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397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33-34문
문답내용 33문 :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 :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아들이시고 또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4문 :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릅니까?
답 :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죄로부터 구속하시고, 또한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강설날짜 2013-12-1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3주(33-34문)

외아들, 우리 주

말씀 : 요 1:1-3, 14

33문 :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 :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래적인 아들이시고 또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4문 :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릅니까?
답 :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죄로부터 구속하시고, 또한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사도신경의 두 번째 부분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고백인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지난시간까지는 ‘예수’와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두 가지, ‘외아들’, ‘우리 주’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외아들

우선 오늘 요절 말씀을 보면...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요한복음의 이 서론은 다른 복음서하고는 다른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4 복음서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마태, 마가, 누가는 보는 관점이 비슷하다 해서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보는 관점이 특이하다해서 ‘제4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공관복음과 비교해서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관점과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신성과 그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강조입니다. 물론 공관복음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또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는 요한복음만큼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특히 서론만 보아도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공관복음서는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은 아기 울음소리 들리고 동방박사가 찾아와서 경배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아기 울음소리 들리고 목자들이 찾아와서 경배합니다. 이렇게 마태와 누가는 아기 울음소리로부터 예수 복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가복음에서는 더 이상 아기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청년예수님이 등장함으로써 예수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전혀 다른 시점에서 예수 복음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말할 때, 아기울음소리나, 청년에서 시작하지 않고, ‘창세전에’, 즉 이 세상이 지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의 기원을 시간이 창조되기 전인 영원 전으로까지 소급해 올라갑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 요한복음의 웅장한 선언은 창세기 1장 1절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견줄 수 있는... 아니 그보다 더 근원을 파고 들어가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천지가 있기 전에 말씀이 계셨는데, 사실 이 ‘말씀’이라는 단어는 번역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로고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그렇게 해놓고 “로고스가 무엇이냐?”하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라고 번역해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놓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는 오해하기도 합니다. 말씀이라고 하니깐 사람이 하는 말을 자꾸 생각합니다. 이 말씀이라고 불리는 분은 인격적 실체로서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지, 단순한 발화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원문대로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렇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왜 사람으로 오시기 전에도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로고스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호칭할 마땅한 용어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호칭을 붙이면 되지 않느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라는 호칭은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그래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에 연합된 그분에 대한 호칭이기에, 선재하신 성자 하나님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선재하신 성자 하나님을 뭐라고 호칭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영감 가운데 그 당시 그리스 문화에서 “진리의 근원, 철학의 근본, 우주의 근본”을 가리키는 용어인 ‘로고스’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로고스’라는 단어는 “말, 말씀”이라는 뜻이지만, 그러나 철학에서는 “진리의 근원, 우주의 근본”이라는 독특한 의미로 통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라고 하여 선재하신 그리스도를 표현하였습니다. 단어를 차용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철학의 로고스와 성경의 로고스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통해서 성령하나님이 의도하신 내용에는 그분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하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그분을 로고스라고 칭할 때는 그분이 만물과 우주의 근원이시고 근본이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계속해서 보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로고스께서 곧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면, 앞의 하나님과 뒤의 하나님이 어떻게 구별되시며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됩니다. 그래서 14절에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즉 로고스는 성부하나님의 독생자인 성자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분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앞서 12절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여기서 ‘자녀’는 의역된 것이고, 원문을 보면, ‘아들들’입니다. 즉 예수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많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많은 아들 중에 예수님은 맏아들... 이정도 표현이면 이해가 되겠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표현하니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33문 : 우리도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 :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만 홀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비하여 우리는 그로 인하여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은혜로 아들로 입양된 자들이고, 예수님은 본래 아들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는 원수였는데, 은혜로 입양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로고스께서 하나님이심이 다시금 선언되면서, 이 로고스를 본 사람은 곧 하나님을 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일차적으로 그분의 신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들 되심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우리의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개념을 무작정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단이 됩니다. 교회사를 보면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하여 늘 이단이 있어왔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3세기 아리우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 2편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낳기 전에는 성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피조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의 부자(父子)관계가 그러하듯이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보다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 못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전체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부자(父子)관계를 성급하게 본문에 적용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했을 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우리의 부자관계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못한 분이라고 이해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발언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늘 드는 예지만, 개의 새끼는 개이고, 고양이 새끼는 고양이이고,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신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며, 그분의 권능과 영광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에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오리겐이 잘 설명했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영원히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태어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점을 강조해서 설명하는 것이죠.

