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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24조
문답내용 제 24 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Our Sanctification and Good Works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노예됨에서 자유롭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다만 자기 사랑이나 정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헛된 믿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행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사람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뿌리로부터 나온 이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이바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선행이 칭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선행을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 그 나무 자체가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2:13).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유의합시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럽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을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시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
강설날짜 2015-06-14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4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제 24 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Our Sanctification and Good Works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노예됨에서 자유롭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다만 자기 사랑이나 정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헛된 믿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행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사람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뿌리로부터 나온 이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이바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선행이 칭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선행을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 그 나무 자체가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2:13).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유의합시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럽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을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시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진위 여부를 점검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벨기에 신앙고백서 24조 내용을 배우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문장을 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한 문장 안에 사실 성화론의 핵심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화란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은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중생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생과 새사람으로 된다는 것은 모두 회심과 성화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신칭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이신성화’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화가 결국 전적인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화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은 성화가 전적인 성령님의 사역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을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성화를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매우 탁월하고 높은 수준의 도덕윤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불공을 열심히 드리는 불자들, 이슬람교에 헌신하는 아랍인들을 보면,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체험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래서 때때로 신의 은총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마치 기독교의 회심과 같은 그런 삶의 변화도 체험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신을 숭배하면서 일상의 삶 속에서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적 회심은 종교 밖에서도 나타납니다(굿 윌 헌팅 영화).


문제는 그런 식으로 기독교의 믿음을 생각하고, 그런 차원의 체험을 하고,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교회에 많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과 로마가톨릭은 그것을 믿음으로 보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이 심리적 감흥을 통해 다른 종교에서 신앙생활 하듯이 하나님을 믿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활동 입니다.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이 인간의 종교 활동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가지게 되는 참된 믿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얼마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무지하며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무지한가 하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사를 보면 장로교 안에서도 성령의 역사에 대한 무지로 팽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제1,2차 영적대각성이 일어나기 전이 그러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조나단 디킨슨 같은 청교도들은 그 당시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상황이 매우 어둡다. 교회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매우 낮은 상태에 있었으며, 신앙고백은 하였지만 생명력과 경건의 능력이 없고,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부주의하고 게을렀다. 육신적이었으며 세상적인 것에 의지하였다. 예배는 형식화되고, 사람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이 없으며, 예배 가운데 부주의한 행동을 하고, 주일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황이 꼭 미국의 제1차 영적대각성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과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원인으로 3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알미니안을 교회의 타락의 주범으로 꼽았습니다. 성령의 역사와 믿음에 대해 무지한 목회자들이 거듭나지 아니한 종교인들을 교회로 무더기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교역자로 세우면서 교회가 급속도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이신칭의 복음을 왜곡하여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자신들의 삶 속에 성화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면 목회자들이 이런 자들에 대해서 그들의 영적상태와 죄에 대해서 강력하게 질책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언약, 예정론과 십자가 복음만을 강조함으로써, 말 그대로 어설프게 십자가 복음으로 위로 받게 하여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게 하고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꼭 이스라엘이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있었는데,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성전이 있으니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를 외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있고 십자가가 있고 은혜언약이 있으니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교회에 대해서 죄에 대한 강력한 질책과 더불어서 회심하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강력하게 설교했고, 참되게 회심한 자의 특징이 무엇이고, 교회 안에 회심하지 아니한 자들의 신앙적 특징이 무엇인지를 날카롭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신칭의 복음을 아주 선명하게 증거하였고, 그와 더불어서 그러한 이신칭의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중생의 역사를 증거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비로소 신자들이 자신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깨닫고 신음하며 애통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각성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미국의 제1자 영적대각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암만 스스로의 마음을 수양하고 갈고 닦아도 이룩해낼 수 없고, 또 어떤 방법이 있어서 그 방법대로 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시스템과 조직을 잘 갖추고 프로그램 만들어서 으쌰으쌰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 하셔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부흥을 기대하면서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바꿔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화되기 위해 내가 뭔가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켜주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을 말씀이라는 은혜의 수단 아래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가운데, 간절히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셔 우리에게 성령충만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참으로 우리가 성화되는 길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참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참된 믿음으로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계속해서 보시면...


이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노예됨에서 자유롭게 해 줍니다.


참된 믿음은 그냥 그 사람의 무의식 속에 가만히 내재되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의식 안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때때로 죽어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반드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 죄의 노예 됨에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자들, 또 죄가 이끄는 대로 즉시즉시 죄에 넘어지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주장은 로마가톨릭의 주장이죠. 로마가톨릭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냐 하면,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무시하고 이제 막살자”라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도덕률폐기론 이단으로 여겨서 그렇게 무자비하게 핍박하고 처형했던 것입니다. 더브레는 여기서 그것이 전적인 오해임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가톨릭보다 더욱 성화를 강조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으며, 다만 자기 사랑이나 정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이신칭의 복음을 참되게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이신칭의 복음을 부정하는 로마가톨릭은 겉으로는 대단히 성화를 강조하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들도 열심히 헌신하고 선행을 행하잖아요? 그런데 더브레는 그것이 다 자기사랑에서 나온 것이고,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브레가 심리학자도 아닌데, 그들의 마음의 동기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종교를 통해 자기 행복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든지, 또는 이 세상에서의 축복과 형통을 바란다든지, 좀 더 고상하게 영원한 천국에서의 행복을 얻기를 바란다든지... 그런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자기 사랑입니다. 그리고 로마가톨릭 사람들이 힘써 순종하는 이유는 결국 정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아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로마가톨릭의 종교는 성령을 받은 종교가 아니라 종의 영, 곧 사탄의 영을 받은 집단입니다. 율법을 통해 형벌의 두려움을 심는 사단의 역사가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한 순종, 그러한 헌신은 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며 더러운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5-9)


