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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23조
문답내용 제 23 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Our Righteousness Before God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죄의 용서에 있고, 다윗과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도 그 죄의 용서에 있음을 믿습니다. 다윗과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선포합니다(롬4:6; 시32:1). 사도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롬3:24).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확고한 근거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이나 혹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과를 가리우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신감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합니다. 즉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면서 숨으려 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자신을 덮으려 했던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게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어떤 피조물들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우리는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오 여호와여,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시143:2).
강설날짜 2015-05-31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3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제 23 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Our Righteousness Before God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죄의 용서에 있고, 다윗과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도 그 죄의 용서에 있음을 믿습니다. 다윗과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선포합니다(롬4:6; 시32:1). 사도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롬3:24).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확고한 근거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이나 혹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과를 가리우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신감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합니다. 즉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면서 숨으려 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자신을 덮으려 했던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게 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어떤 피조물들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우리는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오 여호와여,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시143:2).


지난주에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칭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죄 사함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구원과 영생을 받아 누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믿음조차도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이신칭의 교리입니다.


오늘 벨기에 신앙고백서 23조는 이러한 이신칭의 교리에서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획득하게 된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벨기에 신앙고백서 첫 번째 문단을 보시면...


우리는 우리의 행복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죄의 용서에 있고, 다윗과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도 그 죄의 용서에 있음을 믿습니다. 다윗과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선포합니다(롬4:6; 시32:1). 사도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합니다(롬3:24).


이 고백은 로마서 4장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1)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2)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8)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1-8)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의 논지는 신약의 백성들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백성들도 동일하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오해하는 것이 구약은 행위종교이고 신약은 은혜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도 은혜, 신약도 은혜입니다. 다만 구약에서는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내산 언약에서 율법을 추가하여 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또 구약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면 시내산 언약을 행위구원론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많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심지어 예수 믿기 전 바울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신칭의 복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구약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구약도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사실을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두 대표적인 인물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다윗도 은혜로 죄 사함 받는 행복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선행을 노동에 비유하고, 돈을 칭의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고용주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노동자는 한 달 후에 받게 될 월급을 빚으로 생각하지 절대로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본문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돈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경건치 아니한 자인데,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은혜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로 번역되는 단어가 헬라어 ‘카리스’인데, 이 단어는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성도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롭다 하심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7)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8)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그것은 죄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란 곧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무죄선언을 하시는 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죄 없다고 무죄선언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일이 함께 있어져야 합니다. 첫 번째로 죄에는 형벌이 있으므로 그 형벌이 충분하게 시행되어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나쁜 놈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받아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이구... 이제 벌 다 받았으니 의인이네...” 그럽니까? 아니죠. 벌 다 받았어도 때려죽일 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야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법정에서도 어떤 사람에게 무죄선언을 합니까? 법을 다 지킨 사람에게 무죄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다는 말과 율법을 다 지켰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죄가 없다”는 선언이 있기 위해서는 죄의 형벌의 시행만 있어서는 안 되고,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또한 있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시행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죠. 우리가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주님과 연합한 주님의 몸 된 지체로서 새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의인이시니깐, 우리가 그 주님께 붙어서 주님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마치 율법을 온전히 지킨 의인인 것처럼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한... 스스로 노동을 해서 돈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죠.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받는 것을 빚으로 여기시지 은혜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그를 의롭다 하시고 높이셔서 그의 공로에 따른 상을 주셔야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참한 죄인인 우리가 전혀 그럴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예수님의 일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예수 대접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데, 하나님은 예수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에게 빚이라도 지신 것처럼 그렇게 은혜를 우리에게 막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사함이라고 하는 칭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예수님의 의로움, 그분의 온전한 거룩함, 그분의 지혜와 능력, 그분의 모든 공로가 다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되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죄 사함 안에 이 두 가지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죄사함이 곧 칭의요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웨슬레는 이러한 내용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죄사함을 칭의로 말하는 성경의 표면만을 취하여서 “죄사함이 칭의이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잘못된 교리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가톨릭도 똑같이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이 우리 대신 형벌 받으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온전히 순종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 확고한 근거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이나 혹은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형벌 받아주셨다”는 사실은 많이 생각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해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굳게 붙잡고, 둘 다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온전히 순종해주셨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을 다 순종하셨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더 이상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도덕률폐기론으로 빠지는 오류입니다. 이 교리를 자신의 죄악된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을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죠. 웨슬레나 로마가톨릭이 이것을 우려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복음을 깨달은 자는 이런 오류로 나아갈 수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다룰 것입니다. 둘째 오류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순종해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좇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 이루셨다고 하면 자기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니깐...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반드시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신의 육체의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또 자기 의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다 순종해주셨으니 예수님만 자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스스로 의와 경건을 쌓으며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을 품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보십시오.


“(1)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빌 3:1-2)


여기서 ‘삼가다’라는 말은 ‘보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분별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 가운데서 아주 나쁜 사람들, 두 부류를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개와 행악자들입니다. 개는 부정한 동물의 대명사로서, 도덕적으로 아주 타락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 사실상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예수 믿고 죄를 이겼다가 다시 져서 그 형편이 이전보다 더 심하게 된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삼가야 합니다. 그리고 행악하는 자들은 “사악한데 숙련된 자”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은혜의 복음을 색욕거리로 바꾸어서 죄 짓는 것을 밥 먹듯이 하면서 탐욕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도덕률 폐기론자들을 경계하고 있고, 또 한편의 부류를 경계하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손할례당입니다.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서 아주 율법을 중시하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증거합니까?


