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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45문
문답내용 45문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얻으신 자신의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지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확실하게 보증해 줍니다.
강설날짜 2014-01-1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7주(45문)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유익


요절 : 고전 15:16-17


45문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얻으신 자신의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지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확실하게 보증해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이후부터 죽음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모든 인류를 덮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이 죽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버리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산 죄의 삯인 이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지, 사람들마다 인간은 죽고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의 틀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자주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을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하고, 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증언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그 보는 것을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이 아님을 알리시기 위해 그 자리에서 생선 한 마리를 잡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금 늦게 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 도마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언해도 “내 손가락으로 못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믿지 못할까”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실상 제자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며, 그것이 모든 인류가 가진 인식의 한계인 것입니다. 죽으면 영혼은 살아있어서 하늘로 올라간다거나 마지막 때에 다 부활할 것이라든지 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도 믿었던 것이지만,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다시 그 몸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은 유대인들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인간의 범주 밖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음의 권세가 모든 인생들의 뼛속 깊이까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틀에서 벗어나서 부활을 생각하거나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참으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았고 만졌고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인식의 한계의 틀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면서, 소위 벼락을 맞은 것처럼 생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왔고, 모든 가치관과 인생관이 혁명적으로 뒤집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후부터 제자들의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절망에 두려워 떨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기뻐하였고,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일심단결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고 복음의 모든 진리를 밝히 깨달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성령 받고 권능을 받은 후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5)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27)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31)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22-32)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딱 한절만 이야기 하고, 또 대속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한편 우리는 주로 전도할 때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셨다. 그래서 이분을 믿어 영접하면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 라고 하면서 주로 십자가 복음에 강조점을 두면서 전도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해도 그냥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차적인 옵션정도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을 온전히 전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들,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십자가의 대속을 먼저 깨닫고 부활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먼저 부활을 경험하고 그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 사건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사도 바울의 회심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부활의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의 사건을 먼저 경험하고, 그 부활 사건의 빛으로 십자가 사건을 재해석함으로써 그의 인생에 생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왔고, 그리하여 우리가 아는 사도바울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어떤 편견 가운데 있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회심하기 전에 그는 두 가지 확신에 붙들려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고, 나머지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여나 이방인 중에 아주 탁월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혹시 이스라엘 나라의 몸종으로서 들어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나머지 이방인들은 다 지옥의 땔감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을 들어서 자신이 지옥의 땔감처럼 여기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는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 라고 하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보편적인 유대인들처럼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수는 메시아일 수 없는 것이죠. 오히려 예수는 자기가 신이라고 하는 신성모독을 행하며 백성들을 미혹하고 선동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 처형을 당한 자라고 확신했습니다. 신명기 말씀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기 때문에, 사도바울과 당시 유대인들은 그가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선지자였다면 순교를 당하는 수는 있어도 결코 나무에 매달려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순교를 당하지만 나무에 매달린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도록 섭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셨으니 바울이 볼 때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흔들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허망한 풍설을 퍼뜨리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바울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유대 공동체를 심각하게 타락시키는 누룩과 같은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에 가서 거기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처벌받게 하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일행과 모두가 함께 땅바닥에 엎드러졌고, 거기서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물리적으로 만났습니다. 사도바울이 환상을 보거나 영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승천하시고 높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승천하기 전처럼 제자들과 대면하여 대화하듯이 그렇게 마주보고 대화할 수 있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 예수님에게서는 사람이 가히 쳐다볼 수 없는 찬란한 빛이 비쳤고, 위엄과 영광이 둘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눈이 멀어버렸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진 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 누구십니까?” 본능적으로 사도바울은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온 세상이 주가 되시는 분이심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때 음성이 들려오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과 온 세상의 주가 되신 것을 두 눈과 두 귀로 생생하게 체험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순간적으로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았던 인물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았던 에녹이나,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믿어지는 모세나, 아니면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이었고,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고,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받았던 사람들이었고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다시 살리사 죽음을 넘어서게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의로우신 분이시며, 더 나아가 단순히 부활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앞의 구약의 인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하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는 자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는 한 가지 모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로 나무에 매달리도록 섭리하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 그렇게 저주받을 자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일도 없는 것이고, 또 반대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시는 자를 혹 순교 당하게는 하실지라도 나무에 달려 죽게 하실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이제 일순간에 성령의 은혜 가운데 놀라운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이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것이지만, 그러나 그 저주의 죽음은 그분이 하나님께 저주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을 대신 당하신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아온 자신의 죄를 대신 지시고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음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로 부활의 사실을 통하여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은 세상을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복종하시되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공의를 다 충족시키셨으며, 온전한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목숨까지 바쳐 구속의 임무를 perfect 하게 수행하신 아들을 더 이상 죽음 가운데 내버려두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사흘 만에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시고 또 온 세상의 주게 되게 하심으로써 이 아들이 의로운 분이시며, 그 저주의 십자가 죽음은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완전한 대속의 죽음임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통해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히는 생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자가 도리어 자기가 잔해하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


