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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요 1:19-23; 마 13:1-8
성경본문내용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21)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3)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19-23)

(1)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1-8)

전도특강 제6강

 

전도의 비유(1)

 

말씀 : 요 1:19-23; 마 13:1-8

 

1.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말라기를 끝으로 400년간 선지자가 전무한 영적인 암흑기가 있은 후에 갑자기 유대광야에 세례요한이 출현했습니다. 이 세례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 앞에서 사람들마다 “세례요한이 혹시 오리라한 엘리야가 아닌가?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며 수근 거렸고, 급기야 바리새인들은 그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물었습니다.

 

“(19)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20)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21)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22)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3)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요 1:19-23)

 

이에 대해 요한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기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오리라한 엘리야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오리라한 엘리야인데,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가 가죽 띠었습니다. 그러면 솔직하게 자기는 “오리라한 엘리야다”라고 말하면 될 텐데, 헷갈리게 “나는 소리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전도자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엘리야였지만, 엘리야라고 말하지 않고 소리라고 말한 이유는 자기를 드러내기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 앞서 보냄을 받은 엘리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비록 엘리야가 맞지만, 스스로 그 정체를 밝히게 되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자기가 받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고 그분을 증거하는 일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것은 속였다기보다는 자기소개는 생략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모든 자기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쫓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역자의 자세에 대해서 좋은 찬송가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스스로를 “소리”나 “나팔”과 같은 하나님의 도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메시지를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 메시지가 드러나고, 예수님이 증거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고, 완전히 ‘내’가 없는 그런 삶입니다.

 

우리는 뭔가 자기가 열심히 해서 대단한 일과 업적을 남기면, 좀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박수를 쳐주었으면 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본인은 언제나 “나는 도구다.” 라는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칭찬과 영광도 절대로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바로 그런 의식을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스스로를 광야에 외치는 소리라고 하면서 인용한 구약본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사야 40장 말씀입니다.

 

(1)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2)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39장에는 유다민족이 결국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40장인데, 놀랍게도 소망의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습니다. 죄가 사하여졌고, 이스라엘이 정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가 끝이 나고,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3)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4)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바벨론에서 유대 땅으로 오기 위해서는 중간에 사막이 있고 지형이 험악하기 때문에 그 지역을 통해서는 갈 수 없고 멀리 돌아서 북쪽 다메섹 지방을 거쳐서 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여호와께서 친히 이 광야에 임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 길을 예비해야 한다. 골짜기는 매꾸어지고 산은 낮아져서 바벨론에서 유대 땅까지 평지대로가 놓이게 될 것이다.” 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사야 본문에서는 그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꽃이 피어서 에덴동산같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광야에 임하시고 시온을 향한 시온의 대로를 만드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로 걸어가실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날 것입니다.

 

(5)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6)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7)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입니다. 66장 이사야 전체를 통해서 바로 이 한 가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제가 중심주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는 외치는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은 결국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이사야의 소명의 사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9)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10)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11)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결국 그 오리라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친히 강한자로 오셔서 광야를 에덴동산 같게 하고 시온을 향하는 시온의 대로를 만드셔서 백성들로 하여금 걸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바로 자기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자는 자의 소리일 뿐이고, 자기는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풀과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 그분의 영원한 말씀을 높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실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자기인식을 하였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이사야의 소명 체험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을 보시면...

 

