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296
  • 어제방문자 : 
    1,077
  • 전체방문자 : 
    1,414,312
조회 수 3137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잠 21:25 외 다수
성경본문내용 (25)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 함이니라
강설날짜 2013-02-10

2013년 2월 10일 한결교회 오후강설
잠언 제46강

 

게으른 자의 정욕

 

말씀 : 잠 12:27, 19:24, 21:17, 21:25, 22:13-14, 23:20-21

 

1. 복습

 

우리가 지난주에 배웠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에까지 맞닿아 있는 성화라는 커다란 그라운드를 허락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그 일에 동참할 수 있게 허락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며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하셨고, 또 그 일한만큼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화라는 그라운드를 허락하셔서 기대하신 것이 바로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미 얻은 은혜를 토대로 해서 그 은혜에 마땅함으로 우리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성화의 커다란 그라운드에 세워놓으신 질서는 바로 영적추수의 법칙입니다.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애쓴 만큼 열매를 맺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조건성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농사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얼마나 많은 수고와 애씀과 노력이 필요합니까? 매일 새벽에 더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그것을 참고 일어나서, 밭에 가서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갈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낮까지 그렇게 수고하며 땀을 흘려야 농사가 되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놀고 싶고,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열매를 바라보면서 참고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그 땅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가시와 엉겅퀴가 온 지면을 뒤덮고, 돌담이 무너져서 짐승들이 와서 농작물을 다 파헤쳐 먹고, 결국에는 그 땅이 황폐화되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추수의 원리가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늘 우리가 말씀 충만, 성령 충만, 소원 충만해서, 말씀 읽고 기도하고 싶은 소원으로 넘쳐서 그렇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원해서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게 되는 그러한 상황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안에는 쉬고 싶고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마음대로 가만히 놔두게 되면, 우리의 삶에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죄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되어서 도저히 열매 맺는 삶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이 신앙의 의무를 함에 있어서 하기 싫은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러한 게으름을 꺾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쉽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절제해야 하고 참아야 하고, 잠을 줄이고, 금욕하면서 오직 이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말했던 성화의 원리로서 농부와 군사와 운동선수의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충성스러운 삶은 Simply 라이프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잘 하려면, “나는 도서관하고 학교밖에 몰라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나가고 정말 열매 맺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말씀과 기도밖에 몰라요...” 그러한 말씀과 기도와 순종하려는 삶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것이 재편되고 Simple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피를 흘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한 실질적인 피나는 노력과 몸부림이 없이, 그저 누릴 거 다 누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면 그런 삶에는 결코 열매란 것이 있을 수 없고 성화의 삶이 없고, 그 어떤 좋은 것도 우리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를 늘 생각하면서, 은혜에 마땅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들을 성실히 준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추수의 원리 때문에 하나님이 성화라는 커다란 그라운드에서 인간들이 살아가고 걸아 가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사람마다 거룩해져가는 것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조금 올라가다가는 주저앉아서 올라간 시간보다 더 많이 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십자가 내려놓고 서너 명이 모여 앉아서 고스톱 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예 뒷걸음질 치면서 신앙을 포기할 양으로 들어왔던 문을 향해 다시 걸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성화의 그라운드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날마다 이 게으름의 악과 싸워나가야 합니다.

 

2. 상식을 뛰어넘는 게으른 자의 귀차니즘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일을 주실 때, 터무니없이 어렵고 불가능한 일을 주셔서 도무지 일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면 얼마든지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그래서 그것으로 먹고 살고, 부를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밖에 사자가 있어서 내가 나가면 찢겨 죽을 것이다 핑계하면서 나가서 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가서 뭐라도 일하고 수고하면 얼마든지 열매 맺을 것들이 있고, 먹을 것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귀찮다고 안 해서, 눈앞에서 그러한 열매 얻을 기회들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귀차니즘에 대해서 몇 구절 더 살펴보겠습니다.