이런 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워낙 의로운 분이신데, 왜 또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만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의 문맥을 생각하면 분명하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저주의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온 세상에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구절도 다 그러한 맥락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의롭게 됨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했을 때, 절대적인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면, 다음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어떤 집에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방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집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방바닥을 다 태워먹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대노하면서 누가 그랬냐고 다그치고 있을 때, 맏형이 동생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자기가 그랬다고 하면서 스스로 누명을 쓰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분노한 부모가 그 맏아들을 데리고 벌주는 방안에 끌고 가서 문을 잠그고 그 맏아들을 벌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 동생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대신 벌 받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안심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문밖에서 두려워 떨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형이 부모 방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이 잘못한 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즉 방문을 열고 형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도 대신 벌 받는 것이 진행 중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형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동생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벌이 다 내려져서 형이 벌 받는 것이 끝마쳐졌고, 집에 불을 낸 것에 대한 부모의 노여움이 이제 완전히 가라앉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빈 무덤은 바로 그분이 우리를 위한 완전한 속죄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고 온전한 의를 이루셨음을 우리로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사죄의 확신과 의롭다 하심이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깊이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 죽으심의 은혜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죽으심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이며, 부활의 빛에서만 우리는 십자가 복음의 진수를 깨닫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16)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17)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6-17)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임 당하셨어도 만일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에 예수님의 부활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만난 자만이 진정으로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만났습니까? 12제자들처럼, 사도바울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가치관과 인생관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생애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오는 그런 체험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정말로 믿습니까? 사실 이 질문에는 어패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실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인데, 현실은 정반대인데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에 아멘하고서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은 다릅니다. “내일 아침 해가 동쪽에서 뜰 것을 믿으세요. 어떤 물건이든 공중에서 놓으면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을 믿으세요.” 이런 질문은 틀린 질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지, 믿으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12제자들이나, 사도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본적도 없고 손으로 만진 적도 없지만 성경말씀이 그렇다고 하니 “예수님이 부활했을 것이다” 하고 믿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만지고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복음전할 때도 뭐라고 합니까? 자신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증인은 자신의 바람이나 자신의 믿음이나 추측을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증인은 실제 사건을 보고 만지고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 자기 본 것만 사실대로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바로 예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예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전도 운동 일으켜서... 시스템으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증인의 삶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각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게 될 때에, 그리하여 우리 가운데 생애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는 회심을 하게 될 때에, 우리가 영권을 받아 예수 부활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본적도 없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부활신앙이 아니고, 가짜 믿음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실 확인하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택하신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12사도나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바울처럼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도마에 대해서 예수님은 “나를 보는 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라고 하셨고, 사도 베드로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맨 마지막으로 만삭되지 못한 나에게도 나타나셨다”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목격한 맨 마지막의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물리적으로 정말 눈으로 보고 만진 사람은 초대교회 사도와 성도들 몇 명뿐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뵐 수 없으니 사실 확인할 수 없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부활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체험한 우리로서는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과 동일하게 기정사실로 확인한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증인으로서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실 확인하게 될 때에 거기서 어떤 유익을 얻고, 무엇을 깨달으며 우리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되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다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답을 보십시오.


답 :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얻으신 자신의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지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확실하게 보증해 줍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남김없이 다 치르셨고, 그 의에 우리가 참여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이제 나에게 어떠한 하나님의 진노나 형벌도 남아있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의 권능으로 지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생을 말하는데,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부활의 생명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있게 되어지는 우리의 몸의 부활 때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부활의 생명과 능력을 미리 당겨서 맛보며 살아갑니다. 


