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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학 교수인 라은성 교수의 글입니다.

#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
              
                                                                                          라은성 국제신대원 ( 역사신학교수)
개혁의 요청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는 표현은 개혁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로마 카톨릭이나 프로테스 탄트들이나 할 것 없이 고대교회로부터 전해준 이 위대한 슬로건을 늘 사용한다. 더욱이 신학생이면 누구든 들어왔을 것이고 이 표어처럼 살기를 원할 것이다. 일반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한 번 이상은 들어보았던 슬로건일 것이다. 이천년 가량 내려오면서 신앙의 선배들이 사용했던 이 슬로건을 통해 우리가 가지는 마음은 정말 교회는 개혁되어야만 한다는 마음이다. ‘항상 개혁되어야만’ 이라는 문구는 무엇 보다 중요하다. 교회는 정체해 있으면 안된다. 우리말에도 있듯이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말이다. 이처럼 이 말을 시대, 문화, 지역,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하는 ‘유동적인 교회’ (Liquid Church)를 의미로 보아서는 안된다. 개혁과 유동은 어감이 유사할지 모르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분명한 것은 교회는 변해져야만 하는데 그것을 개혁으로 보는 것이지 유동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매스컴, 즉 KBS, 「시사저널」, 그리고 이어서 「한겨레」까지 가세하여 교회의 개혁을 주도하고자 한다. 정말 그들의 주장을 듣기도 전에 누구든 기독교 신앙인이면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것이다. 더군다나 매스컴에서 말하는 교회의 상황은 정말 얼굴이 화끈하게 뜨거울 정도로 부끄러운 모습들을 보게 된다. 늘 매스컴에 오르고 내리는 소식들을 듣노라면 “교회가 이래도 괜찮은가?”라는 마음이든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주장이 “맞지!”라는 동의도 하면서도, 한 편으로서는 그들의 주장이 “너무하다” 라는 말로 대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을 가지던, 누군가 개혁의 주체가 되든지 간에 한국교회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보면 한국교회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한국교회를 싸잡아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는 드러난 교회들이다. 하지만 말없이 순결하게 신앙을 유지하는 수많은 한국교회들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격에 있는 굵직굵직한 교회들이 정말 이래서는 안된다는 말들이 오고갈 수 있다.

수동적 개혁

분명히 한국교회에는 개혁이 필요하다. 위의 슬로건을 달리 번역하여 “개혁이 필요하다”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교회는 늘 개혁의 필요성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교회가 개혁되기를 원한다면 그 개혁의 목표, 개혁의 목적, 개혁의 방향, 개혁의 수단, 개혁의 시기, 개혁의 주체, 그리고 개혁의 대상 등에 대해 우리는 정확하게 정의 내려야만 한다 굳이 정의를 내려야만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오게 되는 파장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반드시 정의를 내여야만 올바를 방향을 정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말에 “말 타면 경마 들린다!”는 말이 있다. ‘개혁’이란 말을 누구든 좋아하지만 ‘변혁’ (變革, revolution)이나 ‘혁신’ (革新, renovation)을 ‘개혁’ (改革, reformed)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올바로 아는 것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그 단어의 정의를 두고 오래 동안 말할 의도는 없다. 그렇다고 개혁이란 말을 성의 없이 간략하게 정의도 없이 진행하는 것도 멋쩍은 것 같다. 개혁에 대한 정의를 간략하게 해 놓고 이 글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진다.

먼저 문법적으로 ‘개혁’ 이란 단어를 보면, 수동태 또는 현재분사이다.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개혁주의’ 라고 하기 보다는 ‘개혁파’ 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또는 단순히 ‘개혁’ 이라고 쓰기를 주장한다. 어떤 단어로 번역되든지 간에 개혁이란 말은 수동적이지 능동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누군가에 의해 수동적으로 개혁되기를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의 주체는 교회 구성원들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사람들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시다.

개혁의 도구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의도한다고 하여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개혁을 주창하면 또 다른 재반응을 맛보게 될 것임을 역사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보려고 나름대로 힘껏 노력했던 사건들이 있었으나 교회를 더욱 타락하게 만들고 또 다른 문제들을 일으킨 것에 불과하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못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인간의 주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의 위대한 슬로건에 따라 루터 이 전에 있었던 수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교회의 타락을 보고 개혁코자 부단히 노력했다. 어떤 때는 세속권력을 이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영적 권력을 가지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력을 통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신비적인 체험으로 개혁하려고 했다. 루터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교회개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더욱더 타락해만 갔다.

