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748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1~2문
문답내용 1문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오직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2문 :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강설날짜 2013-09-0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주(1-2문)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

 

요절 : 롬 14:7-8

 

1문 :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오직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1. 성경은 위로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나?

 

위로에 대한 언급으로 요리문답을 시작하는 하이델베르크의 관점은 성경적으로 옳은 것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소요리문답에 비해서 너무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본다면, 이러한 우려는 금방 불식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위로받는 것이 필요함을 매우 강조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위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2)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1-2)

 

이사야 40장은 포로 된 이스라엘을 향한 회복의 말씀입니다. 그 첫 머리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가 끝이 났고, 죄를 사함 받았으며,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환란과 고난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시어 그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위로의 하나님은 구속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인생들을 위로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만나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눅 2:25). 그는 진정으로 위로받기를 원했는데 어떤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로”인데, 곧 메시아가 오셔서 죄와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들에게 있어서 참된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이 사건이 모든 인생들에게 참된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는데, 그러면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이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곁에 있어서 변호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주는 자”를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진리로 늘 인도하심으로써 인생의 고난과 환란 가운데 있는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위로는 단순히 인간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 살 때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과 곤란한 일들,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괴로움을 덜어주고 슬픔을 달래주는 차원의 위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위로로 말미암아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됩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성경이 말하는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과 거의 비슷한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많은 고난이 있고 시련이 있는데, 그것을 견뎌내게 하고 극복해 나아가게 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웃음 짓게 하고, 살아갈 힘을 주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성령의 위로인 것입니다.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5)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3-5)

 

“(4)내가 너희를 향하여 하는 말이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17)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위로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난이 없으면 위로도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위로가 쓸모가 없습니다. 위로는 그 단어 자체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살면서 여러 가지 고난을 받을 때, 그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로를 힘입어 낙심하지 않고 도리어 일어서서 고난과 맞서 싸우고, 더욱 선한 일과 말에 굳게 서서, 더욱 교회답게 든든하게 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위로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이런 위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전혀 인간중심적이라든지, 주관적이라든지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일로 인해서 우리가 위로받고 고난 가운데서 성령의 위로를 받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또한 이 위로를 힘입어 우리는 고난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세상 사람들의 위로와 그리스도인의 위로의 차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생사 간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나의 몸과 영혼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나의 평생에 그리고 죽어서도 유일한 위로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디서 위로를 얻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소유한 그 무엇인가를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정말 불행하고 힘든 일상을 살아가지만, 사랑하는 자식 때문에 웃을 수 있고, 살아갈 힘이 나고, 모든 어려움을 견뎌냅니다. 또는 사랑하는 애인, 남편, 아내, 자신의 가족, 가장 친한 친구를 삶의 위로로 삼고 살아갑니다. 또는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서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어디에서 위로를 얻느냐 하면, 자신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거나 어떤 인생문제가 해결될 때 위로를 얻습니다. 자식이 서울대학교 합격했을 때, 부모들은 위로를 받고, 자식이 사법고시 합격하면 부모는 죽어도 원이 없을 만큼, 위로를 받습니다. 암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 유일한 위로는 자신의 병이 치료되어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우리 인생들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위로가 꼭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런데서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으니깐 예수님한테만 위로를 받아야 하니깐 이런데서 전혀 위로를 못 얻는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자식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또는 남편을 통해서, 또는 아내를 통해서 위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또는 우리의 어떤 소원이 성취될 때나 인생문제가 해결될 때에도 위로를 받습니다.


다만 우리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는 첫째로 이러한 위로를 하나님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자기 어머니 사라가 죽었을 때, 그 모친을 잃은 것으로 인해 낙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리브가를 아내로 주셔서 이삭이 많은 위로를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위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이런 세상적인 위로를 받을 때, 그러한 위로들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로 세상적인 위로와 관련하여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이러한 위로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일시적인 위로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그런데서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런 위로에 목메지 않습니다. 그런 위로는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인생은 잠간이고,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나타나는 양상들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을 근본적으로 불행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이며, 그 죄로 인해서 자신이 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고, 죽어서도 영원한 지옥심판에 떨어질 운명이라는 사실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에게 그 무엇이 유일한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돈을 억만금 가져다준다고 참된 위로가 되겠습니까? 자식이 서울대학교 들어간다고 거기서 참된 위로를 받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 유일한 참된 위로는 바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죄 사함과 구원을 받고 그분의 것이 되어서, 그분의 품에 안겨서 참 안식을 누리고, 그분과 함께 동행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목적을 이루면서 이 세상을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복락을 누리며 사는 것, 이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사는 죽으나, 생사 간에 유일한 위로인 것입니다. 1문의 포인트는 “유일한”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3. 나 자신은 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는 나 자신이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몸도 영혼도 다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선언은 놀라운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상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했기 때문에 위로를 얻었지만, 우리는 도리어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로를 얻습니다. 자식, 남편, 가족, 재물도 내 것이 아니고, 내 몸도 내 영혼도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도리어 나의 모든 것, 내 몸과 영혼까지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이 사실에 아멘이 되십니까? “정말 그렇다”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도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나 자신이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 될 때, 내가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워낙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 안에서만 참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범죄하여 이 하나님을 떠나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꼭 부모 없는 고아의 삶과 같습니다. 누가 고아를 보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험악한 세상에서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홀로 모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며 비참함을 당하다가 멸망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고아와 같은 인생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방황하며 고통하던 나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 값으로 다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은혜요 위로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아와 같던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그분의 소유가 되게 하셔서 참된 구원과 영생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품에 안겨서 모든 죄의 짐과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주님의 책임져주시는 보호 아래서 모든 위로와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물은 마시면 얼마안가 다시 목마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위로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시는 생수는 마시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참된 위로와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로가 우리 안에 있게 되어질 때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제 삶의 목적과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의 삶의 목표가 뚜렷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지금 이 로마서 말씀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그 당시 로마 교회 가운데 신앙이 있고 지식도 있어서, 우상의 제물 상관하지 않고 다 잘 먹고 아무 일 없는 그런 수준도 있는가 하면, 우상의 제물을 보면 뭔가 찝찝하고 그래서 고기도 안 먹고 우상의 제물을 피하고 하는 성도들도 있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 안 먹는 것이 신앙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 깨끗하므로 기도하면서 감사함으로 받는 자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 좋은 것도 좋고, 지식이 있는 것도 좋고, 용감한 것도 좋지만, 지금 못 먹고 우상의 제물이라고 물리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행하시오.”