“(10)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1)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 나아가는 만큼 우리는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아갈 때,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며,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장차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즉 셋째,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으니, 그의 몸된 지체인 우리도 그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후에 그분의 부활에도 동참하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 확인 한 자들은, 그리고 그 빛에서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사도행전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바울의 인생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고 수많은 순교의 길을 간 신앙의 선배들의 인생에서 보는 것처럼, 그 명백한 특징이 바로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신자들도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55)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6)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은 사단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무장 해제시킨 사건입니다. 사실 사단 마귀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사망의 권세로서 우리 인생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하나님이 율법을 따라 정하신 것이지만, 율법을 가지고서 이 죽음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권한은 마귀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 죄의 굴복하고, 죄에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사단의 마지막 비장의 무기인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시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자들도 “내가 비록 이 땅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다시 영광스러운 부활을 통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확신하면서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를 대적하여 그들을 이기는 자들이 막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남한의 불순한 동영상(드라마나 뉴스 등)을 본 사람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처형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기관총으로 갈겨 죽여서 아주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뉴스가 사실 잘못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기관총에 갈겨서 죽임당한 자들이 사실은 불순동영상을 본 사람들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다니다가 발각이 되어서 그렇게 총살해서 죽인 것이라고 탈북자들이 증언해서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수용소에 끌려가서 말 못할 비참한 고통을 당하고 핍박과 박해를 당하며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목숨 부지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숨부지 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던지, 아니면 성경을 아예 안 가지고 다니면 되는 것이고, 또 예수님 안 믿는 척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다 걸리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사는 것이고 또 북한 사람들에게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하고 성경을 늘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친히 영적으로 체험했고, 자신들도 부활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교회는 나와도 참으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무서워 신앙을 포기하곤 하지만, 그러나 참되게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북한의 성도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총칼 들이대면서 “신앙을 부인하라.. 부인하지 않으면 죽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는 담대한 마음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신앙을 포기할 것 같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 복음을 참되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많은 교회가 있고 성도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마귀의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죄에 굴복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오늘날 북한과 같은 핍박이나 박해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사단마귀가 꼭 핍박과 박해의 위협으로만 사망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단 마귀는 이 죽음의 권세를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여러 가지 방안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죽음까지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 때에 당하는 이 고난이 바로 사단 마귀가 사용하는 죽음의 세력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망설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가지고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그마한 희생과 손해를 가지고 위협해도 거기에 굴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마귀는 죄의 쾌락과 세상의 즐거운 것들과 달콤한 것들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것도 사망의 세력의 일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무시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죽이고, 자신의 욕망을 꺾는 순교의 정신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주님 따라가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결국 이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변형된 것이긴 하지만 결국 사단 마귀가 사망의 세력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권세로 사람들을 사로잡아 죄의 종노릇하게 하려는 사단 마귀의 역사가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더 교묘하고 어떻게 보면 더 악랄한 방법입니다. 핍박을 통해서 교회는 더욱 믿음이 순결해지지만, 이렇게 풀어주면 자연적으로 타락하게 된다는 것을 사단 마귀가 잘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에게 순종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는데도, 우리에게 이김을 주셨는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 것을 무서워하고, 이 목숨 붙잡고 어찌하든지 살려고 몸부림치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어찌하든지 더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하고, 더 누리기 위해, 더 행복하기 위해, 더 즐겁기 위해, 더 안락하기 위해, 그렇게 이 세상에 목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두려워하는 자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오, 곧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7-8)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이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거듭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오늘을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마음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고 십자가 복음을 깊이 깨달으며, 예수의 부활생명으로 충만한 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담대하게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금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살 때 겪게 되는 눈앞의 여러 가지 희생과 고난만 보지 말고, 또 눈앞의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만 보지 말고,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놀라운 승리의 사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사망의 권세를 이길 능력을 선물로 받았으며 더 이상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진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우리가 참으로 북한 성도와 같이 담대하게 예수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순교당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북한의 순교자들의 담대한 믿음을 우리에게도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도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 아니하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세상이 감당치 못할 참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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