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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127-129문
문답내용 127문 :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128문 :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무리합니까? 또한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129문 :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아멘”이라는 말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더욱 확실히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강설날짜 2014-11-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129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요절 : 고전 10:11-13


127문 :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128문 :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무리합니까? 또한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129문 :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아멘”이라는 말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더욱 확실히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1. 여섯째 간구


127문 : 여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가. 시험, 유혹


일반적으로 시험이라고 번역된 단어의 헬라어 원어인 ‘페이라스모스(페이라조 동사의 명사형)’는 그 단어 자체가 두 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는 검증과 연단과 성숙을 위한 선의적인 시험, 곧 test이고, 두 번째는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temptation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선의적 test가 따로 있고, 죄를 짓도록 하는 사단 마귀의 temptation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은 항상 하나인데, 그 하나의 시험을 두고서 하나님과 사단 마귀의 의도가 다를 뿐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선악과 금령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test하기 위해서 만드신 선의적 시험입니다. 과연 아담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에 준행하는지 아니하는지 보시기 위해서 test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test하실 때 쉬운 문제로 test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문제로 test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나무에 바퀴벌레 같은 열매를 걸어놓고 먹지 말라고 하신다면, 절대로 그것은 test가 아닙니다. test는 어려워야 합니다. 굉장히 맛있어 보이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를 걸어놓고서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맛있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것을 먹지 않을 때, 그것이 아담 부부의 신앙을 입증하는 도구가 되어 아담 부부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더욱 담대함과 확신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는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마귀는 그 동일한 선악과 금령을 가지고서 아담 부부를 temptation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이렇게 test와 temptation이 동일한 하나의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사건도 동일한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어려운 문제로 test하심으로써 그의 신앙을 검증하여, 그로 하여금 더욱 확고한 신앙의 반석위에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순종하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 이삭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들은 우리가 수없이 찾을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하신 것입니다(출 15:25, 16:4).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16)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광야에서 여러 가지 고생과 어려움을 주신 것은 곧 그들을 시험하여 마침내 복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단 마귀는 이스라엘이 직면하는 그 동일한 시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순종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과 동침하자고 유혹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테스트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사단 마귀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창가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스럽기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밧세바의 알몸을 보도록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테스트 하고자 하신 것이요, 또한 사단 마귀는 그 동일한 밧세바로 다윗을 유혹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험에는 언제나 test와 temptation 두 가지 측면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시험 앞에서 믿음으로 순종하여 test에 통과하기도 하고, 또는 연약하여 temptation에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결과가 있든 시험은 반드시 여러 가지의 유익을 주는데, 첫 번째는 그 시험을 통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입증하고 검증하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참된 성도에게 시험이 오면, 그 시험은 일단 그 성도의 믿음을 뿌리 채 흔드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됩니다. 잠재되어 있던 믿음은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진가를 발휘하여 본격적으로 믿음이 실제로 움직이고 작용하여 자신의 살아있는 능력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 하여금 그 어려움 앞에서 넘어지지 않고 인내하고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신자의 믿음이 살아있는 진짜 믿음임이 시험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신 믿음의 불은 사단 마귀가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 불이 더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심으신 믿음의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성도는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시험을 치면, 그 시험을 준비하고 치르는 과정에서 굉장히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힘들지만, 그러나 시험을 치고 나면 실력이 아주 급격히 느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시험을 통해서 그 신앙이 아주 급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그 신앙을 입증하여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공공연히 인정받고 상급을 받습니다. 물론 시험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이미 그 성도 안에 있는 믿음이 진실된 믿음임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고 싶으신 것,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드러내고 싶으신 것은 그저 잠재되어 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생명력과 그 생명력이 만들어낸 인내라고 하는 열매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보게 되기를 원하시고 또 이 세상에 드러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참되다고 칭찬하시고 인정하시며 영생의 면류관의 상급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말을 행함으로 상급 받는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고 상급 받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인내의 열매에도 다 죄의 찌꺼기가 섞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온전치 못한 순종을 갖다가 상급을 받는 공로로 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급을 받고나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의 면류관을 다시 벗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상급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의로운 행위를 나타냈다고 칭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해 믿음의 살아있는 증거가 나타나서 하나님 앞에서 공공연히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 여러모로 우리 편에서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야고보서가 잘 보여줍니다.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여기서의 “여러 가지 시험”이 무엇이냐에 대해 학자들마다의 견해가 다 다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시험이 temptation이 아니라 test라고 주장하면서, 성도가 당하는 여러 가지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시험은 test이고 13절의 ‘시험’은 temptation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별로 타당성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시험이 test와 temptation 두 가지를 동시에 포함하는 하나의 시험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 고난을 만날 때,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삶 속에서 강력한 유혹을 직면할 때도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 모든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삶 속에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고 유혹을 받을 때, 우리의 믿음이 인내를 만들어 내어 우리의 믿음의 살아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에, 시험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을 보면...


