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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72-74문
문답내용 72문 : 그렇다면 물에 의한 외적인 씻음 자체가 죄를 씻음이 되는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73문 :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고 하셨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몸의 더러움이 물에 의해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며, 또한 이 신적 맹세와 증표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가 영적으로 참으로 씻겨진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였고, 또한 어른들 못지 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언약의 표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고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구약에서는 할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신약에서는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강설날짜 2014-04-1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72-74문)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

 

요절 : 창 17:10-14

 

72문 : 그렇다면 물에 의한 외적인 씻음 자체가 죄를 씻음이 되는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73문 :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고 하셨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몸의 더러움이 물에 의해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며, 또한 이 신적 맹세와 증표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가 영적으로 참으로 씻겨진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였고, 또한 어른들 못지 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언약의 표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고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구약에서는 할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신약에서는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1. 세례의 요소와 내적인 은혜와의 관계

 

72문 : 그렇다면 물에 의한 외적인 씻음 자체가 죄를 씻음이 되는 것입니까?
답 :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님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72문은 로마가톨릭의 성찬론을 비판하는 문답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세례 자체가 죄 씻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즉 로마가톨릭 신조를 지적으로 동의하고 세례를 받아 교인으로 등록되는 것 자체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에 있어서 세례는 구원받는 중요한 조건인 것입니다. 세례 안 받으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이 위태로울 때, 신부가 와서 세례를 줄 수 없는 경우는 평신도가 세례를 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대세라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들이 다 세례를 죄 씻음 자체로 보는 그들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세례 받으면 구원을 받는데, 그 구원이 최소한 지옥에는 안 간다는 이야기지,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 받고 그 이후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면 천국과 지옥의 중간 상태인 연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곧바로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 받은 이후에 선행을 많이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로 쌓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덕이 많이 쌓이면, 쌓인 공덕에 따라서 연옥 안에서 형량이 감소되고, 공덕을 많이 쌓으면 더 이상 연옥에 있을 필요가 없이 곧바로 천국 갑니다. 더 나아가 엄청나게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다름 사람들에게 자신의 공덕을 나눠줄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크게 훼손하는 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신부 앞에서 세례만 받으면 최소한 지옥에는 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세례 자체에 목을 매고 신부에게 목을 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프전 때 재미있는 광경이 펼쳐졌는데, 미군들이 신부들 앞에서 줄서서 세례 받는 모습이 TV를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전장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로마가톨릭이 세례 받으면 최소한 지옥은 안 간다고 하니깐 미군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신부 앞에 줄을 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공부라든지, 신앙에 대한 점검이라든지 이런 거 전혀 없이 그냥 간단한 고백하나만 하면 믿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받는 군인들 스스로도 세례 받고 천주교 교인으로 등록되었으니 최소한 지옥은 안 가겠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헛된 소망입니다.


세례는 구원하고 직접적인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례 안 받아도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받고, 또 세례 받았어도 참으로 거듭나지 않았으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세례 받으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는 성령세례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곧 구원입니다. 의식 세례는 이미 받은 그 죄 씻음의 은혜를 단지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확증하는 의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세례 자체가 죄 씻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세례 자체를 죄 씻음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이 73문에서 나옵니다.

 

