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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46-49문
문답내용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47문 :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떤 곳에도 갇혀 있지 않고,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 밖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하나로 연합해 있습니다.

49문 :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자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엣 것을 찾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우편에 앉아계시며, 땅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강설날짜 2014-01-2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8주(46-49문)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요절 : 행 1:9-11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47문 :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떤 곳에도 갇혀 있지 않고,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 밖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하나로 연합해 있습니다.


49문 :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자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엣 것을 찾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우편에 앉아계시며, 땅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1. 승천의 의미


오늘은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문을 보시면...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처럼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9)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11)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9-11)


즉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는 광경을 일부러 보여주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의 부활 같은 경우는 그 부활하시는 과정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제자들을 모아 놓은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신비에 감추어두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광경은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냥 심심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계시하시고 가르치시고 또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축복하시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눅 24:51)


제자들을 등지고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올라가셨더라도 제자들이 참으로 잊지 광경이었을 텐데, 하물며 그분이 자신들을 축복하시면서 올라가시는 그 장면은 예수님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강한 인상을 제자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을 기뻐하시고 복 주시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올라간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천사가 이 사건을 해석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본 것 그대로 다시 재림하여 오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름이 가려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는 구름에 가려진 것이 아닙니다. 구름이 와서 일부러 가려버렸습니다. 이것이 의미심장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건축하고 첫 성막에서의 제의를 시작하려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였고, 그것이 성막에 가득한 구름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영광으로 인해서 제사장들이 도무지 서서 섬길 수가 없고, 또 성막 안으로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모세조차도 거기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는데, 영광의 구름에 싸여서 하늘의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아주 영광스럽게 되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원한 영광을 다시 취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예전에는 로고스이신 신성으로만 가지셨는데, 이제는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안에 연합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다시 취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인성, 곧 예수님의 몸과 영혼도 이제 영화로운 자태를 가지고 하늘에 계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처만 변화한 것이 아니라, 존재 상태에도 변화가 있게 된 것입니다. 곧 그가 하늘에서 사시기에 합당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과 대면하여 대화도 하시고 마주보고 얘기도 할 수 있었는데, 승천하시고 나서부터는 이제 그분을 만나면 곧바로 죽은 자처럼 땅에 엎드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서 사람이 가치 쳐다볼 수 없는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이 힘 있게 비췸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죄인들이 그 힘에 압도되어 고꾸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주 높이되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46문 :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문답에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부분은 조금 있다가 살펴볼 것이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고백은 다음 주에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이어서 다음 47문답을 보겠습니다.


2. 인성으로는 하늘에, 신성으로는 우리와 함께


47문 :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 :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관련한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좀 엉뚱한 질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어떻게 답해야 할지... 그 답이 궁금해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정말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질문을 하나의 발판으로 삼아 예수님의 신인성 교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47문의 답을 보면 예수님은 인성으로 우리와 더 이상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면 그것은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은 아까운 걸 낭비했다고 하면서 차라리 그것으로 구제를 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8).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도 기도하시면서 “(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1).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성으로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인성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21)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


예수님의 인성은 시공간에 제한됩니다. 인성은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이 하늘에 계시면 여기에는 안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 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답변처럼 그의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위엄으로(majesty-위풍당당, 위엄, 왕권), 그리고 은혜로,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하늘에 있지만, 예수님의 신성은 인성 안에 제한되실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신성으로 온 세상에 편재하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시간도 초월하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과거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시고 시간 밖에도 계십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신성은 우주 안에도 우주 밖에도 계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이 돌 속에도 이 나무속에도 그리고 심지어는 불신자들 속에도 계십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무소부재라고 말합니다. 구약에도 보면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예수님 앞에서 온 세상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신성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고 또 우리 안에도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실 때는 그런 무소부재하는 차원에서 함께 하심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유행어인 “내 안에 너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연합이요 생명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지금도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까?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삼위 하나님 중에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삼위 하나님 모두가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영이시고,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계신 곳에 아들도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점유하시고 상호 내주하십니다. 삼위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따로 분리해서 계시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만약에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단 한순간도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의 신성으로 그의 위엄으로, 그의 은혜로,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렇게 각각의 방식대로 함께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아주 풍성하게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9)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마지막에 내가 너희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고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일차적으로 의미하지만, 또한 거기에는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교제 나눕니다. 이런 사실을 배운 자로서 우리는 이제 육적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뿌리 뽑으며 예수님 보여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3. 엑스트라 칼비니즘


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어떤 곳에도 갇혀 있지 않고,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 밖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하나로 연합해 있습니다.


