : 그리스도께서는 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명하셨습니까?
답 :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의 말문을 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께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에 기초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도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는 더더욱 우리의 믿음의 요구를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121문 : 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덧붙여졌습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대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야말로 기도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며,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하는지에 대한 궁극의 지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잘못된 내용과 잘못된 방식으로 기도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가 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아버지


우선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첫 머리말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먼저 누가 기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자격을 가르쳐줍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성령에 의해 부르짖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를 어떤 방법을 따라 열심히 노력하면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기도에 대한 접근방식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떼쓴다고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는데, 우리 안에 양자의 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양자의 영이 없으면 기도의 시작조차 불가능합니다.


“(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 양자의 영의 역사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기도는 은혜의 방도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서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내가 양자의 영을 받은 자인가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나오는 사람들 중에 양자의 영을 받지 못했는데도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41)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2)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1-42)


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완전히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됩니다. 마귀의 아들들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든지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하나님의 아들들인가요? 아닙니다. 교회 다녀도 마귀의 자식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얼마든지 착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내가 성령을 받은 자인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해 주시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증거의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양자의 영을 구해야 할 것이고, 만일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사랑이 있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한다면, 우리는 기도할 때 내 의지와 내 계획과 내 생각대로 기도를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님의 역사를 온전히 바라고 의지하면서,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불같이 뜨겁게 하시면서 성령님의 감화를 강하게 느끼는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기도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기도하게 되면서, 분명 기도는 내가 하는데, 마치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 오셔서 성령님 자신이 하고픈 기도를 내 안에서 실컷 하고 가시는 것 같은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령님의 감화가 있는 기도에는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위한 기도가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 기도를 통해서 성도는 주님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깨닫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주님과 교제하면서, 성령 안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 영적생명력의 활기,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감, 주님께 대한 사랑, 자기꺾임과 주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같은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할 때는 바로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갈망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간절히 바라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어린이아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가지고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생활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돌보시며 우리의 결핍을 안타까워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경외심과 신뢰 가운데 기도하십니까? 많은 경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치 딱딱하고 냉정한 신께 기도하듯이 기도합니다. 심지어는 냉정한 폭군에게 사정하듯이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다 불신앙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깨우쳐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신뢰를 갖도록 도와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온전히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은혜를 참으로 깨달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어린아이와 같이 경외심과 신뢰를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8)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10)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여기 보면 무조건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구할 때 토대가 되어야 하는 태도를 9절 이하에서 설명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육신의 부모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며 이제까지 우리를 얼마나 정성껏 양육해주셨습니까? 오직 자식 위해 일평생을 모두 소진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우리가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떡을 달라하는 자식에게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하는 자식에게 뱀을 줄 부모는 없습니다. 이 땅의 부모도 이처럼 자식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다 내어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그 부모의 사랑의 완전한 원형이신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실까요? 이 땅의 부모는 주고 싶어도 돈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자녀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안타까워하는 부모가 많은데, 온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식의 기도에 대해서 무엇인들 안 들어주시겠습니까? 독생자까지 주셨는데,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이것은 자녀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이것저것 막 달라고 해도,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만 선별해서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만의 특권입니다.