73문 :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고 하셨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몸의 더러움이 물에 의해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며, 또한 이 신적 맹세와 증표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가 영적으로 참으로 씻겨진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이 성례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한 것인데, 그들이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오류에 의해서 오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정말 그렇게 오해할만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성경에 보면 정말 세례로 죄 씻음 받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례뿐만 아니라 모든 성례에 대해서 그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먼저 최초의 성례인 생명나무를 보면, 우리가 이미 배운 것처럼 생명나무 열매 자체에 영생을 가져다주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저가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와 같이 되었으니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면서, 아담을 쫓아내시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으면 영생할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할례가 곧 언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는 것 자체가 언약을 깨트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할례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는 언약이 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물리적인 의식으로서 언약의 증표일 뿐이지 언약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을 보면 이것을 언약의 징표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그렇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징표이지, 언약 그 자체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할례를 언약 그 자체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헷갈리는 부분이지만, 그러나 사실 이것이 성경의 용법이고 굉장히 은혜로운 표현입니다. 이것은 성례의 외적인 요소(의식)와 그 요소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 안에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깐 세례 자체가 죄 씻음인 것처럼 표현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도 바로 이 긴밀한 연합을 오해한 것입니다. 어떻게 오해했습니까? 로마가톨릭은 이 외적인 의식과 의식을 통해 주어지는 내적인 은혜가 기계적이고 물리적이며 마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의 교리를 지적으로 동의하고 세례만 받으면 죄 씻음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마음에 죄 씻음 받았다고 하는 확신이나 느껴지는 은혜가 전혀 없어도, 죄 씻음 받았으니 무조건 믿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의식 자체가 죄 씻음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경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로마가톨릭의 오류를 지나치게 비판한 나머지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쯔빙글리의 견해입니다. 쯔빙글리는 요소와 내적인 은혜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성례는 단지 복음의 사실을 표현하는 의식일 뿐, 의식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신자에게 전달되는 은혜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은혜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만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틀린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것은 성례란 단순히 상징적인 의식이 아니라, 그 의식을 통해 내적인 은혜가 참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가 믿음으로 세례의식에 참여할 때, 그리고 성령께서 그 성례를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실 때, 신자는 외적인 세례의식을 통해서 참으로 자신이 죄 씻음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어지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고 영생을 누리는 은혜가 자신 안에 쏟아 부어지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의식과 내적인 은혜가 기계적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도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건 성례를 행한다고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참여해야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것을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세례의식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와 위로를 실질적으로 가져다주는 은혜의 방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쯔빙글리처럼 세례 의식 자체를 소홀히 여겨서도 안 되고, 또 로마가톨릭처럼 마음에 아무런 은혜가 없는데, 의식을 행한 것으로 스스로 구원받았고 은혜 받았다고 착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정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세례식에 참여할 때, “그냥 의식이다” 그런 생각으로 참여할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을 견고케 하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어떤 은혜를 기대하면서 참여해야 합니까?

 

73문 : 그러면 왜 성령님께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고 하셨습니까?
답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몸의 더러움이 물에 의해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해서 제거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리하신 것이며, 또한 이 신적 맹세와 증표로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이 물로 씻겨지듯이 우리의 죄가 영적으로 참으로 씻겨진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례는 물이 우리 머리에 흘러서 얼굴로, 그리고 몸으로 흘러내려가면서 내 몸의 더러움이 실제로 씻겨지듯이, 그렇게 실제로 나의 마음의 죄를 성령께서 확실히 씻어주셨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맹세와 보증으로 도장찍어주시는 의식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주셔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케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기대하면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참여한다는 이 말은 믿음의 확신이 있는 사람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확신이 없고, 스스로의 중생에 의심이 있어서 세례를 안 받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지금 영적침체에 빠져서 믿음을 거의 상실했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 있고 거룩하게 사는 사람만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확신이 없이 매일 의심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셔서 우리로 거룩하게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바로 성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고 연약할수록 더욱 더 세례와 성찬식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례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에서 믿음이란 믿음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고 다만 그리스도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참여할 때 성령께서 세례의식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믿음을 놀랍게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 문서와 같다고 하겠다. ...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례는 한 번 받은 것이며 지나간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자신의 죄에 지치고 눌려서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서 절망과 혼란 속에서 괴로워하곤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단의 송사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의 세례 받은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증서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그것은 우리의 사죄를 확증해주는 보증서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고, 또 나의 모든 죄를 다 도말하시고 사해주셨다는 (하나님의 도장이 찍혀 있는) 보증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을 때, 그리고 이미 세례 받은 사람은 그 세례증서를 봄으로써 참으로 큰 위로를 받고 은혜를 받으며 또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세례는 한 번 받는 것이지만, 그 세례의식이 일평생 두고두고 우리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세례 받은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치 구약의 성도들이 항상 그 언약의 표를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처럼, 그렇게 신약의 성도들도 세례의식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세례증서를 주면 그것을 구석에 처박아 놓지 말고, 눈에 보이는데 갖다놓고 주님이 이 세례의식으로 자신에게 인을 쳐주셨음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희미해지고, 주님 뜻대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매우 힘이 들고 낙심이 될 때마다 자기가 옛날에 세례 받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2. 유아세례

 

