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134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126문
문답내용 126문 :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강설날짜 2014-11-1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요절 : 마 18:24-35


126문 :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1.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의 중요성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이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결국 주기도문의 문맥에서 볼 때 다른 기도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먼저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와 일종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육신 곧 몸의 생존을 위한 기도라면,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생존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 몸이 밥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은 죄 사함의 은혜 없이는 한 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결국 영원한 저주와 사망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만, 사실상 우리의 주된 관심은 영혼을 위한 공급을 구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게 있다 하더라도 죄 사함의 은혜가 없다면, 다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갖다 주어도 그는 그 음식에서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일용할 양식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안녕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안녕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죄용서의 기도는 앞선 기도의 내용대로 기도하고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고 또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심과 죄악된 본성이 그렇게 살기를 거부하고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참된 신자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어도 신자는 수시로 많은 실수와 죄를 범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며 죄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꼭 나쁜 짓 할 때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마다 항상 죄 용서를 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 지고자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행실에는 죄의 찌꺼기와 얼룩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신자의 자기 인식은 죽을 때까지 지속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나는 이제 회개할 것이 없다.”라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특별한 죄, 또는 큰 죄를 범했을 때만 상하고 통회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참된 신자가 갖는 전형적인 특징이요,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의 구조와 틀 자체가 상하고 통회하는 정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가 점점 줄어들고, 성숙해지면, 이러한 정서가 점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지고 더 깊어지고 날카로워집니다. 반대로 참된 성도라도 영적인 안일과 나태함 가운데 죄를 많이 짓게 되면, 오히려 그 죄가 그 사람을 영적으로 어둡게 하여 스스로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한 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없이 기도하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회개의 마음 없이 기도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항상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날마다 자신의 죄 용서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신자가 마음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1)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2)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죄가 무서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지고 단절되게 만듭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때때로 죄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재판장으로서 진노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것은 아닙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 참조). 그러나 죄와 함께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속성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 부모로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참된 신자라 할지라도 죄를 품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모든 죄를 용서받아서 다시금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늘 죄가 있고 또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죄도 많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자백하고 회개했다 하더라도 미쳐 우리가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렇게 치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과 교제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우리는 죄 용서를 구한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죄 용서는 구체적인 몇 가지 잘못에 대한 반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은 죄들에 대해 일일이 값을 치루는 것이 죄 용서가 아닙니다.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죄의 몇 가지 이파리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오히려 죄의 뿌리인 우리의 죄악된 본성에 더욱 초점을 둡니다.


답 : “...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러므로 참된 죄 용서의 기도란 바로 마음과 말과 행실로 범한 죄과와 더불어 그러한 죄들을 잉태한 자신 안에 있는 전적 타락한 본성을 부여잡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울며불며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주님을 심히 아프시게 해드렸음을 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또 내가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를 위해서 죽어주신 그리스도의 공로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을 믿고 안식하는 것이 바로 참된 죄 용서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깨달은 만큼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공로 밑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설사 깨닫지 못해서 회개하지 못한 죄들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다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겪게 되는 가장 큰 고통과 고난은 바로 죄에 시달리는 영혼의 고통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고통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고, 그래서 빨리 육신을 벗어서 주님의 품으로 가고 싶은 것이 우리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죄 때문에 주님과의 관계가 틀어져서 영적인 곤고와 메마름 속에서 수일을 눈물로 보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은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신 그 칭의의 은혜를 우리는 날마다의 죄용서의 기도를 통해서만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회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만 사죄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죄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도 용서하지 않으심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단순히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기도는 형제의 죄를 용서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하는 토대위에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거든 우리의 죄도 용서해주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점을 강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내용을 말씀하신 후에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이러한 강조점은 마태복음 18장의 일만달란트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1만 달란트면 얼마정도 되느냐 하면, 학자들마다 말하는 것이 달라서 정확하게 집계할 수는 없는데, 1달란트가 약 6000데나리온 정도 되고, 1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깐, 1달란트는 약 16년 정도 일한 연봉에 해당되고, 1만달란트면 약 16만년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해서 번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을 때 해당되는 돈입니다. 이것은 연봉 3000만원으로 계산하고 쉬는 날까지 포함하면 5조는 족히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이것은 정말 딱 5조 가량의 액수라는 말보다는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액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종이 어떻게 하다가 1만 달란트나 빚졌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종이 임금에게 엄청난 빚을 졌다는 것과 그것을 당장 갚아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여기 보면 그 빚을 탕감해주는 근거와 원인이 나옵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은 그 종이 빚을 갚을 수 없고 결국 처자식 다 팔리고 감옥에 갇혀 평생 값을 치루어야 하는 상황을 보시고서,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주었죠.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여기서 백 데나리온이면, 100일 일한 품삯이니깐 분명 작은 돈은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500~700만원 정도 됩니다. 