“(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시험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성도에게 말할 수 없는 유익을 줍니다. 성도는 결국 이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 시험을 인내로 통과함으로써 하나님께 공공연히 옳다 인정함을 받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시험을 통과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 개혁포럼-바울과 야고보의 칭의개념 참조). 그래서 이렇게 시험이 성도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근실히 자기 성도들을 시험하십니다.


그리고 시험은 교회적으로도 큰 유익이 되는데, 그 이유는 이 시험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가 분명하게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즉 시험을 통해서 참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는 그 시험을 참지 못하고 실패하여 시험에 들어 나가떨어지기 때문에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이 더욱 보전되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핍박이라는 시험이 교회를 덮치게 될 때, 교회를 급속히 세속화시켰던 명목상의 신자들이 나가 떨어짐으로써 역으로 교회는 더욱 신앙이 뜨거워지고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그야말로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대학교가 수능시험을 통해서 학생들의 실력을 평가하여 실력이 나쁜 학생들은 탈락시키고, 좋은 학생들만 합격시키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시험을 통해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가려내어 알곡은 들이고, 가라지는 내어버리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시험에는 또 다른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거듭난 신자라도 시험에서 넘어질 수 있는데, 그때 그 실패로 성도는 많은 고통을 당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것이 오히려 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죄와 부패성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서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는 데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에 빠져서 소위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다음부터 조심하고 경계하게 되는 예방의 효과까지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참된 성도를 다시금 일으켜주시고 그 신앙을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 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성도들에게 늘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합격할 때까지 시험하십니다. 그러니깐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도는 시험에 결국에는 통과할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시험은 참된 성도에게 무조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욥의 경우에 잘 나타납니다. 특히 욥의 경우는 사단 마귀의 유혹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과 사단 마귀와 대등한 입장에서 test하고 temptation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 마귀는 욥을 시험하고자 하였지만, 자기 임의로 성도를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사단 마귀는 성도들을 자기 임의로 털끝하나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사단 마귀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욥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욥을 시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욥을 시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이 시험을 통해서 욥의 신앙을 입증하고 또 그를 연단하며 그의 신앙을 성숙시키고자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 마귀가 욥의 재물, 가족, 건강을 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욕하고 자살하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내까지 동원하며 유혹합니다. 그러나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욥의 신앙이 이 시험을 통해 증명되고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욥이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어떻게 보면 욥이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연단하셔서 하나님을 귀로만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그리고 더욱 자기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으로 성숙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비슷한 예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 부인하는 사건에서도 나타납니다(눅 22:31-34).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극구 부인하고, 자신은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범죄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여기서 “밀 까부르듯 하려고”라는 말은 ‘밀을 체질하다’는 말인데, 알곡은 남기고 쭉정이는 제거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사단 마귀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베드로가 참으로 알곡이 맞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가 알곡인지 아닌지 시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청구)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알곡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자기 의로 충만하고 또 예수님을 이용해 한 자리 차지하려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고, 또 베드로가 이 시험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님은 그 사단마귀의 요청을 허락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그러한 실패의 경험이 꼭 필요함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러한 실패의 경험으로 가룟 유다처럼 완전히 나가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미리 그 결과를 일러주신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 할 텐데,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으니, 너는 회개하여 돌이켜 든든하게 서라. 그리고 너같이 연약한 자들을 도와 굳게 세우는 자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수준에서 우리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을 주십니다. 만일 사단 마귀가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시험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당하게 되면, (시험 당한다는 말은 시험 앞에서 범죄하여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넘어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고, 또 우리로 회개케 하시고, 또 그 실패가 도리어 우리에게 약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당할 즈음에 시험에 망하지 않도록 살 길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시험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로 유익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전적으로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해서 “그러면 참된 성도는 시험에 넘어져도 어쨌든 유익을 얻으니까, 그러면 굳이 시험에 맞서 싸우며 이기려고 하지 않아도 되겠네”하는 안일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도가 유혹에 넘어가 불순종하여 시험에 넘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 있게 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였을 때, 그의 인생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징계를 받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죄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보십시오.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1-12)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심판을 열거하면서 이 모든 기록들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들어 죄 짓는 것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방심하면 안 됩니다. 선줄로 생각해서... 그래서 베드로처럼 나는 시험당해도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죄와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죄를 전혀 안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넘어졌을 때,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나도 이제 심판 받겠구나” 라며 절망에 빠져 가룟유다처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다음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러니깐 이제까지 한 말, 곧 성도가 시험에 빠져도 하나님이 건져내시고 또 그 실패조차도 유익이 되게 하신다는 말은 절망에 빠진 성도를 위로하고 회개케 하기 위한 말씀이지, 죄 짓는 것을 조장하거나 합리화하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참된 성도는 때때로 실수하기는 하지만, 그 실수를 끝까지 계속적으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는 그렇게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나중에 회복되고 나서도 또 실패했습니까? 아닙니다. 나중에 성령강림 이후에 똑같은 시험이 그에게 주어지는데, 공회에 잡혀서 순교의 위협을 받을 때 베드로는 목숨까지 내어놓음으로써 그 시험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한 후에 변화되어서 나중에 수넴 여자 아비삭을 침대에 넣어주어도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만일 동일한 시험에 계속해서 넘어지는 자는 자신의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의심해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언젠가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험에 빠졌을 때, 하나님 핑계대면 안 됩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여기서 “시험을 받는다”는 동사는 시험을 당한다, 또는 시험에 빠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사단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었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이 나를 걸고넘어지게 하시려고 이 걸림돌을 나에게 주셨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이 시험이 주어졌지만, 자신이 그 시험에 넘어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괜히 선악과 두셔서 우리가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다.” 야고보서는 그런 말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여기서는 언급되지는 않지만, 한 가지를 더 언급하면, 사단 마귀 핑계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김기동 파의 오류가 무엇입니까? 뭐든지 귀신 탓하는 것입니다. 질병도 귀신 탓이요, 여러 가지 어려움도 귀신 탓이요, 죄 짓는 것도 귀신 탓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생각은 안 하고, 맨날 “귀신아 물러가라”만 외칩니다. 아닙니다. 죄 짓는 것이 물론 마귀가 유혹한 것이 원인이기는 하지만, 결국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죄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고 죄짓도록 하기 위해 시험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6-17)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로 성숙케 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내를 온전히 구비하여 결국엔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선의적으로 시험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붙잡아주셔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이 시험을 능히 이기고 인내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시험에 빠졌을 때는 자기 죄를 회개하면서 자신을 그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기도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나. 성령님의 은혜로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음