이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유아세례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아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에 속하였고, 또한 어른들 못지않게 유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속죄와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언약의 표인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에 연합되고 불신자의 자녀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구약에서는 할례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신약에서는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유아세례 논쟁의 핵심은 갓난아이가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구원의 표인 세례를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설사 성령께서 때때로 갓난아이를 거듭나게 하실 수 있다손 쳐도, 과연 이 아이가 정말 성령께서 택하신 아이인지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우선 정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세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선입견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중생한 사람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중생한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저 사람이 중생했는지 안했는지를 100%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중생한 자에게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면, 목회자가 심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볼 때, 이 사람의 행실을 보아하니 중생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세례를 주고, 그런 느낌이 안 들면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볼 때는 중생한 것 같은데, 실제로 안 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목회자가 볼 때 중생 안했다고 판단되어지는데 실제로 중생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증거인 성화와 성숙함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람에게만 세례를 주겠다는 말은 성령의 뜻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앞세우는 교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세례를 주는 주된 근거는 그 사람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신앙고백만 하면 무조건 주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앙과 삶을 어느 정도 살펴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참으로 중생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러나 이 사람이 정말 중생 안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고백은 하는데, 교회 예배에 자주 빠지고, 말씀에 관심이 없고, 술 마시고 음란을 행하고, 언행이 방탕하고 불결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확실하게 이 사람이 중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판단하고 분별하라는 것이지, 중생에 대한 눈에 띄는 분명한 열매가 나타날 때만 세례를 주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바르게 하고, 교회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잘 받고, 교회의 지도를 잘 받으며, 외적인 삶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세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세례줄 때 목회자의 마음이나 성도들의 마음이 어떠할까요? “우리는 어차피 저 사람이 정말 중생했는지 안했는지 모르는데... 그냥 신앙고백 했으니 세례 주는 거지 뭐...” 이런 생각으로 세례 준다면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성경공부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기로 했으면, 이제 온 교회는 이 사람이 참으로 중생한 자라고 믿고 확신하면서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중생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믿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에 대한 바른 생각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유아세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아이가 정말 중생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생했을 수도 있고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택한 백성일수도 있고 유기된 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행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이 아이를 모태에서부터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그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다 씻어주시고 중생시켜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 편에서 그렇게 믿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 실제로 그 아이에게 어떻게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고, 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는 우리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여 이 아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확신하고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가정적 중생설”이라고 하는데, 칼빈이나 김홍전 박사님, 그리고 신조 중에서는 도르트 신조가 그렇게 주장합니다.

 

도르트신조 1장 17조 -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 말씀은 신자의 자녀가 거룩하되 본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은혜언약에 의해서 거룩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하여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유아들의 사망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신자의 자녀들이 죽었을 때, 부모는 그 아이의 구원을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태에서부터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거룩하게 하사 구원하여주셨음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바로 유아세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신학의 또 다른 입장 중의 하나는 유아세례는 단순히 언약의 영향권 아래 들어오는 것으로서 그 아이가 직접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부모와 교회에 그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언약의 후손으로서 교육하겠다고 하는 부모의 결단이 유아세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유아들이 이미 중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이광호 교수나 최홍석 교수님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또 다른 일부 개혁파는 이 두 입장의 중간에 서서,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아들은 언약의 자녀들이므로 언약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중생의 약속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들이고, 세례의 영적인 효과는 세례를 시행할 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지속된다고 지적합니다. 이 경우는 직접적으로 ‘중생했다고’ 표현하기보다 ‘중생의 약속, 중생의 씨앗이 유아 속에 있다’고 둘러서 표현합니다. 이 입장은 칼빈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조, 그리고 이승구 교수님이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선 언약의 영향력 안에 들어왔고 교육적인 의미만 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유아세례에 대해서 많이 오해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례는 죄 씻음을 표하고 인치는 것이고, 중생했다는 표로 주는 것이 세례인데, 유아에게 세례주면서 이 유아는 중생하고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언약의 영향권 안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교육적인 목적만이 있다고 한다면, 유아세례 할 필요 없고 침례교의 ‘헌아식’을 하면 됩니다. 그 의미가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 “중생과 죄 씻음의 약속이 있다”는 표현을 하거나 또는 “중생의 씨앗이 그 안에 있음을 믿는다”는 표현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입장은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입장은 그런 어정쩡한 태도보다는 김홍전 박사나 칼빈이 말하는 것처럼 가정적 중생설의 입장에서 확신가운데 참여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유아세례가 성경적인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성경에 유아세례 하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데, 성경 어디에 주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일성수가 주님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떤 근거로 확신합니까? 제4계명의 성취적인 의미로서, 그리고 신구약성경 전체에서 정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함의를 통해서 우리는 주일성수가 주님께서 명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직접 명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함의들도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운바 있습니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명하고 있는 곳은 없지만, 성경전체의 가르침과 함의를 기초로 해서 우리는 유아세례가 주님의 뜻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점에서 유아세례가 성경적입니까?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유기적 섭리 방식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은혜언약의 통일성에서 보아야 합니다. 보통 유아세례의 근거로 은혜언약의 통일성만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논지가 빈약합니다. 구약시대 때 할례를 자녀에게도 행했으니 구약의 할례를 대체하는 신약의 세례 역시 자녀에게 행해야 한다는 논지는 말은 맞지만, 만일 구약에서 자식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은 구약의 언약이 자손을 통해서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는 혈통중심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신약은 혈통적인 언약이 아니지 않느냐 고 반문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의 통일성은 유기적인 섭리의 원리라는 맥락에서 언급해야 적절한 답변이 됩니다.