 

(27)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 12:27)

 

여기서 ‘게으른 자’라고 하는 것은 “태만하고 느슨하고 느린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잡을 것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냥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고, 뒤에 ‘사냥하지 아니하나니’라는 말에서 ‘사냥하다’는 엄밀히 말하면 ‘사냥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얻다 또는 굽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직역하자면,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①사냥할 것도 사냥하지 않는다. ②사냥한 것도 굽지 않는다. 둘 중의 어느 해석을 취해도 결론은 똑같습니다만 어감 상 두 번째 해석이 보다 나을 듯 싶습니다.


즉 게으른 자가 어떻게 사냥을 해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냥한 것을 구워야 먹을 텐데 굽는 것을 귀찮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굽지 않았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구워 먹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모습은 게으른 자의 상식을 뛰어넘은 귀차니즘(?)을 말해줍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24)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게으른 자는 먹을 것이 주위에 가득 널려 있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굶주리고 있습니다. 1행에서 게으른 자는 자신의 손을 그릇 속에 숨기고 있습니다. 손을 그릇에 넣고 감추었다는 것은 집어먹을 의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고, 소원은 있는데, 그러나 손을 들어 입으로 되돌리기를 피곤하게 생각해서 안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정도로 게으른 자는 없습니다. 과장법이기는 하지만 게으른 자의 귀차니즘을 조롱조로 비꼬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이 구절에서 일차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열매를 얻고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나가서 도전하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 얼마든지 열매를 얻고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많은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건강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손쉬운 기회조차도 귀차니즘으로 인해서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굶주림과 결핍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혼자 자취하는데, 얼마든지 수고스럽지만 스스로 요리해서 먹으면 알찬 식단이 되어서 건강을 유지할 텐데, 그것이 귀찮아서 대충 해먹고, 인스턴트식품 먹고, 끼니를 거르든지 아니면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건강을 망치는 것이죠. 이것이 게으른 자의 귀차니즘입니다. 게으른 자는 바로 만사가 다 그런 식입니다. 뭐라도 조금이라도 수고하고 애쓰면 좋은 길이 있고, 많은 열매를 얻을 기회들이 있는데, 귀찮으니깐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결핍과 굶주림을 초래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러한 게으름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늘 주의하면서, 만사에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애쓰는 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요즘 들어 취직하기가 어렵고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해도, 그래도 수고하고 애쓰면 다 먹고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먹고 살도록 다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허락하신 우리의 재능을 활용해서 기회를 잘 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내전으로 인해서 피난을 가는 바람에 기아를 겪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부분 이 아프리카 사람들의 국민성이 게으릅니다.


케냐 선교사가 와서 이야기해주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선교사가 집을 짓기 위해 일군들을 고용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새벽 6시부터 와서 수고하고 부지런히 일할 텐데, 거기서는 9시가 되어도 안 오고, 10시쯤 되어야 느릿느릿 걸어와서, 30분 정도 커피마시면서 노닥거리다가 한 시간 잠간 일하고, 또 쉬고 놀고... 그런 식이었습니다. 선교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몇 마디 했더니 도리어 그들이 선교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나라 문화요 국민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 말고는 자원 하나 없고, 전쟁의 폐허가 된 최빈국이었지만, “열심히 잘살아보세” 하며 노력했을 때,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자원 널려있고, 따뜻한 나라인데도 게으르니깐, 별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살기 힘들어도 노력하고 애쓰면 얼마든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도전하지 않고, 귀찮아서 안 해서 문제지, 이 세상은 얼마든지 그런 기회들로 널려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대우 김우중 사장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고 애쓰면, 그래서 날마다 수고하면서 기도에 힘쓰고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데 힘쓰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르짖어 구하면, 그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몸부림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우리가 이루기에 너무나 어려운 불가능한 것을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라고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성령에 계신다는 것과, 또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은혜를 은혜의 방도를 통해서 주시는데, 우리가 얼마든지 수고하고 애를 써서 은혜의 방도의 집착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은혜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변화된 삶과 인격으로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우리가 도전하지 않고, 귀찮아서 안 해서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재능과 은사와 특권과 기회들을 낭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이요 죄입니까? 물론 다들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나도 사도바울처럼 성령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을 가지는데, 실제로 그러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으니깐, 결국 영적으로 핍절하고 결핍한 삶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악과 싸워야 합니다.

