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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4조 강설 - 사람의 타락과 자유의지

by 최상범 posted Mar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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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14조
문답내용 제 14 조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
The Creation and Fall of Man and his Incapability of Doing What is Truly Good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이때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 그런 지위를 바르게 인식하지도(appreciate)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으며, 전체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사람은 육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대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또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 완악하고 부패해져서,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몇 가지 작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써도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는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인간을 어두움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이 변하여 어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이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요8:34),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3:2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라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감히 자기 자신의 뜻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고전2:14)라는 말씀이 있는데 누가 자신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는 말씀을 알고서야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 없이 인간은 그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어떤 하나님의 뜻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설날짜 2015-03-08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4조 강설


사람의 타락과 자유의지


제 14 조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
The Creation and Fall of Man and his Incapability of Doing What is Truly Good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이때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 그런 지위를 바르게 인식하지도(appreciate)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으며, 전체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사람은 육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대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또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 완악하고 부패해져서,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몇 가지 작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써도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되기에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는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인간을 어두움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이 변하여 어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이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요8:34),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3:2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라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감히 자기 자신의 뜻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고전2:14)라는 말씀이 있는데 누가 자신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는 말씀을 알고서야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 없이 인간은 그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어떤 하나님의 뜻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형상이라는 말은 조금 닮은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닮은 것으로 치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천사 같은 경우는 지정의 인격까지 있고, 영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보다 더 하나님을 닮았으며, 그 거룩함과 선함에 있어서, 그리고 권능과 영광에 있어서는 우리보다 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천사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돌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천사에게는 없지만 사람에게는 있는... 하나님의 형상됨의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연합의 관계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곧 셋이면서 하나로 연합하여 계시는 그 관계를 사람이 닮았습니다. 천사는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하나도 닮지 않았습니다. 천사는 모두 동시에 창조되어 동시에 존재하고 다 각기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들입니다. 천사들끼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혈연관계를 맺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바로 그 연합의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았고, 뜨거운 사랑 가운데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서로 하나 될 때 그들에게 자녀가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부모와 자식이라는 열렬한 관계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가정 한 가정이 생겨나면서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거기서 수많은 각기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경험하는 모든 관계는 사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다양한 관계를 주님 안에서 경험합니다. 주님은 우리 남편이 되시고,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맏형이 되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 스승이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끈끈한 관계를 이룰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와만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여 신의 성품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에게 왕으로서의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황태자로서 장차 만유를 유업으로 이어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지위는 오직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더욱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십시오.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신 것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 2:16). 그리하여 주님의 값진 희생과 한량없는 은혜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값 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하고, 앞서 언급한 모든 은혜와 특권과 지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주님의 구원의 은혜는 천사들에게 신비 그 자체여서 천사들이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12)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그래서 우리 사람이 분명 천사보다도 못한 점이 많지만, 그럴지라도 사람은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으로서 천사보다도 존귀한 존재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시선과 마음은 하늘의 천사들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천사들은 바로 사람들을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4)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5)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7)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8)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3-8)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얼마나 독보적이고 존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입니까? 성경은 둘 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좁은 의미의 형상과 넓은 의미의 형상을 구분해서 생각합니다. 넓은 의미의 형상은 사람의 “지정의로서 인격적인 존재, 그리고 이 세상을 다스려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이성과 탁월한 재능과 능력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 여전히 남아있는 도덕적인 본성(양심)과 종교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사람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을 이 세상에 어느 정도 반영하기 때문에 타락한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사람은 전적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을 닮았다고 할 때에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성품을 닮은 것을 말하는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런 성품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냥 죄 덩어리요, 티끌이요, 육체요, 동물이요, 전적인 어둠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을 읽을 때 중점적으로 생각해야 할 부분의 바로 이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됨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내용도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은 선함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그냥 선하게 지음 받았다고 하면 너무 단순하니깐... 좀 더 정교하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까 고민하는 가운데, 바울이 “우리가 옛사람을 벗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은 새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한 구절을 주목하였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이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새사람의 상태가 곧 첫 사람 아담의 상태이겠구나 하고 역추적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은 선했는데, 어떻게 선했냐 하면, 온전히 의롭고 거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됨의 본질입니다.


의롭고 거룩하다는 말은 죄가 없고, 그 마음과 모든 행실이 하나님의 법에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 거짓말 같은 악을 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온전히 선하게 사는 것은 아담에게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 자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은 하나의 선의적인 시험으로써 온전히 선한 아담도 범할 수 있는 계명이었습니다. 바로 아담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그 선악과 금령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는 우리가 죄 짓는 것 하고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 짓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입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을 레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부부는 얼마든지 죄를 안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고의로 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때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 그런 지위를 바르게 인식하지도(appreciate)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에서 핵심은 아담의 범죄가 고의적인 범죄라는 것입니다. 그 고의성이란 결국 자신의 지위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교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마땅히 자신들이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어야 했고, 또 흙으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래서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서) 더 없이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음을 알고 다윗처럼 자신들을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사단의 꾐에 빠져 현 상태보다 더 높이 되겠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선악과 금령을 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범죄의 결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범죄는 벌금 얼마 내고 태장 몇 대 맞으면 끝날 그런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범하면 죽게 되고 영원히 저주아래 있게 되는 생명의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으며, 전체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사람은 육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대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 저주와 사망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야 할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고 물 밖으로 나온 것과 같고,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것과 같으며, 기차가 레일에서 이탈한 것과 같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는 것 자체가 사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사망을 두 가지 차원에서 경험합니다. 바로 육적인 사망과 영적인 사망입니다. 먼저 육적인 사망은 당장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유예기간을 가진 후 늙거나 병들어서 또는 사고로 죽게 됩니다. 반면 영적인 죽음은 범죄한 직후 곧바로 임했습니다. 영적 사망 상태란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모든 선한 것을 잃어버리고 죄 가운데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죄책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양심의 고통을 느끼며 살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 내면 전체가 오염되고 부패하여 그야말로 추악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또 사람은 모든 면에 있어서 악하고 완악하고 부패해져서,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몇 가지 작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이것으로써도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되기에 충분합니다.