답 :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아버지여”하고 기도의 말문을 열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께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를 불러일으키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경외심과 신뢰에 기초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모도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는 더더욱 우리의 믿음의 요구를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의 죄만 바라보아서... 낙심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포기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아주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재판장으로 보게 만들고, 나의 죄를 크게 부각시켜서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모든 사상은 사단마귀로부터 온 계략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보여주신 자비와 긍휼의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동정하시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일곱 번만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거듭 용서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형편에 있을지라도 다음의 3가지를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1)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성도의 자기 인식.
2)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을 받는 대상이라는 사실.
3)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함.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기도생활 할 때, 이 3가지에 대해서 자꾸 의심이 듭니다. 왜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니께서 우리의 기도를 더더욱 거절하실 리가 없다”고 하는데, 실제로 기도해보면 자주 거절감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이 감화하셔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면 우리는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가 기도할 때 느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감, 하나님이 너무 멀리계신 것 같은 느낌, 영적인 메마름과 고통, 버려진 것과 같은 느낌에서 비롯되는 깊은 낙담, 황폐하고 메마르고 거친 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번민과 고통은 눈물겹도록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비록 우리를 심히 사랑하셔도 때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시기 위해 자신의 사랑스러운 낯을 가리우시는 그 연단의 과정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냉정하게 거절하시는 경우가 나타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비록 비유지만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서도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눅 18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거절하심이 예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일부러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전체로 볼 때 그렇게 거절하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일차적으로 우리 마음속에는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고, 또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징계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죄의 본성을 깊이 깨닫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죄를 미워하게 하기위해서...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죄에 대한 미움과 혐오, 후회를 일으키시기 위해서 자신의 낯을 가리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의 교만과 자기 의가 깨어지고, 가난한 마음이 되어 겸손하게 됩니다.
3) 우리로 주님을 뵙기를 더욱 간절히 찾고 사모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신약성도들의 이름은 새 이스라엘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겨루어 이긴 자를 의미합니다.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놓아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하나님을 이긴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그렇게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묵묵부답으로 차갑게 우리를 거절하실 때도, 그것이 다 우리를 미워하셔서, 우리가 싫어서, 우리를 버리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와 교만에 사로잡혀있는데도 기도하는 족족 은혜 충만하게 된다면 우리는 사탄마귀보다 배나 지옥자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히 사랑하시지만, 우리로 먼저 말씀 앞에서 책망을 받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잠시 동안 낯을 가리신채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자주 이런 영적인 황폐함을 경험했습니다.


“오후에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갔다. 그러나 매우 의기소침해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통해 내 영혼을 더욱 겸손케 하셨다. 내 안에 있는 사망의 몸을 보며 애통해 했다. 지극한 슬픔 속에서 울부짖었다.” (113)


그러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도리어 그러한 황폐한 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요즘 나를 짖누르는 모든 황폐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런 황폐함으로 인해 내가 더 겸손해지고 하나님께 모든 주권을 내어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128)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어두움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인내하며 경건의 의무를 힘쓰면서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17)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사 8:17)
“(34)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 8:34)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지만, 주님을 뵙지 못하고,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20)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21)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3)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25)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7)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8)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애 3:19-28)


기다릴 때 낙심하지 말고,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잠잠히 기다리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메우신 멍에를 달게 져야 합니다.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우리가 주님을 만나 뵙고 참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는 주님이 메우신 멍에를 온유와 겸손으로 메고서 인내해야 합니다. 온유는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원망불평하거나 경거망동하지 않고, 잠잠히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그 고통의 과정을 잠잠히 인내해야 하고, 또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마음은 우리를 향해 잠시 낯을 가리시고 계시지만, 결국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죄악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덮여진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고통스럽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지만, 주님이 언젠가는 약속하신대로 우리의 영혼에 유쾌한 날이 이르게 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인내하며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릴 때 하나님은 잠시 가렸던 낯을 다시금 우리를 향해 내보이시면서 우리에게 큰 은혜의 단비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이나 놀라운 은혜와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모양의 영적인 조급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서 오래도록 살다가, 갑자기 한 번에 이 문제를 해결 받아서, 모든 영적인 문제를 단번에 종식시키고,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갖는 신령한 세계로 단번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영적인 조급증을 갖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낙심하고 말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포자기 하면서 지금 당하고 있는 엄청난 영적인 고통과 번민을 잊기 위해서 도리어 죄의 낙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탕자가 먼 나라에서 방탕한 삶을 살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그때 단번에 아버지를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멀리 떠났던 만큼이나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과정이 탕자 자신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가면서 “혹시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시지 아니하면 어떡하나? 포기하고 먼나라로 다시 돌아갈까?” 그렇게 수없이 의심이 되고 고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의 마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끝까지 포기하기 않고 가게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생각할 때에 설사 아들로는 아니더라도 품꾼의 하나로는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나에게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고서 먼 나라를 돌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돌아왔을 때, 탕자가 본 것은 여태까지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본인이 그렇게 아버지를 보기 원했고, 본인이 아버지께 품꾼으로서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하면서 돌아가고자 했는데,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보기를 원하셨고, 내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만나기를 사모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주님은 우리를 간절히 사모하십니다.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우리를 사모한다는 말씀을 잊었느냐”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약 4:5). 우리는 우리를 향해 낯을 가리신 주님에 대해서 주님이 마치 나를 싫어하여 버린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전혀 그 반대입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잘 나옵니다.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20)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5-20)