48문은 매우 어려운 내용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아마도 가장 신학적이고 정말 교리다운 문답니다. 이것은 쉽게 설명하려고 하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취지에서 보면 얼마든지 말 안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인데, 일부러 넣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답을 통해서 루터파의 성찬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찬을 배우는 시간이 아닌데,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나중에 성찬에 대해 말할 때 이 사실을 언급해버리면, 루터파하고 논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깐 아주 지혜롭게 성찬을 말하는 문답에서는 이런 내용을 생략하고, 일부러 앞에다가 루터파의 공재설을 반대하는, 칼빈의 성찬론을 은근슬쩍 언급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화체설을 주장하는 로마가톨릭의 입장을 사실상 그대로 이어받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을 공재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두 가지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물리적인 것으로서 ‘질료’가 있고, 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그것’을 참 ‘그것’되게 하는 것으로서 ‘본질’(또는 본체, 형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과 포도주에 사제가 축성(성찬식때 하는 기도)하면 순간적으로 이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질료는 떡의 질료와 포도주의 질료 그대로이기 때문에 먹으면 떡 맛이 나고 포도주 맛이 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 그것되게 하는 본질이 예수님의 몸과 예수님의 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체가 변한다 해서 화체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축성한 후의 떡과 포도주는 실제적인 주님의 몸과 피기 때문에, 절대로 흘리거나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받을 때는 그 앞에 엎드려야 하고, 그리고 매주 성당에 갈 때마다 그 앞에 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사람들이 입구에서 동상에다가 인사 또는 절하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동상에다가 절하는 것이 아니라 동상 뒤에 있는 성찬식 후에 남은 떡을 보관하는 성체보관함에다가 하는 것입니다. 곧 성찬의 요소 자체를 숭배하게 되는 오류로 빠지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입장을 반대했습니다. 루터는 축성해도 떡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떡 자체를 숭배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성찬식에 참여할 때, 이 떡에는 떡의 질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몸이라는 본질이 이 떡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있는 떡의 본질과 더불어서 예수님의 몸이라는 본질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재설(共在說)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틀린 이유는 첫째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질료와 본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넌센스이며 말장난입니다. 두 번째로 루터의 이 주장이 틀린 이유는 바로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죠.


만일 루터 말대로라면 예를 들어 부활절이 되면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그때 예수님은 한국의 모든 교회에 동시적으로 계셔야만 하는 것이 됩니다. 실제로 루터는 예수님의 인성도 신성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교회에 동시적으로 존재하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쇠를 불에 달구면 이 쇠는 여전히 쇠고 불은 여전히 불이지만, 그러나 이 쇠가 불에 영향을 받아서 벌겋게 달아오르게 되고, 그것을 다른 물체에 갖다 대면 거기서 불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인성도 신성의 영향을 받아서 편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 안에 있고, 그 인성이 신성의 속성을 공유함으로써 그 인성 역시 시공간을 초월해 계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칼케돈 신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고 있는 생각입니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혼합되어 제3의 성질이 된다든지 하는 것에 대해서 칼케돈 신조는 이단으로 정죄했었습니다. 루터도 칼케돈 신조를 자신이 믿는 바로 고백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신성과 인성이 서로 어느 정도 섞여서 신성 비슷한 인성을 말함으로써 칼케돈 신조를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럴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신성과 인성은 서로 섞일 수 없습니다.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입니다. 그리고 인성은 신성을 다담아낼 수 없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은 인성 그대로이고,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도 있고, 예수님의 인성 밖에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거니실 때, 그의 인성은 갈릴리 바다에만 있지만, 신성으로는 그때도 온 세상에 편재하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예수님의 신성은 예수님의 인성 바깥에도 있다. 밖에도 있다.” 이 이야기를 많이 하니깐, 루터란들이 “칼빈주의자들은 맨날 바깥에.. 바깥에... 라고 말한다.”라고 하면서 이 “extra(밖으로) Calvinisticum(칼빈주의자들)” 이라고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신성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성령으로 우리의 성찬식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참여할 때, 이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몸과 피가 되어서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고, 주님의 몸에 참여하며 주님과 신령한 연합의 교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하다보면 그러면 신성과 인성이 서로 분리되는 것 아니냐 하는 반대를 받게 되는데,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4.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유익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유익이 무엇인지 배워보겠습니다.


