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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21조
문답내용 제 21 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The Satisfaction of Christ our High Priest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흠 없이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도다.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5,7,12).” 그리고 비록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처음에는 그분을 무죄하다고 선언했으나, 나중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범죄자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시69:4). 그분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벧전3:18). 그분은 몸과 영혼이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느끼셔야 했고, 그분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습니다(눅22:44). 마지막으로, 그분은 외치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전2:2)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빌3:8).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온갖 모양의 위로를 얻습니다. 신자를 언제나 완전케 하는, 이 단번에 드려진 한 번의 속죄 제사(히10:14) 외에 하나님과 화해할 다른 방편을 찾거나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천사가 그분을 “예수”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1:21).
강설날짜 2015-05-17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1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제 21 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The Satisfaction of Christ our High Priest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흠 없이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도다.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5,7,12).” 그리고 비록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처음에는 그분을 무죄하다고 선언했으나, 나중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범죄자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시69:4). 그분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벧전3:18). 그분은 몸과 영혼이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느끼셔야 했고, 그분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습니다(눅22:44). 마지막으로, 그분은 외치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견디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전2:2)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빌3:8).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온갖 모양의 위로를 얻습니다. 신자를 언제나 완전케 하는, 이 단번에 드려진 한 번의 속죄 제사(히10:14) 외에 하나님과 화해할 다른 방편을 찾거나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천사가 그분을 “예수”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1:21).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21조부터 26조까지 구원론을 다룹니다. 오늘 배울 21조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고, 22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23조는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고 자기를 신뢰하지 말아야 함에 대해서, 24조는 우리의 성화와 선행이 결코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25조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26조는 그러므로 신부나 교황, 죽은 성자들... 그리고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들은 모두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구원관과 교황제도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과 다른 내용을 말하면 그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그 시대에 더브레는 용기 있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 그대로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서론에서 배웠듯이 더브레는 이 성경적 고백의 내용을 통해 로마가톨릭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것을 기대했습니다. 아니면 최소한 자신들이 이단 광신자들이 아님을 알아서 자신들을 향해 펼치고 있는 핍박정책을 취소하고 관용정책을 펼쳐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물론 더브레도 이것이 꿈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설사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하여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복음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브레는 이 복음을 참되게 깨달았고, 또 이 복음만이 구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전혀 새롭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더브레 당시에는 정말 복음에 대한 획기적인 발견이고 깨달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은혜의 복음이 1000년 동안 교회에서 가르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루터가 복음을 깨닫고 1517년에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전 유럽에 걸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그 바통을 칼빈이 이어받아서 이 은혜의 복음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서 종교개혁을 완성한 것입니다. 바로 더브레는 이 칼빈으로부터 배운 사람이고,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불과 40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것입니다. 더브레가 로마가톨릭 아래에서 오랫동안 흑암가운데 있다가 이 은혜의 복음, 오직 십자가 복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워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읽어보면 그러한 감격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 대한 감격에 사로잡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배우는 내용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통해서 더브레와 같이 이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1조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대제사장의 희생제사의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순교가 아니라, 구약의 희생제사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이 고백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죄의 삯은 사망이고, 대속의 희생제사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복음을 점진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이 드린 희생제사는 대속의 의미라기보다는 헌물의 의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노아가 드린 희생제사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속의 개념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족장시대 때는 보다 자주 희생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했다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숫양으로 번제를 드린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로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게 하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할 희생제사에 대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계시해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모세 당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명시적으로 희생제사 규례와 그 의미들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에서의 핵심은 바로 성막에서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생각해야 할 사실은 동물을 희생제사로 신께 바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 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 당시의 모든 종교에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종교에서의 희생제사는 모두 신에게 값비싼 동물을 헌납하여 신의 환심을 사거나 또는 신이 진노하면 그 헌납을 통해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린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면을 볼 수 있는데...


“(14)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


어떤 사람에 대해서 미운마음이 가득하게 있는데, 그 사람이 찾아와서는 친절하게 대해주고 선물도 주고, 돈도 많이 주면, 그 미운 기분이 다 풀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모든 이방종교는 그런 식으로 신을 대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뇌물을 바쳐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신의 환심을 사서 복을 받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희생제사는 전혀 다른 개념의 희생제사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희생제사 역시 하나님께 헌물을 드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개념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이 기독교 희생제사의 본질적인 개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이 품고 계시는 진노와 분노는 그런 동물 몇 마리가 바쳐진다고 해서 가라앉을 진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무한한 진노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악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지옥으로 형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배려하시지만, 세상 끝이 되면 그야말로 복수하는 날로서 일말의 일반은총 없이, 영원히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품고 계시는 마음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런 비참한 상황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방종교의 희생제사 처럼, 교회 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도덕적으로 선을 많이 행해서, 그 공로로 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환심을 사서, 그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을 보장받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가증한 짓이고, 교만한 짓이며, 복음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 어떠한 행위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속죄제사를 통해서만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택한 백성들은 바로 이 희생제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이 희생제사가 있기 전까지 구약의 성도들은 그 희생제사의 모형, 곧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희생제사의 본질은 대속의 죽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헌신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것은 이러한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고 사랑의 반응인 것입니다. 자신의 헌신과 선행을 하나님의 환심을 사고 복을 받기 위한 뇌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뿐 아니라 지금 믿음으로 사는 매일의 삶속에서도 이 사실을 기억하고 십자가 희생제사에 대한 절대의존 감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는 다 자기 의를 사랑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늘 주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서 자기 죄를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신앙의 자리로 계속해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여기 보면 희생제사를 이야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 친히 제물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히 7:1-3)