유기적 섭리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들이 아니라, 서로 생명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강렬하고 열렬한 유대와 결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의 유기적인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이것이 분명해집니다. 천사는 전적으로 개별적인 존재입니다. 천사는 처음부터 동시에 개별적으로 지음을 받았고,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또 타락의 길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도 스스로가 결정을 내려서 그 결정에 따라 각각 개별적으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내가 선악과 따먹은 것도 아닌데, 첫 조상 아담이 따먹었을 뿐인데, 그로 인한 형벌과 저주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함께 받습니다. 아담과 나는 분명히 다른 독립된 개체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질서에 의해서 서로 강렬한 유대와 연결을 갖게 된 관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부모에 의해서 태어나고 존재하게 되며 부모로부터 모든 유전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요소를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생김새만 닮은 것이 아니라, 성격이나 습관, 기질, 행동거지, 자질이나 능력까지 다 부모를 닮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유산도 그대로 물려받아서, 부모가 전적타락 했으니깐, 그 자녀도 타락한 채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끊임없이 부모의 교훈과 본보기에 영향을 받는 채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 간에는 끊을 레야 끊을 수 없는 아주 맹렬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도 바로 이런 문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천사와 같이 각각 독립적인 개체라고 한다면 100번이고 침례교가 맞고 재세례파가 맞습니다. 각자 개인의 신앙여부에 따라서 세례를 주어야 하고 각자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천사가 아닙니다. 사람은 천사와는 다르게 가정이라고 하는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가정’이라고 하는 강력한 유기적인 개체를 사용하셔서, 그리고 이러한 유기적인 원리로 섭리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가시고, 자신의 경륜과 구속사를 진행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천사처럼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가정이라는 강력한 유기적인 질서를 세우시고, 그 가정으로부터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하나 태어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렇게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중에 커서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정의 유기적인 원리에 의한 자연적인 출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 땅에 점점 번성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건설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적인 원리에 의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건설이라는 뜻은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아담에게서 자녀가 태어나면 그 자녀는 타락한 채로 태어나고, 처음부터 죄의 노예요,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류를 버리시지 않으시고,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사람들과 은혜언약을 맺으셔서 몇몇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다시금 무슨 원리를 회복하시느냐 하면, 바로 첫 사람 아담에게 의도하셨던 그 가정의 거룩한 유기성을 회복하셔서 택하신 백성들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보존되고 확장되도록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정의 유기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언약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이 땅에 보존하시고 확장해 가시는데 중요한 원리로서 바로 가정의 유기적인 원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아담에게 말씀하신 첫 은혜언약도 바로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 3:15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왜 하필 ‘후손’을 이야기하십니까? 그냥 “구원자가 언젠가 인류 사회 가운데 태어나서 너희들을 구원할 것이다.” 라고 하시면 안 됩니까? 왜 하필 ‘자손’을 말씀하시고 거룩한 계보를 이어가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기적인 원리로 이 세상을 섭리해 가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부터 보면 곧바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갈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후손들은 다 뱀의 후손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고, 반대로 셋과 셋의 후손들은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가인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나올 수 있고, 셋의 후손 가운데서 뱀의 후손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여인의 후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천사와 같은 존재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가정이라는 강력한 유기적인 작용에 의하면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그렇게 쭉 타락한 백성으로 가는 것이고, 셋의 후손은 그대로 쭉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각자 행한 바에 따라 자유로운 결정대로 뱀의 후손이 되느냐, 여인의 후손이 되느냐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이 그것을 구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이라는 공동체에 역사하는 유기적인 원리가 아주 강력하기 때문에 부모가 불신앙하면, 그 불신앙이 그대로 자녀에게 이어지고, 신앙인의 부모의 경우는 그 신앙이 그대로 자녀들에게 계승되는 일이 창세기 5장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가정의 유기적인 작용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유지되고 발전되도록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노아를 구원하실 때도, 노아만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구원하실 때도, 그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갓난아기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또 그 구원의 표인 할례까지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이스라엘 12지파를 낳고, 그래서 나중에는 거대한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고, 또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진전되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무렇게나 구속사를 진행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유기적인 섭리의 원리를 통해서, 혈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기적인 섭리의 원리는 남편을 그 가정의 머리라고 말하는 성경의 증거에서도 나타납니다. 가정은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이 복을 받으면 그의 가족과 자녀들이 함께 복을 받고 가장이 저주를 받으면 그 가족이 함께 저주를 받는, 그런 같은 운명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2계명의 언급에 보면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일 침례교나 재세례파의 견해가 맞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얘기를 하시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유기성의 원리, 대표성의 원리라고 하는 자연적인 질서를 만드셔서 그것으로서 섭리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라가 죄를 범했을 때, 그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들과 소유들이 다 함께 망하는 것이고(민 16:30-33), 아간이 벌을 받을 때도 그 혼자만 벌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들이 함께 벌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심판하실 때도, 어른들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갓난아기까지 다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경우는 침례교나 재세례파 입장에서는 사실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 자녀들이 그 부모의 죄에 동참했다고 하는 언급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부모의 죄를 함께 당하게 되는 상황을 침례교나 재세례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각자 믿음으로 구원받고 세례도 받는다고 한다면, 벌을 받을 때도 각각 개별적으로 그 행위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침례교와 재세례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점은 그들이 바로 이런 유기적인 원리와 대표성의 원리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렇게 유기적인 원리와 대표성의 원리로 이 세상을 섭리해 오셨습니다. 가정은 그냥 개개인으로 모인 하나의 그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결집과 유대와 연결을 가진 유기적인 개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는 이러한 가정의 유기성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아니면, 이방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운명이 완전히 갈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과연 이러한 유기적인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세상에 가정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한 이 원리는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가정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우리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 천사와 같이 되는 날이 와야 이러한 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14)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 11:14)
“(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31)

