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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기독교세계관
강설날짜 2012-01-29

2012년 1월 29일 & 2월 5일 한결교회 신년 기독교 세계관 특강

 

제 4 강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1.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법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만일 법이 없으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들마다 서로 아무렇지 않게 살인하고, 폭력을 행하고, 빼앗고, 도둑질하고, 성폭행하고 하면서 그 사회가 개판이 될 것입니다. 완전히 동물들의 세계,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될 것이고, 전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 나름의 법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렇게 법이 잘 지켜지고 법의 정의가 잘 실현되는 나라일수록 사람이 살기 좋은 나라이고,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법의 정의가 잘 실현되기 위해서는 4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법을 공평하게 잘 만들어야 하고, 두 번째는 이러한 법을 사람들마다 다 알 수 있도록 잘 공표해야 하고, 세 번째는 어떤 사람이 법을 어겼을 때는 그 사람의 행위를 법에 잘 비추어서 죄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하고 아무것도 안한다면 그 법은 있으나 마나 한 법이 됩니다. 그래서 네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정당하게 형벌을 내리고, 또 법을 잘 지켜서 선을 행한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사람들은 이중적으로 격려를 받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형벌 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저런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또 올바르게 살아서 큰 상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올바르게 살아서 저렇게 상을 받을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법적 상벌이 정확하게 시행되어야만 비로소 법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고, 사람들마다 법 무서운 줄 알고, 법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그렇게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만드신 후에 “이제는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하고 내던져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법을 가지고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그 법을 지키며 살아갈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재판장이 되셔서 자신의 법을 순종한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불순종한 사람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자신의 도덕적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도덕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는 도덕적인 존재로 사람을 지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를 따라 상벌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래로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없게 되었고, 다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소망 없는 인생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을 향한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시지도 아니하신다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면, 그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큰 슬픔이 되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놀라운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런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을 행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이 한 청년에게 욕설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아마도 시민들이 모인 곳을 가던 중에 어떤 젊은 청년을 보고서 그 청년을 격려해 주려고 악수를 청하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 사람이 “내 몸에 손대지마라, 부정 탄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하였습니다. 몹시 자존심이 상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그 사람에게 “그럼 저리 꺼져, 이 머저리 같은 놈아”라고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그대로 찍혀서 인터넷에 올려졌고 그 동영상을 100만 명이 넘게 조회를 했습니다. 이 사르코지라는 사람이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옛날 시대의 중국의 황제였더라면 그 자식은 단칼에 모가지일 것입니다. 황제가 “얘야”하고서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손대지마, 나 너하고 악수하기 싫어.” 이것은 그 사람만 죽을 것이 아니라 삼족이 멸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거기에다가 썼습니다. “어떻게 대통령이 그렇게 거친 말을 할 수 있냐...”라는 댓글 밑에다가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옹호하면서 “프랑스 국민 누구도 다 평등하지만, 대통령을 모독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잘했다...” 그렇게 썼습니다.


그러니깐 하물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었던 모든 황제를 합쳐도 하나님이 높으십니다. 유치한 얘기이죠. 그런데 그 분이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으로 내려 보내시면서, “너희의 힘으로는 결코 사망과 형벌의 인생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런 너희들을 위해 내가 나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노라.”라고 하시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싫다.”고 하면서 자기의 의지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최후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셔서 자신의 도덕적 의지를 실현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를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시고, 또 그 반대로 자기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산 사람들은 도리어 이 세상에서 큰 불행과 고통을 당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을 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았는데도, 남들이 보기에 태평하고 부유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과 같은 것들에 대해 신자들이 겪는 혼란이 시편 73편의 아합의 시에서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2)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4)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5)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 (12)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13)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4)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15)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16)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시 73:1-4,12-16)


