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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62-63문
문답내용 62문 :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전적으로 완전해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면에서 일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도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63문 : 이 세상에서 또한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선한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입니까?
답 : 이 상은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4-03-1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Ⅰ(62-63문)


성경적인 성화론


요절 : 요 15:5


62문 :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전적으로 완전해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면에서 일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도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63문 : 이 세상에서 또한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선한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입니까?
답 : 이 상은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배운 것처럼 이신칭의 복음은 우리의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입니다. 칭의의 은혜란 우리가 모든 계명을 어겼고, 단 하나의 계명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으며, 지금도 모든 악으로 향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음을 양심이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받을 만하지 않는데도,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자처럼, 그리고 온전히 순종한 자처럼 의로운 자로 여겨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대접해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기쁨과 사랑을 받는 자녀로 용납되어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이러한 은혜의 사실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늘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2-4)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순종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순종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여기서 “교훈의 본”은 “디다케”라는 단어인데, ‘교리’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이미 규격화된 교리의 양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 이신칭의 교리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순종이지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즉 내 마음이 이 교리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하는 것이 바로 참된 믿음입니다. 지식적인 동의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은 오직 은혜 받은 자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 이신칭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이제 날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날마다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립니다. 그 마음에 감사가 넘치게 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며 주의 영광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은혜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강건하여져서 비로소 성화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칭의와 성화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칭의는 성화를 유발하고, 성화는 칭의의 증거입니다. 그런데 로마가톨릭은 바로 이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보는 오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칭의라고 하지 않고 ‘의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화된 것은 하늘의 법정에서 그저 의롭다고 칭한 법정적 선언(legal fiction)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삭제와 더불어 실질적인 하나님의 의로움이 우리 내면에 주입되어 우리가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는 구절들이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음에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우리는 거듭나고 예수님을 믿어서 죄인에서 의인이라는 우리의 신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성화가 곧바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거듭남의 체험 그 자체가 죄의 권세를 깨트리고 죄를 아주 죽여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 방탕 가운데 살던 사람도 복음을 듣고 회심하면 곧바로 거룩하고 의롭게 변화됩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은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의 이 주장은 그럴 듯하지만, 그러나 치명적인 오류입니다. 첫 번째로 성경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단어가 성경전체에서 법정의 상황에서 쓰이는 법정적인 용어라는 것을 로마가톨릭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죄에는 두 가지 측면, 곧 죄책과 오염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로마가톨릭이 혼동하고 말았습니다.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 구절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고, 그 동일한 원리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죄로 삼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셨다는 말이지, 우리의 오염을 짊어지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와 부패가 예수님 마음 안으로 주입되어서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죄가 없으십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은 다만 우리의 죄의 책임을 짊어지셔서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동일한 원리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의롭다는 하나님의 법률적인 판단이 우리에게 미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의화로 보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더욱이 로마가톨릭의 이러한 주장이 참으로 치명적인 오류인 이유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데서부터 저주받을 행위구원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믿음으로 의화를 시작한 신자는 끊임없이 의화의 공덕을 쌓음으로써 최종적인 칭의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믿음과 더불어 행함이 있어야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최종적인 구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의화의 삶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신자는 죽을 때가지 절대로 구원의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행함이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강조하는 구절들이 있고, 예수를 믿어도 끝까지 신실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경고의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마 6:4,6,18; 마 7:21-27; 마 10:38-39; 마 13:44; 마 21:43; 롬 8:13; 고전 6:9-10; 고전 9:24-27; 고전 15:58; 갈 5:19-21; 갈 6:7; 엡 5:5-7; 딤후 2:5-6; 히 2:1~3; 히 3:7~4:1; 히 5:11~6:8; 히 10:26~31; 히12:25~29; 약 2:24; 계 2:7; 계 2:23-26; 계 3:5 외 다수...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아니’라고 하는 긴장관계 속에서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감으로써 궁극적인 완성에 이르러야 하는 과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구원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고, 현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고, 또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최종적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천로역정도 바로 구원이 순례의 여정임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이 중도에 잘못되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룩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가지고서 순례의 여정을 진행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챤에게 그런 두려운 마음만 있습니까? 골고다 언덕에서 크리스챤이 죄의 짐을 풀어버렸을 때, 그에게 언약의 문서가 주어졌습니다. 언약의 문서는 구원의 확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다는 거룩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이 역설이지만 신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잘못되면 망할 수 있다는 경고는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게으름과 안일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으려는 죄악된 본성, 곧 육체의 방종을 끊임없이 찔러서 우리로 정신 차리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의 동기를 이야기 할 때 세 가지를 다 말해야 합니다. 첫째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땅히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우리가 그분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원함으로 순종합니다. 셋째로 끝까지 신실하게 신앙의 경주를 해 나아가지 않으면 도리어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날마다 정신을 차려 회개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합니다.


