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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왕하 4:29-35
성경본문내용 (29)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30)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31)게하시가 저희의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가로되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34)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전도특강 제4강

 

죽은 아이를 살리는 방법

 

말씀 : 왕하 4:29-35

 

1. 전도의 본질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

 

오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엘리사의 입장은 전도 사역과 관련해서 볼 때, 정확히 저와 여러분의 입장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를 살려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도사역의 본질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교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본질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육적인 죽은 아이를 살려내야 했지만, 우리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전도할 대상이 죽어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제대로 전도할 수가 없습니다.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전도해야 할 사람이 영적인 시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가. 목적에 대한 분명한 인식 - 살리는 것이 목표.

 

엘리사도 바로 이 점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엘리사가 그녀의 집에 간 목적은 아이의 죽은 몸을 깨끗하게 씻어주거나 그것에 향유를 바르거나 깨끗한 수의를 입히거나 적절한 장소에 묻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 아이는 여전히 죽은 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졌으니, 그것은 바로 그 아이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 목표는 중생과 회심입니다. 그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지식을 쌓게 해주는 것, 그리고 교회에 신실하게 잘 나오고 적당히 봉사하는 모범적인 성도가 되게 하는 것, 그리고 도덕적으로 잘 교훈하는 것... 그런 것들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사명은 단 하나 그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 이 일의 엄중성 /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욥바에서 도르가라는 죽은 여제자를 살려내었던 것처럼, 마치 바울이 설교시간 졸다가 떨어져서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려낸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 앞에 죽은 사람 갖다 놓고 살려달라고 애원한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반드시 그를 살려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떻게 죽은 사람을 살려내겠습니까? 그것이 전도입니다. 우리가 아무생각 없을 때는 그냥 복음 전해서 전도하면 되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러나 본질을 알고 나면, 이 전도라는 것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도라고 하는 사역을 생각함에 있어서 먼저 주님이 하라고 하신 그 전도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했는데 누군가가 복음을 영접하고 거듭나서 회심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누가 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인 것입니다. 전도한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의 헌신을 귀하게 생각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높임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고, 또 본인이 인정 영광 얻기 위해 전도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선교단체 시절 얼마나 이 문제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웠습니까? 누구는 많이 전도해 오고 열매를 맺는데, 나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때, 얼마나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시기 질투하는 마음에 사로잡혔습니까? 그것이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이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먼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엘리사나 베드로나 바울을 통해서도 그러한 역사를 이루셨고, 또 우리를 통해서 그러한 역사를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도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엘리사나 공통적으로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자로 이 자리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볼 때 아무리 자신이 연약해 보이고 초라해보여도,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이신 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 일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데, 우리가 그것을 못 믿겠다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전도할 때, 특히 마음이 강퍅하거나 완강한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 마음의 불신앙은 즉시로 우리에게 “이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겠는가?”라고 속삭입니다. 하나님은 이 동일한 질문을 에스겔에게도 하셨습니다.

 

(3)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

 

바로 우리도 에스겔과 같이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선입견을 가지고 “저 사람을 절대로 예수님을 믿지 못할 거야” 라고 미리 선을 긋지 말고, 에스겔처럼 “저 사람이 살아날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처럼 전능자의 손에 모든 것을 의탁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을 이겨낸 생명의 큰 군대가 행진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라

 

두 번째로 우리가 본문을 통해 배우는 바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사는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은 것을 알고, 자신의 종인 게하시를 시켜서 자신의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만일 엘리사가 자신의 스승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사례를 생각하고, 그가 보여주었던 사례를 본받기 위해 힘썼다면, 그는 이러한 실패를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러한 실패 뒤에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인 엘리야의 본을 그대로 본받아 행했고, 그리하여 그 아이를 살려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엘리야가 저에게 그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 안고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 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20)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21)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22)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왕상 17:19-22)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중요한 교훈은 바로 최고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이 세상의 참된 전도자로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다 불러내어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우리에게로 오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 또한 이웃에게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전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장 탁월한 전도의 비결과 방법을 바로 예수님에게서 배웁니다. 예수님은 전도의 최상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어떻게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방법으로 어떤 내용으로 전도하셨는지, 또 제자들에게 전도훈련을 시키실 때 어떻게 전도 하라고 명하셨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힘과 능력을 믿고 자기 나름대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취할 때 우리는 반드시 엘리사처럼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주 예수님의 정신과 방식을 본받을 때에만, 우리는 영혼을 구하는 일에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망각했던 엘리사는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었고, 그는 그것이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위상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자기는 엘리야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직접 가지 않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일에 대해서는 엘리사가 생각한 방법들에 늘 응답하시고 즉시로 기적을 일으켜주셨지만,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엘리야의 모본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자 하신 바가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을 매개체로 한 소생의 역사

