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37-39문
문답내용 37문 :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38문 : 그리스도는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9문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른 방법으로 죽는 것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몸소 당해야만 하는 저주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떠맡으셨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설날짜 2013-12-2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5주(37-39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신 예수


요절 : 벧전 2:24


37문 :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38문 : 그리스도는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39문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른 방법으로 죽는 것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몸소 당해야만 하는 저주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떠맡으셨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고난의 전체성


37문 :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사도신경의 “고난을 받으사”라는 고백은 그 문맥이 의미하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의 끝부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그 고난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아니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그분의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이 사실 고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생각할 때는 그 고난이 전체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은 시간적으로 전 생애동안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생애 마지막에서만 아니라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실 영광의 주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부터가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것도 인간적으로 보아도 영광스럽기보다는 비천한 출생을 했습니다. 호적을 하러 가는 독특한 상황과 베들레헴에 많은 이들이 와서 여관에 잘 곳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 구유에 뉘어지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그분의 인생이 고난 그 자체임을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보여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고 거기서 몇 일 동안 지내면서 몸조리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부모도 고생이고 아이도 고생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탄생은 그의 인생이 얼마나 불편하며 고생하는 인생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은 일평생 고난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다 겪으셨습니다. 가난의 고통, 질병의 고통,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설움도 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는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배척, 배신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 내내 머리 둘 곳 없이 사시고, 많은 불편과 고생 감수하셨으며, 매일매일 살인적인 일과를 소화하시면서 자신의 진액을 다 짜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일평생 중보적 죄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도 다 그런 의미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죄인이 세례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죄가 없는데도 세례를 받으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있는 죄의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자기에게 믿음으로 나아온 모든 자들에게 죄용서와 구원을 선언하셨는데, 그것은 그저 능력 많으시니 그냥 치료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 8:17)


병을 고치시는 것도, 귀신들린 것을 고치시는 것도, 다 그 문제를 자신의 등에 짊어짐으로써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연약함의 문제는 죄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 용서도 그냥 죄사하는 권세가 있으니깐 죄 용서를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는 말 속에는 항상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내가 널 대신해서 죽어주마...” 하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등에는 항상 인류의 무거운 죄의 짐이 이미 지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을 치를 십자가가 늘 눈앞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이 일평생 가지신 중보적 죄의식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와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 죽음을 기다리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사형수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사형이 집행되는 그 순간이 아니라, 자기가 언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죽기 직전까지가 오히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기 직전까지 사형수는 극도의 심리적 공포와 두려움과 낙담 속에서 신음하면서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에 걸쳐서 바로 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성과 관련해서도 전체적으로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만 고생하신 것이 아니라 몸과 영혼 전체가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고난은 육체의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비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영적인 고난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일반 순교하고 예수님의 죽음하고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인 순교는 육신은 극한의 고통을 받지만, 영혼은 성령의 위로와 은혜로 말미암아 도리어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찬양하면서 기쁨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죽음이 그러한 일반적 순교라면 예수님은 정말 기뻐하시면서 그리고 찬양하시면서 죽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전날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워 떠시고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히 괴로워 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두려워하신 이유는 그것이 몸만 고난당하는 영광스러운 순교가 아니라, 죄 덩어리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저주의 죽음이요,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가 몸과 영혼에 쏟아 부어지는 지옥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죽기보다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고난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지옥의 고통이라는 것이 어떠한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되겠지요. 지옥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용암 불 못에서 끊임없이 불타며 화상을 입는 그 고통도 말할 수 없이 끔찍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사실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 자체가 지옥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도 그것이 지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있어도 살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악인들에게도 잠시 내려졌던 하나님의 일반은총도 거기서는 다 거두어지고, 어떠한 하나님의 은총이나 인자나 자비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그 영혼에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러한 몸과 영혼의 고통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물고기가 물에서만 살 수 있는데, 물 밖에서 영원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기가 있어야 사는데, 공기 없는 우주 밖에 영원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채 영원히 거하는 것 자체가 지옥이 주는 가장 무서운 고통인 것입니다.