먼저 우리는 이 기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 뒤에 나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 용서해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기도에 이어서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해달라고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 지을 각오로 살면서 죄 용서를 구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죄 용서를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시험에 빠져 다시 그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 짓고 안 짓고 하는 문제가 우리의 의지와 결단, 정신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는 오직 성령님의 은혜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죄를 짓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아...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내가 정말 의지가 약하구나...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라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자신을 자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큰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텐데, 네 의지를 강하게 먹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니거든요. 도리어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네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 짓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한 교만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죄 짓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짓거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은혜 없으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 놀라고 당황하고 실망하십니까? 그것은 나에게서 뭔가를 기대했다는 말인데, 그러나 우리가 우리 육체에게서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의 최후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육신은 죽을 때까지 죄악된 육신입니다. 은혜 없으면 그래서 이 육신이 발동하면 사도바울이라도 대책 없습니다. 그것을 누군들 막을 수 있겠습니까?


“(16)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이제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넓은 들에서 먹임 같이 저희를 먹이시겠느냐”(호 4:16)
“(24)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 암나귀가 그 성욕이 동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성욕의 때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자들이 수고치 아니하고 그것의 달에 만나리라”(렘 2:24)


은혜 없는 상태에서 육신이 발동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날마다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핵심은 형식적으로 이 기도의 내용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했고, 또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답 :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게 되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면서 주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짓고 용서를 구하고 또 죄짓고 용서를 구하고...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영혼은 더욱 피폐해져가고 지쳐가게 되는 것이죠. 많은 경우 우리의 신앙이 성령받기 전의 베드로의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호언장담했다가 범죄하고 그리고 펑펑 울고... 또 호언장담하고 범죄하고 또 펑펑 울고... 똑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물론 그렇게 반복적으로 죄를 지어도 참되게 참회하면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치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가 반복되면, 자신에 대한 패배의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벼룩도 낯짝이 있지 이번이 50번째인데.... 또 용서를 구하는 거 진짜 면목 없어서 못하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자포자기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단이 원했던 것이죠. “그렇지... 네가 이제 더 이상 구할 수가 없겠지... 네가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또 용서해달라고 구할 수가 있겠냐?” 물론 우리가 이런 사단 마귀의 음성에 넘어가면 안 되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이러한 모든 신앙의 양태는 자기 힘으로도 죄를 안 짓고 살 수 있다는 무지와 교만에서 오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까지 간절히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하는 것이 없는 영적인 게으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마 26:41).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되겠습니다. 경건의 의무에 올인 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을 때까지 경건의 의무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령님을 의존하는 것이 사단 마귀의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눅 4:1-2)


