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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40-44문
문답내용 40문 : 그리스도는 왜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값이 치러질 수 있습니다.

41문 : 그리스도는 왜 무덤에 묻히셔야만 했습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42문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습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43문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사악한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44문 :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그것은 내가 극심한 시련과 중대한 유혹을 당할 때에도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고난을 당하시고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육체의 아픔과 공포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강설날짜 2014-01-05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6주(40-44문)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된 우리

말씀 : 롬 6:11-13

40문 : 그리스도는 왜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값이 치러질 수 있습니다. 

41문 : 그리스도는 왜 무덤에 묻히셔야만 했습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42문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습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43문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사악한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44문 :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그것은 내가 극심한 시련과 중대한 유혹을 당할 때에도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고난을 당하시고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육체의 아픔과 공포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공의

지난주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자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까지 배웠습니다. 즉 지난주에 “못 박혀”까지만 배웠고, “죽으시고”는 오늘부터 배울 내용입니다.

40문 : 그리스도는 왜 반드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답 :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죄값이 치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사람은 법대로 살아야 하고, 어기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진리가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성경진리가 바로 죄의 삯은 사망임을 분명히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값을 치르실 때에도 죽으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이미 배웠듯이 참 신이시고 참 사람이신 의로우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실 수 있고, 그분의 죽음만이 모든 인류의 죄값을 온전히 치르실 수 있는 것입니다.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2. 무덤에 묻히심

41문 : 그리스도는 왜 무덤에 묻히셔야만 했습니까?
답 : 그것은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음의 핵심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지만, 사도들은 때때로 이 외에도 한 가지를 더 추가적으로 언급합니다. 그것이 바로 장사지낸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4)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사도바울을 포함한 성경기자들은 예수복음에 있어서 이 장사 지낸 바 된 것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주 언급합니다. 특별히 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바로 아리마대사람 요셉 이야기가 모든 사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4복음서에 모두 언급되는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례요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 오병이어, 죄 많은 여자가 향유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린 이야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 가룟 유다가 배반하는 사건, 베드로가 3번 부인하는 사건, 겟세마네기도, 십자가 죽음, 부활

위의 이야기들이 사실상 4복음서에서 모두 언급되는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생각만큼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언급된 이 이야기들은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예수 복음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한 것 역시 사복음서가 동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냥 죽어 무덤에 장사지냈다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사복음서 모두가 굳이 아리마대사람 요셉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가 예수님을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했다는 것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이것은 이 이야기가 예수복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9)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8-40)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오늘날의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고 부자였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로 바리새인임과 동시에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이었고, 역시 부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의 제자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밝힐 경우 자신의 지위와 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겨왔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커밍아웃 하여 진리 편에 섰습니다.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자기의 지향성, 사상을 밝히는 행위인데, 꼭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이익을 각오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공회에서 제명당하고, 유대사회에서 출교가 내려지는 것을 각오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비겁하게 숨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 걸고 진리 편에 섰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볼 때 부자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돈과 지위를 가지고서 어느 편에 서느냐, 어디에다가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돈 가진 자가 당당하게 진리 편에 서고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지위와 돈을 사용하는 자가 제대로 된 부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의 장사지낸바 된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룹니다. 보통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제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사실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장례식에 가보면 장례식의 순서 순서마다 유가족들의 반응이 조금씩 다릅니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입관할 때, 발인할 때, 하관할 때, 다 다릅니다.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때는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주로 하관할 때입니다. 땅을 파서 무덤에 관을 놓고 흙으로 묻을 때, 사람들은 “정말로 돌아가셨구나... 이제 함께 할 수 없구나...”하는 것을 실감하고 격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도 동일한 것을 말해줍니다. 즉 그분이 참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절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자들 가운데 소위 ‘기절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인데, 이후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담대한 모습을 보았을 때, 부활을 지어낸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보기는 본 것 같은 것이죠. 그래서 고민하다가 이 사람들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기절설’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죽지 않고 기절했는데, 사람들이 죽은 줄로 알고 내려다가 장사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서늘한 무덤에서 기절해 있다가 나중에 깨어나서 돌문을 열고 나와 잠시 잠적해 있다가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자들이 보고 부활한 것이라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믿지 않고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이야기 일뿐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안식일이 밤부터 시작되니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빨리 죽이려고 망치를 들고 갔는데, 이미 죽어 있어서 관절을 꺾지 않고, 다만 확인사살로 창을 옆구리에 찔러서 사망상태를 확인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빌라도의 인증과정도 거쳤습니다. 아리마대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돌하게 시체를 달라고 했을 때, “벌써 죽었느냐?”라고 빌라도가 물었고 백부장이 정말로 죽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공적인 재판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확실히 죽으셨다는 것도 공적으로 인증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종교지도자들은 평소에 예수님이 사흘 후에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무덤을 큰 돌로 막아서 인봉하고 파수꾼을 두어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깐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서 굴릴 수 있는 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공통된 증언은 그분이 확실히 죽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무덤이 장사지낸바 되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참으로 죽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치러주셨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공부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잉태가 죄 중에 잉태되는 우리의 죄를 덮어준다고 했는데,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우리를 거기서 구원하시려고 무덤에 묻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셔서 거룩하게 잉태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를 위해 몸이 썩어져가는 그 과정에까지 이르셨습니다. 그리하여 복지국가의 슬로건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덮어주시고 책임져주신 것입니다.