바로 그 지옥의 고통이 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몰라도 예수님은 전지하시니깐 그 깊이를 온전히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공포에 떠시고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면서 처절하게 절규하셨던 것이고, 그렇게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얼굴을 돌리시고 철저히 외면하시고 버리셨던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저주하시고 자신의 진노로 그 영혼을 짓밟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사랑스러운 자신의 독생자가 아니라, 죽어 마땅한 흉악한 죄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 박히신 후 세 시간 동안 해가 빛을 잃고 캄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낯을 숨기시고 외면하셨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도대체 왜 전 생애동안, 그리고 몸과 영혼에, 그리고 특별히 십자가에서 그 처참한 수난을 당하셨습니까? 그분이 고난을 즐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는 것을 죽기만큼 싫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부인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답을 다시 보시면...


답 :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분이 화목제물이 되심을 자주 증거합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힐라스모스)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힐라스모스)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원어로 ‘힐라스모스’는 “진정시킴” 또는 “진정시키는(달래는) 수단”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형벌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는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부터 건지시고 구원하여 주셨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 안에서 일평생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된 것입니다.


답 :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2.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이제 두 번째 부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신경의 이 고백은 “본디오 빌라도는 죽일 놈이다” 하는데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죽일 놈 맞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나를 네게 넘겨준 사람의 죄가 더 크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은 본디오 빌라도에게도 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실 죄의 크기로 따지자면 본디오 빌라도보다도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나 예수님을 죽이고자 모함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더 큰 것입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 놓아주려고 정말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할 때는 “이 죽일 놈...” 하면서 이를 박박 갈면서 외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라고 하는 공적인 재판장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에 포인트를 두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대적들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암살 당하셨다거나 테러를 당해서 죽임 당하셨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곧 재판을 통해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을 통해 죽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인데, 로마 하면 법이고, 공정함입니다. 법대로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총독이든지 간에 총독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재판은 공정하기로 유명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공정하기로 유명한 재판장으로부터 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재판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부당한 거래가 많고 뇌물을 잘 받기로 유명한 그런 재판관으로 부터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재판을 신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정한 재판장인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재판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선언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시기함으로 예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았던 것입니다. 정말 대단히 공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놓아주기 위해서 일부러 살인자 바라바를 세워두고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로부터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만일 그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에게 충신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깐 본디오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 흘림에 대해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손 씻는 행위를 한 후에 그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도록 내어줍니다. 이것은 곧 그가 사형선고를 내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깐 빌라도는 무죄선언도 하고, 사형선고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역설입니다. 죄 없는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재판에서 왜 사형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백성들의 민란을 두려워하여 우유부단한 빌라도가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린 것 같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요 19:11)


아무도 예수님을 해할 권세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금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리시고 하나님이 죽이시는 것입니다. 이 유대 총독 빌라도의 재판장이 사실상 하나님의 천상적 재판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빌라도와 많은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무죄선언을 통해서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을 공적으로 드러내시고, 빌라도의 사형선고를 통해서는 바로 그분이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신 사형수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상의 법정에서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 아들에게 물으시고 그 아들을 사형선고 내리셔서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공적으로 재판을 받고 고난을 받으신 사건은 참으로 우리에게 은혜의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엄중한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사형선고의 형벌이 없을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38문 : 그리스도는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는 것은 모든 예수님을 대적한 무리들의 대표로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는 없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여러 세력이 합세하여 이루어진 일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사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이들의 선동에 놀아난 유대인 민중들, 헤롯과 빌라도, 그리고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 등 여러 사람들이 합작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형에로 예수를 내어준 사람은 그 당시 유대 땅의 정치적․사법적․군사적 주관자인 로마 총독 빌라도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부하 직원이 잘못을 범하면 그 부하 직원을 거닐었던 리더가 책임을 지고 사임하듯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함한 악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죄가 가장 크지만,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 책임을 언급할 때는 결국 빌라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의 말씀이 이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는데, 이 뱀의 후손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을 포함해서 모든 예수님을 대적한 사단마귀의 세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공적인 총 책임자로 언급할 때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발꿈치를 상하시고 고난을 받으셨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바로 예수님께서 뱀의 후손에 의해서 발꿈치를 상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빌라도는 백성들의 압력에 의해서 무죄한 예수님에게 사형언도를 하고 나서 나중에 밤마다 환청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다가 미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문제로 문책을 당해 소환되었다가 프랑스 남쪽으로 유배되었고, 거기서 자결하여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빌라도가 비록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대중들 앞에서 손을 씻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책임이 있음을 그의 인생의 비참한 말로가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3. 십자가 죽음은 저주를 뜻함