여기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십니까?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는 육에 속했습니까? 영에 속했습니까?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헛된 믿음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행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사람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가 믿음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사실은 믿음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의 그릇된 믿음관이 다 깨트려지고 성경적 믿음관을 정확하게 정립해야만 합니다.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깨달아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달아 알면 반드시 우리는 예수님께 향유 부은 여인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감격과 감사, 사랑, 그리고 일평생 빚진 자의 마음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순종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믿음의 선한 뿌리로부터 나온 이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최선의 선행을 행해도 거기에는 여전히 부족하고 허물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믿음으로 행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선행을 기뻐 받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이 받으심 직하게끔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에게 힘써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결국은 우리로 모든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의와 경건함으로 남은 때를 살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닙니다.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우리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모든 일에서 정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선행을 힘써 나아갈 때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 째는 자신의 선행에 구원의 근거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이바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선을 행하기도 전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칭의 받으려고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선행이 칭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의 은혜를 받는 것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선행을 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우선 그 나무 자체가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우리의 선행이 칭의에 이바지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하면, 칭의 받지 않고서는 선행을 행할 수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는데, 그들은 칭의 받기 위해 선행의 공로를 쌓아야 한다고 말하니깐, 완전히 넌센스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오류를 순환논리의 오류라고 말하죠.


그런데 이 오류가 단순히 로마가톨릭만의 오류입니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은연중에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짓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꾸 행위의 공로를 쌓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선행이 나올 수가 있습니까? 나올 수 없죠. 그래서 결국 실패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로 인해 더욱 면목이 없어서 도무지 주님께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되고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전의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더 힘쓰고 애씁니다. 그러나 또 실패합니다. 이렇게 순종하려고 결단하고 또 실패하고... 마치 미끄러운 바위를 올라가는 것처럼 끊임없이 올라갔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어떤 확신도 없이 방황하는 가련한 영혼들이 오늘날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톨릭의 순환논리의 오류의 함정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아무리 비참하고 죄악 되어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곧바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더욱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죠. 그렇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탕자와 같은 우리에게 은혜의 비를 쏟아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먼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면, 그때는 이미 순종을 안 할레야 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억지로 꾸역꾸역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감격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순종할 때 주님처럼 온전해지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죄의 강력한 세력도 느끼고 또 자신의 선행에서 여러 가지 부족함과 허물을 발견하게 되죠.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애통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성령이 또 역사하셔서 다시 우리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그래서 더욱 순종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순환되면서 성화되는 것입니다. 앞에 율법주의적인 순환과 비슷한 것 같은데 본질이 다릅니다. 이것은 성화의 선순환의 원리입니다. 앞에 율법주의는 악순환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행과 관련해서 우리가 로마가톨릭의 악순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늘 우리는 성령님만을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보면... 우리가 선행과 관련하여 두 번째로 주의해야 할 점은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2:13).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유의합시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럽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을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시기에 충분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결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공로로 여겨주시고 칭찬하시면서 그 보상으로 상급을 주시겠다는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급은 어디까지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일함의 대가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일한 자는 그 삯을 빚으로 여기지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을 해서 삯을 빚으로 여기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이 우리의 일이 아닌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선행의 출처가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서 그 포도나무로부터 모든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생명력과 힘과 모든 영양까지 다 공급받아서 열매 맺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열매는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선행을 행한 후에 철저하게 하나님만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적으로 무익한 종의 자세로... “주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요한의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일이 아닌 이유는 우리의 최선의 선행에도 항상 죄의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삯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되려면 온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적타락한 인간이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설사 온전한 선행을 많이 행할 수 있다 쳐도, 단 하나의 불순종만으로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적으로 온전한 선행을 행해서 공로로 내세울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남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인 것입니다. 저번에도 예를 들어 말씀드렸지만, 제 딸이 어린이집에서 발표회 할 때, 춤도 추고 노래도 했는데, 이제 5살밖에 안 된 아이가 무슨 춤이나 노래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막 열심히 하는데 모든 게 엉망인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잘했다고 박수 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는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 기쁘게 해보겠다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애쓰는 그 진심이 부모가 볼 때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끝나고 나서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꽃다발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톨릭은 이런 하나님을 부모가 아니라 심사위원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하면 꽃다발 주고 못하면 탈락이죠. 그것은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급은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늘 선행을 힘써 행하면서도 그것을 공로로 삼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고 주님만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신의 선행을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하려는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의존감정을 놓쳐버리고 자기 선행을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교만에 빠져 자기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처럼 되거나 또는 절망에 빠져 의심으로 가득차서 방황하는 가련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서 그러한 교만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살피고, 만일 있으면 그러한 마음을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다시 붙잡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힘쓰지만 겸손히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무익한 종의 자세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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