하나님께서 루터를 통해 이루신 종교개혁은 그가 의도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이었다. 개혁되도록 주도했던 사람은 루터가 아니었다. 루터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당시의 교회는 개혁의 물결을 타면서 나아갔던 것이다. 그는 개혁을 의도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 개혁의 물결을 그 자신이 멈출 수 없었다. 물론 교회 타락의 불만이 바벨탑처럼 높이 솟아 있었던 터라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또는 상황이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전 교회사에서 더 타락하고, 더 힘든 상황이 있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루터를 통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분명한 한 가지는 루터는 하나님의 . 도구였일 뿐만아니라 분명한 진리를 발견한 자였다.

진리의 재발견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루터처럼 분명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한 자가 없을 것이다.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진리의 발견이 있었던 자들이었다. 당시에 루터 외에도 이미 개혁을 주창했던 스위스의 개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 루터를 기억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가 재발견한 진리가 있었기에 그의 개혁을 ‘종교개혁’ 이라고 불린다. 그가 무엇을 재발견하였는지 여기서 긴 시간을 가지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자하는 것은 루터가 구원의 진리를 재발견했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어느 누구도 1,500년 동안 그처럼 확신을 가지며 발견한 자는 결코 없었다. 이미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진리를 발견한 그를 들어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누구든 개혁을 부르짖는다. 꼭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개혁시키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개혁되어야만’ 한다. 그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성실한 도구이고, 그 도구로서 진리의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단순히 슬로건으로 끝나는 개혁이 될 것이다. 개혁은 하나의 제도를 바꾸거나 관습을 바꾸어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씩 바꾸다 보면 큰 것도 바꿔지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처럼 기독교의 연민을 가졌고,그만큼 많은 학식을 갖추었고, 영향을 끼쳤던 자이지만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이루신 것이 아닌 것은 그는 진리를 알고 실천한 것이지 진리를 재발견한 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루터가 세상에 등장했을 때 그는 역사의 무대 뒷자리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상황은 개혁의 분위기이다. 그 덕분에 어두운 곳에 있는 분들이 광명으로 나오게 된다.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예를 들면, 장애자들이 사회 활동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과거였지만 개혁으로 말미암아 그들도 우리와 같은 혜택의 목소리가 높아져 가고 점점 이뤄지고 있다.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공공기관들도 친절해간다고들 한다.정말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얼굴에 슬픈 기색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혁의 분위기는 일시적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의 불안감이다.