39문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른 방법으로 죽는 것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내가 몸소 당해야만 하는 저주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떠맡으셨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대적들에 의해서 스데반처럼 돌로 쳐 죽임 당하실 수도 있고, 불 태워 죽임 당하실 수도 있고, 목매달아 죽임 당하실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 당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하는 것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죄를 담당하사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음을 인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인용하는 신명기 말씀을 보면...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사형을 시킬 때 보통은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리고 나무에 매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렇게 함으로써 온 백성이 보고 두려워하여 그 죄에 대한 경계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하시도록 하나님 앞에 두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이 사람의 죄에 대하여 저희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몸을 죽여 형벌하였지만, 그러나 이 사람의 영혼까지 형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도 형벌해주십시오. 이 사람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있을 곳이 없어서 성 밖으로 내놓았으니, 마찬가지로 하늘에서도 이 사람은 받아들일 곳이 없음을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이제 친히 심판해주십시오.”


그래서 나무에 달린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고, 또 하나님으로부터도 저주를 받아서 땅에서도 버림받고 하늘에서도 버림받는 그런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무에 매달린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수많은 의로운 백성들과 선지자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나무에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음해한 하만 같은 사람이나, 신성모독죄를 범한 자들, 자칭 메시아, 거짓 선지자나 이단자들이 죽임을 당한 뒤에 나무에 매달렸는데, 거기에는 그렇게 죽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미 거짓 메시아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곤 했기 때문에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그런 자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아직 변방에 자리 잡고 있을 때 만들어졌던 사형방법이지만, 유대인들은 그것이 로마의 처형방식일지라도 나무에 매달린다는 면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당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를 사형시켜야 된다고만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사형집행방법까지 요구했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형벌이 이외에 다른 것으로 예수의 목숨을 끊는다면, 이전에 위대한 선지자들이 순교를 당했고, 죽음 이후에 그의 삶과 가르침이 옳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났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사형시키면 나중에 그분이 옳다는 것이 다시 밝혀지고 드러나게 될 때에, 자신들이 구약에서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의 피를 흘린 것처럼 예수도 죽였다는 재해석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러한 재해석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든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분명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사실은 옳았다는 식의 재해석을 도무지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명기 말씀대로, 그리고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인식대로 명백하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는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그분이 저주받을 짓을 한 것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그분은 의로우신데, 우리의 죄를 짊어지심으로써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다른 방법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통해 그분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셨음을 확실히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 적용