그러나 시편 73편의 결론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이 겪는 많은 모순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딱 육체의 죽음 그 이전까지 줄을 그어서 생각하니깐 모순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인생의 어떤 구간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영원한 세계까지 필요 없고, 조금만 확장해서 보아도 기가 막히게 이것이 모순이 아니라 질서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의 아주 좋은 예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물론 아버지의 사랑을 등에 업고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 한 것은 좀 잘못된 것이었고, 또 요셉이 얘기한 꿈이 형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고, 또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도 형들의 입장에서는 좀 샘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구덩이에다가 집어넣어서 죽여 버리려고 할 정도로 잘못한 것이었습니까? 그렇게 해서 결국은 돈을 받고 애굽에 가는 상인한테 그를 팔아먹어서 노예살이를 일생 시켜야 할 정도로 그렇게 잘못한 것이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팔려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하나님 원망하거나 인생을 비관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인정을 받아서, 이번에는 그 가정의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 보디발이 자기 아내 외에 모든 집안의 일을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의 공평함이 작용한 같지 않습니까? 가서 투덜대지 않고 성실하게 마당이나 쓸면서 그렇게 노예로써 만족하고 열심히 일했더니 그에게 하나님이 상을 주고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비록 종이긴 하지만, 온 집안에서 보디발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되어서, 그 집안의 모두를 돌보고 다스리는 권한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순리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요셉이 한창 피 끓는 젊은 청춘인데, 한순간의 혈기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거절했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이 여자는 “아니, 우리 둘 밖에 누가 있냐” 그랬더니, 요셉은 “셋 있잖아, 너 있고 나 있고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이런 일을 행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얻겠느냐” 그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그것이 얼마나 의롭고 정당한 행동입니까? 그렇게 정당 했으면, 하나님이 그 못된 여자를 혼줄 내주고, 그리고 이 요셉의 명예를 높여주셔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장 그 인생이 곤두박질 쳐서 저기 감옥 속으로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필름을 딱 끊어버리면 그것은 영화로 치면 짜증이 나는 영화일 것입니다. 우리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영화의 예술 가운데 전이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관들을 무너뜨리면서 영화를 그런 식으로 끝내는 영화들이 21세기에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는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이놈은 착한 놈, 저놈는 나쁜 놈 그렇게 구별해서 보면서, 착한 놈이 좀 고생해도 나중에 잘되고, 또 나쁜 놈은 처음에는 잘 되어도 결국에는 못되는 식의 권선징악의 결말을 원하는데, 전위예술의 영화들은 나쁜 놈이 실컷 착한 놈을 두들겨 패고, 그러면서 나중에도 나쁜 놈이 잘되고, 와~! 하면서 영화가 끝나는 것입니다. 짜증나는 영화입니다. 그런 영화 보면 찜찜합니다. 마치 필름을 중간에 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도 거기서 끊어버리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확장해서 보십시오. 그가 감옥에 간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감각적인 사람이니깐, 항상 눈에 보이고 만지고 이러는 인생이 전부이고, 죽은 뒤에는 가본 적도 없고, 태어나기 전에는 다녀온 적이 없으니깐 그것은 필요 없고, 이것으로 딱 끝나서 이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은 동의할 수 없는 모순투성이인 것입니다.


옛날에 들은 이야기인데, 실화입니다. 어떤 믿음이 신실하고 교회를 위해 일생 헌신해 오신 한 권사님이 심방을 다녀와서 버스를 탔는데, 옛날 버스는 엔진이 앞에 있었습니다. 거기가 겨울 되면 따뜻해서 앉아있기 참 좋은 자리여서 옛날에 어르신들이 거기 많이 앉으셨습니다. 일종의 경로석이죠. 그래서 이 권사님이 거기에 앉았는데, 이 버스가 가다가 갑자기 앞에 뭐가 튀어나와서 급정거를 했는데, 이 권사님이 앞으로 탕하고 튕겨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유리를 깨고 밖에 떨어졌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트럭이 옆에서 와서 밟고 지나가버렸습니다. 한 순간에 아주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가족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고 봉사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 하면서 막 원망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규칙들이 안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 하더라도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인상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저도 한 때는 이런 것이 아주 혼란스러웠습니다.


