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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24문
문답내용 124문 :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유일하게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소명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강설날짜 2014-11-0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요절 : 마 5:48


124문 :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유일하게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소명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1.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주기도문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십계명처럼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앞에 3가지 청원은 하나님 사랑과 관련되어 있고, 뒤에 3가지 청원은 이웃사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앞의 3가지 청원은 하나님을 위한 간구이고, 나머지 3가지 청원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청원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뒤에 3가지 청원은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청원이 아닙니다. 아니 사실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청원 맞습니다. 그러나 근본 그 바탕에 깔린 정신은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습니까? 내일을 염려하면 남한테 베푸는데 인색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죄 용서함을 구합니까?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왜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기도합니까? 모든 시험과 유혹은 이웃사랑을 버리고 자기 사랑을 택하도록 하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자체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십계명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 청원까지 공부했는데, 공부하면서 드는 느낌이 꼭 제1계명 복습하는 기분이 들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은 우리의 첫 번째 관심과 소원과 열망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우리가 밤낮으로 울며불며 간구해야 할 내용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우리의 간구는 어떠합니까? 우리 마음에 그것에 대한 간절한 소원과 열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부터는 그것을 바라고 구하지도 않고, 아니 기도자체를 거의 안하고, 이따금씩 기도를 해도 자신의 소원성취도구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죄를 품고 살아간다는 증거이고, 내가 지금 우상숭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살펴보면서 “아~ 기도란 이런 것이구나... 내일부터 이렇게 기도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주기도문 앞에서 우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성령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기도문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정말 내 소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저번에 배웠던 것처럼 우리가 맨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간절하고 소원하고 열망하면서 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신앙이 어릴 때, 자기가 지금 직면해 있는 인생문제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아니 우리로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어려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셔서 우리를 참된 기도를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왔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처음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무슨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창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나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적으로 딱 고쳐주시고 나면, 그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이제 무엇을 깨닫게 되느냐 하면, 말씀 한 마디로 일평생 나를 괴롭혔던 이 불치병을 완전히 고쳐주시는 이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영안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병 나았다는 사실은 이제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제 뭐가 중요합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가?” 하는 예수님과 그분의 뜻 자체에 이제 모든 관심이 몰두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루 종일 물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기뻐하면서 “우와 대박~! 예수님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물고기 못 잡을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계속 그렇게 갑니까? 아닙니다. 물고기를 잡은 다음에는 베드로의 영안이 열려서 지금 물고기가 배안에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이제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내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받았을 때, 그는 즉시로 배와 고기를 버려두고 주님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때 감사하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 안하면서 살았는데, 그것 때문에라도 기도하게 하셔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문제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참되게 만났다면, 이제는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여전히 배와 고기를 붙잡고 그것만을 위해 기도하면 곤란합니다. 만일 주님 만났는데도 계속 이 세상의 인생문제 해결해달라는 기도로 일관한다면, (오늘날 순복음교회가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주님을 안 만났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만나면 마음이 변화되어지고, 그리하여 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자신이 불쌍해서 자기 연민 때문에 울고, 그 다음에는 자신의 죄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울고, 그 다음에는 예수 믿지 않는 저 형제 때문에 운다.” 이렇게 신앙이 성장하면서 자꾸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생문제 때문에 울고불고 기도하지만, 그러나 은혜 받으면 이제는 자기 죄 때문에 울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에 웁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면,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의 영광이 이 땅에서 짓밟히는 것 때문에 울고, 교회 때문에 울고, 형제자매 때문에 울고,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가족과 친척, 친구들 때문에 울며불며 구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인생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문제가 없어서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인생문제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그 문제가 주된 관심사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3)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25)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26)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고후 11:23-29)


사도바울은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자 할 때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인생문제는 바로 교회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이란 내가 당면한 인생문제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보다도 교회를 위한 염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짓밟히고 있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의 영광이 내 모든 것이 될 때에만이, 그리고 그분의 나라로 온 세상이 통일되는 것이 내 궁극적인 소원이 될 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에 힘써서 은혜를 받아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기도가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하나님의 뜻과 내 뜻


그런 은혜를 받아야 이제 배울 내용이 의미가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일차적으로 내 뜻을 죽여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내 육체의 소원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난 신자라도 일향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게 아닌 것입니다. 신자 안에는 여전히 부패한 육신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는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체의 욕망을 꺾어야지만...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를 져야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 자체가 바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행위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십시오.