예수님께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함을 입어 성령님을 의존하셔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28)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도 성령님을 의존하여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며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도 귀신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귀신과 싸우실 때 성령님을 온전히 의존하셨는데, 하물며 비참한 피조물인 우리야 얼마나 더 성령님을 의존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매일 기도 안하고 은혜 없이도 잘 살아가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성령충만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답 :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


그러면 우리가 구해야 하는 성령충만의 은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영적 카타르시스에 들어가서 샬라샬라 하는 것이 성령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말씀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깨닫고, 자기 깨어짐 가운데 그리스도를 나의 주요 왕으로 자신의 마음 중심에 모시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성령충만함을 받게 될 때 있게 되는 놀라운 변화는 첫째로 우리 마음의 입맛과 기호가 변화되어 죄를 심히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며 성령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변화로부터 경건의 능력과 영적인 권세, 곧 영권이 나타나게 됩니다. 먼저 경건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죄를 이길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권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담대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에 영적인 권세가 있어서 사람들이 듣고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러한 은혜를 사모하고 이러한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이러한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다. 영적전쟁


그러면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시겠습니다.


답 :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우리는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사오며,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친히 붙드시고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에 대해 항상 굳세게 대항하게 하시옵소서”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는 철천지원수가 있고, 우리가 지금 그 원수와의 처절한 영적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에서 시험은 곧 사단 마귀의 공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에서 구하옵소서”에서 ‘악’은 원어로 보면 “악한 자”라는 뜻으로서 사단 마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죄를 지어 사단 마귀의 포로가 되었을 때, 자신을 그 포로 됨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두 전쟁용어인 것입니다. 그냥 죄 짓고 회개하고 착하게 사는 차원의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 기도는 생명을 걸고 하는 처절한 영적전쟁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신앙생활이 영적전쟁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신앙생활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영적으로 철이 안 들었기 때문입니다. 철이 없는 아이들은 전쟁터에서도 노는 것 인줄 압니다. 그래서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아이들은 줄넘기하고 공기놀이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적으로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이 냉혹한 현실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여 우리의 영적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전쟁터라는 사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도 전쟁입니다. 목회자는 어찌하든지 성령을 힘입어서 한 말씀이라도 성도들의 마음에 심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사단 마귀는 어찌하든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해서 한 말씀도 심겨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사람 마음속에 본성적으로 불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싶고, 헐렁하고 느슨하게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런 마음을 자꾸 자극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자꾸 졸음이 오게 하고, 목사님의 허물이 자꾸 생각나서 목사님의 말씀을 못 듣게 하고, 딴 생각이 자꾸 나고... 말씀을 듣고 믿지 못하도록 우리를 혼미케 하려는 세력이 지금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좋은 말씀 듣자고 이 자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예배 가운데서도 지금 치열하게 전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서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매순간이 영적전쟁입니다. 사단마귀는 쉴 세 없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답 :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육신은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나이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정말 사단 마귀는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불구대천이라는 말은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반드시 복수해서 죽여 없애야 하는 원수”를 뜻하는 한자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영적전쟁의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주적이 누구이며, 그 주적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고, 그 주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전쟁하고자 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군대에서 우리나라의 주적이 누구냐 물어보면 “미국”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히려 북한은 우리의 동족이요 협력의 대상이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그렇게 잘못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우리나라의 안보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적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런 병사들 이끌고 훈련시키고 무장시킨들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도리어 전쟁나면 우리를 배신하고 북한과 손잡고 아군을 공격할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때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세상과 벗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원수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적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신이 지금 전쟁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자신이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통하고 참담한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지금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우리를 쉼없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합니까? 사단 마귀는 바벨론이라고 하는 세상의 구조를 가지고서 우리를 공격하고, 또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을 이용하여 공격합니다(요 15:19; 계 17:1-6; 마 16:24; 롬 8:7). 그래서 우리의 주적은 마귀, 세상, 육신의 삼위일체입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 육신의 게으름, 세상의 여건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말씀 읽고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안 그래도 우리 육신은 기도하는 것이 싫은데, 세상 여건이 또 기도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기도하러 나오십시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여건이 안 되어서요...” 그렇게 말하는데, 여건이 안 되면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전쟁입니다. 우리의 환경은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우리가 쉽게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직장생활, 학교생활이 우리를 말씀과 기도에 힘쓸 수 있도록 친절하게 배려해주는 경우 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세상의 즐거움과 재미, 쾌락이 끊임없이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TV, 인터넷, 스마트폰, 음란한 대중문화...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현실을 우리 눈앞에 자꾸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말씀을 좇지 않고, 돈을 좇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고 비판하고, 반발하고, 핍박하게 만들어서 복음전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 세상의 모든 구조는 죄를 안 지을 레야 안 지을 수 없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그런 세상이 싫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바로 나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이 정말 심각하고도 어려운 전쟁입니다. 때문에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1)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두루 다닌다는 말은 굉장히 부지런하다는 말입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리고 우는 사자와 같다는 것은 지금 사단 마귀가 굉장히 분노해 있다는 것(계 12:12)과 굉장히 강하며 잔인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달콤한 미끼로 유혹하지만, 일단 미끼를 물면 난폭한 폭군처럼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무식하게 힘세고 부지런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지략과 전략으로 공격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게 그리고 가장 교묘하게 속여서 공격합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의 체질과 욕망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듭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약점이 있지 않습니까? 사단은 바로 이 약점을 공략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즐비한 맛있는 밥상으로 유혹합니다. 사단은 한 번도 우리가 싫어하는 반찬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패한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한번 패하면 다음번에는 일곱 귀신을 데려와서 우리를 장악하려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치밀하게 철저하고 그리고 끈질기고 강력하게 공략해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공격에 영적인 안일과 게으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감각합니다. 살면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데 정말 중요한 것, 곧 우리의 철천지원수인 사단 마귀가 우리를 죄로 어떻게 유혹하고, 그 죄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또 우리를 어떻게 사망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집을 송두리째 태우기 위해 은밀하게 타고 있는 불에 무관심한 것과 같습니다. 죄 죽임에 무관심하고 영적인 것에 무지한 것이 멸망에 빠지는 지름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사단 마귀가 지금도 우리를 어떻게 교묘하게 속이며 유혹하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늘 깨어 경계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4-36)