우리는 10만원 20만원만 돈 빌려놓고 안 갚으면 화가 나고 원망도 하는데, 500-700만원이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붙잡아다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고, 그러다 안 되니깐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임금에게 가서 이 일을 고했더니 임금이 대노해서 이 종을 다시 데려다가 옥에 가두는 것으로 이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용서의 은혜는 모든 경제 논리를 뒤엎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제관계는 공의와 정의입니다. 사람이 빚을 지면,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형성되고, 각자에게 권리와 의무가 지어집니다. 채권자는 이자를 요구할 권리, 계약에 명시된 기한에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채무자는 이자를 주고, 기한 내에 모든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경제 원리요, 정의의 원칙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빚지는 것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빚잔치해서 실컷 고생한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빚지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빚지면 그리고 그것을 안 갚으면 그 빚은 그 사람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고 종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다 갚을 때까지... 호리(500원)라도 남김없이 다 갚기 전까지 결단코 그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돈에 대해서 사람들이 철저합니다. 친척 간에도 형제간에도 돈 문제에 있어서 칼입니다. 형제간에 빚잔치해서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믿는 사람들끼리도 사랑의 빚 외에는 빚지지 말라고 사도바울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 원칙의 그 근본이 상실되는 일이 지금 본문의 비유에서 일어납니다. 작은 액수도 아니고 1만 달란트 빚진 자를 값없이 은혜로 탕감해준 것입니다. 그 나라 임금이 그렇게 해버리면, 그 나라의 경제 활동의 정의가 다 무효화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이렇게 해버리면, 이 일만달란트 빚진 종 말고도 임금한테 빚진 사람들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도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임금한테 와서 빚 탕감해달라고 애원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임금은 그 빚을 다 탕감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이 그렇게 다 탕감해주면, 이제 그 사회는 빚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또 빚 갚으라고 독촉하지도 않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상황을 악용해서 돈 벌기 위해 일부러 돈을 빌려다가 안 갚고 하는 것은 교묘하게 남의 것을 빼앗는 범죄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놓고 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형편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렸을 때는 이제 더 이상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빚 갚으라고 독촉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요? 5조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았기 때문에, 그 5조라는 금액에 의해서 500만원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500만원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만, 그러나 5조라는 금액 앞에 서게 되면 그냥 무시할 수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큰 금액이라 이해가 쉽지 않다면,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내가 10억 빚져서 하루하루 정말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누가 나를 불쌍히 여겨서 그 10억을 대신 갚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길 가다가 저번에 100원 빌린 사람 만나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깟 100원...” 아닙니까? 그래서 이 임금의 일만달란트를 탕감해주는 행동이 그 사회로 하여금 빌려 주면서도 갚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사회가 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의 모든 경제활동의 근본원리가 정의나 공의가 아닌 은혜와 관용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빚을 빌려주고 또 갚고 하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의무와 책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입혀드린 피해가 일만달란트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서 심판받아야 할 만큼의 심각한 죄를 하나님께 지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일만달란트 빚졌다는 것을 인식하십니까?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한지를 인식하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많이 어두워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기도 가운데 성령의 빛 비취심을 받아서 우리가 일생동안 지은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심각한 것들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슨 큰 죄를 지어야만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를 지었구나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잠시 우리 마음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지옥형벌로 멸해야만 하는 가증한 죄악인 것입니다. 죄 된 마음 하나도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만큼 무한한 죄인데, 우리는 거의 매일 수십만 번의 악한 생각을 하고, 거기에다가 말과 행실로 옮겨진 수많은 죄과들이 우리 앞에 셀 수 없이 산적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무한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못 박혀 죽지 않고서는 도무지 갚아질 수 없는 그런 일만달란트의 빚을 우리가 하나님께 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비참한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영원한 지옥으로도 갚지 못할 내 많고 많은 죄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탕감이 아니라 대납입니다. 자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가 받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이제 자신이 더 이상 형제의 죄를 물을 수 없는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주님께 지은 죄를 생각할 때, 그리고 용서받았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형제의 죄에 대해서 “그깟 100원쯤이야...”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저 사람에게 있는 티쯤이야...” 무시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 형제가 나에게 끼친 피해가 작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형제로부터 말 못할 고통과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 그 형제의 잘못은 그야말로 무시할 수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세상의 정의의 원리를 완전히 깨트려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잘못하면 반드시 죄를 묻고 배상해야 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 바로 세상의 원리입니다. 피해를 입었으면 그 사람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그리고 복수심으로 불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 근본원리가 무력화 되었습니다. 피해를 받았는데도 피해의식이 없습니다. 상처를 받았는데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그 사람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되어서 그 사람을 만나면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답 :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여기 보는 것처럼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상처를 받고 피해를 받았는데도 피해의식이나 복수심이 없다는 것은 바로 내가 주님께 얼마나 심각한 죄를 범한 죄인인가... 그리고 주님이 나의 이런 심각한 죄를 어떠한 사랑으로 용서해주셨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믿고 의지한 것의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참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입었다면 기본적으로 형제의 과실에 대하여 토죄하지 아니하는 심상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 피해의식으로 눈물짓고 밤낮으로 그 형제를 미워하고 그 형제에 대한 쓴뿌리를 갖고서 그 형제에 대해 복수하겠다는 독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은 무엇의 반증입니까?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주님이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로 용서해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믿고 의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무지와 불신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외식이죠. 하나님이 그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천부께서도 그렇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 형제를 용서해야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제로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기 죄를 모르고 주님의 사랑을 모르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알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아니 그냥 자동으로 용서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죄를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자신이 일만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 앞에서 기도 가운데 성령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우리 죄를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3. 