답 :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만 홀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비하여 우리는 그로 인하여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영원하신 아들이신 반면에 우리는 본래 아들이 아니었고,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는 누구의 아들이었습니까? 사단 마귀의 아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인생들이 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측면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단 마귀의 자식들이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입니다. 죄 가운데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사단 마귀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어느 한 순간에 은혜가 임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편에서는 그런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표현이 달라집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를 입양하셨습니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복음을 듣고 깨달아 예수를 믿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값없이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는 어떤 자입니까? 사단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비로소 입양되는 것이 아니라, 워낙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는데 돌아오기까지 집나간 탕자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에 가서 죄와 방탕 가운데서 사단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다시금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자들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역사의 어느 순간에 원수였다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영원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 사랑은 우리가 입양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도 계속되어서, 원수와 같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주시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였기에 그의 몸된 교회도 예수님이 누리신 모든 신분의 특권과 권세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5-17)

이 로마서 말씀이 쓰일 당시에는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 받고 핍박을 받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자들이 의문을 갖는 것이죠.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 이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도리어 천대받고 고난 받고 핍박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사도가 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신분이 가지는 특권과 권세와 위엄이 이 세상에서는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합니다. 고난당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대기업 사장이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워낙 철이 없어서 그냥 물려주지 않고, 미션을 주어서 그 미션을 이루면 물려주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로 고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철없는 아들이 미션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고, 또 눈물 젖은 빵도 먹어보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자기가 깨어지고... 그렇게 하면서 철이 들게 되죠. 그제야 아버지는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어서 그 아들이 회사를 잘 경영하게 되었다는 헤피 엔딩의 드라마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영광과 상급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장차 불타 없어지고 말 것이고, 우리에게 주실 유업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왕 노릇하는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에 참예하기에 합당한 자로 훈련하시는 훈련소인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으면, 이제 마귀의 자녀로 살 때 가졌던 습관들, 가치관이나 생각들, 행동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가문의 기풍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 지키려고 하고, 계명 지키려고 하고, 주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되는데,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어려움이 오니깐 힘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신 특별 기회인줄 알고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는 사랑과 은혜와 위로를 주셔서 우리로 넉넉히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고난 속에서 우리가 영적으로 철들게 되고, 또 하나님 아버지와의 효성관계를 잘 형성해 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답게 훈련되고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부르심으로써 기대하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이 이 세상을 고생하고 훈련받는 훈련소로 살지 않고, 안락한 처소로 삼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어찌하든지 피하려고 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시려고 고난을 주시면 “왜 하필 저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이 물러가게 하시고, 평화를 주옵소서... 형통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도 없습니다. “힘든 경기는 없게 하여주시고 놀고먹는 운동선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면 면류관도 없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고 고생도 안하고 평안한 농부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추수할 때 열매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쟁이요, 영적 경기요, 영적 농사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지금은 누리고 편히 쉴 때가 아니라, 부지런히 눈물을 흘리며 심을 때고, 싸울 때고, 최선을 다해 경기할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본래적인 독생자이시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은혜로 입양된 자녀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우리 주