(1)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2)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3)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4)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소명 받을 때에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 가서 스랍가운데(천사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찬란한, 엄위로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입니까? 선지자는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였고, 이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은 그 앞에 있는 인간이 누구든지 간에, 그 인간에게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첫째는, 존재의 크기와 위대함에 있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끝이 없는, 무한하고 영원하시고 위대하고 광대한 분이시며, 자기는 그 하나님 앞에서 정말 바람에 부는 티끌과 같은 존재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자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누가 누구보다 낫고, 누가 누구보다 훨씬 훌륭하고 존경스럽다라고 하는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무한 앞에서는 큰 유한이든지 작은 유한이든지 그 상대적인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모두 한 점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만난 사람은 교만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서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 그리고 모든 우주의 중심은 나라고 하는, 내가 신이라고 하는 교만이 산산히 부서지고 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철저한 자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기 전에는 자기의 결점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제법 자기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영광의 빛이 비취게 되면, 그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빛 앞에서 자신이 너무나 불결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그 영광의 빛을 경험하면서 이 두 가지를 경험합니다. 자기는 하찮은 존재이며 더러운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5)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비참하고 더러운 죄인인데, 그 순결하고 위대한 하나님을 만났으니 나는 이제 어찌할꼬...” 그러면서 두려워 떠는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표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때에 “할렐루야! 야 신난다. 난 진짜 은혜 받았다. 나같이 주님 만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라...” 라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누구이십니까?”라고 하였고,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완전히 고꾸라져서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찬란한 영광의 빛 앞에서 이사야와 같이 자신이 티끌과 같은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다 부서지고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먼저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전도특강이고 뭐고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이 중요합니다. 이 일이 내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이런 저런 좋을 뜻을 세우고, 그리고 그분의 일을 하려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쓰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동기로 하는 것이냐 했을 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위해서 비전은 품었지만, 그분 앞에서 무너져본 경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 앞에서 자기는 티끌 같은 존재이며,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불결하고 더러운 죄인일 뿐이라고 하는 자기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그가 끊임없는 비전을 품었다 하더라도, 결국 거기서 자기 인정 영광을 구하게 되어지고, 그래서 많은 신앙의 문제들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선지자로서 부름받기 전에 철저히 무너진 사람이었습니다.

 

(6)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7)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때에 천사 중에 하나가 날라 와서 제단 숯불에 있는 그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지졌습니다. 그 뜨거운 숯불로 입술을 지지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입술이 새카맣게 타들어갑니다. 왜 하필이면 입술을 지졌을까요? 선지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제유적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세례를 줄 때, 물의 의미는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온몸을 그 물로 씻는 것인데, 그 중에 대표로 머리에다가 물을 뿌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백체 모든 것이 거룩한 불로 지져져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을 지지질 않고, 이사야의 입술을 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외칠 이사야의 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핀 숯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을 말하는데, 그것으로 지진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제단의 숯불은 어디에다가 쓰입니까? 제물을 번제단에 올려놓으면, 그 제물을 태워버리는 것이 핀 숯입니다. 이러한 불태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핀 숯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당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들려오는 음성이...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곧바로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의 경험 안에는 이미 사명이 포함이 되어있다고 여러 차례 설명했습니다. 은혜 안에는 이미 사명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 안에서 대대적인 회심과 부흥과 갱신의 역사가 있은 뒤에는 반드시 선교사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뒤집어 놓고 생각하면, 바로 이 선교사역을 위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또는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신앙을 갱신하여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구원하시고 새롭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으시면, 그때는 세상 끝 날입니다. 더 이상 구원받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곧바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새롭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고, 또 교회 안에서 신앙이 갱신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이 세상에 구원받아야 할 택자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는 즉시로 “아 주님께서 나에게 하라고 시키실 일이 있구나. 나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사명을 회복하면, 이사야와 같이 “주님 나를 보내소서.”하면서 주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간다고 해서 꼭 선교사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 파송되겠지만,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 다시 파송되는 것입니다.


개그맨 김미화 씨는 연예계에서 한번 붙잡히면 끈질기게 전도하는 지독한 전도쟁이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한 이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방송국에 보내신 이유는 물론 재밌은 연기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라고 하신 것도 있겠지만 방송국에서 함께 일하는 만은 동료와 후배 연예인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하신 것 같아요. 전 그 사명을 감당해야죠.”

 

이렇게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은 두 눈빛이 반짝이면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명감이 있습니까? 나의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이웃들과의 만남에서, 내가 그들에게 파송된 사람이라고 하는 사명감이 있습니까? 이 사명감이 없는 삶은 살았으나 사실 죽은 삶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먼저 이 이사야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체험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오직 예수의 영광만을 드러내고 그분의 복음을 외치는 소리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9절을 보십시오.