 

어떻게 가장이 믿게 되면 온 집안이 구원을 받게 됩니까? 침례교의 견해가 맞다면 바울은 절대로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도 아니고, 가족 가운데 안 믿을 사람도 나올 수 있는데, 함부로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할 때는 바로 이러한 가정의 강력한 유기적인 작용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이러한 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

 

여기서의 ‘거룩’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그런 구원론적이고 윤리적인 ‘거룩’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의식적인 ‘거룩’으로서 믿는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서 그 상대편도 ‘거룩’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 중 하나만 믿어도 그 부모에게서 난 자녀 역시 거룩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도 우리는 가정의 강력한 유기적인 작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유기적인 섭리의 원리” 속에서 이제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세례의 통일성이 의미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성인의 경우는 반드시 믿음이 먼저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언약 안에 들어오고자 할 때는 여호와 신앙을 배우고, 신앙을 고백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 믿음의 표로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의 경우는 그 순서가 다릅니다. 자기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수 없는 난지 8일된 갓난아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은혜언약에 기초해서 그리고 가정의 유기적인 원리에 기초해서 할례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각각 성인세례와 유아세례의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례와 외적인 표식만 다르고 전적으로 동일한 할례가 유아들에게도 행해졌다고 한다면, 그 할례의 대체의식인 세례 역시 교회 회원의 유아들에게 시행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비해서 은혜가 덜 풍성한 구약시대에도 언약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 수 있었다면, 구약보다 훨씬 더 은혜가 풍성한 신약시대에는 얼마나 더 유아세례를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원리인 가정의 유기성을 생각할 때에, 그리고 은혜언약의 통일성, 곧 할례와 세례의 연관성을 생각할 때에, 유아세례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 곳곳에 나타난 유아세례를 함의하는 구절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문헌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글파일 뒷부분에 첨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를 낳았으면 그 아이를 그냥 방치하지 말고, 이 유아세례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임을 믿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유아세례에 참여할 때에 더 이상 어정쩡한 태도가 아닌 확신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자신만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까지도 구원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와 감격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 유아세례 의식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사와 감격은 이제 무엇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까? 유아세례의 두 번째 중요한 함의인 바로 신앙교육의 의무로 연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왕에게 아들이 태어났다고 합시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커서 나중에 스스로 왕이 될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출 때에 왕의 후사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왕의 후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를 때도 ‘태자’라고 말하고, 왕의 후사답게 교육해가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왕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교육하는 거하고, 아예 왕이 될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를 왕으로서 교육하는 거하고, 교육하는 자세나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 아이는 중생 안했다. 그냥 언약의 영향권 아래 있다. 나중에 잘 믿으면 구원받을 것이고 안 믿으면 지옥갈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서 이 아이를 교육하는 것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다.”고 확신하면서 이 아이를 교육하는 것 하고 천지차이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왕의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이 황태자를 왕이 어떻게 교육합니까? 일반 백성의 아이들이 받는 가정교육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황실 교육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왕으로서 능력과 자질을 잘 구비하여서 왕의 직무를 잘 감당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아이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믿고 고백했으면, 이제는 일반 세상 사람들의 아이들처럼 자신의 욕심과 성공과 꿈을 따라서, 자신의 정욕과 쾌락을 위해서 살도록 놔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양육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부모는 먼저 이 아이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교육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둘째로, 자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삶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경건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할 때, 억지로 하는 것은 율법주의니 자원해서 할 때까지 내버려두겠다는 생각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면서 주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키도록 훈계하며, 때로는 매를 들어가면서까지 지키며 살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어렸을 때는 부모가 무서워서 억지로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원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그 경건의 훈련과 습관과 경험들이 자신의 순종의 삶에 굉장히 유익하고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잘 양육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날마다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이 몰래 부모 혼자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의 눈물을 자식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눈물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잘 양육하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가 말로 가르친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참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성공과 돈, 정욕과 쾌락을 좇아 살면서, 그 자녀들에게 암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교회에서 하는 교육은 한계가 있고, 결국 자녀교육은 부모가 하는 것인데,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을 사는 본을 보이지 않고서는 자녀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할 때, 그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책임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부모의 책임입니다.