또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까? 정말 변한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들 때가 있다. 개혁은 좋다. 그렇지만 바람직하고 후회 없는 개혁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심정이 든다. 개혁의 주체는 하나님, 개혁의 대상은 한국사회나 제도가 아닌 한국교회, 개혁의 시기는 지금, 개혁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향하여,즉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 같이,개혁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 구원, 개혁의 수단은? 개혁의 수단과 개혁의 대상은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개혁의 수단과 대상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상에 따라 수단이 달라질 수 있다. 대상을 교회 가운데 목회자로 본다든지, 성도의 삶으로 본다든지, 교회의 체제 또는 제도라든지, 아니면 교회 자체를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공통적인 수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우리는 사회적 개혁이나 혁신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된 개혁을 행해야만 한다. 제도 하나를 변화시키거나 교회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개혁은 아니다.그것은 단순한 변화일 뿐이다. 어떤 때는 혁신이 될 수도 있다.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치료하면 결국 또 발생하는 질병과 같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제도든 어느 체제든 항상 문제는 있다. 정도에 지나치기 때문에 변화를 원하는 것이지 개혁이라는 말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개혁의 수단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누구든 동감이 가지만 이것만큼 주관적이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해석만큼 쉽게 보이는 것이 없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 어려움보다 너무나도 주관적이기가 쉽다는 말이 더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해석의 주체가 성경 자체라고들 하지만 실제는 사람들과 신학자들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전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로마 카톨릭과 별다를 바가 없다. 해석을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개혁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은 악용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매스컴을 사용하는 분들의 의도는 나름대로의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여 확신을 가지고 행하고 있을 것이다. 보수적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다른 해석 기준을 가지고 행동을 취한다. 해석의 차이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달리 적용시키고 행동지침도 달라질것이다. 해석은 그 당사자의 지식, 경험, 그리고 지각에 따라 달라진다. 또 교파별로, 교단별로, 그리고 신학사상별로 달라진다. 이 모든 것이 통합되고 합일점을 찾지 못하면 개혁 운동은 단 하나의 흐름으로 끝나고 말 것이고 대중적 지지를 받지못한다.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나의 운동으로 그치고 만다. 루터의 개혁을 보면, 당시에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그 물살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하였다. 매스컴도 아니었다.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로마 카톨릭인들의 기득권을 여전히 공존하고 있었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구원관’ (Soteriology)이다. 이 구원관이 성경과 일치하면 누구든 동의할 것이다. 이 말은 누구든 구원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관이 분명하고 선명해야만 한다. 단순히 외적인 환경들을 바꾸겠다고 개혁을 일삼으면 결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름대로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다른 가치관을 외적인 요소로 바꾸지 못한다.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 성령은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구원에 대해 어떤 개념을 갖고 있느냐가 대중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구원관은 곧 신론, 즉 삼위일체론 (Trinity)과 기독론, 즉 그리스도론 (Christology)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두 교리에서 분명하게 내려지는 것은 칭의론이다 칭의론은 곧 믿음과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uptura), 그리고 ‘오직 은혜로’ 라는 슬로건들을 주창했는데 그것은 곧 구원관에 필수적이었고, 신론과 기독론에 필수적인 것이기에 많은 이들이 동감했던 것이다. 교파를 초월한다. 국가와 문화를 초월한다. 분명한 구원관을 설명되지 않으면 올바른 개혁의 흐름을 이끌 수 없다. 무엇보다도 구원관에 있는 칭의관이 정립되면 프로테스탄트들은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적 칭의관이 요청된다. 그러면 칭의관에서 행동지침이 나온다. 성도로서의 삶의 기준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행동지침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칭의관이 올바로 정립될 때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칭의관, 루터란 칭의관, 웨슬리안 칭의관, 로마 카톨릭 칭의관, 등등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느 칭의관이 과연 성경에 바르게 입각했는지 점검해야만 한다. 자신을 희생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희생은 아무 유익이 없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는 이라는 말보다 더 귀한 말씀이 없다. 사랑으로 라는 말은 곧 믿음을 동반하는 말이다. 그래서 믿음은 곧 칭의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칭의관은 또 다시 우리의 삶의 좌표를 정해줄 것이다.
성경적 칭의관이 정립되고, 구원관이 정립되면 성도로서의 삶의 기준이 분명히 정해질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에 아니 한국교회 성도를 향해 외친다: 어떤 협력이나 통합을 논하기 전에 한국교회의 칭의관을 정립해야만 한다고. 이 일을 위해 칭의관을 성경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고 나는 한국교회에 도전한다. 올바른 해석은 성경적 해석을 말한다. 성경적 해석이란 역사적, 문맥적, 구조적, 문학적, 등등 여러 과학들이 동원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전통적 해석이라 믿는다. 역사적으로 정통교회들이 지켜온 해석들을, 정평이 난 해석들을,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해석을 먼저 권하고 싶다. 이것은 역사적인 해석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역사는 해석을 위한 주춧돌이다. 역사적이지 않으면 검증되기도 어렵다. 역사적인 검증을 위해 교회사 연구를 한국교회에 도전장을 던진다. 자신들의 위치, 정체, 나아가야 할길 등은 역사, 즉 교회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편협 되고 아전인수격인 해석이 아닌 레흐린의 빈센트가 우리에게 말하듯이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인정받는 것”을 우리는 전해 받았고 그것을 연구해야만 한다. 이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목회자들은 이것들을 배우고 전달해야만 한다. 성도들은 전달받고, 모든 자들이 함께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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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세훈 2005.01.18 08:26
    오직 이 모든 것의 원인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믿음 없음이 문제임을 고백하고, 오늘 이 하루도 내안에 계셔서 나를 싫어 버리시지 아니 하시는 성령님께 인도함을 진실되이 구하며 나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자녀의 간구에 귀 기울이시고, 당신의 선하신 계획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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