왜냐하면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중심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도들이 시험들것 같으면 일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바울 사도는 고기 좋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나서 예수님의 것이 된 자들의 마땅한 삶입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1)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이것이 그리스도의 것이 된 자들의 삶입니다. 또 다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음행을 멀리하라고 권면하면서 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피 값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것이니, 내 몸에 대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께 헌신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정말 위로로 다가와야 하는데, 문제는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부담스러운 김에 좀 더 부담스러운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4)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

 

이 요한계시록 말씀은 구원받은 성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4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킨 자들
여기서 여자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이 말은 이 세상과 벗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다든지,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상숭배를 행한다든지 하지 않고, 세속의 더러움에서 자기를 지킴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충절을 지키는 자라는 말입니다.


2)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십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데, 성도는 바로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3)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
번역이 좀 매끄럽지 못합니다. “구속을 받아”라는 단어는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다”라는 뜻의 단어인데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을 원어 그대로 직역하면,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첫 열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값으로 사신바 되었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농사를 지어서 열매가 나면 그것을 수확한 후에 다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성도란 그렇게 처음 익은 열매처럼 하나님께 바쳐진 자들인데, 그냥 바쳐진 것이 아니라,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은혜로 주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정말 주님의 소유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4)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
이것은 성도가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처럼 죄를 숨기고 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죄인됨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그 죄와 더불어 평생을 싸우며 흠 없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은혜로 말미암아 이런 성도들의 연약한 순종을 흠 없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삶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입니까? 그리고 그분께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위로가 됩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요, 우리가 신앙의 정로를 이탈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참으로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내가 주님의 것이라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이미 주님의 것이 되었는데, 여전히 옛사람의 본성을 따라서 자기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왜냐하면 거듭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거스르려는 죄된 본성이 우리 안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들이 은혜로 죄죽임 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그런 상황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것인데, 주님의 것으로 살지 않는 매우 모순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무엇과 같으냐 하면 아래의 말씀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물론 이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라서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정확하게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얼추 비슷한 상황입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말은 우마차(소가 끄는 마차)를 끌고 가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인데, 우마차를 끌고 갈 때, 가끔씩 이 소들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때 주인이 뒤에서 끝이 뾰족한 채찍으로 때리는데, 그것이 바로 ‘가시채’입니다. 그렇게 때리면 이 소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인한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항을 하는데, 자기를 때리는 주인을 향해 뒷발로 발길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그 발이 주인에게 닿지 않습니다. 우마차의 나무부분에만 부딪쳐서 자신의 발에 상처만 날뿐입니다. 그러니깐 반항해봤자 자기 발만 아픈 것이죠. 부질없고 무모한 반항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주님의 것인데, 우리가 우리의 소유주이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반역해서 대적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꼭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 고생인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자기의 것이라고 우기고 죄된 삶을 고집하면 할수록 자기만 고생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부질없고 무모한 반항입니다. 우리가 반항한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한번 소유로 삼으셨으면 절대로 그 소유권을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은혜죠. 다만 고집 부리는 만큼 매만 더 벌고 나만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부질없는 반항을 그만두고 자진납세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나쁜 생각들, 못된 마음들을 물리치고, 정신을 차려서 복음진리를 다시금 깊이 깨달아서,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깊이 깨닫고, 또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며 은혜며 위로인지 깨달아서, 그 위로를 누리고 살면서 자신을 주님께 헌신해 드려야 합니다.

 

4.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내가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왜 나에게 유일한 위로인지를 뒤이어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입니다.