 

3. 게으름의 발전 : 의무 포기 -> 죄의 정욕의 지배

 

(25)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 함이니라(잠 21:25)

게으른 자의 욕심(욕망)이 그를 죽입니다. 왜냐하면 손으로 일하기를 단호히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는 스스로의 생명을 죽이는데, 그 원동력이 정욕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입니다. 그런데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는 것이 무슨 칼로 찔러서 갑자기 죽이는 식으로 눈에 보이게끔 급격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소량의 독이 섞인 음식을 먹게 해서, 서서히 죽게 되는 식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멸망은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그를 죽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느 날, 칼을 들고 왕실에 뛰어들어서 왕을 죽이려는 자객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대비가 되어 있는 것이죠. 서서히 왕의 음식에 독을 섞어서 서서히 죽게 만들었던 역사적 사례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이에 서서히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들 가운데 “살인, 간음, 배교와 거짓말”같은 것들은 이를테면 자객의 암살과 같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고, 게으름은 우리 삶에 독을 타서, 서서히 우리도 모르게 고사시키는 죄입니다. 그러니까 더 무서운 죄입니다.


게으름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서서히 사망에 이르게 합니까? 게으름의 시작은 우선 소극적입니다. 처음부터 칼을 우리에게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소극적으로 접근합니다. 무엇으로 접근합니까? 자기를 사랑하도록 속삭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처음 출발은 자기 사랑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속에 베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의무를 행하게 하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게 하지 않거나, 그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것이 게으름의 시작입니다. 의무를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최선을 다하면 힘이 드니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게으름의 시작입니다. “처삼촌 벌초하듯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벌초라는 것은 똑바로 앉아서 잔디가 아닌 것들은 일단 뽑아내고, 잔디는 정교하게 낫으로 일정한 높이로 잘라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초는 나란히 식구가 앉아서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삼촌이 나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억지로 끌려가기는 했는데... 처도 별로 사랑하지 않는데, 처의 아버지도 아니고, 삼촌이면... 몇 번 명절 때 본적도 별로 없는데, 그 사람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다리 아픈 것 참아가면서 앉아서 잡초를 뽑겠습니까? 그냥 대충 하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시작 자체는 일을 하기는 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어느 날 게을러졌다고 해서, 당장에 모든 의무를 떼려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를 하기는 하는데, 충실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딴 생각하거나, 조는 것이죠. 그것이 게으름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게으른 자는 갑자기 무슨 큰 악을 행한다든지, 신앙의 의무를 내팽개친다든지 하는 것은 없지만, 무엇이 없느냐 하면 적극적으로 선을 위해서 온전히 달려 나가며 전진해 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아야 합니다.