아주 악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신실한 신자가 그렇게 죽어버리면, 굉장히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신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저 사람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길래 저렇게 죽음을 당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중대한 심판을 행하심으로 본을 보이시는 적도 있지만,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양상일 뿐입니다. 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은 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죽지 않으면 인생을 끝낼 사람이 없고, 신자는 하나님 나라 갈 사람이 없고, 불신자는 자기의 행한 바를 따라서 받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이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살다가 아침 잘 먹고, 조용히 낮잠 자다가 죽으면, 고급 유람선 타고 가는 것이고, 몇일 좀 앓다가, 가족들 속도 좀 끓이고 그러고 가족들이 떠나보낼 준비도 좀 하고, 그렇게 죽으면, 허름한 여객선 타고 가는 것이고, 갑자기 사고 나서 비참하게 죽으면, 곧 가라앉을 듯이 삐그덕 거리는 쪽배 타고 건너가는 것입니다. 어차피 강 건너 가는데, 무슨 유람선 타고 간들, 쪽배타고 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신자가 유람선 타고 오면 천당에서 더 많이 환영하고, 쪽배 타고 가면 발길질하고 그럽니까? 그것은 하나의 양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가 되니깐 사고도 당하는 것이고, 질병도 걸리고, 혹은 충격 받고 쓰러져서 죽기도 하고, 놀러갔다가 물에 빠져서 죽기도 하고, 그렇게 다양하게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우리가 죽고 난 이후에 바로 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하신대로 다 갚으시는 것입니다. 이 심판하심을 통해서 그 동안 모순이라고 느껴졌던 것들이 일거에 다 해소되어지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공의가 온 세계위에 명명백백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덕적인 의지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모순은 없습니다. 영원세계까지 확장할 것 없이, 단지 죽음 이후까지 조금만 확장해서 보아도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냥 흘러가는 인생도 아니고,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가는 인생도 아니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통치 하에 있는 인생, 곧 각 사람이 행한 대로 하나님이 갚으시는 그런 한 치의 오차도 없고 모순도 없고 실수도 없는 그런 규칙과 질서 속에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위에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도덕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오직 거듭난 신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깨달음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이것을 결코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순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불신자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앞에 권사님의 유가족들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계시면 어떻게 이럴 수 있냐?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냐?”하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도 부인하기 때문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막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만일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즉각 즉각 갚으신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즉각 즉각 갚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죽음 이후로 다 미루신 것입니다. 없앤 것이 아니라 뒤로 미루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깐,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죄 짓는 것을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현상입니다. 문제는 우리 신자들이 문제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또 깊은 깨달음이 없으면, 불신자들하고 똑같이 살기가 쉬운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 짓는 것을 두려워 아니하는 악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만들어진 회개라는 지우개가 있으니깐 더욱 겁 없이 죄를 범하는 데로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죄를 범한다고 해서 당장에 구원이 취소되고 다시 형벌아래 놓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범해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죄를 마음껏 지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결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분노하시며, 맹렬한 불로 불신자들을 잔인하고 처참하게 심판하시는지를 신자는 알기 때문입니다. 비록 신자가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하지만, 불신자들의 멸망당함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경고를 받고,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불신자와 똑같이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는데, 이런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결코 죄 짓는 것을 가벼이 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으면 그 마음속에 반드시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울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범할 때를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십시오. 죄를 짓게 될 때는 반드시 두 가지를 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잊어버렸고, 둘째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사실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죄를 멀리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인식이, 그 세계관이 우리 마음속에 날카롭게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루하루를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돌아가시는 분이 많아서 그런지, 특히 요즘 들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느덧 나이 30줄 중반에 들어섰습니다. 어떻게 보면 젊은 나이일 수 있지만, 제가 몸이 허약하기 때문에 60살에 죽는다고 보면, (물론 그 전에 죽을 수도 있지만...) 벌써 인생의 반을 산 것이 됩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인생의 반이 지나갔는데, 나머지 인생의 반도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바짝 듭니다. 저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우리의 모든 인생을 다 결산할 날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무익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든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것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질 날이 곧 찾아 올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어떤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1-14)