“(3)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이 구절을 반대로 말하면, 손할례당은 자기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 율법! 외치면서 대단히 하나님을 위하고자 하는 것처럼 떠들지만, 결국 그들의 본심은 자기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한다는 것을 간파하여 들춰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잘 압니까? 바울도 예수 믿기전에 바로 그렇게 자기 자랑하는 맛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너무나 잘 아는 것이죠.


사실 많은 바울의 대적자들은 율법없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율법 없는 복음을 말하는 것은 바울 당신이 율법에 ‘율’자로 모르니깐 그런 것 아니요? 당신이 이방인처럼 율법 무시하고 살았으니깐 이렇게 율법을 무시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율법에 헌신했던 자신의 과거의 화려한 이력을 공개합니다.


“(4)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5)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6)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얼마나 율법에 헌신했고 스스로 경건과 의를 힘써 쌓아왔는지... 스스로를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아마 바울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자신을 쏟아 부어 헌신했을 것이고, 그 점에서는 이미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고백합니까? 율법에 대한 열심히 도리어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남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때 그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바울이 깨달은 그것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써 노력했던... 다시 말해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면서 일평생 쌓아온 종교적 경건과 의, 명예가 그리스도 앞에서 완전히 쓰레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여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말에서 ‘모든 것’은 일평생 쌓아온 종교적 경건과 의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경건과 의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이며 똥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왜 똥입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고, 따라서 그가 무슨 행위를 하든지 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하고 더러울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자기 자신이 비참한 죄인이요, 죄인중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아주 해로운 행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더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값없이 주어지는 구속의 사랑, 모든 믿는 자를 의롭게 할 수 있는 의의 공효, 그리고 온갖 보화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동안 전부라고 여기며 살았던 육체의 자랑을 기꺼이 배설물로 여기고 전부 버렸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육체의 자랑을 다 버려야만 합니다. 참되게 예수님을 만나고 이신칭의 복음을 깨달은 자는 바울처럼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자기 의를 배설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으며, 성령님을 의지해서 살고 예수님만 자랑하면서 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대신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굳게 붙잡고 의지하며 살아가십니까? 바울처럼 자신의 육체의 자랑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만 온전히 자랑하며 사십니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뭔가 자기가 열심히 하고 헌신하고 봉사한 게 있으면 우쭐해지고, 교만해지는 것이 모든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바울 본인도 수시로 이런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로 자고하지 못하도록 사단의 가시를 주시고,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주님만 의지하며 자랑하며 살지만, 항상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언제나 모든 신자 안에는 육체의 자랑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것을 자신의 의와 공로로 삼아서 자랑하려고 하는 마음이 솟아올라올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고 자기가 그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깨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이 복음을 날마다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처럼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날마다 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모든 육체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늘 주님을 겸손히 믿고 의지하고, 또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보시면...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과를 가리우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신감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합니다. 즉 우리의 양심을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 떨면서 숨으려 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 자신을 덮으려 했던 우리의 첫 조상 아담의 본보기를 따르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2)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아담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려워 떨며 숨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의 가리움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고, 또 그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자신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만일 자신감이 없다면, 그래서 여전히 우리가 아담처럼 두려워 떨며 숨고 있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는 아직 복음을 참되게 깨닫지 못했든지, 아니면 여전히 자기 의를 붙잡고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사랑하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정말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어떤 피조물들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을진저! 우리는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오 여호와여,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시143:2).


로마가톨릭은 인간의 행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 편에서도 잘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믿어야 하지만, 예수님의 은혜에 잘 협력하는 자기 자신도 믿어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도 믿어야 하고, 성자도 믿고, 사제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소멸하시는 불에 의해서 소멸될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 속에는 자신이 여전히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독립된 존재라는 인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떨어져 있어야만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긴 하셨지만 나도 나름대로 잘 협력했다라고 하는 자기 자랑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붙어서 모든 생명과 힘과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성화에 있어서 주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의 출처는 바로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 의를 자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의 목전에는 자신의 행위로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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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5조 - 주의 만찬의 성례(1) file 제35조 최상범 591
22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7조 강설 - 타락한 인간의 회복 file 제17조 최상범 605
222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5조 - 주의 만찬의 성례(2) file 제35조 최상범 639
22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강설 제18조 -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file 제18조 최상범 644
22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7조 - 최후 심판 file 제37조 최상범 644
219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6조 강설 - 하나님의 선택 file 제16조 최상범 655
21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6조 - 그리스도의 중보 file 제26조 최상범 664
21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3조 - 성례 file 제33조 최상범 683
216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3조 강설 - 하나님의 섭리 file 제13조 최상범 703
21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22조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우리의 칭의 file 제22조 최상범 704
21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4조 강설 - 사람의 타락과 자유의지 file 제14조 최상범 706
21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1조 -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file 제21조 최상범 712
212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5조 - 원죄 file 제15조 최상범 715
21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2조 강설 - 하늘과 땅의 창조 file 제12조 최상범 720
21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4조 - 세례의 성례 file 제34조 최상범 724
209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24조 - 우리의 성화와 선행 file 제24조 최상범 729
20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강설 제8조- 삼위일체 file 제8조 최상범 738
20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9조 강해 -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file 제19조 최상범 748
»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3조 -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file 제23조 최상범 750
20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0조 - 교회의 정치 file 제30조 최상범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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