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3.12.18 08:0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2주Ⅱ(32문) -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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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32문
문답내용 32문 : 그런데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며,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감사의 산 제물로 드립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나는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맞서서 싸웁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3-12-0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2)


그리스도인


요절 : 행 11:26


32문 : 그런데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며,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감사의 산 제물로 드립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나는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맞서서 싸웁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 - 예수 증인된 삶, 조롱과 핍박


원래 ‘그리스도인’라는 이름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불려 졌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6)


이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배경을 보면, 스데반 순교 사건 후에 예루살렘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온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이 안디옥 교회도 그렇게 핍박을 피해 온 예루살렘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을 전해 듣고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물론 그들이 안디옥 지역에 복음을 전할 때 맨 처음에는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에게만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많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어 영접하는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했고, 이 바나바가 혼자서는 안 되겠다 해서 다소에 있는 사도 바울을 안디옥 교회로 데려와서 사역자로 세워 함께 동역목회를 했습니다. 두 사람이 안디옥에서 일 년 동안 많은 무리를 가르쳤는데 그 와중에 안디옥 교회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고, 그 지역의 사람들이 그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향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구절의 포인트는 “비로소...”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이런 호칭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디옥은 첫 이방선교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안디옥 지역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를 보니깐 처음에는 유대교 또는 유대교에 속하는 한 종파정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깐 유대인하고 이방인들이 함께 연합해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죠. 원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하고 함께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 함께 연합해 있는 안디옥교회의 독특한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들이 힘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들으면서, 이 무리는 유대교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요, 새로운 무리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리를 어떻게 호칭할까 생각하다가 말끝마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하니깐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였던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크리스티아노스’인데, 그 뜻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집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3번만 사용되었습니다(행 11:26, 행 26:28, 벧전 4:16). 오늘날에는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그냥 예수 믿는 사람을 일컫는 아주 보편화된 말로서 이 명칭을 사용하는데, 초대교회 당시에는 성도를 일컫는 보편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불신자들이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붙여준 하나의 조롱조 섞인 명칭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쟁이’와 비슷한 것이죠. 이러한 사실이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


바울의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멈추면서 아주 조롱조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식으로 하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예수쟁이가 되게 하려는도다” 하고 조롱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이 단어가 사용된 베드로전서에서도 나타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즉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면서 고난을 받고 조롱을 받지만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앞에 구절을 보니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조롱조로 불렀지만, 성도들은 그분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하고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호칭하는 그런 용어가 아니었고, 불신자들의 조롱과 핍박,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연상되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이 “예수쟁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붙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믿어가지고는 이런 소리 못 듣습니다. 정말 예수를 독실하게 믿어서 그 말과 행실 속에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귀찮을 정도로 전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의 복음 전하고, 그래서 예수를 냄새나게 믿는 사람에게만 붙여 주는 명칭입니다. 전도 하지도 않고, 특별히 구별된 삶도 없는 사람에게는 이런 용어를 붙여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인지 아니면 나일론 신자인지 세상 사람들이 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안디옥 교회도 바나바와 바울이 성도들을 잘 가르쳐서 이 교회가 복음위에 굳게 서게 되니깐, 그 인격과 삶이 예수를 닮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의 말씀을 잘 가르침 받아서, 함께 말씀과 기도에 힘써서, 먼저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고, 그렇게 예수 복음 전할 때에,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핍박과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저 이력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하도 복음전하고 전도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수쟁이라고 비아냥 섞인 조롱을 듣습니까? 복음 전하기 때문에, 전도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고 고난 받는 삶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위에 계시다고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과 행실로 예수 증인 된 삶을 삶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이런 영광스러운 호칭을 듣는 복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의미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보면 단순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리스도 추종자라는 의미이지만, 그러나 성경전체로 볼 때 이 용어는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도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이 이 이름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직분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이것을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32문 : 그런데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며,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감사의 산 제물로 드립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나는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맞서서 싸웁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다 기름 부음 받은 자이고 그러므로 다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지체가 되었고, 그분의 성령의 기름부으심에 함께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기름부음이 따로 있고, 우리가 받은 기름부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시 133편에 보면 아론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니까 그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그래서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양어깨와 가슴 흉배의 12보석에까지 기름이 흘려 내렸을 것입니다. 제사장의 수염을 타고 흘러내린 그 기름의 향기가 아론의 몸을 휘감고 그의 몸 전체를 향기롭게 합니다. 이것은 기름의 향기가 아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12지파에게까지 두루 미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아론의 기름부음에 12지파가 다 참여한 것이죠.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 안에서 그분과 연합한 교회도 함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누가 예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고, 누구만이 이 예수 이름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성령세례 받은 사람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만이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성령세례 받고 나서 제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예전에는 입으로는 목숨 바쳐 충성하겠다고 해놓고서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 다 줄행랑 치고, 베드로는 그나마 따라가기는 갔는데, 누가 알아보니깐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는데, 이제 성령세례 받고 나니깐 권능을 받아 변화되어서 담대하게 예수증인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잡아다가 예수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핍박해도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고, 매를 맞아도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제자들이 모습 중에서 어떤 모습에 가깝습니까? 우리는 솔직히 전자의 모습에 가까움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도 제자처럼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제2차 은혜로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틀린 말이라기보다는 틀린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단회적인 것이고,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은 후에 별도로 성령 세례 받는 것은 구속사적으로 과도기에 있었던 그 당시 성도들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현상입니다. 오늘날에는 믿는 즉시로 성령세례 받는 것입니다. 다시 성령세례 받을 필요 없습니다. 이미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았고,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죠. 그러면 왜 우리가 제자들처럼 못사는 것입니까? 처음 예수님 믿었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게으름과 악함으로 은혜생활을 잘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안에 죄들을 그냥 내버려두면서 자꾸 죄에 지고, 죄에 넘어지면서 성령을 소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제2차 은혜로서 성령세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제2차 은혜로서 성령충만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니 제2차 제3차가 아니라 날마다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성령충만의 은혜는 별다른 체험이 아니라, 회심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하신 사명의 자리에 서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증인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제자들처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증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예수님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신다는 말씀은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예수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전도하기를 부끄러워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전도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 복음을 싫어하니깐,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고, 그들로부터 반대와 조롱을 받기 싫으니깐 자기체면 생각해서 전도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 “너희들이 정말 나를 믿고 있느냐”하고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이 책망의 음성을 듣고,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회심하고, 성령 충만 받아서 권능을 받아 말과 행실로 복음전하면서 고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목적입니다.