124문 : 셋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유일하게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소명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나를 죽여주십시오. 내 뜻을 죽여주십시오”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 기도에 예수님이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십자가 안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지는 것이었습니다. 참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배웠는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혼란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죄를 지을 것인가 죄를 안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안 져도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십자가는 죄인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의로우시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안 져도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면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민은 죄 지을 것이냐 아니냐의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한 행복을 포기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서 저주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연합한 행복을 계속 누릴 것이냐의 고민이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온전히 연합해서 서로 심히 사랑의 관계를 누리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게 되면 그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지는 것이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원’은 ‘뜻’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십자가 지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은 예수님의 고민하고는 완전히 다른 고민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이 세상에서 내 행복과 안녕과 성공과 명예를 위해 살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 것이냐?” 하는 고민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늘 무엇을 택하고 싶어 합니까? 전자를 택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가운데 전자를 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육체는 너무 세상에서의 행복을 선택하고 싶은데, 이것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자기 뜻을 접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죠. “내 힘으로 날 죽일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날 죽여주십시오. 내 뜻을 꺾어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하늘과 땅


그런데 이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그냥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게 하신 이유는 두 가지 측면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소요리문답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주로 이 두 가지 측면 중 한 가지 측면만을 다룹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합니다. 성경이 하늘이라고 했을 때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고 판단되어지는데, 하나는 완성이라는 개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완전이라는 개념입니다.