죄와 관련해서 사도요한이 가졌던 중요한 사상이 사랑이 아니면 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둘 중 하나인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특별히 불화하거나 갈등이 없어도, 이미 미워하고 있는 것이고, 그 안에 생명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적극적인 선행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 때는 그것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것과 똑같은 죄악입니다. 거룩한 삶과 죄악된 삶은 동쪽과 서쪽이 먼 것같이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지 않으면, 중간에 무슨 중립지대가 있어서 한참 지나면 죄악된 삶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 없으면 곧바로 죄악된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곧바로 죄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그 반대도 성립합니다. 죄의 길을 떠나서 한참가야지만 신앙의 길이 나옵니까? 죄에서 진실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곧바로 신앙의 길이 나옵니다. 그만큼 가까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신앙생활은 “도 아니면 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을 찾으라... 하나님을 추구하라...” 그 명령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삶이 아니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삶이고 죄를 간절히 찾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바로 그러한 적극적으로 선행을 행하는데 최선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무를 내팽개치거나 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행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선행을 행하는 것이 없고, 적당하게 하는 것이죠. 그것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죄와 동급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달란트 비유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악하고 게으르 종은 한 달란트를 받아서 가만히 감춰두고 꼼짝 않고 앉아있었습니다. 달란트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은사라기보다는(왜냐하면 재능대로 달란트를 주셨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어진 재능으로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느냐를 가늠해주는 하나의 가능성, 또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그러한 자신의 재능으로 열매를 남길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낭비하는 것이죠. 그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자기 집에다 자동차를 놔두고 전혀 타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를 산 효과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달란트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이런 상태로 그냥 있다가 나중에 주인이 와서 찾으니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놓은 것이죠. 무엇을 내놓기는 내놓았습니다. “본전은 내가 안 잘라 먹었습니다. 본전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본전 안 잘라 먹은 게 어디냐, 그런대로 잘했다” 그러십니까? 도리어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시면서 책망하시고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큰 악을 안 행하고, 적당히 이 상태를 유지만 하면 된다.”가 아니라, “보존”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도록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주신 것은 바로 이윤을 바라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었으면, 열매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냥 죽지만 말고 살아라..” 그것을 기대하면서 씨앗을 심는 농부가 어디 있습니까? 열매 맺는 것을 기대하고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으면 끝입니까? 그러한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노력과 애씀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이 악하고 게으른 종은 “하나님은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고 말하면서, “내가 수고하고 애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짠하면 열매가 탁 나오게 하시는 그런 분 아니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본전 안 잘라 먹고 그대로 보존한 게 어디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종을 향해 주인은 “이 악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 끌어내어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삶의 옵션이 아닙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한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참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의 증거입니다. 열매가 없는 사람은 근본 자신의 중생을 의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 땅에 두신 목적이 바로 열심히 수고하고 일하여서 열매를 남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열매를 보시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들과 애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성화를 위해 달려가지 않는다면, 적당히 현상 유지하면서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여 죄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과 같고 그 마지막은 지옥 형벌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게으름의 무서움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치명적이고 두려운 결과들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정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결국은 현상유지조차도 하지 못하고 죄의 정욕에 빠뜨립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사망 가운데로 몰아갑니다. 두고두고 가슴을 울리는 역사적 사건이 단종의 죽음입니다. 수양대군이 죽이는데, 단종이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산속에 유배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두려워서 죽이는 것입니다. 죽여 버려야지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죄도 우리 안에 자기를 사랑하게 하여 의무를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자체가 이미 신앙의 길을 이탈한 것인데, 게으름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아예 의무를 저버리게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은 언젠가는 그만두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언젠가는 그만두게 되어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없으면 그 형식을 지탱하기 힘듭니다. 어떻게 져버립니까?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죠. “그것을 꼭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노력해서 은혜의 삶을 살고, 이렇게 해서 죄를 이기고, 이렇게 저렇게 실천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라 라고 하면, 상당수의 교인들은 “아이구... 저렇게 어려워서 신앙생활 어떻게 하나? 저거는 교회에서 월급 받고 사는 사람들 수준이지... 나야 아마추언인데..”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아마추어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신앙의 프로입니까? 신자의 본분의 인식 없이, 성직에 대한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식으로 성도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고 하는 것 자체가 로마가톨릭적인 잔재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자녀로서 한 머리에 붙어있는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또 자기를 설득하며 속삭입니다. 무언가를 하려다가 옆을 보면서 “아무도 안하네... 나도 안해야지..” 그렇게 해서 그만둡니다. 잘 하고 있다가도 남이 안하고 자기만 하고 있으면, 자기도 슬 빠져나오는 것이죠. 그러나 정말 은혜 받았을 때에는 그런 비교 의식 속에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자기의 의무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접어버리도록 만듭니다. 이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쉬운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의무를 완전히 져버렸습니다. 이제는 정말 편안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게으름의 죄는 거기서 만족할까요? 절대 아닙니다. 소극적인 목표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해야 할 선과 마땅한 의무를 위해서 수고하기 싫다 라고 하는 소극적 욕구는 만족시켰는데,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나를 즐겁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 게으름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신성한 의무를 져버림으로 살아있는 신자가 되기를 포기한 지경에 이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오직 자기를 즐겁게 해달라는 요구가 솟구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정욕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음란과 직결되어 있고, 술과 세상 일락과 방탕한 삶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밭에 씨앗을 심어놓았어도 일주일정도 방치하면, 곡식을 거두기를 포기한 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거기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무들을 중단하면, 우리 속에서 그런 정욕의 잡초들이 계속해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소극적인 편안함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해서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어지는 것이죠.