오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말하는 것이 그 이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32문 : 그런데 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답 : 왜냐하면 믿음으로 내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며, 나는 나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감사의 산 제물로 드립니다...


여기서 “그 이름을 고백한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나 예수님 믿어요...” 하고 신앙을 고백한다는 말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전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선지자로서의 삶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 믿지 않는 자들을 전도하고, 그들을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선지자로서의 우리의 직분이요 사명입니다.


이것은 워낙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해오시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로서 그 일을 해나가는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들이 그대로 사도들에게 반복해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 성령 받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던 것처럼 베드로도, 바울도 똑같이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립니다. 병자들이 예수님의 옷이라도 만지려고 주위에서 모여들었던 것처럼, 베드로의 경우도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라도 덥힐까 하고 모여들었고(행 5:15), 바울 같은 경우는 바울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그 병이 낫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행 19:12).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셨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성도들도 성령으로 기름 부어 세워져서 이 땅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으면 하셨을 그 일을 우리가 그대로 이어받아서 해나가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우리로 그리스도가 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그리스도 되신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됨이란 주님이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직분

예수 그리스도 

교회 

선지자

 그분의 가르침과 삶, 인격으로써 구속의 경륜과 그 뜻을 온전히 밝히 계시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계시된 구속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잘 배워서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쳐주는 사역.

제사장

 사람들의 참 중보자로서 영단번의 속죄제사를 드리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을 함.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헌신하여 드림.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다스리심. 사단 마귀와 싸워 궁극적으로 승리하심.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잘 받으면서 이 세상에서 죄와 사단마귀와 싸워 나아감.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은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구약에는 왕만 되어도, 제사장만 되어도, 선지자만 되어도, 굉장히 영광스러운 인생이었고, 복된 인생이었는데, 우리는 이 세 직분을 한 몸에 다 감당하는 그리스도로 세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우리가 값없이 은혜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은혜로 귀한 직분의 자리로 불러주신 이유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함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여기서도 우리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 것이죠. 그래서 아무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 목사가 필요 없고 가르침 받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 형제교회라는 이단이 있는데, 이 이단은 바로 이 구절을 잘못 오해해서 교회에 목사를 두지 않고, 설교 없이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앉아 있다가 누구든지 감동받은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한마디 하고 또 앉고 하는 식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아무도”는 앞의 26절에 나오는 미혹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요일 2:26)