가. 묵시의 세계 속에서의 완성


먼저 완성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도록 하실 때 산에서 보여주신 식양대로 짓도록 명하셨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2)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3)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4)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5)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 8:1-5)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모세가 이 땅에 지은 성막은 하늘의 성막을 본 따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하늘성전이 본체이고, 지상의 성전은 그것의 모형이요 형상입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은 바로 그러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하늘의 하나님은 본체이고 지상의 사람은 그 하나님의 모형이요 형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은 원형, 그리고 땅은 모형이라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상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을 본 따서 만들어졌는데 문제는 그 하늘성전의 본체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땅에서 모세가 성막을 만들 때 예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그리스도를 성전삼아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완전하고 완성된 본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본체를 따라서 이 시공간의 땅에 성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묵시의 세계 속에 있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속사의 경륜을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저번 여름수련회 때 목사님을 통해서 배운 내용입니다(사경회 게시판의 “2012년 여름수련회 특강-묵시의 세계와 역사의 세계”를 참조).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 성령에 이끌려서 하늘로 가서 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 세상 끝에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그는 보았습니다. 참 성전, 참 예루살렘, 교회의 완성,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즉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본 사도 요한은 이제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 천상세계의 완전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늘은 천상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완전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 하늘과 땅은 짝지어져서 자주 사용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하늘과 땅은 일단 창세기문맥에서 보았을 때, 공간과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곧 물리적인 땅과 물리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계시가 점차로 진행되면서 땅과 하늘에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물리적인 땅이나 하늘이 아니라, 땅은 사람이 거하는 곳으로...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계시되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기도했고, 기도할 때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신구약성경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천상세계를 의미하고, 땅은 온 우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원 또는 천당이라고 불리는 천상세계는 바로 하나님과 천사가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을 입고 거기 계시며, 거기에는 또 이미 죽은 성도들의 영, 곧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금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를 창조하셨느니라”라고 재해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틀릴 수도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천상세계는 이 지상세계와 동시에 창조된 것입니다. 즉 천사들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함께 동시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 전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천상세계와 천사가 그때 비로소 창조되었다고 보는 이유는 천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공간의 제약은 우리보다 덜 받지만...).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이 창세기 1장 1절에서 비로소 있게 되었다면, 천상세계와 천사들의 존재도 그 때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상세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죄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단 마귀가 왜 거기서 쫓겨났습니까? 하늘은 그 어떠한 죄나 어두움도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어두움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상천하지의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온전히 흠 없는 천사들이 그 성삼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을 찬양하며 예배합니다. 그리고 죽은 성도들의 영혼, 곧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 거기서 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합니다. 바로 하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런 완전무결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완전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고 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명하시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한다든지 대적한다든지 불순종한다든지 하는 것이 일체 없고, 천사든,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이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은 다릅니다. 사단 마귀가 내려와서 다스리고 있고,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성도라고 하는 우리도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자 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이 너무나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그대로 놔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도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결국 “땅에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마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을 온전히 죽여주셔서 우리로 하늘에 있는 천사처럼 당신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답 : ... “우리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유일하게 선하신 주님의 뜻에 불평 없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과 소명을 하늘의 천사들처럼 즐거이 그리고 충성스럽게 수행하게 하옵소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순복합니까? 지체 없이 즉시로 온전히 절대적으로 순종합니다. 불평하는 마음이나 억지로 하는 마음이 있을 리가 없고, 오히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원함으로 즐거이 순종합니다. 땅에 있는 우리도 하늘이 천사들처럼 그렇게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우리가 그렇게 순종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는 자주 “천사들아 찬양하라...”라고 천사에게 명령합니다. 이 표현이 사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본인이 하나님 찬양하고 싶으면 “하나님 찬양합니다.” 그렇게 표현하면 되지, 왜 “천사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렇게 말합니까? 이것은 우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과 그분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는 신앙고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바다야 찬양하라... 해와 달과 별들과 모든 호흡 있는 자들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모든 피조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아 찬양하라”라고 표현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천사들의 온전한 찬양을 자신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싶다는 소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죠. 바꾸어 말하면, 자신은 육신을 입고 있어서 천사들처럼 온전한 찬양을 드릴 수가 없으니깐, “나도 천사처럼 저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했으면”하는 아쉬움을 담아서 “천사들아 찬양하라”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천사처럼 순종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보다 더 뛰어난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천사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 아버지처럼, 그리고 우리의 참 모범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온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여기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괜히 “하늘에 계신”이라는 단어를 붙여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땅에 있는 우리도 온전하게 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다”라는 기도와 완전히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의미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천사와 같이, 아버지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온전히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순종하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우리는 너무 죄를 많이 짓고 살아서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너무나 높은 도덕적인 이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할 때 적당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순종한다는 각오로 순종하면 안 됩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천사처럼 어떠한 불순한 동기나 주저함이 없이, 어떠한 원망이나 불평 없이, 자원함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신속하게 하나님의 뜻에 퍼펙트하게 순종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양태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이나 습관을 고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마음에서부터 어떠한 죄된 마음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는 각오로 살고, 내 마음이 죄된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더러워질 때에는 그것 때문에 미쳐 날뛰면서 고통스러워 할 만큼, 거의 죄에 대해서 편집증적인 자세로, 그리고 노이로제 걸릴 만큼 죄에 대한 결벽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똥을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까? 똥 누고 나서 뒤를 닦을 때, 손에 똥 찌꺼기가 조금이라도 묻을까 노심초사하며 많은 휴지를 손에 감아서 조심스럽게 닦습니까? 그리고 똥이 조금이라도 손에 묻었을 때는 온갖 인상을 지어가며 고통스러워하면서 그 즉시로 손을 씻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똥이 아니라 똥 냄새만 맡아도 매우 불쾌해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우리가 죄를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했던 대제사장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대제사장에게는 가장 엄격한 정결규례와 법도가 적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심지어 가족이 죽어도 그 장례식에 갈 수 없었습니다(레 21:10이하). 시체나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자기도 부정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모든 부정에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부정 타지 않기 위해 늘 노심초사하면서 주의 깊게 살피며 살아야 했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부지중에 저지른 허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지나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손으로 땅을 짚다가 부정한 곤충의 사체에 접촉하게 되었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부정하게 된 것이며, 이 부정을 속죄하기 위해 그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하나님께 속죄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수송아지면, 오늘날 차 한 대 가격입니다. 한번 부정해질 때마다 차 한대씩 날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큰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이 하루하루를 얼마나 피곤하게 살았을 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앉으나 서나 잘 때나 생활할 때나 언제나 “하나님께 성결” 이 하나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제사장보다 더 높은 거룩의 경지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전 가까이에 나아갔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죄를 안 짓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모든 악하고 더러운 마음도 허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마음에서부터 모든 죄와 부정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마음의 죄는 둘째 치고라도 우리가 행동으로 죄 짓는 것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은 율법의 때요 신약은 은혜의 때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면서, 너무 쉽게 죄에 무너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일 대제사장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단 하나의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니, 아예 마음속에 단 하나의 악한 생각이라도 품을 때마다 소 한 마리씩 바치도록 했다면, 우리가 잠시 스쳐지나가는 악한 마음에 대해서도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며 그것과 철저하게 싸우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구약과 같이 그런 조항이 없으니깐 우리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편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 마음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그 죄 된 마음 하나 때문에 소 한 마리 정도가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스쳐지나가는 악한 생각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고, 정말 그러한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 대적하면서 눈물겹도록 처절하게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보다도 더 치밀하게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죄와 싸우며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기까지 우리는 쉬지 말고 울며불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어떠한 손해와 핍박과 박해가 있어도 주와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대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적당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달려들든지, 아리면 신앙 없이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목숨 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을 갱신시켜주셔서 우리에게 천사처럼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받은 직분과 소명을 따라 죽도록 충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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