 

(9)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10)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시를 원하셨고, 이를 위해 이사야를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깨닫지 못하게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고 귀를 막게 하라고 하시고 그들이 듣고 깨닫고 돌이킬까봐 염려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염려하셨다면 아예 이사야를 안보내시면 되는 것인데, 이사야에게 메시지를 주어 전하게 해놓고서는, 또 한편으로 그들이 듣고 깨닫고 돌아올까봐 염려하는... 곧 제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어떻게 보면 심각한 모순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신약에서 여러 번 인용이 되는데, 그 용례를 다 파악해보면, 결국 이 말씀은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반드시 듣는 사람들과 듣지 아니하는 사람의 구분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10)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1)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12)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3)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4)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0-15)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비유를 다 풀어 설명해주십니다. 그래서 깨달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를 믿지 아니하고 따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이 비유가 수수께끼로 남게 합니다. 이것은 택자들과 불택자들을 가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말씀이 택한 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로 깨닫게 하셔서 구원의 능력의 말씀이 되게 하시지만, 그 동일한 말씀이 불택자들에게는 깨닫는 은혜가 없으므로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이 말씀이 자기에게 걸림돌이 되어서 그들로 더욱 강퍅하게 만드는 것이 되어 그들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심판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4-16)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8)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 2:7-8)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6)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3-6)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이 듣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불택자들로 하여금 더욱 강퍅하게 만들어서 심판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헛되이 뿌려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전해진 복음은 일단 전해지면 그 들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으로 역사하든지 생명으로 역사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반드시 능력으로 역사하는 복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우리는 전하고 봐야 됩니다. 들을지 안 들을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끝까지 안 들었다고 해서 그 전도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 복음 전도를 통해 그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택자들이 듣고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깨닫는 은혜 주시는 것을 불택자들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 말씀도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고 깨닫기를 원하고 돌아가기를 원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이 아니죠. 도리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아니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깨닫는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을 생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그러한 의미의 심판의 선고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게 아니라 남은자만 구원받습니다. 이것을 이사야 6장 1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이사야에게 대부분이 너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들을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남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심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또 소수의 어떤 사람은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점은 두 번째 비유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2. 씨 뿌림

 

“(1)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2)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4)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1-8)

 

예수님은 전도를 농부가 씨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비유는 현실에 있는 이야기에 과장법, 비현실성을 곁들여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중요한 교훈은 전도는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바라고 마음을 들여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씨를 뿌려야 하지만, 그러나 일단 그 씨가 우리 손을 벗어난 이후부터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좋은 밭인지, 돌밭인지, 가시떨기 밭인지 모릅니다. 일단 뿌리고는 봐야 하는데, 뿌린 뒤에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소망을 가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농부가 씨를 뿌릴 때 흩뿌리는데, 비록 3/4이 손실되지만, 그러나 분명히 결실을 맺는 씨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절하고 배격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들을 사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전도하면서 “어차피 다 안들 것인데, 요즘 누가 교회 다니려고 하나, 더욱더 나 같은 사람이 전하는 이 복음을 듣고 누가 믿겠냐..” 그러고서 전도하면 절대로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을 듣고 정말 회개하고 돌아올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전해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마다 듣지 아니하고, 유대인들은 더욱 날뛰면서 박해를 해오자, 두려워 낙심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그래서 이 확신가운데 열심히 씨를 뿌렸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개척된 교회가 고린도교회 아닙니까?


이승구 교수님이 초등학교 시절 때, 동네 아주머니의 전도로 교회를 나와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그 아이가 이런 훌륭한 신학자가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용호초등학교에, 봉림초등학교에 제2의 제3의 이승구 교수님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확신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땀을 흘리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람들이 다 거절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부지런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렇게 소망가운데 씨를 뿌리다보면 반드시 듣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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