참으로 주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시도 죄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기를 위해 날마다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공부 힘쓰고 기도에 힘써서 성령충만 받는 길 외에는 다른 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한다는 것은 무장한 군인이 밤새도록 보초서는 것을 말합니다. 한 시도 방심하지 않고 늘 정신을 차려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대처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에 힘써서 늘 긴장감 속에서 굳세게 사단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대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송영


128문 : 당신은 이 기도를 어떻게 마무리합니까? 또한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간구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이 모든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기를 원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마치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 좋은 기도냐 나쁜 기도냐가 판별됩니다. 한숨으로 시작해서 한숨으로 끝나는 기도는 빵점짜리 기도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기도는 한숨으로 시작했다가도 나중에는 찬송으로 끝납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도 죄에 빠진 상태에서 구해달라는 처절한 기도로 끝나지 않고, 그 뒤에 “대개(마지막으로 요약하자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하고 마칩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끝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는 그 마지막이 송영으로 끝나야 합니다. 왜요? 현실은 우리가 자주 죄에 시달리고 시험에 빠지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 온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통일하시고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만이 높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미리보고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근심으로 시작해서 찬송과 감사와 감격으로 끝나야 합니다.


3. 확신으로 끝나는 기도


129문 :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아멘”이라는 말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더욱 확실히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우리의 기도가 확신으로 마쳐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아멘을 기도의 마침표정도로 생각하고 습관처럼 할 것이 아니라, 기도의 내용에 확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 확신이 없고 의심이 든다면, 그것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기도의 의미를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가 무엇인지 깨달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고 또 응답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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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300
4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6-37주(99문,100문,101문,102문) - 제3계명 file 99-102문 최상범 2037
4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5주(96문,97문,98문) - 제2계명 file 96-98문 최상범 2617
4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4주(91문,92문,93문,94문,95문) - 율법과 제1계명 file 91-95문 최상범 2927
4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3주Ⅱ(88문,89문,90문,91문) - 그리스도인의 회개의 삶 file 88-91문 최상범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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