성경의 경고는 단순히 우리에게 겁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위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심각한 경고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 택하신 사람은 절대로 타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전의 선택이기 때문에 성도의 견인교리는 견고합니다. 그리고 신자는 그것을 알기에 구원의 확신 가운데 감사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또한 타락의 가능성이 자신에게 열려있음을 인식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우리로 더욱 성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성도의 견인교리는 진공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역동적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의 행위구원론은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가 최종적인 칭의 선언을 받기 위한 공덕이요 공로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을 보십시오.


62문 :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전혀 의가 될 수 없는 것입니까?
답 :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전적으로 완전해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면에서 일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하는 가장 고귀한 행위도 모두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어떤 용어를 해석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으로, 또는 철학적인 개념으로 곧바로 적용하여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같은 단어라도 성경의 용례와 일반적인 용어의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단어가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행’은 도덕적인 선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행을 하는데 불신자들이 우리보고 악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다 쳐서 멸하라고 하셨으면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육을 행하는 것이 선행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은 아주 악한 학살로 보이겠지만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세상을 향해 죄를 책망하고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악하다고 욕하면서 우리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행의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다 죄라고 말했습니다(롬 14:23). 따라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행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빛나는 악’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행동만이 참된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의 기준을 우리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부모님한테 효도 선물을 할 때에도 부모님이 맘에 들어 하는 선물을 사드려야지 자기생각에 좋은 것으로 사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좋은 것이라고 해서 부모님께 드렸는데, 부모님이 그 선물을 싫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서운해 하고,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상처받는 것입니다. 근데 이러한 일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자기는 열심히 하나님께 봉사했고 선행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속상해 하시고, 우리는 우리대로 서운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선행을 행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는 온전한 의이고, 율법의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행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났어도 불가능합니다. 죽을 때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늘에 피해 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온전히 순종하셨다는 그 공로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가지는 이제 나무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생명력과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서 비로소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행할 때, 하나님은 불완전한 우리의 순종을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서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는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다른 말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믿음으로 행하면, 그 모든 행함이 하나님 보실 때 ‘선행’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그렇게 살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에 복종하기보다도 자신이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행위의 주도권을 지고 뭔가를 해서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선행’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만족의 틀로 이해합니다. 내 행실이 나의 기준에 부합했을 때, 스스로 만족스러워합니다. “이정도로 많은 것을 했으니깐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야” 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다 자기만족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암만 열심히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절대적으로 완벽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선행을 행해도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가 않습니다. 왜요? 우리는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구제할 때도 그 마음에 뭐가 있습니까? 은연중에 뭔가 자기 의가 있고, 다른 사람 구제하면서 그 사람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사심 없다고 하면서 내심 “내가 이렇게 했으니깐 너 나한테 감사해야해... 이정도면 내 말 좀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면서 그 사람한테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또는 구제를 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100% 순수한 마음으로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선행에도 회개가 필요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 옷 입어 행하지 아니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고 선한 행실이 나타나야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선한 행실이 구원을 받기 위한 공덕이 되어서, 그러한 공덕을 많이 쌓으면 연옥에 갈 필요 없이 곧바로 천국에 직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엄청나게 많이 쌓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자의 공덕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허무는 것으로서, 유일한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데서 떼어내려고 하는 저주받을 사단마귀의 복음입니다. 로마가톨릭은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기준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행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선행은 반드시 늘 십자가의 은혜와 관련을 맺어야 합니다. 은혜 빼고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려야 합니다. 내 의지와 내 방법과 내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그의 회심이야기를 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구원을 열망하며 철저하고 엄격하고 열성적으로 경건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하고 금식하고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묵상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는 그러한 종교적인 의무를 아무리 잘 행해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의무들로 하나님께 칭찬 받기를 은밀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깨어 달려간다면 곧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더 많이 더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때때로 마음이 녹아내리고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나올 때는 자신이 천국을 향해 선한 발걸음을 한 걸음 더 옮겨 놓았다고 스스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나만큼 감동을 받으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종교적 의무나 행위를 더 많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시기가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애쓰면 하나님이 응당 나에게 은혜를 주셔야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이 다 자기만족이요, 자기사랑에 기초한 이기심에서 나온 자기숭배이며 하나님께 대한 악한 조롱이었음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어느 날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거의 6년 동안을 엄격하게 경건의 생활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한 적이 없었음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자신의 의지와 힘과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과 경건한 모습들과 선행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려고 하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으려고 하는... 그래서 자신이 뭔가 경건을 쌓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자기중심성이 깨트려진 후에야 이신칭의 교리를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그 회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선행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선행인 이유는 성령을 의지하고 은혜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회심한 후에라도 신자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관점으로 보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보십니다.