3. 그럼에도 우리가 죽는 이유

그러면 이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어떻게 보면 매우 고약한(?) 질문을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값을 다 치르셨다면, 그러면 우리는 안 죽어야 하는데, 왜 여전히 예수 믿는 사람들도 죽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42문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죽습니까?
답 :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와 불신자의 죽음의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고 고백합니다. 불신자의 죽음은 죄의 형벌로서 죽음이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값을 이미 다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치러야 할 죄값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와 결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밖에서 막노동을 한 후 결혼식에 갈 때에는 입던 작업복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더러운 작업복을 내려놓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결혼식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에는 인간의 죄성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 자체가 자기를 섬기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싸움을 싸웁니다. 이러한 연약하고 죄에 절어 있는 육신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죽음이란 바로 그러한 육신을 벗어버리고 신령하고 온전히 의로운 몸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죽으면 더 이상 죄와 씨름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아파하고 탄식하며 고생하는 것이 없고, 죄와 싸우기 위해서 눈물겹도록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죽음은 축복이며 소망입니다. 불신자의 장례식에는 장송곡이 울려 퍼지지만 신자의 장례식장에는 승리와 환희의 찬송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신자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에 거하는 한 죄가 끊임없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고 훼방하기 때문에 여간 고통스럽고 성가신 것이 아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죄와 결별하고, 주님과 온전히 함께 거하는 것이 신자의 지상최대의 소원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은 빨리 죽어서 죄의 몸을 벗고 주님과 온전히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2-25)

몸은 죄를 섬기고,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데, 그러한 끊임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영적인 곤고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기다립니까?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 받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즉 신자는 죄의 몸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성취되고,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완성됩니다. 신자는 바로 이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자의 죽음의 의미란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현세를 끝내고 내세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불신자는 죽음의 문을 통해 형벌로 나아가지만, 신자는 영생에 들어갑니다. 영생의 포인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영원히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죽음 이후에 영원히 살지만,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면, 불신자들도 지옥에서 영원히 살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장수일 뿐이고,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은 불멸의 삶일 뿐이지 그것이 영생은 아닌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영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그러므로 신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물론 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생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암만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주를 사랑하지 않는 삶은 수치스럽고 더러우며 부끄러움뿐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면 반드시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살아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살면 오늘 죽어도 그것이 영생입니다. 주님 부르시면 ‘아멘’ 하면서 기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그들이 이 땅을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것이지, 그들의 소원은 빨리 죽어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빨리 죽고 싶은 마음이 없고 다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건강에 대단히 신경을 쓰고, 어찌하든지 몸에 좋은 것을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보약도 먹고... 그렇게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합니다. 우리가 건강을 돌아보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건강을 챙기는 우리 마음속에 과연 빨리 죽고 싶은 소원이 있는가 하는 것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오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삶인가 하는 것을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와 결별하여 주님과 함께 있을 욕망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만 생각하면 빨리 죽는 게 최선의 길이겠지만, 그러나 섬겨야 할 교회 형제자매를 생각할 때, 그리고 예수님을 모르고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곤고한 영혼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향한 상한목자의 심정과 사랑 때문에,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빨리 죽고 싶은 욕망을 잠시 억누르고 주님이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그날까지 자신의 몸과 영혼을 헌신하여 교회와 영혼들을 섬기는 일을 감당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이고,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다운 신앙생활입니다. 이 믿음, 이 소망 가지고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우리

43문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사악한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성화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공부하면서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이 43문은 바로 성화에 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첫 번째 언급으로서, 성화의 핵심요소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신자의 성화의 모든 근거와 이유와 원동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에 집어넣어주셔서, 우리로 예수와 연합하게 하사,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죽은 적이 없고, 예수님 믿기 전이나 후나,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깨닫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었고, 다시 부활하여 새 삶을 얻었음을 느끼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인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죽이지 말라고 해서 살렸는데, 히브리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