 

(17)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잠 21:17)

 

이 구절에서 ‘연락’은 ‘유쾌함, 환희, 기쁨,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은 잔치의 이미지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연락과 포도주와 기름은 오늘날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TV, 게임, 드라마, 영화, 스포츠, 연애, 음악, 취미생활 등등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으름의 정욕은 바로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거기에 몰두하게 합니다.

 

(13)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14)음녀의 입은 깊은 함정이라 여호와의 노를 당한 자는 거기 빠지리라(잠 22:13-14)

 

13절과 14절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으른 자에 대해서 하나님이 노하시는데, 그 노를 당한 자가 어디에 빠집니까? 성적인 방탕에 빠집니다. 게으른 자는 반드시 성적인 범죄로 빠집니다. “내가 음행을 행한다”라는 것은 내가 게으른 자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도 열심히 전쟁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일 없이 평안히 앉아서 성을 거니고 있을 때, 음행에 빠졌던 것입니다. 게으른 자는 음란의 함정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징벌입니다. 게으른 삶은 자기를 사랑하는 근본 우상숭배적 삶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마음의 정욕대로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셔서 몸을 음행으로 더럽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20)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21)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 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잠 23:20-21)

 

게으름은 술과 고기와 맛있는 것, 편안한 쉼, 잠을 좋아합니다. 육욕을 채우는데 급급한 모습입니다. 그것은 한 그릇 식물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모습과 비슷한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름은 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상태로까지 끌고 가는 것이 게으름의 죄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사람을 이렇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으름을 우리가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되고, 이 게으름의 죄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서 우리를 사로 잡아가는지를 알아서 이 게으름의 죄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퇴치하는 방법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하루하루 죄를 이기기 위해서 자기 의무를 충실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사실은 그러한 정욕으로까지 발전해서 자기를 파멸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처치법입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조회 수
74 [복음전도 6강] 전도의 비유(1) 요 1:19-23; 마 13:1-8 최상범 2129
73 [복음전도 3강] 잠잠할 수 없는 소식 왕하 7:9 최상범 2210
72 [복음전도 5강] 사망과 생명의 원리 고후 4:12; 요 12:24 최상범 2227
71 [복음전도 4강] 죽은 아이를 살리는 방법 1 왕하 4:29-35 최상범 2580
70 [복음전도2강]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요 21:15-17 최상범 2620
69 [기독교세계관] 회심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2765
68 [기독교세계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2897
67 [잠언] 게으름 5강 - 게으른 자의 핑계(2) - 성화론 잠 22:13 최상범 2900
66 [복음전도1강] 교회의 지상 최대의 사명 : 선교 마 28:18-20 최상범 3002
65 [잠언] 게으름 3강 - 게으른 자의 선택 : 부주의 잠 24:30-34 최상범 3095
» [잠언] 게으름 6강 - 게으른 자의 정욕 잠 21:25 외 다수 최상범 3137
63 [잠언] 게으름 4강 - 게으른 자의 핑계(1) 잠 22:13; 26:13 최상범 3219
62 [잠언] 게으름 7강 - 방탕한 수면생활에서 벗어나라 잠 19:15; 잠 20:13 최상범 3220
61 [잠언] 게으름 2강 - 게으르지 아니한 자의 게으름 잠 26:14 최상범 3230
60 [기독교세계관]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3862
59 [기독교세계관] 대중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4136
58 [잠언] 게으름 8강 - 현숙한 여인 잠 31:10-31 최상범 4496
57 [기독교세계관] 이성교제의 문제점 file 기독교세계관 최상범 4824
56 [잠언] 게으름 1강 - 게으름의 본질과 그 결말 잠 6:6-11외 다수 최상범 6370
55 [2017년 복학기 교회론 특강]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실히 받드는 교회(3) file 갈 5:16-26 손재호 29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