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7조 강설 - 타락한 인간의 회복

by 최상범 posted Apr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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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17조
문답내용 제 17 조 타락한 인간의 회복
The Rescue of Fallen Man

우리는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영육간의 사망상태에 있는 인생들이 스스로를 파멸 속으로 내던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저주 가운데서 스스로를 전적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가장 놀랄 만한 지혜와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전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치는 인생들을 친히 찾으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갈4:4) 뱀의 머리를 깨뜨리심으로(창3:15) 인생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실 분이십니다.
강설날짜 2015-04-19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7조


타락한 인간의 회복


제 17 조  타락한 인간의 회복
The Rescue of Fallen Man


우리는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영육간의 사망상태에 있는 인생들이 스스로를 파멸 속으로 내던지고 있다는 것과 그리고 저주 가운데서 스스로를 전적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가장 놀랄 만한 지혜와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전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치는 인생들을 친히 찾으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갈4:4) 뱀의 머리를 깨뜨리심으로(창3:15) 인생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실 분이십니다.


지난 강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버려진 자들을 통해서는 공의를 나타내시고, 구원으로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는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신다고 배웠습니다. 오늘 17조부터는 이러한 선택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사역을 다룹니다.


우리는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믿는데, 왜 가장 은혜로우시냐 하면... 이 점에 대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행위를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보셨다’ 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찾으셨다’ 입니다. (‘불쌍히 여기셨다’는 원문에는 없고 번역자의 의역입니다.)


첫째로 보셨습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망상태에 있는 인생들을 보셨습니다. 영육간의 사망은 원죄의 결과입니다. 누가 억지로 죽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인생들이 스스로를 파멸 속으로 내던졌다고 표현하고 있고, 저주 가운데서 스스로를 전적으로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생각할 때 이것은 상식을 벗어난... 결코 당연하게 생각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께 반역한 자들입니다. 예로부터 반역죄는 가장 큰 죄로 생각되어 삼족을 멸하거나 구족을 멸함으로서 엄벌하였습니다. 인생들이 하나님께 지은 죄는 구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을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은커녕 모든 인생들을 다 진멸하셔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무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쁜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인데,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작정하신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런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죄인들이지만, 불택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진멸당해 마땅한 원수인 반면, 택자들은 집나간 탕자인 것입니다. 배은망덕하게 자기 발로 집 나간 자식이 비참해질 때, “꼴좋다” 하고 웃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에게 그 자식은 미워도 내 자식입니다. 도리어 그 자식이 비참해질 때 부모는 그 자식이 너무 불쌍해서 마음이 찢어질 만큼 고통을 느낍니다. 차라리 내가 그 고통을 당했으면 당했지, 저 아들을 그 비참한데서 구해내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저주와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고 구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인생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두 번째 행동입니다.


가장 놀랄 만한 지혜와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전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치는 인생들을 친히 찾으시고


죄인들의 비참함은 스스로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데 있습니다. 왜 도망갑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괜히 그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죄책으로 인하여 그 관계가 파괴되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범죄한 인간의 첫 번째 행동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그런데 이렇게 피하여 숨고 도망가는 아담 부부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나아올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시고! 찾으시는! 이 하나님의 두 행동은 구원에 있어서 주도권이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형벌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서 구원을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하나님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그래 살려줄게.”하시며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복음 전할 때, 신자가 불신자에게 사정사정해서 교회 와서 예수 믿어 구원받으라고 말합니다. 실상은 누가 누구에게 사정해야 합니까? 불신자가 신자에게 “나도 예수 믿고 싶은데 제발 복음을 알려주시오. 저를 한번만 교회에 좀 데려다 주십시오.” 그렇게 사정해야 하는데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사람을 전도할 때 수많은 고생과 희생과 눈물로 섬겨서 겨우 교회 데리고 와서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인데, 일단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예수를 믿게 되면, 그제야 사태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교회로 인도한 사람에게 두고두고 “당신은 내 은인입니다.”하면서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부르짖을 때에 만나주신 것이 아니라, 도망갈 때 친히 찾아와서 만나주시는데, 이런 예들은 우리가 성경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경우에, 바울이 하나님을 향해 “나를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세워주옵소서...” 철야하고 금식해서 예수님 만나고 사도로 세움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찾으러가는 사랑이 누가복음 15장에 또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첫 번째는 잃은 양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유인 열 드라크마 비유에서도 “하나를 잃어버리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으시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찾다 안 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 그렇게 이해하는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곤란합니다. 세 번째로 탕자 비유를 잘 봐야 합니다. 탕자 비유는 사실상 앞의 비유들과 똑같은 비유인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탕자 비유 결론에서 아버지는 잃었다가 찾았다고 말합니다. 즉 아버지는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으셨다는 것인데,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그의 마음을 주관하셔서 그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케 하심을 통해서 찾으시는 것입니다. 즉 탕자 비유는 찾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여전히 견지하면서도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을 또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찾아오시는 일방적인 은혜는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평생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를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주님을 3번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님이 부활하셔서 찾아오셨을 때 베드로는 아마도 주님을 뵐 면목이 없었을 것입니다. 배반한 놈이 알아서 자진납세해서 빌어야 할 상황인데, 베드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뒷걸음질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베드로가 스스로 나아와서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그것이 아니라 다시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3번 사랑고백을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3번 사랑고백하게 하신 것은 3번 부인한 것을 만회할 수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회복이죠. 찾아오시고 회복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죄 짓고 넘어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예배드리는 것이 싫어지고 기도하는 것이 싫어지고 성경 공부하는 것이 싫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결국에는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게 되죠. 그것이 우리 스스로의 결단력과 용기로 자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렇게 회개의 마음으로 겸비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으셔서 구원하여주시는 가장 은혜로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찾으셔서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그냥 죄 지은 거 없던 걸로 해줄게...”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룰도 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완전한 지혜와 선하심과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따라 최선의 방법으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놀랄 만한 지혜와 선하심으로 하나님의 목전 앞에서 두려워 떨며 도망치는 인생들을 친히 찾으시고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여자에게서 나서(갈4:4) 뱀의 머리를 깨뜨리심으로(창3:15) 인생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실 분이십니다.