정말 예수님을 내 마음에 믿어 영접하고,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보혈의 공로로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지 아니하고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믿어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섬기면서 살면서, 이 세상과 벗하지 않고,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정결하고 순결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이 세상과 벗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행복과 꿈을 좇아간다면, 그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 주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을 갖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경외하여 이 멸망 받을 바벨론의 길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위기는 신앙의 중심에 하나님이 와야 하는데, 하나님은 축출되고 인간이 그 중심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과 온 우주의 중심인줄 알고 자기가 행복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고 그렇게 제멋대로 살던 인간이, 어느 한 순간에 복음 진리를 듣고 그리고 쾅 하고 충격을 받으면서 비췸을 받아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한 것과 자기가 죄인인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그리고 돌이켜 회개하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 온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마무리 지으시고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도덕적 통치를 하고 계신다는 것과, 거미줄같이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이 모든 세상을 섭리하시며, 그리하여 위대한 인물로부터 시작을 해서 발아래 밟혀 죽는 하찮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모두 그들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그 많은 피조물들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아주 미물에 지나지 않는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요한 분이시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살아있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지으신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더더욱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까? 사실 많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은 그렇게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중요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교회 와서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다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고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는데, 죄인의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모든 것에 대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 하는 것도 자기가 능히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인의 결정적인 특징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모든 세대의 부패한 인생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러나 특별히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와서 더욱 그런 부패한 생각들이 팽배해졌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려면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중세시대까지는 기독교 신앙이 서구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태어나면 주민등록도 교회에다 하고, 재판을 받을 때도 교회에서 하고, 결혼도 교회에서 하고, 죽을 때도 교회에서 죽습니다. 교회와 떨어질 수 없는 환경에서 인간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기독교를 통해서 배운 인간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을 판단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주시긴 했지만, 그것은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단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빛 아래서 자기 이성의 판단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계시와 자기가 내리는 판단이 틀리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즉시 복종해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 아래 있을 때, 거기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총 아래 굴복하고 있으면, 그것이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상태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세시대가 어떠했습니까? 로마가톨릭의 시대였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이 가진 엄청난 권세를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횡포를 부리고,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는데 교권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람들은 로마가톨릭과 교회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고, 점차로 이렇게 사는 것은 참된 인간이 처해야 할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라는 반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4세기서부터 그런 움직임들이 점차로 있다가, 15세기에 문예부흥이라고 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6-17세기에 이르러 과학이 발달하고 지리상의 발견도 이루어지고 모든 면에서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더욱 그러한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다가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절정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위에서 억누르고 있는 이 권력과 같은 신앙을 제거해야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본을 보이지 못한 교회의 권력을 제거해야지만, 우리 인간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상이 점차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발생과 함께 제일 먼저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교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소위 근대주의(modernism)의 출현입니다.


근대철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중요한 인물이 바로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입니다. 데카르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떠나버리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말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데카르트는 진정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회의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사실 수학과 기하학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어떤 수학 문제를 풀 때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추론이나 가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자명한 기본적인 명제 또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거기에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회의하고 의심하여 가장 자명한 근본 명제를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세상과 세계에 대한 판단과 논의를 해감을 통해 진리에 이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회의하고 의심하였습니다. 빨간 사과를 보면, 정말 사과가 빨간 것인지, 아니면 내 눈에 빨갛게 보이고, 또 뇌에서 그것을 빨갛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의심했습니다. 또 찬물을 마시면, 물이 정말 찬 것인지, 아니면 내 몸이 그것을 차다고 느끼는 것인지, 태양은 정말 둥근 것인지, 내가 둥글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보이는 이 세상이 진짜 보이는 그 세상인지, 아니면 우리 눈이 그렇게 보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등 모든 감각적인 경험들과 지식들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수학과 기하학도 의심했습니다. 2+2=4 가 맞는지, 혹시 5는 아닌지, ‘전능한 악마’가 우리 모두를 2+2=4라고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의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세상과 세계와 자기 자신마저도 의심했지만, 그는 한 가지 의심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만약 전능한 악마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속으려면, ‘속고 있는 나’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치 뱀이 온 세상을 다 집어 삼키고 자기 꼬리까지도 먹기 시작했는데 결국 자신만큼은 다 먹지 못한 결과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면 할수록, 의심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본인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데카르트의 사상은 그 당시로서는 중세시대를 끝내고 근대시대를 도래케 하는 엄청난 획기적인 사상적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중세시대 사람들은 모든 가치 판단의 준거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라고 성경에 써 있으니깐,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이런 성경말씀과 계시가 아닌, 스스로의 이성과 생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모든 판단의 토대요 근거로 삼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세상과 세계와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깐 모든 가치 판단의 준거와 근거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생각하는 나’라고 하는 인간의 정신과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때, 바로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죠. 그래서 중세시대의 신 중심적인 사고관이 데카르트를 통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관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이성을 중시하면서 과학이 발달하고 나중에 칸트가 등장하는데, 칸트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사람이 바로 뉴턴(Sir lsaac Newton, 1642-1727)입니다. 뉴턴이 발견한 여러 가지 물리학 법칙들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뉴턴의 역학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이나, 성경이나, 신앙, 기적과 같은 것들은 다 환상이고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칸트가 등장해서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상적 토대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서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기독교를 독단이요 미신이며 환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한 종교 아래 얽매여서 타율적인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을 아주 미성숙한 미성년자로, 노예로 비유하였습니다. 칸트의 주장은 거기서 벗어나서 자율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계몽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고, 진정한 학문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 이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하여 결국에는 이 세상이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입니다.


