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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3-5문
문답내용 3문 :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4문 :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5문 :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주(3~5문)

 

율법 앞에서 죄인 된 우리

 

말씀 : 롬 3:20

 

1. 율법 앞에서 죄를 깨달음

 

3문 :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율법이 없이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또 자신이 죄 가운데 비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있는 양심, 그리고 사회에서 지켜져야 할 도덕윤리 개념에 기초해서 자기가 그것을 어길 때에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죄책감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양심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일반은총 가운데 허락하신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양심 자체가 지닌 여러 가지 한계 때문에 이 양심이 온전한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는 없죠. 어쨌든 이 양심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서 사람들은 그 영혼이 고통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근본 공허하기 때문에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쾌락과 방종과 향락을 좇아가면, 그 끝에는 말할 수 없는 허무함과 수많은 죄들로 인한 죄책감과 수치심, 마음의 번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구 죄짓고 사는 사람들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전히 붙잡고는 있지만, 그러나 자신이 이 죄 때문에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율법을 알지 못해도, 스스로 죄와 비참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결국 그러한 깨달음은 굉장히 피상적이고 파편적인 깨달음이고,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에 진정한 죄의 깊이와 뿌리를 보지 못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죄만 깨달을 뿐이고, 무뎌진 양심으로 말미암아 그중에서도 일부만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죄로 말미암아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그 진정한 깊이를 보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통해서만 나의 죄와 비참함의 진정한 깊이를 깨닫습니다.

 

3문 :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

 

2. 율법의 요구

 

그러면 나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하는데 율법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소위 613개조나 되는 율법을 일일이 배우려면 몇 달이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온 율법을 딱 두 문장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문이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4문 :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뿐만 아니라 구약전체가 이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강령이라는 말은 원어로 ‘크레마타이’로서 “매달다”라는 뜻이고, 수동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원어를 직역하면, “온 율법과 선지자는 이 두 계명에 매달려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옷장을 보시면 거기에 기다란 쇠기둥이 있고, 그 쇠기둥에 수많은 옷들이 걸려 있는데, 그 기둥이 바로 강령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구약의 모든 계명과 명령은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계명을 지키되 반드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의 터 위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계명의 문자만 지키면 그것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사랑의 근본정신은 놓쳐버리고 계명들을 낱낱이 쪼개어서 조목조목 지키려고 하고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해 사람의 유전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러한 노력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다 쓸데없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없는 순종은 죽은 순종입니다.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로마서 말씀은 조금 다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사랑은 마치 모든 율법과 계명을 다 담고 있는 포대자루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기만 하면 그것은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의무와 계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계명을 아우르고 포함하는 그야말로 율법의 요약입니다.


그러니깐 결론적으로 모든 계명은 사랑의 터 위에서 지켜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강령입니다. 또한 사랑은 모든 율법을 담고 있는 포대자루입니다.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 율법 전체의 요구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요약인 것입니다.


3. 율법의 기준은 어디에?

 

중요한 것은 그냥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되 어느 정도로 사랑하라는 기준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그냥 적당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전 존재를 다 바쳐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몸을 챙기고 보호하고 사랑하듯이 그렇게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순위도 분명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첫째요 가장 우선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웃사랑이 그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터 위에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인류애를 실천하려고 하고, 사회복지와 민중해방을 위해 목숨바쳐 희생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하나님은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이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은 자신의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절대적인 사랑과 헌신의 대상이십니다.

 

4. 예수님이 율법의 기준

 