우리의 상황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과 똑같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미지근한 신앙으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 내가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었는지 그 부끄러운 모습을 깊이 깨닫고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안약을 사서 바르고, 옷을 사서 입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주님의 책망의 음성 앞에서 징계를 받으면서 회개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동안 주님은 우리에게 낯을 가리십니다. 아니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거절한 채 문밖에 계시도록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이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 여는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결국 이 문 여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영적 황폐함 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온유와 겸손으로 멍에를 지면서 주님 만나기까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그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거절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거절했음을 알고, 더욱 겸손히 회개하면서 현재 낯을 가리시고 거절하시는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야 합니다. 더욱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책망을 받고 이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은혜의 장대비가 우리 마음속에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늘에 계신


이제 이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121문 : 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이 덧붙여졌습니까?
답 :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부터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의 하늘 권세를 땅의 권세와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며”라는 부분은 처음 읽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조금 의역이 필요한데, 영어판을 보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권세를 우리 육신의 아버지의 권세정도로 혼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물론 우리 육신의 부모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결국 땅에 속해 있고 이 땅에 붙어사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는 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위엄과 영광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그런 위엄의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육신의 부모에게 하듯이 “할 수 있거든 ~~해 주세요.”라는 식의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는 줄을 알고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우리는 담대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는 그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장차 유업으로 받을 것이니깐, 이 온 우주가 사실상 우리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고전 3:21-23).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토대 위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달라고 구할 때, 그 기도가 얼마나 대담하고 담대하며 스케일이 크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심을 믿고서 무엇이든 담대함과 확신가운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우리의


그리고 이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얼마든지 호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우리의 아버지’라고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내용 안에도 ‘우리’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냥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제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준 것처럼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제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굳이 ‘우리’라고 하는 1인칭 복수로 기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의 기도가 그저 개개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지체로서의 기도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몸 된 지체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어떻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이면 손대로, 또 발이면 발대로, “나에게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제가 발 역할을 잘해서(또는 손 역할을 잘해서) 몸 전체가 고르게 성장해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 중심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중심적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을 그 중심으로 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의 목적은 서로 그 기도하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이렇게 나 개인으로서 서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 된 개개의 지체들로서 서야 하는 것입니다. 지체의식을 가지고서 우리가 예배도 드리고 교제도 나누고 해야 하지만, 기도조차도 지체의식을 가지고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라는 말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고, 남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 된 지체로서 내가 주님께 잘 붙어 있어서 영양을 잘 공급받아서 그 지체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 역시 옳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바로 그러한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할 때는, 내 의식주 문제만 해결해주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 하나하나에게 이러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할 때도, 우리 개개인의 죄도 생각하지만, 교회 전체가 몸 된 공동체로서 마땅히 자라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교회 전체의 죄도 사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하는 기도도 나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교회 전체가 정신을 차려서 은혜위에 굳게 서고, 우리를 시험하는 사단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 서로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나 혼자 기도 열심히 해서, 나 혼자 영적으로 잘 되어보겠다는 것은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남이 안 되면, 나도 안 되는 것입니다. 발이 고장 나면, 손은 “너는 그렇냐? 나는 멀쩡하지롱~”하는 것이 아니라, 온 지체가 그 발로 인해서 다 괴롭고 슬픈 것입니다. 남이 힘들면 같이 힘들고, 남이 영적으로 시험에 들면 우리 모든 공동체가 영적으로 시름하고 그런 것이 바로 몸 된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때때로 위로와 권면으로 돕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체의식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셋째로 ‘우리’라는 말은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의 개인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로 함께 모였을 때, 우리는 합심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우리’라는 인칭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기도 하는 사람이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말씀하실 때는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으로 예배 때나 공적으로 모여서 함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공적인 예배를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누가복음판은 예수님의 기도의 원판에 가깝다고 본다면, 마태복음판은 예배의 기도로 합당하도록 짝을 맞추고 좀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표현도 하고, 또 송영도 첨가를 해놓은 것입니다. 이 점은 다음에 또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도 기도하고 다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와 신뢰감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나와 우리 교회와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영육간의 필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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