 

그것은 바로 생명의 소생은 생명을 매개체로 하여 일어난다고 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전도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달되는 복음의 내용 곧 지식과 정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사람입니다. 물론 전해지는 복음의 내용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나 도구로서 사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영적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진리 자체가 바르게 전달되기만 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영적으로 개판인 사람을 통해서도, 심지어는 비중생자를 통해서라도, 복음의 진리가 바르게 전달될 때, 하나님이 그것조차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야 하고, 보편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참된 신자의 마음과 헌신이 담긴 복음 메시지를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게하시가 엘리사의 몸의 일부가 아닌 그저 무생물인 지팡이를 그 아이에게 암만 갖다 대어봤자,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게하시가 지팡이로 했던 것처럼, 아무리 참되고 바른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깨닫고, 체험하고, 순종한 진리가 아닌, 곧 우리의 생명력이 스며들어 있는 복음 메시지가 아닌, 나의 영혼과는 무관한 하나의 메마른 교리와 지식을 전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생물체인 지팡이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엘리사가 직접 가서 자신의 살을 그 아이에게 맞대었을 때, 소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하나는 생명의 역사는 생명을 매개체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레디의 실험을 아십니까? 사람들이 파리나 구더기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줄 알았는데, 레디가 실험해보니깐, 뚜껑이 열려 있는 병에서만 고기에 구더기가 생기는 것을 통해서 생명은 생명을 통해서만 생겨난다는 것을 증명했고, 파스퇴르도 이와 비슷한 실험을 해서 이 사실을 증명한 바가 있습니다. 미세한 미생물 하나도,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 없고 반드시 이미 있는 미생물로부터 번식해서 생명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복음전도의 원리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죽어있는 시체가 생명을 낳을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하기에 앞서서 먼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거듭난 자인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고, 그 생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이것이 꼭 구원파의 질문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확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전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근본 자기 신앙부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설사 자신이 거듭난 것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지금 영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 사람도 이 생명의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시나 계속되는 강조점이 전도는 나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내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전도할 수 있고, 그 전도의 사역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엘리사의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나의 생명과 인격과 영혼으로 그 사람을 품고 복음으로 섬길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엘리사의 행동들을 보십시오.

 

(32)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이 방과 침상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가 편히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엘리사만의 은밀한 공간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그 죽은 아이를 눕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우리 마음속에 눕혀져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내 마음의 침상에 가져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되고, 그들의 아픔이 나의 신음이 되고, 그래서 그들로 인해서 우리가 고민하고 밤잠을 설쳐야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모본대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하였습니다.

 

(33)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결국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 간구하며 매달리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울며불며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로 하여금 그 사람의 완악한 마음을 단숨에 부숴버리는 망치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기도는 견고한 성에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격기의 폭탄과 같습니다. 결국 기도를 통해서 한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엘리사는 기도한 후에 그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살을 맞대는 행동을 취하였습니다. 스펄전은 “기도 없는 행동, 그것은 주제넘은 짓! 행동 없는 기도, 그것은 위선!”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도와 행동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사는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34)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그는 시체를 향해 몸을 굽히고, 아이의 입에 자신의 입을 대고, 자신의 눈을 그 아이의 눈에 대고, 자신의 손을 그 아이의 손에 대었습니다. 아이의 싸늘하게 식어 있는 죽은 살이 선지자의 따스하게 살아있는 살과 맞닿았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즉시로 돌 같은 시체의 으스스하고 차갑고 싸늘한 기운이 자신에게 퍼져오는 것을 느꼈고, 또한 반대로 엘리사의 활력 있고 뜨거운 생명의 기운이 그 죽은 아이로 퍼져갔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을 그 시체와 연합시켜서 그 시체를 품고서 자신의 생명을 무생물체에 전이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전도는 그 사람을, 그 영적으로 죽은 시체를 자신의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의 죽은 상태로 인해서, 그리고 그 영혼의 파멸당할 운명으로 인해서 고통스럽고 애절하고 비천한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파멸을 우리 자신의 파멸로 느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면, 우리 자신이 그 진노 아래 있는 것처럼 그 상황에 대해 진정한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를 우리 자신의 죄인 것처럼 그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하고, 그것을 중보하기 위해 주님 앞에 제사장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상한 목자의 심정”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어차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전적으로 주님께 달려 있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저 메시지만 잘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 뒤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도무지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전도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을 자신의 자궁에 넣고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서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품고 섬긴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7)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살전 2:7-8)