이렇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특히 이 이웃사랑에 있어서 재미있는 점은 구약과 신약이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옛 계명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새 계명 -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새 계명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르기 때문에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옛 계명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율법은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명해집니다. 이 새 계명은 단 하나의 계명이지만, 그러나 이 계명 안에는 하나님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고, 또한 율법의 모든 계명의 말씀이 성취된 의미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소위 “그리스도의 율법”이라고 하는 이 새 계명은 옛 계명보다 훨씬 가시적이고 풍성하고 수준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사랑만 보더라도 옛 계명은 사랑의 기준이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엄청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새 계명은 한 발 더 나아가서 사랑의 기준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만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렇게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사랑해라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옛 계명에서는 그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 라는 것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의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몸소 실천하신 이 세상에 유일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옛 계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시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십니까? 정말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시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셨고, 헌신하시고 복종하시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은 또한 이웃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한 본보기가 되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여 남을 위해 사셨고, 집이나 재산이나 아무 소유도 없이, 머리 둘 곳 없이 지내시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소진하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원수와 같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진정한 이웃사랑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모범은 율법의 진정한 수준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하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과 교훈을 잘 모르면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율법을 수준을 낮추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로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5문에서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데, 이 질문을 만일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청년이 답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기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세리처럼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강제로 빼앗지 아니함을 인해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 그 자체만으로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뭔가 흠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사악함이 율법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이정도 순종하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기준으로 자기는 지켰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하고 반대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저 세리와 창기는 죽일 놈들이다 그러면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원춘 살인마보다 내가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나쁜 짓 하고 돌아다니는 양아치보다 내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 내가 저 사람보다는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뭐냐면 아직 율법이 무엇인지, 또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율법을 왜곡해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죄악된 본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왜곡되고 낮추어진 율법의 수준을 다시금 하늘 위로 끌어올리셨습니다.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누구든지 살인하지 말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살인한 자고, 가벼운 욕이라도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다. 누구든지 간음하지 말라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소송을 걸어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주고,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돌려대고, 원수도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율법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예수님은 친히 삶으로 완벽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교훈과 그분의 삶을 통해서 율법은 가장 절대적으로 완전한 모양새를 갖추고 우리 앞에 제시됩니다. 바로 이 율법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평가해야 하는 것입니다.

 

5. 복음 앞에서 율법은 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율법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으로 사람들의 모든 근본 죄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빛이십니다. 빛이 오니깐 어두움이 다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택한 자들로서, 이 빛 앞에서 자신의 모든 어두움을 깨닫고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 모든 어두움을 사함을 받고, 빛이 된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자신들의 어두움이 드러날 까봐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빛을 미워하며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자체가 자신이 이때까지 쌓아왔던 모든 자기 의와 명예에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빛 가운데 나와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모든 어두움을 드러내고 회개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추고 외식하면서 빛을 미워하여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않는 자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빛 가운데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 가운데로 나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명예를 목숨보다 사랑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당했다거나 자신의 숨겨진 수치가 드러나서 자신의 명예에 치명적인 상처가 났을 때 사람들은 견디지 못할 괴로움을 느끼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가 죽어 마땅한 벌레보다 못한 더러운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명예를 사랑하는 자는 십자가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은혜를 주셔서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셔서 우리로 빛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의해서 율법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율법만 선포되어서는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율법을 열심히 선포했고, 또 세리와 창기들의 죄를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들 중 아무도 회개하고 돌아온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수많은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께로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적용한 것도 문제이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복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율법을 가지고서 “너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그러면서 정죄하는 데에만 썼습니다. 이를테면 칼로 배를 찔러 죽이려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칼로 찔러 죽이려는 사람에게 누가 자신의 배를 들이밀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칼로 수술하여 고치려는 의사에게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놓습니다. 다시 말해 구원하시려고 하시고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완전한 삶(율법), 그리고 그와 더불어서 용서하시는 사랑(복음) 앞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뉘우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복음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늘 함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복음 없는 율법은 율법주의입니다. 반대로 율법 없는 복음은 은혜지상주의, 도덕률폐기론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이 둘이 늘 붙어 있어서 우리에게 적용되어야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와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우리의 현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결론적으로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5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5문 :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 아닙니다.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자신만 보아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고 그 정신을 따라서 지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모범에는 도무지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도리어 우리 안에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려는 성향이 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믿는 사람에게조차도 본성적으로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물론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믿고 거듭나면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주도적인 성향이 자리잡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전히 하나님을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는 죄된 성향이 남아있지만, 예수님 믿기 전처럼 주도적이고 전적인 성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 믿기 전과는 상황이 천지차이 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5문이 신자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됩니다. “그러나”하면서 뒤에 더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초점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신자, 불신자 여부를 떠나서 모든 인생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상황에서 남아있는 부패성과 은혜, 그리고 율법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각각 우리 신앙생활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다음에 배울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이 예수님의 모범 앞에서, 이 완전한 율법 앞에서,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요구에 이를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래서 율법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또 그 죄로 말미암은 모든 비참한 결과들을 일평생 스스로 짊어지고 살다가 결국 멸망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은 근본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고 소망 없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의 사실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모든 죄의 비참한 결과들을 대신 짊어지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없이하셨고, 또 온전히 의롭게 사신 자신의 완전한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죄 없다 하시고, 완전히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은혜인지 깨닫고, 늘 잊지 않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일평생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 말고는 위로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교만하기 쉽고 이정도면 괜찮다고 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완전한 모범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자신의 근본 죄성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가야하고, 그래서 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고, 늘 회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고쳐 이제 주님을 닮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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