그런 의미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과연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초월적 실재, 신, 영혼불멸등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냐, 그러한 순수한 이성이 존재하냐 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입니다. 칸트의 주장은 그럴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눈에 보이는 현상계를 벗어날 수 없고, 우리는 다 색안경을 쓰고 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신이나, 영혼과 같은 것들에 우리의 이성이 접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것들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의 종교에 불과하며, 그것은 탐구의 대상도 학문의 대상도 아니고, 미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계신 신앙의 세계는 인간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탐구를 하고 그럴 필요가 없는 완전히 별도의 세상인 것으로 제외시켜 놓은 것입니다.


사실 예전에는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중세시대 때에는 모든 학문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기본적으로 신학을 배워야 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해도 신학을 배워야 했고, 음악을 해도, 예술을 해도, 과학과 수학과 천문학, 의학을 배워도 신학이 기본과목이었습니다. 모든 학문의 토대는 신학이었고, 그리고 또 모든 학문에서부터 이 신학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천문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별들과 여러 가지 법칙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것들을 이렇게 만드셨구나,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어떠한가” 묵상도 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까”, 이렇게 아주 순박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칸트 이후부터 사람들이 과학과 합리적인 생각과 이성을 맹신하면서, 하나님, 신앙 이런 것 빼버리고 자연 그 자체를 탐구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면서 이 신학이라는 과목이 아주 미천한 과목으로 취급받게 된 것입니다. 마치 미신을 믿는 것처럼 몰지각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취급되면서, 아주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생각이고,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든 내용들이 바로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 하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할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을 생각하고서 비판적인 관점에서 수업도 듣고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가 무엇이냐 하면,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은 다 옳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배운 만유인력의 법칙은 진리입니까? 옳은 것입니까? 열역학 제1,2,3의 법칙은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정말 확실한 진리입니까? 다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은 다 틀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그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만유인력의 법칙, 하나님이 없는 열역학 법칙은 다 진리가 아닙니다. 나타나는 현상으로는 사실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리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배울 때, 비록 학교에서는 그냥 원인과 결과라고 하는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가치관에서 가르치지만, 여러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한번 걸러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을 배우면서도 “아~!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구나,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음악을 배우면서 “아~! 하나님이 주신 이 음악의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가? 음악을 잘 익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써야지”, 역사를 배우면서 “아~!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의 세계를 어떻게 섭리하셨고, 그런 역사를 통해 인간들에게 교훈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그 가운데서 구속사를 어떻게 진행시켜 가시는가?”하면서 그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묵상하고, 수학을 배우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부여하신 놀라운 질서들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면서 그 질서의 오묘함을 찬양하고... 그렇게 모든 과목을 하나님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배우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 공부할 때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세상의 학문을 공부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때로는 감격하고 때로는 찬양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그냥 교회 와서 예배드렸다고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학업의 현장에서 이런 삶의 예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아무생각 없이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단순히 시험 잘치고 좋은 대학 가기 위해 공부하다 보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온갖 무신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가치관이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보다는 이성과 합리적인 생각과 과학을 더 맹신하는 오류에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데카르트를 통해 중세가 끝이 나고, 칸트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성과 합리성을 최고로 두는 계몽주의 시대, 근대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언제나 경험할 수 있고, 알 수 있고, 반복해서 실험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고 하고, 초자연적인 진리들에 대해서는 안 믿으려는 경향으로 많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전에 신성하게 믿었던 성경을 다 찢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지금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예전에도 일어났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의 내용을 다 찢는 것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지금 수만 명을 먹여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할 수 없는 일이니깐 그때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는 것이고, 성경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록해 놓은 것은 아마 진짜로 그랬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 한두 명을 나눠 주니깐,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혼자 먹으려고 했다가 예수님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니꺼 내꺼 다 내놓아서 나눠먹다 보니 아마 다 먹고도 남은 것이고, 그러니깐 이 말씀은 결국 나눠먹고 살아라 라는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다 해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주의입니다. 자유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이제는 신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제 기고만장해지게 되고 그러면서 19세기쯤 되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기독교와 신앙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만나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해결이 안 되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니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교회가 어떻게 하였습니까? 교회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의 풍조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자료를 보면, 그 당시 19세기 말에 교회의 주일예배 설교 제목이 “감자를 먹는 즐거움”, “짐승은 우리에 기르는 것보다 방목하는 것이 좋다.” 부활절에는 “생매장 당하는 것의 끔찍함”,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유익”, “천연두 예방주사 맞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설교 제목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죠. 충격적이지만 실제로 이런 설교들이 있었습니다.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회가 와르르 무너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두 번의 걸친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죽고, 온 세계가 완전히 쑥밭이 되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사람들이 이제 반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믿었더니 된 게 뭐있냐”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믿었던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만을 내세우고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이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통용되는, 저 멀리에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가 있고,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고), 그것들을 우리들이 찾아갈 수 있고, 그것대로 산다면, 이 세상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계몽주의입니다. 하나님은 부정하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선악의 개념이 있는 것이고, 기준이 있는 것이고,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성을 믿었는데, 돌아온 것은 무엇이었냐 하면, 잿더미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비참한 세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너도 믿을 수 없다.” 그러고서 보좌에서 확 잡아서 끌어내렸는데, 그 끌어 내침을 당한 것이 바로 인간의 이성입니다.