미혹케 하는 이단들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고, 또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평생 참된 목회자의 가르침은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진리로 인도해주십니다. 그 가르침을 잘 받아서 그대로 전하는 것이 우리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우리가 주일마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의식 예배라고 한다면, 로마서 12장에서 말하는 이것은 우리의 생활 예배인 것입니다. 의식예배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의식예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생활예배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비난받는 이유도 의식예배는 성대하게 잘 드리면서 생활예배는 왜 그 모양 그 꼴이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 비판 앞에서 우리들은 참으로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데... 사실 이렇게 비판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 대해서 뭔가 기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뭔가 달라야 하고, 또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일 뿐이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러나 결코 완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데, 세상은 이러한 우리 실력을 모르고 너무 과대평가해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고맙긴 하지만, 감당이 안 되죠. 그렇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성령을 힘입어 날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힘써 나아가야 할 거룩한 제사장의 사역입니다.


또한 왕으로서 우리는 죄와 사단 마귀와 싸우는 영적전쟁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영적전쟁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사단 마귀와의 영적전투라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아니 사단 마귀라든지 어떤 영적세계의 전쟁이라든지 하는 개념이 계시사적으로 분명하게 계시되지 않은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그러한 영적전쟁이 살짝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희미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백성들은 그것을 몰라도 됩니다. 그냥 하나님을 잘 섬겨 나아가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신약에 와서까지도 그걸 모르고 그냥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단마귀와의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하기를 원했습니다.


“(11)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1-12)


우리는 예수의 좋은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 공중권세 잡은 사단 마귀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하면서 전신갑주를 취하여 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공격합니까? 밖으로는 핍박과 고난으로 두려움을 갖게 하고, 또 안으로는 우리의 죄를 부추기고 유혹하여 우리 스스로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단마귀를 대적하며 싸워야 하는 것이죠.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대적하고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전에 우리가 사단 마귀의 종이었을 때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는 주인을 거스를 권세나 힘이 없기 때문에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기에서 해방시켜주시고 우리에게 그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는 거대한 군사력과 힘과 능력을 주셔서 싸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을 우리 안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자유롭고 선한 양심을 계속해서 주셔서 우리로 죄와 사단마귀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왕입니다. 왕이면 전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우면서 우리의 왕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싸울 생각 없이 그저 죄와 사단마귀에 굴복한다면 그것만큼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싸울 때는 그냥 아무렇게나 싸우는 게 아니라, 야고보서 말씀처럼 “하나님께 순복”함으로써 싸우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잘 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도 이 세상에서 죄와 사단마귀와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앞으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싸움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신 싸움이고 또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싸움입니다. 그것을 알면서, 그리고 소망하면서 그리스도의 승리의 근거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이 세상에서 이기고 결국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사단 마귀의 머리가 우리 발아래서 박살나게 될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적전투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하루하루 살아야 합니다. 사단 마귀를 대적하면서 그렇게 전투적으로 모든 순간을 지내야 합니다. 군대 가면 뭐든지 전투적으로 합니다. 축구를 해도 전투축구이고, 식량도 그냥 식량이 아니라 전투식량이라고 합니다. 다 전투적인 개념으로다가 이해를 하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그런 이해가 필요합니다. 매순간 내가 사단 마귀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이러한 말을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사단 마귀가 기뻐하겠는가? 이 돈을 이렇게 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단 마귀가 기뻐할까? 내가 지금 이것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사단마귀가 기뻐할까?...”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꿈에서까지도 영적 전투합니다. 꿈에서도 뱀하고 싸우는데, 뱀에 물려서 위험에 처하는 순간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싸움에서 이겨서 하나님께 감사 찬양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몽이라기보다는... 꿈은 그 사람의 무의식의 세계를 투영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깊이 몰두하게 될 때, 그것이 꿈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이렇게 꿈속에서도 영적전투 하는 꿈을 꿀 정도로 매순간 영적전투하며 살아가는 그 긴장감이 무의식의 세계까지 미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꾸자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매순간의 삶을 영적전투로 인식하고 날마다 영적전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순간의 삶이 영적전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하나님께 순복하면서 죄를 대적하고 마귀를 대적하면서 싸워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우리가 충실한 예수의 군사로, 그리고 예수의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고난 받고 살면, 반드시 주님과 함께 영광중에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증인의 삶을 포기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포기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부름 받은 이 귀한 그리스도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서 주님이 임하실 때 칭찬받는 주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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