우리가 죄 용서 받는 근거는 우리의 용서의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공로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조건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용서의 행위가 공로가 되어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우리가 죄 사함 받는 것의 원인과 근거와 공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증거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유일한 근거와 공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한편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더 없이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답 :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증적으로 확신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성례의 표와 인으로 증명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러나 앞의 두 가지보다 더 노골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바로) 우리로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품고 섬기며 사랑하게 살도록 하심으로써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거짓일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들도 체험하고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진실되게 사랑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형제를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해서 안심하거나 자기 구원을 확신해서는 안 되고, 형제를 참되게 사랑하기까지 나는 여전히 사망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형제를 참되게 사랑하게 되기까지 말씀과 기도와 경건의 의무를 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사랑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율법주의로 오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의 은혜의 결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되게 구원받았어도 사랑하지 못하는 일이 때때로 신자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요한일서 말씀을 읽으면 신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려야 합니다. 그것은 그 신자의 영적인 안일함과 나태함을 찔러 흔들어서 그 신자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일단 경고를 받고 나서,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해 형제를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길을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먼저 주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깨닫고 다시금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먼저 입니다. 일에는 항상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다음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4. 제자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


이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사건입니다(요 13장).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함께 하시면서 그 식사 중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사실 발 씻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온 방에 발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서로 씻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들 자기가 잘 낫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인데도 성령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기적이고 연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참으로 거듭났다 하더라도 성령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성령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곧 제자들의 왕이요 주요 창조주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먼저 섬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세상의 섬김의 원리를 완전히 바꾸어놓으시는 사건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섬김을 받고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이 섬김으로 말미암아 높은 자는 낮은 자를 섬기고 낮은 자는 높은 자로부터 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제자들은 서로를 섬겨야 하는 당위성에 놓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3-15)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먼저 주님께 어떤 섬김을 받았는지를 깨닫고 주님의 섬김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섬김을 받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형제를 섬길 수 없고, 또 섬길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섬겨주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이 왜 오셨다고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오 왕이시지만, 사람들의 종이 되어 사람들을 섬기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섬김이 무슨 섬김이냐 하면, 바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종이 물로 주인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듯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섬김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은망덕을 회개하고 다시금 이 섬김의 은혜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이 배은망덕한 죄인을 더럽다고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며(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됩니다) 섬겨주시는 그 섬김을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형제의 발을 씻어주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요 선생이지만 이렇게 너희의 종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주었다. 너희도 나를 본받아서 서로의 종이 되어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이것은 먼저 “이제 너희의 신분은 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피로 한번 목욕한 사람은 이제 그 사람의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자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제 자유인이 아니고 종이요 하인입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하인이고, 또 옆의 형제들의 종이요 하인이 되었습니다. 종이면, 이제 자기 자존심 체면 살리지 않습니다. 종이면, 이제 저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내가 허드렛일을 하고, 저 형제의 마음이 편하고 기쁠 수 있도록 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옆에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섬김은 바로 저 형제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형제의 허물과 단점 때문에 내가 괴롭고 힘들지만, 그것을 묵묵히 감당해주고, 또 용서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섬김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우리도 성령받기 전의 제자들과 같이 서로 자기를 높이고 서로 경쟁하며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다투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교회 안에 발 냄새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왔으면 교회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하는데, 썩은 내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섬김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종이요 하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이 최고이고, 제일 중요하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돌이켜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을 깨닫고, 내가 종이라는 것을 알고,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서, 그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서로 발을 씻어주면서 서로 섬기며 살아가는 주의 성도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죄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면서 확신과 담대함으로 신앙생활 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5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문,128문,129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file 127-129문 최상범 1708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ile 126문 최상범 1341
5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0주(125문)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file 125문 최상범 1494
5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124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file 124문 최상범 1568
5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8주(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file 123문 최상범 1360
5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주(122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ile 122문 최상범 1693
5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1711
5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1913
5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1892
5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287
4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228
4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146
4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1673
4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281
4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276
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235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1993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549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822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174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