즉 이삭은 단 한 번도 죽은 적이 없지만,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삭은 그때 정말 죽었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부활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삭은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실 예수를 예표 할뿐 아니라, 그 안에서 죽고 부활할 우리도 예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실제로 죽고 살아난 적 없지만, 성령님의 은혜가운데 영적으로 죽고 살아난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이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미 예를 들었듯이, 물에 빠져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건져주었을 때, 자기를 구원해준 사람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심중에는 “나는 이미 그때 죽은 거나 다름없다. 아니 그때 죽었다. 지금 살아있는 이 생명은 그 사람이 나에게 덤으로 준, 선물로 준 새 생명이다. 그러므로 덤으로 얻은 이 새로운 생명은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것이다.”하는 마음이 마땅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도 바로 그러한 사실을 고백합니다. “사망의 형벌과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나였는데, 주님이 대신 형벌 당하심으로써 나를 거기서 건져주셨다. 나는 이미 그때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옛날의 나는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었다. 이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선물로 주신 새 생명이며 주님을 위한 삶이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즉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를 구원하고 당신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려 죽음의 자리까지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순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와 사랑을 주님의 죽으심에 함께 참예함으로써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 그 은혜와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가만히 있을 수 없도록 우리를 감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깊이 침잠되어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할 때, 우리는 내 육체의 욕심을 좇아 살아간 지난날을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며,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주님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의 동기요 이유요 원천이며 근본이며 본질이며 핵심이며 요체이며 원동력입니다. 물론 성화의 동기에는 이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근본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이므로 그를 경외하므로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있고, 또한 그분이 공의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로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화를 이야기할 때 그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에 잘 나타납니다. 로마서 6장 1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을 때 자연적으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앞서 로마서 2장부터 5장까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십자가 공로로, 오직 은혜로 온전히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함으로써 이신칭의 복음을 서술했는데, 사람들이 이 바울의 복음을 도덕률 폐기론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입니다. “율법의 행함이 아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러면 우리가 왜 신앙적인 열심을 내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만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죄를 안 짓기 위해 매일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고군분투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논리성에 의하면 당연히 복음에 대한 설명이, 이러한 무책임으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2-3,6)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는 이유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참으로 연합해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산 체험을 하는 자는 그 은혜 안에서 주인이 바뀌는 체험, 곧 자신의 정과 욕심을 버리는 회개를 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의 연결점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오직 은혜의 복음을 들어도 “그러면 이제 마음대로 죄 짓고 살아도 천국 가는 데 문제없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도무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정신으로 함부로 죄짓고 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 은혜를 참되게 깨달은 사람이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체험을 했습니까?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경험을 통해서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습니까? 그래서 바울처럼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 이제 나의 삶은 그분의 것이다” 하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까? 만일 없다면, 우리는 거듭난 자가 아닙니다. 또는 거듭나기는 거듭났는데,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그러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은 시제로 말하면 현재완료로서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평생동안 지속되는 것이고 또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자는 이제 날마다 자신의 변화된 신분과 지위와 권능을 잘 알고 깨달아서,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이 은혜를 받은 자라면 우리가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담대함과 위로를 주며, 죄를 이길 권능을 주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롬 6:6),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갈 5:24), 우리가 죄와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며(롬 6:7;롬 7:1-4;갈 2:19), 이미 이 세상에서 사망 신고 처리되었고, 무덤에 묻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도 죽었습니다(갈 6:14).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사단 마귀는 더 이상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게 할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거나 낙담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는데, 그 후에 일본 순사가 한국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였다고 합니다. 전에는 그 명령에 무조건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8월 15일이 지난 다음에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명령을 한다면 오히려 “네가 누구냐...” 하면서 오히려 큰 소리를 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고 살았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매우 담대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데,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옛날의 나처럼 죄에 종노릇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8월 15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소식이 늦게 전해진 어떤 시골에서는 일본 순사가 전처럼 한국 사람에게 무엇을 시킬 때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다시 새생명으로 살았다고 하는 우리의 새롭게 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는 이제 옛사람이 죽었고, 그리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자동적으로 죄 안 짓고 살고, 일향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된다 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10)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