얼마 전에 제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발표회가 있어서 갔습니다. 제 딸이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했는데, 이제 5살밖에 안 된 아이가 무슨 춤이나 노래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막 열심히 하는데 모든 게 엉망인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잘했다고 박수 치고 오히려 기뻐서 웃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기쁘게 해보겠다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애쓰는 그 모습이 부모가 볼 때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끝나고 잘했다고 저의 딸에게 꽃다발을 주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도 거기 있는 아이들 중에 제 딸이 제일 잘 한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떤 아이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꽃다발을 못 받았을까요? 잘 한 아이는 비싼 꽃다발 받고 못한 아이는 그냥 꽃한송이 줍니까? 아니요. 똑같이 다 받았습니다. 왜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3문을 보십시오.


63문 : 이 세상에서 또한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선한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없는 것입니까?
답 : 이 상은 우리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자가 주를 위해 애쓰며 살고 선행을 행할 때 하나님이 상으로 갚아주십니다. 사도바울은 말했습니다.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하나님은 정말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주와 복음을 위해 애쓰고 수고한 신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으로 보상해주십니다. 순례의 여정을 끝까지 완주했을 때, 수고했다고 면류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면류관을 얻기 위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10에 보면...


“(10)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신구약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로서 곧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자신이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벗어서 다시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자신이 지었던 수많은 죄들을 생각할 때,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그마한 선행 하나도 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맺은 열매이기 때문에,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찬양하면서,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던져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의 사도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 세상에 사도바울보다 선행의 열매를 많이 맺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러한 많은 선행들이 다 은혜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은 성화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줍니다. 오직 은혜 받은 자만이 주를 위해 애쓰며 선행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행의 열매를 맺은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선행이 공로가 되거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행하는 것, 그리고 성화되는 것은 결코 주님과 내가 협력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바울에게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에 있어서도 바울은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성화 역시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것이 교회사 속에서 끊임없이 논쟁이 되어 왔던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성화는 하나님과 우리가 협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예전에 ‘게으름’ 강의를 할 때 영적추수의 원리를 말씀드렸었는데, 참으로 그렇습니다. 성화란 농사짓는 것과 비슷해서, 영적추수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내버려두고 방치해버리면 거기서 죄의 잡초가 무성해지고 경건의 돌담이 무너지고 결국 그 영혼의 밭이 황폐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밭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결국 불사름을 당하게 됩니다(히 6:7-8). 즉 우리가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으로 거두는 것입니다(갈 6:7-8). 그러나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경건생활을 하고, 말씀과 기도와 성례에 집착하여서 은혜를 받고, 성령을 의지하여 죄와 싸우고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히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 밭에서는 아름다운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그 열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성이 어떻게 보면 로마가톨릭이나 알미니안이 말하는 “협력주의(synergism)”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해와 비를 주시고 또 결국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편에서는 또 열심히 물주고 심고 잡초를 뽑고 해야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의 협력 작품으로 보입니다. 물론 본인이 심는 대로 거두고, 힘쓰고 애쓰는 만큼 성화되는 영적 추수의 원리는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안에서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결국 이 영적 추수의 조건성도 하나님의 주권에 아름답게 복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협력이 아닙니다. 성화도 주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이루어 가시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창조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홀로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십시오.