다섯째,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특별히 교회의 모든 공적 모임에 어릴 때부터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항을 잘 기억하여 유아세례에 참여하고 또 유아세례 받은 우리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해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자녀 교육과 더불어 자녀를 많이 낳는 일에도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꼭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해서 새로이 믿게 만드는 것만 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녀를 많이 낳는 것도 바로 전도요 교회의 확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김홍전 박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녀들을 땅 위에서 쓰셔서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계획을 역사 위에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믿는 자녀들이 번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확장이란 밖에 나가서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함으로만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자녀들이 거룩한 도리 가운데서 장성해 가면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유기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데서 교회의 확장이란 면모를 잘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전도도 해야 하지만, 또한 믿음의 자녀를 많이 낳아서, 그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일도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임을 생각하고 그 일에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로 이 세상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교회에는 정상적인 경우에는 애들로 바글바글(?)해야 합니다. 오히려 어른들 수보다 더 많아야 하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개혁교회의 특징은 자녀들의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도를 통해서도 성장해야 하지만, 이러한 가정의 유기적인 원리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3명 이상은 낳아야 합니다. 둘만 낳는 경우는 도박으로 치면 본전치기이고, 하나만 낳는 경우는 반타작입니다. 예를 들어서 돼지를 키우는데, 짝짓기를 시켜놨더니 하나밖에 안 낳았으면, 돼지 주인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짝짓기를 시켜놨으면 10마리 20마리씩 낳아서 번성해야 그것이 정상이고, 주인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짝지어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짝지어 주실 때도 단순히 하나 둘 기대하시고 짝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이 명령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명령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많이 낳는 만큼 교회는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는 그만큼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아내들은 사회적 진출을 포기해야 하고, 또 양육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아이들이 많아지면 양육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다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 아이를 많이 낳기를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유아세례의 의미를 잘 생각해서 자녀출산과 양육과 교육에 힘써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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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75문,76문,77문) - 성찬의 의미 file 75-77문 최상범 2600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72문,73문,74문)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 file 72-74문 최상범 2836
2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주(69문,70문,71문) - 세례와 성화론 file 69-71문 최상범 5030
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65문,66문,67문,68문) - 말씀과 성례 file 65-68문 최상범 2286
2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Ⅱ(64문) - 성화는 칭의의 열매 file 64문 최상범 2364
2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Ⅰ(62문,63문) - 성경적인 성화론 file 62-63문 최상범 2726
2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59문,60문61문) - 이신칭의 file 59-61문 최상범 2606
2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주(57문,58문) - 부활과 영생 file 57-58문 최상범 2708
2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Ⅱ(56문) - 죄 사함 file 56문 최상범 2896
2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Ⅰ(54문,55문) -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 file 54-55문 최상범 3062
2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주(53문) - 성령 하나님 file 53문 최상범 3177
2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9주(50문,51문,52문) -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재림 file 50-52문 최상범 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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