여기서 “여긴다”는 말은 실제로는 안 그런데, 그렇다고 간주하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는 여전히 죄에 대하여도 꿈틀거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꿈틀거립니다. 우리가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는 양쪽이 다 꿈틀거립니다. 옛사람은 죽었지만, 우리 몸의 사악한 정욕은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옛사람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옛사람은 지금 죽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옛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의 습성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처럼 살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자처럼 살아라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죄짓는 일이 없으면 이런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믿어도 때때로 죄 짓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자꾸 잊어버려서 문제입니다. 물론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좋은 것도 있습니다. 옛날의 안 좋은 일들이 잊혀 지지 않고 매순간 기억이 난다면, 우리는 도무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 한순간이라도, 한 찰나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과 옛날의 내가 그분과 함께 죽고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사는 이 생명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도 죄를 짓게 되고, 다시 자기주장이 나오고, 온갖 더러운 정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 서신을 써서 권면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일이 없다면 왜 이 서신을 썼겠습니까? 신자가 연약해서 자꾸 잊어버리니깐, 다시금 권면을 해서 그들이 받은 은혜와 그들의 새롭게 된 정체성들을 다시금 되새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신분을 다시금 우리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스스로 여겨야 합니다. 즉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죄가 불러도 못들은 척, 죄가 유혹해도 못 본 척, 죄가 끌고 당겨도 죽은 척해야 합니다. 곤충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이 사람이 와서 만지면 죽은 척 하는 것입니다. 좀 갖고 놀려고 했더니 죽은 체 하니깐 재미없어서 가버리면 그제야 슬그머니 일어나서 자기 갈길 갑니다. 죄가 유혹할 때 바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치 눈이 없는 자처럼, 귀가 없는 자처럼, 다리가 잘린 불구처럼,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죄에 대해서 그렇게 처신을 하는 것이고, 반대로 의가 부르면 “내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고, 진리가 부르면 눈을 번쩍 뜨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몸의 악한 정욕이 남아있고, 그것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한순간도 거기에 순종하지 말아라는 것입니다. 너희 지체를, 너희 손을, 너희 발을, 너희의 시간과 재능과 모든 지체를 죄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 힘으로 옛사람의 습성을 누르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이루어놓으신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새롭게 된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성령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고 사악한 정욕을 누르며 새사람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43문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은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묻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사악한 정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5.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이어서 44문을 공부하겠습니다. 

44문 :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그것은 내가 극심한 시련과 중대한 유혹을 당할 때에도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고난을 당하시고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육체의 아픔과 공포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영어판 사도신경을 보면 “무덤에 묻히시고...” 다음에 “He descended into hel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빠져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 문장을 뺀 채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선교사들이 일부러 뺀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 고백을 뺐는지, 어떤 의미로 뺐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뺀 선교사들의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전 세계 교회가 한국교회처럼 이 구절을 빼고 고백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어떤 교수님은 이 구절을 빼고 고백하자고 미국의 교단에 요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 원문에 보면, “DESCENDIT AD INFERNOS”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인페르노스’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하데스’라는 용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하데스’는 지옥이 아니라, 음부라는 뜻의 단어로서 히브리어 ‘스올’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의미하는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게헨나’입니다.

‘음부’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스올’이나 헬라어 ‘하데스’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냥 “죽음, 무덤에 묻힘”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자신의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을 때, “내가 슬피 음부로 내려가리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옥에 간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살 소망이 없으니 죽으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죽는 것을 가리켜서 “돌아가셨다”라고 말합니다. 하늘로 돌아갔다고 해서 ‘소천’이라고도 말하는데, 정말 하늘에서 왔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하늘로 간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정서를 따라서 죽음을 그렇게 관용적으로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영혼도 없고 끝이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자들과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도 누가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관용적 표현이 “음부에 내려간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죽으면 모두다 땅 속 깊은 곳인 음부라는 장소에 내려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관용적으로 죽음을 음부에 내려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음부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이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31)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행 2:31)

이 말씀은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은 인용하면서 설교하는 가운데 한 말입니다. 여기 보면 중언법(똑같은 의미를 다른 단어를 사용해 반복해서 표현하는 문학적 표현 방법)을 쓰고 있는데, “음부에 버림이 된다는 것”과 “육신이 썩음을 당하는 것”이 동일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부에 내려간다는 말은 죽어 무덤에 묻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아주 자주 ‘사망’이라는 단어와 짝을 이루며 나타납니다. 

“(18)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계 6:8)

이 계시록 6:8의 경우 다른 한글번역본은 이 음부를 ‘지옥’으로 번역하여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지옥이 그 뒤를 따르더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번역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 문맥에서 볼 때 그것은 실수로 여겨집니다. 다음 구절에서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계 20:13-14)

음부도 지옥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표현에서 이 음부는 확실히 지옥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음부는 사망의 결과적인 상태 또는 사망의 세력 하에서 육신이 썩어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또 아래의 구절을 보십시오.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여기서도 역시 지옥의 권세라기보다는 사망의 권세로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구절을 보시면...