34문 : 왜 당신은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릅니까?
답 :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금이나 은이 아니라,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죄로부터 구속하시고, 또한 마귀의 모든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원래 ‘주’(큐리오스)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이 용어를 부활하신 예수님께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되셨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 되셨으며, 온 세상을 철장으로 다스리실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분의 교회만이 그분을 ‘우리 주’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언제가 되면 모든 인생들도 다 그분을 주라고 고백하게 됩니까?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셨지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이 일은 주님의 재림의 때에 진정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원든 원치 않든 모든 사람들이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되며 그분이 주님이심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비로소 ‘주’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본래 주인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그분은 본래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반역하고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죄와 사망과 사단의 노예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다시 값을 주고 사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무슨 값을 주셨습니까? 자신의 피값을 주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단의 종에서 해방되어 다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9)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8-9)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예수님을 우리의 주로 고백하며 사십니까?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정신이 빈약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생각은 우리가 많이 합니다. 그러나 죽으신 그분께서 부활 승천 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고 교회의 머리요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후자를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음을 늘 말하고 고백해도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값을 주고 사셨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라고 하는 정신은 바로 십자가 복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알면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 없이 “주님이 날 대신 죽어주셨음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가짜 믿음이요 거짓말입니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비장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는 흔히 접하게 됩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리고 뻔한 줄거리지만,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위해 준인공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버리면서까지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물어볼 것입니다.

“왜 저 사람에게 그렇게 목숨 바쳐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까?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까?” 

주인공은 틀림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그때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의 나의 삶은 저 사람이 나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나는 최선을 다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목숨까지도 바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은인이 아니었다면 그 주인공은 분명 죽었을 것이고, 때문에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삶은 보너스나 선물과 같이 덤으로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덤으로 얻은 삶은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것이라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깔려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나를 죽을 위험에서 구원해주어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바쳐서라도 그 사람의 은혜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로서 본래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생명과 삶, 모든 가족과 소유물과 재능... 이 모든 것들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모든 것이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악하게도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거역하여 떠나 내가 신이 되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지옥형벌을 면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죽을 운명에 처한 우리를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받은 우리로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더욱 마땅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을 자신의 서신서에서 많이 하는데, 이것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옛날의 나, 곧 내 마음대로 죄짓고 살던 나도 같이 죽었고, 주님 부활하실 때, 새로운 생명과 삶을 선물로 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 “그분은 나를 피로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나의 새 주인이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이다...” 하는 정신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대로 신자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십자가에서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못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주님의 것으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어떤 값비싼 대가를 치르셔서 우리를 그 지옥형벌에서 구원해주셨는지 깨달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알 때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덤으로 주신 새 인생임을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새 인생을 그동안 내 욕심을 따라 살아온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값 주고 사셔서,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영혼도 주님의 것이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은혜에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새 주인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순종할 때 당하게 되는 모든 손해와 희생, 고난과 핍박을 주님 주신 은혜와 위로로 감내하면서 주의 자녀로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나는 이미 죽었다” 생각하고, 예수님을 나의 새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6,11-12)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23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8주(103문) - 제4계명 file 103문 최상범 2718
23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9주(104문) - 제5계명 file 104문 최상범 2671
23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0주(105문,106문,107문) - 제6계명 file 105-107문 최상범 2755
2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1주(108문,109문) - 제7계명 file 108-109문 최상범 2036
23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2주(110문,111문) - 제8계명 file 110-111문 최상범 2607
23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3주(112문) - 제9계명 file 112문 최상범 2645
23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Ⅰ(113문) - 제10계명 file 113문 최상범 2705
23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주Ⅱ(114문,115문) - 율법과 성화 file 114-115문 최상범 2338
23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5주(116문,117문,118문,119문) - 기도 file 116-119문 최상범 2493
22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5주(12문,13문,14문,15문) - 우리의 중보자 file 12-15문 최상범 5561
2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6주(120문,121문)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file 120-121문 최상범 2109
22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7주(122문)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file 122문 최상범 2068
22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8주(123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file 123문 최상범 1814
22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9주(124문)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file 124문 최상범 2157
22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0주(125문)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file 125문 최상범 1997
22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1주(126문) -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file 126문 최상범 1904
22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2주(127문,128문,129문) -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file 127-129문 최상범 2388
22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6주(16문,17문,18문,19문) - 유일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file 16-19문 최상범 5028
22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 제1주(1문,2문) - 생사간의 유일한 위로 file 1~2문 최상범 7751
21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7주(20문,21문,22문,23문) -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file 20-23문 최상범 587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