성화에 대한 로마가톨릭의 입장.jpg



이 그림은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 모든 수도원 영성신학의 성화론의 입장입니다. 금욕과 고행과 자신을 힘껏 쏟아 붓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안 됩니다. 로마가톨릭도 하나님의 은총의 절대적인 면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개념입니다. 인간의 동의와 헌신과 노력과 애씀에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총이 협력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협력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사상이 잠재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즉 은총이란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통해서 가질 수 있거나 얻어지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음의 행위와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충분히 긍휼히 여길 만한 공로나 업적을 쌓아야만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그 은총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편 알미니안은 행위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결국 믿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결국 로마가톨릭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틀린 생각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서 경고했던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래 그림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화에 대한 개혁신학적인 입장.jpg


이것이 성경적인 성화론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 더욱 힘쓰고 애쓰고 수고하고 부지런히 사역하고, 또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 까 두려워서 날마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고, 순종하려고 몸부림치고, 눈물겹도록 투쟁하면서 살았던 모든 행위들이 사도바울 본인이 행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자유의지와 놀랍도록 신비롭게 조화되셔서 일하시고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알기 때문에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기 위해서 오늘의 요절 말씀을 보십시오.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싹 조금 나다가 말라비틀어집니다. 그러나 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가지입니까? 아닙니다. 열매의 출처는 뿌리이고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지를 통과해서 가지가 열매를 맺기 때문에 가지의 행위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면 나무는 진액을 잘 주는 역할만 하고, 가지는 그 진액을 가지고 잘 사용해서 열매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고, 각각 독립해서 각자의 역할을 하여서 합작하는 그런 협력의 관계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나무와 가지가 붙어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못한데서 나온 오류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맨 처음의 그림처럼) 하나님과 독립된 개체로서 협력하여 열매를 맺고 싶어합니다. 왜요? 그렇게 해야 자랑할 것이 있으니까요. 사람의 종교성과도 그것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여 열매를 맺지만, 그 열매를 만드는 모든 수고와 노력까지도, 심지어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할 수 있는 생명도 나무로부터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는 절대로 성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독립된 자아는 죽었고 우리는 주님의 일부요 주의 몸 된 지체로서 ‘교회아’로 살아갑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 2:20).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말씀과 기도에 힘쓰자...” 그렇게 스스로 결단할 때에도 그것이 사실은 성령님이 주신 소원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게으를 때 책망도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그래서 그 말씀 듣고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다시 회개할 마음을 주십니다. 또 절망할 때마다 성령님께서 감화 감동 하셔서 일으켜주시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결단하고 힘쓸 수 있도록 은혜를 다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은혜인 것이고, 나에게서 좋은 것, 선한 것이 나왔다면 그것이 다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나에게서 안 좋은 것, 나쁜 것이 나왔으면 다 누구 탓입니까? 다 내 탓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선행은 공로나 자랑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주의 은혜만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내가 열심히 경건을 쌓아서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안주실 수 없을 만큼의 공로로 제시하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만임을 알고 그러한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주의 몸된 지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값없이 주시는 이신칭의 교리에 우리의 마음이 복종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들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많이 수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만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런 성화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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