그러므로 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처형당하신 이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으며 무엇을 고백해야 합니까? 우리는 “거긴 내 자리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될 저는 여기에 있고, 어떻게 당신이 거기에 계십니까?”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의 덩어리이신데, 죄 덩어리인 우리를 의 덩어리로 만드시기 위해 자신이 죄 덩어리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고, 이것을 모르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찰나라도 잊어버리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내려가시고, 주님이 마땅히 누리셔야 할 축복의 자리에 우리로 있게 하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주님의 공로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구원이 오직 은혜로, 오직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졌다는 것을 늘 잊어서는 안되며, 또한 그 구원이 거기다가 내가 무언가 더 보태야 하는 불완전한 구원이 아니라, 나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시고 온전한 의와 생명에 이르게 하신 완전한 구원임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늘 이 주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면서, 값없이 허락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 자리바꿈의 은혜 때문에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리바꿈은 바로 우리 마음의 주인의 바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성령께서 놀라운 은혜 가운데 우리를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에 집어넣어주셔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실 때, 그것은 주님과 나의 단순한 자리바꿈이 아니라, 주님과의 연합 속에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이제 새사람으로 주님과 함께 부활하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옛날처럼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 주장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나는 주님의 것이다” 하는 자세로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자의 마음 상태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은혜 알면 “주님 더 이상 죄 짓기 싫습니다. 이 세상과 벗하면서 사는 것이 싫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하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 믿었다고 해서 죄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이제 죄에 대해 미워하고 혐오하게 되었고, 대적하며 눈물겹게 싸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따금씩 죄에 무너지지만, 그러나 다시금 회개하고 일어서서 결단하고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버릴 생각 없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여전히 품고 있으면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원하시면 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이런 각오는 없으면서, “저는 예수님의 죄 씻어주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뚝뚝 흘리시는 그 장면 앞에서 어느 누가 자기 죄를 계속해서 고집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이 십자가 앞에 서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고,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비참하게 죽게 한 나의 죄에 대한 미워하는 마음과 혐오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 때문에 자기를 헌신해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김밥이 있으면 통째로 안 먹고 안에 맛있는 것만 쏙 빼먹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여러 가지 속성 중에서 죄 사함과 칭의만 쏙 빼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까? 칭의만 빼먹고 성화는 생략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죄 사함과 영생만 취하고 자기부인은 없어도 됩니까? 칭의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성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만 편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참으로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과연 정말 십자가 은혜를 아는 자인지 의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이야 어떻든 간에 예수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잘못된 설탕 복음에 미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 안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믿고 회개함으로 구원받습니다. 믿음 안에서 회개하고 회개 가운데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고, 회개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회개는 지속적인 일입니다. 믿음은 마음과 입으로 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처음 믿을 때, 회개를 시작한 신자는 이제 날마다 믿음 안에서 회개를 지속하여 일평생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회개를 뺀 믿음을 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설탕복음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산 자가 믿기만 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자리바꿈은, 더 나아가 주님과 연합하여 함께 죽고 산 자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1-3)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위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주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성화를 이야기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제 죄짓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고,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화되는 삶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십자가 은혜를 모르든지,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저버리면서 멸망 길로 가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생명의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고 살았다는 이 굳건한 사실 위에 흔들림 없이 서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셔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을 늘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아래서 정과 욕심이 죽어지고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새 생명이 불일 듯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순종하며 살기 위해 분투하며 눈물겹도록 투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정말 깨달은 신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1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8주(46문,47문,48문,49문) -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file 46-49문 최상범 3643
1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7주(45문) -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유익 file 45문 최상범 3687
1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주(40문,41문,42문,43문,44문) -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된 우리 file 40-44문 최상범 4188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5주(37문,38문,39문)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신 예수 file 37-39문 최상범 3904
1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4주(35문,36문) - 동정녀 탄생 file 35-36문 최상범 3698
1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3주(33문,34문) - 외아들, 우리 주 file 33-34문 최상범 3934
1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2주Ⅱ(32문) - 그리스도인 file 32문 최상범 3496
1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I(31문) - 그리스도 file 31문 최상범 3831
1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주(29문,30문) - 유일하고 완전한 구주 예수님 file 29-30문 최상범 3725
1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10주(26문,27문,28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file 26-28문 최상범 5016
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주(24문,25문) - 삼위일체 하나님 file 24-25문 최상범 5808
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주(20문,21문,22문,23문) -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file 20-23문 최상범 5789
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6주(16문,17문,18문,19문) -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file 16-19문 최상범 4957
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5주(12문,13문,14문,15문) - 우리의 중보자 file 12-15문 최상범 5487
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설 제4주(9문,10문,11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file 9-11문 최상범 4930
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설 제3주(6문,7문,8문) - 사람의 원죄 file 6-8문 최상범 5069
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2주(3문,4문,5문) - 율법 앞에서 죄인된 우리 file 3-5문 최상범 5130
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1주(1문,2문) -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 file 1~2문 최상범 7542
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론 file 서론 최상범 798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