1,2차 세계대전 후에 사람들은 이제 애초부터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절대 진리나 보편적인 선은 없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보편적인 선이나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추구했던 것이 사실은 정말 보편적인 선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선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아주 비근한 예를 들면, 일본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것도 그런 것이죠. 일본 제국주의 안에서는 너무나 선하고, 그래서 그것을 행하다 죽었기 때문에 자손 대대로 칭송을 받을 만한 선한 일인데, 그렇게 선한 일을 행한 그 사람들 때문에 주변에 있는 약소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고, 죽고, 나라가 짓밟혔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나라마다 자기 공동체만의 행복과 선을 추구하다 보니깐 제국주의가 일어났던 것이고, 서로 부딪치면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은 이제 애초부터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나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보편적인 진리나, 절대적인 선 이런 것은 없고, 그냥 우연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안 태어나도 되는 인간들이 괜히 태어나서 그렇게 섞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인간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슨 진리가 있고 선악의 개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진리라고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반발하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선악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그리고 이성에 대해서도 반발하면서 그것을 막 쳐부수면서 살아가는 것이 1940-60년대 일어났던 세계의 흐름들입니다.


이렇게 되니깐 결국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너에게는 그것이 진리이지만, 나에게는 다른 진리가 있어. 너에게는 그것이 선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선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각자 각자가 자기 나름의 진리와 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기준도 없고,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자기만의 가치와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이요,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상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이지만, 특별히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더욱 팽배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를 온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복음의 선포가 설 자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면 당장에 사람들이 기독교는 독단이라고 반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왜 그러시지. 난 바라지도 않는데, 되게 부담스럽게 왜 그러신데.” 그렇게 반응합니다.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죄는 없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 자체가 매우 썰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게 되니깐, 이제는 죄 대신에 상처라는 개념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방황하면서 비참하고 불행한 인생을 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상황이 자기를 그렇게 몰고 갔고, 자기는 상처투성이의 인간이고... 그렇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란 죄를 말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것인데, 그 복음이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신에는 너무 안 맞으니깐, 이제 죄 대신에 상처라는 말을 교회가 자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죠.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다. 당신을 끊임없이 펼쳐라, 당신 안에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고, 그리고 그것을 펼칠 수 있는데, 당신은 자신감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고, 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인간들에게 상처를 너무나 받았다. 예수님이 당신 같은 사람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그 힘든 역경도 감당하셨더니 부활하신 것처럼 당신도 환경과 모든 것이 어렵고 상처가 많은 피해자이지만, 그러나 당신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잘 될 거라고 믿으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면, 생각을 너무 부정적으로 하지 말고, 늘 잘 될거다, 잘 될거다 하면서 스스로를 잘 격려하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에 대한 인식이 흐릿하고 자신이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또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모르니깐 교회를 나와도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여러 가지 유익들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고, 또 자기 배짱만 안 건드리면, 교회 나와서 헌금도 하고 종교활동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짱 건드리면 교회고 뭐고 다 집어치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만 교회냐?” 