가장 놀랄 만한 지혜와 선하심을 따라 최선의 방법으로 구원하여주시는데, 그것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운 성품에 어떠한 손상도 없이, 곧 우리 죄를 향한 자신의 진노를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아들에게 쏟아 부으심을 통해서, 그 아들의 희생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찾지도 아니했고 구하지도 아니했고, 오히려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바로 아담이 타락하자마자 이 아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심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자비와 긍휼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있습니다. “아들을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면, 약속할 것은 또 뭡니까? 타락하자마자 바로 보내주시면 되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훈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로 말미암아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제대로 서기 위해서는 율법이 먼저 와야만 하고, 실체가 제대로 역사하기 위해서는 모형을 통해 예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먼저 약속하시고 모형을 통해 예습시키신 후 한참 뒤에 아들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실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이 약속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여기서 여자는 하와를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로부터 한 아들, 곧 그리스도가 태어나는데, 그 그리스도와 뱀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둘 다 상처를 입지만, 그 피해의 정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박살냅니다. 궁극적인 승리가 그리스도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1:1 대결은 그냥 단순한 개인전이 아니라 사실은 나라간의 전쟁의 맥락에 있습니다. 대표 장수가 나와서 1:1로 붙어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쟁인 것입니다. 거기서 사단마귀가 패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가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승리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땅에 있는 교회는 여전히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면서 영적전투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왜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까? 학자들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예를 사용합니다.


첫 번째로 D-day와 V-day로 설명합니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완전한 승기를 잡은 사건이 D-day라고 한다면, 최종적으로 모든 지역을 수복하고 전쟁을 종식시킨 사건이 V-day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는 전쟁의 승기를 잡은 D-day의 승리이고, 그 승기를 가지고서 교회가 계속해서 뱀의 나라와 전쟁해서 최종적 승리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가 부분적인 승리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은 설명입니다.