“(23)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이 구절에서 ‘음부’를 ‘지옥’으로 번역해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하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의 음부는 지옥이라기보다는 죽은 자들이 거하는 곳, 곧 땅 속 깊은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하늘의 높음과 땅의 낮음이 대조되는데, 예수님은 한발 더 나아가서 땅보다 더 아래인 음부와 대조시키신 것입니다. 

“(23)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눅 16:23)

이 구절이 바로 유일하게 음부가 지옥의 의미로 쓰인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데스’라는 단어가 ‘지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리고 성경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죽으셔서 사망의 세력 하에 육신이 썩어가는 상태로 있으셨다”라는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라는 고백은 이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한 교부가 실수로 넣은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실제로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과정을 한 학자가 조사해보니깐, 사도신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때부터 해서 교부들이 자신들의 믿는바 핵심요리를 고백하는 글들을 남겼는데, 그것이 점점 살이 붙고, 첨가되고, 삭제되고 하면서 정리가 되는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창기 사도신경의 고백들을 보면, 놀랍게도 음부강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404년에 루피누스라는 교부가 처음으로 음부강하를 신앙고백에 넣어 유포시켰고, 그것이 로마가톨릭의 정식 사도신경으로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는 신학자들이 이것을 근거로 그리고 성경의 몇몇 구절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연옥에 내려가셨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아래의 구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고백을 오해하고 말았습니다.

“(18)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18-20)

이 구절은 난해구절중 하나인데,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렇게 난해구절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육과 영은 예수님의 인성의 구성요소인 육체와 영혼이 아닙니다. 이런 비슷한 표현들을 아래의 구절에서 발견합니다.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16)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전 15:45-46)

여기서 보는 것처럼 육과 영의 대조는 쉽게 말해 아래와 같은 것입니다. 

육으로는 -> 겉으로 보기에는... 물리적으로는... 우리 눈으로 볼 때...
영으로는 -> 그 이면적 의미로서는... 신령한 의미적 차원에서는... 영적인 차원에서는...

그래서 베드로전서 3:18절에서 육과 영의 의미도 아마도 이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어지는 난해구절부분을 보십시오.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그 동일한 신령적 차원에서 또는 영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감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옥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그들은 노아를 통해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물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물이 노아에게는 구원의 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에게 물로 세례를 주듯이 노아는 그렇게 물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구원받은 사람이 겨우 8명이었는데, 오늘날도 동일하게 구원받은 자들이 극소수입니다. 그런 극소수에 우리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살아나신 것, 곧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가 그러한 놀라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받은 표로 물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 난해구절을 감싸고 있는 전체문맥입니다.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음부강하를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맥을 가지고 다시 19절로 돌아와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보면 아래와 같은 의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 노아 당시에 복음을 듣고도 불순종해서 물 심판 받고 지금 감옥에서 대기 중인 영혼들이 사실은 그들 생전에 예수님으로부터 신령적 차원에서 복음을 들었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물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이라기보다는 성경전체의 문맥을 보았을 때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나서 지옥이나 연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이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며, 오히려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신 후 곧바로 하늘, 곧 낙원에 올라가셨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고(눅 23:43), 또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일을 다 마치셨고 죽으신 이후에 또 다른 하실 일이 없으심을 말씀하셨으며, 무엇보다도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사 그 영혼을 받으셔서 하늘에 있게 하셨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연옥에 내려가셔서 구약의 백성들을 이끌고 하늘로 다시 올라 가셨다거나,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거나, 또는 지옥에 내려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거나 하는 해석들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 우리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도신경의 음부강하고백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만 했는데, 다음의 두 가지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하나는 그 고백을 사도신경에서 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의 의미는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는 고백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이 고백이 덧붙여져서 오해만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빼자는 것이 하나의 견해입니다. 두 번째는 빼지 말고, 다만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면 더 유익이 된다고 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입장으로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을 정말 연옥이나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십자가에서 우리대신 지옥의 형벌을 받으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고백하면 더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44문 :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 그것은 내가 극심한 시련과 중대한 유혹을 당할 때에도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며 그것으로 위안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곧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평생 고난을 당하시고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육체의 아픔과 공포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는 지옥의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하데스’라는 단어가 ‘hell’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징적인 의미로 ‘hell’로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나 칼빈이 성경이 아니므로 이 입장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각자 양심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저는 중복이라고 생각되기에 차라리 빼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 대신 지옥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를 지옥에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심으로써,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지불하셔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주셨다는 것을 확신하며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배운 내용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늘 기억하며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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