 

이런 구절들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전도란 결국 우리의 생명을 죽은 저들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영혼과 생명과 인격을 그들에게 다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은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그 사람의 죽음의 냉기와 공포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 물속에 빠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에게 임할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와 다가올 임박한 심판의 공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을 인식할 때 우리가 어떻게 전도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내일로 미룰 수 있겠습니까? 복음을 무감각한 마음으로 대충 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어떤 집에 불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그 집의 문을 두드리면서 말할 때, 웃으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당신 집 뒤편에 불이 났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집주인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장난인줄 알고, 도리어 화를 내면서 물 한 바가지를 그 사람 머리 위에 쏟아 부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전할 때 이렇게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우리의 말과 말투와 표정을 통해서 정말 복음의 긴급성과 그들의 영혼의 운명의 위급함이 절실하게 드러납니까? 정말 진지하고 엄숙하게 복음을 믿어야만 이 임박한 진노와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그들의 처한 상황을 정직하게 설명해주고, 복음을 믿도록 강권하며 설득합니까?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 전도할 때 이런 그들의 임박한 진노와 위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말 안하고, 그저 “교회 좀 나오세요. 너무 좋아요.” 아니면, 기껏해야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도 웃으면서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전도가 아닌 것입니다. 전도는 그 사람을 내 마음에 품고 그 사람에게 임할 임박한 심판을 깊이 인식하면서 상한목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4. 살기 전까지 안심하거나 만족하지 말고, 수고를 멈추지 말라.

 

마지막으로 네 번째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은 그 사람이 거듭나고 회심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심하거나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그 아이를 품고 기도했을 때, 그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해져 왔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엘리사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목표가 성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거나 이제 다 끝났다고 방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에게서 어떤 소망의 모습이 보인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말한다거나, 말씀을 듣는 중에 그 눈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을 보았다거나 한다면, 살이 따스해지는 현상이니 감사할 일이지만,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하는 것은 살이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우리가 돌보는 영혼에게서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단순한 반성이나 잠간 느끼는 감동이 아니라 회심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열심을 내었습니다.

 

(35)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결코 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그 아이가 확실히 살았다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걱정하며 탄식하며, 헐떡거리며, 갈망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의 영혼이 완전히 회심하여 구원받는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걱정하며, 거룩한 불안을 갖고 이 같은 수고를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회심의 증거입니까? 그 사람의 입술의 고백과 변화된 삶, 말씀을 사모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회심 여부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회심의 증거로 천사와 같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그 아이가 뛰어 다니며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재채기 하는 것만으로 그 아이가 살아났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심의 증거로 당장에 막 뛰어다녀야 회심 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재채기만 하더라도, 그 사람이 거듭난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전도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떻게 죽은 영혼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는 원리를 늘 기억하면서 내가 먼저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영혼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복음으로 섬겨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전도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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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복음전도1강] 교회의 지상 최대의 사명 : 선교 마 28:18-20 최상범 3002
65 [잠언] 게으름 3강 - 게으른 자의 선택 : 부주의 잠 24:30-34 최상범 3095
64 [잠언] 게으름 6강 - 게으른 자의 정욕 잠 21:25 외 다수 최상범 3137
63 [잠언] 게으름 4강 - 게으른 자의 핑계(1) 잠 22:13; 26:13 최상범 3219
62 [잠언] 게으름 7강 - 방탕한 수면생활에서 벗어나라 잠 19:15; 잠 20:13 최상범 3219
61 [잠언] 게으름 2강 - 게으르지 아니한 자의 게으름 잠 26:14 최상범 3230
60 [기독교세계관]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3862
59 [기독교세계관] 대중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4136
58 [잠언] 게으름 8강 - 현숙한 여인 잠 31:10-31 최상범 4496
57 [기독교세계관] 이성교제의 문제점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4824
56 [잠언] 게으름 1강 - 게으름의 본질과 그 결말 잠 6:6-11외 다수 최상범 6370
55 [2017년 복학기 교회론 특강]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실히 받드는 교회(3) file 갈 5:16-26 손재호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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