 

주님의 것
-> 죄사함과 구원, 영생
-> 일평생 주님이 책임져주시고 보호하심
-> 이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게 하심

 

이러한 사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적인 구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죄사함과 구원을 주시고, 성부 하나님께서 일평생 보호하시고 책임지시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주님을 위해 살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우리는 죄를 지으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리고 종이 된다는 말은 주인의 말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죄를 짓도록 시키면 마귀의 종은 그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으려고 하지만 중독성 때문에 마약을 끊지 못하고 결국 다시 마약을 하듯이 그렇게 인간은 철저하게 죄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의 종, 마귀의 종 된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비참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어떻게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까? 그것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귀의 종이 되었다면, 그 반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면 마귀의 권세는 자연스럽게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모든 죄에서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사단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히 죄를 사해주시고, 사단 마귀에서 건져내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피 값으로 사단 마귀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를 취하셔서 자기의 소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그 사랑으로 지키시고 주관하시고 간섭하시고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5. 성부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는 말씀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다시 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 까지도 다 살피신다는 것은 그만큼 세심하게 우리를 지키시고 살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때때로 환란과 고난이 임해도, 그것이 다 주님의 손 안에서 우리가 당하는 환란이기 때문에 그렇게 두려워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육체는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안전하게 지키시고 마지막 때에 다시 살리실 것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를 믿는 것이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키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합력하여 선이 되고 복이 되게 하십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무조건 잘되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닥쳐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독생자까지 주신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생각할 때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하고, 내가 생각할 때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잠언 말씀에 보면,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잠 22:15). 그래서 아이들은 본성적으로 버릇없고 자기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면서, 날마다 오냐오냐 하면서 그렇게 자기 고집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면 이 아이가 어떻게 됩니까? 이 아이의 인생이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이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근실히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징계하면 이 아이는 그 당시에는 괴롭고 슬픈 것이지만, 그러나 장성하고 나서 보면 그 징계가 자신의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한 것이요 그것이 부모의 사랑임을 아는 것입니다.


만일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잘 먹고 잘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잠간이요, 영원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러한 천국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거룩한 자로 빚어 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근실히 연단하시고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현금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지나고 보면 그것이 다 자신의 영적성숙을 위해 기여할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고난과 환란 가운데서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난과 환란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6. 성령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한번 예수님의 것이 되었으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구원해 내십니다. 참으로 구원의 확신을 주는 말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자주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래서 우리가 넘어지고, 낙심이 될 때마다, 성령께서는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친히 증거하심으로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리고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셔서 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쳐주시고, 인도하셔서 우리로 기꺼이 세상을 포기하게 하시고,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끝까지 구원의 길을 걸어가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악하고 음란하며 소망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로 살아갈 힘을 주고, 웃을 수 있게 해주고 모든 고난을 견뎌내게 해주는 바로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누리는 이러한 축복들을 깨달아서, 자신을 그 피로 구속하여 소유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또 그 예수님을 사나 죽으나 자신의 유일한 위로로 삼고 살아감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이러한 위로 가운데 살기 위해서

 

2문은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이 진정으로 유일한 위로임을 깨닫고 그 위로가운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2문 :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었고, 또 이런 우리를 어떻게 주님이 구속하여주셨는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깨달아 알 때, 우리는 참으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을 살고 또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신앙의 정도에서 이탈해서 죄된 삶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 가르침은 우리가 평생 마음에 간직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또 날마다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할 세 가지 가르침입니다.


이 세 가지 가르침에 대해서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배워갈 것인데, 우리가 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공부를 통해서, 이 복음 진리를 깊이 깨달아서 성령의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을 살고 죽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22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서론 file 서론 최상범 7938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1주(1문,2문) -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 file 1~2문 최상범 7482
22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8주(24문,25문) - 삼위일체 하나님 file 24-25문 최상범 5794
22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주(20문,21문,22문,23문) -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file 20-23문 최상범 5768
22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5주(12문,13문,14문,15문) - 우리의 중보자 file 12-15문 최상범 5472
21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주(69문,70문,71문) - 세례와 성화론 file 69-71문 최상범 5420
21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2주(3문,4문,5문) - 율법 앞에서 죄인된 우리 file 3-5문 최상범 5117
21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강설 제3주(6문,7문,8문) - 사람의 원죄 file 6-8문 최상범 5049
21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9-10주(26문,27문,28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file 26-28문 최상범 4985
21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6주(16문,17문,18문,19문) -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file 16-19문 최상범 4934
21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설 제4주(9문,10문,11문) -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file 9-11문 최상범 4911
21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주(40문,41문,42문,43문,44문) -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된 우리 file 40-44문 최상범 4173
21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3주(33문,34문) - 외아들, 우리 주 file 33-34문 최상범 3926
21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5주(37문,38문,39문)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당하신 예수 file 37-39문 최상범 3896
21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9주(50문,51문,52문) -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재림 file 50-52문 최상범 3846
20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주I(31문) - 그리스도 file 31문 최상범 3815
20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주(29문,30문) - 유일하고 완전한 구주 예수님 file 29-30문 최상범 3717
20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4주(35문,36문) - 동정녀 탄생 file 35-36문 최상범 3686
20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7주(45문) -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유익 file 45문 최상범 3670
20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8주(46문,47문,48문,49문) -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file 46-49문 최상범 362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