“이전에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탁월한 은사들”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고, “몇 가지 작은 흔적들”이라고 표현된 것은 인간 안에 남아있는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의해 남아있는 이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특별히 인간 안에 있는 양심과 도덕성, 종교성을 의미하는데, 그것으로는 그저 그들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도록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전적타락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자꾸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사람 안에 있는 작은 흔적들에 자꾸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고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특히 펠라기우스라는 사람은 아예 아담의 범죄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적타락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여전히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스스로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오류에 대해 우리 믿음의 교부 어거스틴은 목숨 걸고 전적타락교리와 오직 은혜의 복음을 수호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로마가톨릭이 어거스틴의 견해와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반반 섞어버렸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이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지만,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믿지 못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그 은혜에 화합하고 협력하지 못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은 인정하는데, 그러나 우리 편에서도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고 협력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알미니안 같은 경우는 인간의 전적타락을 거의 인정하는데, 다만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는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 경우 중에서는 그래도 알미니안이 제일 은혜를 많이 강조하지만 그러나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세 경우 모두 똑같이 다른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에 얼마나 비슷하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가 아니면 그것은 암만 은혜를 강조해도 결국 다른 복음입니다.


이것을 왜 목숨 걸고 고백하느냐 하면, 전적타락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우리는 전적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살길이 없습니다.”라고 하는 전적의존감정으로 그리스도를 붙드는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앞의 세 가지 견해는 그리스도 없이도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하니깐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세 가지의 사상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려는 우리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여 우리를 바리새인처럼 만들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목숨 걸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벨기에 신앙고백서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라는 말씀으로 사도 요한이 인간을 어두움이라고 부른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빛이 변하여 어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이 가르침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노예일 뿐이며(요8:34), 하늘에서 주신 바가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3:2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고 하셨는데, 누가 자기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라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감히 자기 자신의 뜻을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고전2:14)라는 말씀이 있는데 누가 자신의 지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요컨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는 말씀을 알고서야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는 말씀을 확실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 없이 인간은 그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없고, 그 어떤 하나님의 뜻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적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루터의 말처럼 죄와 사탄을 향한 노예의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그리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그 이후가 되겠습니다. 거듭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고 죄에 대한 노예의지만 있습니까? 네, 여전히 그렇습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선을 행할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의 대답을 끝내면 안 됩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늘 주님께 붙어있어야 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 믿고 한번 주님과 연합해서 구원받았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믿음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태어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존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믿음으로 주님과 붙은 채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께 붙어있게 되면, 물론 우리 안에는 여전히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옛사람이 남아있지만,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강력한 소욕이 우리 안에서 세력을 얻어 우리의 죄된 본성을 억제하고 억누르고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로 육체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 맺는 열매도 온전한 열매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해도 거기서도 흠을 발견하기 때문에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열매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보시고 은혜로 선행으로 여겨주시고 기뻐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선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님을 좇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 성령을 좇아가는 삶은 언제나 자신의 전적타락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전적타락과 전적무능력을 깨달으면 주님 없으면 죽는 줄로 알고 주님께 울며불며 매달립니다. 그런데 자신의 전적타락과 무능력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자는 그렇게 주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만히 행하다가 결국 죄에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전에 말씀 드렸듯이 신자가 죄를 짓는 것은 의지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님께 울며불며 매달리고 의존하고자 하는 전적의존감정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는 실천적인 로마가톨릭이고 알미니안 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는 자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우리가 영적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영적으로 파산상태에 있는지 깨닫고 울며불며 그리스도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 이런 은혜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게으른 자에게는 성화의 삶이 없습니다. 통상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심히 말씀 읽고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그리고 실제 삶속에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로 그리스도를 붙잡고 성령을 의지하며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금욕하며, 절제하며 말씀과 기도에 착념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로마가톨릭이 말하는 은혜에 협력하는 또는 은혜 받기를 준비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로 협력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행위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받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힘쓰고 순종하기 위해 여러 모로 애쓰는 것조차도 다 성령님의 은혜에 의해 생겨난 마음이고 행위인 것입니다.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12절은 구원의 여정을 완주함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의무와 애씀과 노력조차도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이 13절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소원을 주셔서 우리로 구원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고백합니다.


“(10)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러므로 전적타락을 인정하고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를 외치는데, 사도바울처럼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는 삶이 없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스스로 거짓된 믿음에 속아서 멸망으로 가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힘써 수고하는 삶은 있는데, 그것이 자기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그렇게 못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전적타락과 오직 은혜를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자신의 전적타락을 인정하면서 그리스도 외에는 살길이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힘써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거룩한 열매를 삶 가운데 풍성히 맺었을 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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