히브리서가 여기서 멜기세덱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아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유다지파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은 곧 하나님 나라의 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살렘’이라는 단어 자체는 ‘샬롬’ 곧 평화를 뜻하고, ‘멜기세덱’은 “멜렉(왕)+쩨덱(공의)”이므로 이름 자체가 ‘의의 왕’입니다. “평화의 왕, 의의 왕”과 같은 표현은 선지서에서 메시아를 가리킬 때 쓰이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어마어마한 존재의 사람인데,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이런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 전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구속사적으로 어떤 중요한 인물이 나오면 항상 그 사람이 누구의 자식이고 언제 태어났고 또 어떻게 죽었다는 말이 언급되는데, 멜기세덱은 굉장히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14장에서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해주고, 또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고서는 곧바로 퇴장해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모세가 어떤 연고로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이런 식으로 기록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성령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멜기세덱이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는 것입니다.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어떤 분은 이 멜기세덱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너무 과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만일 멜기세덱이 정말 구약의 예수님이라면, 히브리서 기자는 그냥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방불하다’라는 표현을 안 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불하다’라는 단어는 ‘복제판’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분명히 시작한 날도 있고, 아비와 어미가 있고, 족보가 있고 생명의 끝도 있는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도 뒤도 없이 신비로운 인물로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과 멜기세덱은 왕 같은 제사장이면서 레위지파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집니다. 더욱이 이 멜기세덱은 레위지파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자로서 아론 대제사장보다 더 우월한 제사장입니다. (레위인들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셔서 레위지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론보다 우월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에서 이러한 사실이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1,4)


다윗이 주라고 일컫는 그 분이 바로 왕이시면서 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런 내용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예언의 성취가 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론의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신 참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 우월성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한 참된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온전히 구속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시면 기름부음을 받아 세워지셔야 하는데, 그런 의식을 치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기름부음의 의식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삼상 16:13). 그래서 사실 구약에서 기름붓는 의식은 하나의 예표이고 상징일 뿐이고, 그 의식의 실체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참되게 기름부음을 받아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 받으시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시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제물로 안수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증거에서 잘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세례 받으려고 하실 때 세례요한은 분명히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의 자리에 서서 우리를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례 베푼 뒤에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은 바로 세례요한에게 안수 받아 제물이 되어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려주셨음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대속의 희생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생들의 모든 죄를 속하는 영단번의 희생제사였습니다.


“(10)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13)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14)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0-14)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보시면...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흠 없이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도다. 그는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5,7,12).” 그리고 비록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가 처음에는 그분을 무죄하다고 선언했으나, 나중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범죄자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시69:4). 그분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인으로서 죽으셨습니다(벧전3:18). 그분은 몸과 영혼이 고난 당하셨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무서운 심판을 느끼셔야 했고, 그분의 땀은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습니다(눅22:44). 마지막으로, 그분은 외치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견디셨습니다.


이 감동적인 설교에서 눈여겨 볼 점은 빌라도의 무죄선언과 그 선언을 번복한 사건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때 배웠지만, 빌라도의 무죄선언은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말하고, 빌라도의 유죄선언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셔서 죄인의 신분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편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4)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무리히 내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취치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


여기서 ‘취하다’는 동사는 ‘강탈하다, 빼앗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강도짓을 말합니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히면 그 강탈한 것을 몇 배로 배상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떤 강도짓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예수님에게 청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강도짓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배상해야 하는데, 갚을 수 없으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이 친히 대신 배상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상이라는 것이 돈 몇 푼이 아니라, 일만 달란트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다 감당하고자 하셨을 때, 그 고통은 인간의 언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 방울 같이 되기까지 신음하시며 기도하시고, 십자가에서 몸과 영혼에 내려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감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우리를 위해 다 참아내셨습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 우리를 향한 열정(passion)은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수난(passion)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해질 수밖에 없고, 죄 가운데 살았던 우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혐오스럽게 느껴지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날마다 깊이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전2:2)고 말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빌3:8). 우리는 그분의 상처에서 온갖 모양의 위로를 얻습니다. 신자를 언제나 완전케 하는, 이 단번에 드려진 한 번의 속죄 제사(히10:14) 외에 하나님과 화해할 다른 방편을 찾거나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천사가 그분을 “예수”라고 부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마1:21).


이 내용은 앞으로 배울 내용을 요약적으로 다룬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자기를 미워하게 되고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경건과 종교성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처음 예수님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날마다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영혼의 생존의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은혜이고, 그 이후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 십자가에 대한 절대의존감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온갖 위로와 힘과 은혜를 이 십자가에서 얻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각오로...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는 다음에 깊이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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