두 번째로 씨앗과 열매로 설명합니다. 보다 좋은 설명인데 그 설명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온전히 승리하셨고, 그리하여 이 땅에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 나라는 씨앗의 형태로 임했습니다. 그 씨앗은 자라서 완성해야 합니다. 이미 온전히 승리했지만 그 승리는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자라가야 하는 과정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성취가 되었지만 아직 완성이 안 된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에 있는 것이죠. 이 설명은 앞의 설명보다 좋은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도 충분한 설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와 ‘아직 아니’의 긴장관계를 왜 조성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이 전쟁의 두 가지 측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이 전쟁이 일차적으로 보통의 전쟁처럼 양진영이 경계선을 두고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포로를 구출하는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 있는 교회를 구출해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마귀의 권세를 박살내시고 우리를 그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시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마귀의 권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 있기 때문에 바로 자신의 십자가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율법을 폐하심으로써 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단을 결박하시고 그의 소유물을 하나하나 강탈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의 십자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출하고 계신 것입니다. 포로구출작전이 현재진행형입니다. 포로를 다 구출하기 전까지는 사단의 진영에 최후의 폭격을 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 적진을 발견했습니다. 폭격을 가해서 당장에 다 파괴해버립시다.” 그러는데, 예수님은 “지금 폭격을 가하면 남아있는 포로들이 죽을 수 있다. 포로를 다 구출하기 전까지는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최종적 심판과 승리는 차후로 미뤄두셨습니다. 때문에 사단이 패했는데도 그들이 여전히 활동할 기회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영적전쟁은 또한 하나님과 사단과의 내기한판의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욥기를 잘 봐야 합니다. 욥기는 단순한 욥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욥은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교회를 두고 사단마귀와 하나님이 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단마귀는 “하나님! 핍박하고 유혹을 하면 교회가 과연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했고, 하나님께 시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승리를 자신하시면서 “해봐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심으신 참된 믿음의 생명력,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힘을 공급받아 반드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야 마는 그런 믿음의 생명력을 믿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말하면 참된 믿음의 생명력의 진가는 그러한 어려운 시험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열매를 보고자 하셨기 때문에 교회로 하여금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욥기는 이 시험을 통해 교회를 성숙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또한 가르쳐줍니다. 왜냐하면 욥은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성숙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야고보서가 잘 보여줍니다. 야고보서는 철저하게 욥기의 문맥에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처음부터 시험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얻었는데, 왜 교회가 여전히 이 땅에 남아서 여러 가지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해 인내를 이루어 영적 성숙을 도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약 1:3-4,12). 그러면서 2장에 아브라함이 시험당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은 살아있어서 모든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해서 결국 열매를 맺고야 만다고 하는 이행칭의를 말합니다. 이것은 믿음+행함=구원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는 사람의 믿음이 과연 살아있는 참된 믿음이냐” 라고 하는 책망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야고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욥기를 언급하면서 욥의 인내를 본받자고 말합니다.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7-11)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 땅에서 계속해서 영적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욥처럼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난과 핍박과 유혹이 와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 교회의 승리입니다. 뱀이 교회의 발꿈치를 물고 늘어지지만, 그것을 참고 인내함으로써 교회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도 이러한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계 12:1-계 12:17]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2)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4)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8)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9)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10)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11)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2)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14)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16)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이 요한계시록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세 가지 환상은 시간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묵시적으로 용과 대적하며 싸우는 세 부류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단락은 용과 남자 아이 곧 그리스도와의 싸움을 말하고 있고, 두 번째 단락은 용과 미카엘과의 싸움을,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용과 여자와의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세 가지 싸움에서 항상 용이 패배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세 단락 모두 여자가 당하는 고난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단락에서 여자가 남자 아이를 낳고 나서 일천이백육십일 동안 용을 피해 도망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여기서 일천이백육십일, 마흔 두 달(11:1-2), 한때 두 때 반 때, 삼년 반... 다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종말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교회는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그 도망은 패배가 아니라 양육을 받는 시기입니다. 즉 교회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인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뱀의 후손이 우리의 발꿈치를 깨무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락에서 용이 미카엘에게 패배하는데, 역시 여자의 고난을 언급합니다.


(11)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자의 승리를 이야기하는데, 그 승리는 말씀의 선포입니다. 즉 말씀을 증거하다가 순교당하는 것이 여자의 승리입니다(계 11:1-2, 11장 전체 참조). 따라서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패배요 사단에게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복음을 세상에 증거 한다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에서 용은 여자를 대적하며 핍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수리 두 날개를 주셔서 그들을 용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주시고 광야에서 양육해주십니다. 그리고 용이 물로 여자를 수장시키려고 합니다. 그때도 땅이 입을 벌려 물을 삼키게 하셔서 구원하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애굽 군대에 의해서 수장될 위기에 있던 이스라엘을 홍해를 갈라 구원해주시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용은 교회를 파멸시키기 위해 핍박과 유혹이라는 무기로 총공격을 가합니다. 교회가 핍박에 굴하고 세속의 흐름에 흘러 떠내려갈 위험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순교당할 위험에서 우리의 육신을 구원해 주신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보존해주셔서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은 이제 이러한 교회와 용과의 묵시적인 영적전쟁을 지금 우리의 현실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금의 영적 현실을 분명히 직시하고, 잠자던 데서 일어나서, 무섭고도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순교의 길,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는 자, 곧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인 우리가 회개하고 이 길을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를 붙잡음으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가서 궁극적 승리에 참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영적전쟁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19)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20)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19-20)


선한데 지혜롭다는 말은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하는데 힘쓰는 것을 말하고, 악한데 미련하다는 말은 유혹을 물리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살려면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의를 행하면 반드시 고난과 핍박이 따르고, 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부인하고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고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고통을 인내하고 잘 참아내면, 그래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우리가 뱀의 머리를 밟게 되는 궁극적 승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승리가 확정적이기 때문에 그 승리는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졌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은혜로 주어진 그 승리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영적전쟁을 싸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언약은 성경을 읽어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원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창 3:15 안에는 구속사의 모든 진리와 비밀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눈에 보이게 나타난) 최초의 은혜언약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로 비참하게 되자마자 하나님은 아담부부를 친히 찾아오셔서 이 은혜언약을 맺어주시고, 아들을 약속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한합니다. 늘 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감사하면서 믿음으로 이 땅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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