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다른 교회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자기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으로 비쳐지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천벌 아래 놓여 있는 소망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기가 주님께 매달려서 제발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마련인데,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이 죄 때문에 비참한 존재라고 하는 인식이 없으니깐,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싶어서 안달하시는 분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제발 날 좀 믿어줘. 응? 내가 너의 인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나 만나고 인생이 활짝 필래, 아니면, 나 안 만나고 인생이 그냥 쭈그러들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데 한 번 해볼까?” 주님의 손을 잡으면서, “그러시죠, 제가 당신께 허락해드립니다. 오셔서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영광을 내가 그대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전혀 회심을 안 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교회를 나와도 이 속에 깊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인식이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흉한 형벌을 받으셨다고 하는 아주 분명한 인식이 없는 것이죠. 그러니깐 그들을 움직이는 것이,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나, 구원에 대한 감사나,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이렇게 살려주셨으니까, 이제 나의 모든 남은 생애는 주님의 것이다” 라고 하는 구원에 대한 감사로서의 이 구별된 삶, 이런 것들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없을 뿐만 아니라,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인 원동력이 성령을 통해서 그에게 공급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무슨 윤리를 기대하면 거룩한 삶을 기대하겠습니까?


기독교는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 한 두 가지를 고쳐서 단정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그 모든 잘못된 삶의 본질이 그 사람 안에 있다고 보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려고 하는 자아, 곧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기를 놓는 그 자아가 깨뜨려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자신의 왕이요 주로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안 일어났으니, 그 속에서 어떠한 윤리를 기대하겠으며, 거룩한 삶을 기대하겠습니까? 그냥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희망을 갖고 꿈을 갖고 비전을 갖고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나도 한번 활짝 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격려를 받으면서 자기가 꺾이지 않은 채 살아가게 될 때에, 그때 그 사람이 살아가는 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양상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지, 그 마음과 중심의 깃발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사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왕이요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것입니다. 혹시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왕이 없으므로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사사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들이 변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자기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결책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가던 그 인간이 깨뜨려져서 자기가 쓰레기에 불과 하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자기를 우상으로 삼던 그 자리에 주님이 계시게 하고, 자기는 밑에 내려앉아서 주님의 통치에 아주 겸손하게 복종하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난 시간에 배운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순종하여 당신의 창조 목적을 따라 선하게 사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지만, 어긋나면 그들을 반드시 형벌하신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인식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죄인이고,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소망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구원해 주셨다 라고 하는 복음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공로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처음 예수님 믿고 회개할 때만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러한 깨달음이 계속해서 재현되어서 더 깊이 깨달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나는 살 수 없다”, 그러면서 오직 주님만을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의 은혜의 통치를 받으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거기서 큰 행복을 느끼고, 그리고 주님께 감사 찬양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이고,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나의 주요 왕으로 모시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패역한 시대에 정말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시대를 옳게 분별하고, 우리 속에 성경적인 세계관이 바르게 정립되어서, 범사에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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