49문 :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변호자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며,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엣 것을 찾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우편에 앉아계시며, 땅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첫 번째는 바로 예수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거기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로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죄 안 지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죄는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낙망하지 말 것은 아버지 앞에 우리의 변호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해하면 안됩니다. 아버지는 용서할 맘이 없는데 아들이 우리대신 부탁해서 아버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 마귀가 항상 우리가 죄 짓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공의에 의거하여(율법을 의지하여) 고발하고 소송을 거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십시오. 저 뻔뻔한 인간을 보십시오. 어제도 그렇게 죄 지어놓고서는 지금 당신 앞에 나와서 뻔뻔하게 은혜를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저런 자가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까? 저런 인간은 포기하시고 반드시 율법을 따라 벌하십시오.”


그렇게 소송 걸때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 난 못 자국을 나타내 보여주시면서 우리를 위한 변호자로서 반론을 펼치십니다. 그러면 재판장이신 아버지는 그 피를 보고 흔쾌히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로서는 바로 어제 죄를 지어서 심히 낙심이 될지라도, 그리고 스스로도 면목이 없을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봐도 참 뻔뻔하게 여겨질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나와서 회개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늘 주님이 우리의 변호자로서 지금도 날 위해 기도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의 기도를 하시는 모습은 바로 구약의 희생제사제도의 성취인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희생제사를 드린 후에 제사장이 그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기도하며 속죄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속죄사역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가 그 피의 공효를 가지고 하늘 성소로 들어가셔서 그것을 그 백성들에게 적용시켜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생각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승천은 그 자체로 전체 속죄 제사 사건의 한 부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옛날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서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속죄를 이룬 것처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시고 그 자신의 희생의 피를 가지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하나 떼어 내어서 생각할 수 없고 전체를 하나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올라가신 것입니다. 하늘 성소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심으로 자신의 십자가 공효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위로와 유익을 우리가 주님의 승천을 통해서 받고 누립니다.


그러면 두 번째 유익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과 승천을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표현하기를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역한 것이고 원문을 직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하늘에 있는 우리의 살(육체)을 우리는 보증으로서 가지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로 연합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머리로서 우리 몸의 일부가 되십니다. 우리의 일부이신 예수님의 육체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일부의 살(육체)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우리 몸의 일부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부활하시어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으면 우리도 사실상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우편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몸의 일부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장차 온 몸이 그렇게 될 것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보증으로 예수님을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분이 지금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증인 예수님을 하늘에서 소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보증이 하늘에만 있고, 하나님만 가지고 있으셔서 섭섭할 수 있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마치 결혼 서약을 할 때 변치 않을 것에 대한 보증으로 결혼예물을 서로 교환하듯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보증을 가지고 계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서 짝 되는 보증을 이 땅의 교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이십니다.


“(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5)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욱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승천하여서 하나님께 이끌려 올려질 것에 대한 기대와 소망,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엣 것을 찾고 아랫것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부활, 곧 첫째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생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해서 중생했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중생 안 한 자에게 이 말씀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은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위엣 것을 찾는다고 해서 고개만 위로 쳐들고 가다가는 맨홀에도 빠지고 전봇대에도 부딪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위엣 것을 찾는다고해서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고, 학교를 버리고, 매일 말씀만 읽고 기도하고 전도만 한다면, 산으로 기도원으로 신학교로 간다면, 우리는 다 굶어죽게 될 것입니다. 물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렇게 헌신해야 되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이 위엣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육이원론의 오류를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소위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 곧 기도, 말씀, 전도, 목회도 얼마든지 육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목회하는 사람 많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미션너리(목회)가 아니라 비즈니스(사업)입니다. 말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비즈니스를 하는데 주를 위하여 하면 그것은 미션너리가 됩니다.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왜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직장 상사에게 할 때는 “주께 하듯 하라,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딱 돈 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그것은 삯꾼이고, 그것이 비즈니스입니다. 그러나 상품을 만들어도 이 상품을 예수님이 쓰신다고 생각하고 만들고, 고객과 대할 때도 이 고객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서 서비스하는 것, 음식점을 해도 이 음식을 예수님이 드실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만들면, 그런 정신으로 직장생활하면 그것이 비즈니스가 아니라 미션너리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를 위해서 직장생활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말씀을 악용하면서 “그렇죠?... 그것이 위엣 것을 찾는 거죠?...” 그러면서 직장생활만 아주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말씀 읽을 시간도 없고, 기도도 안하고, 수요모임도 빠져가면서 일하는 것이죠. 그것은 결코 위엣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땅의 것을 찾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말씀 이하를 다시 보십시오.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1-3)


위엣 것을 찾는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돈과 쾌락에 대한 탐심과 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곧 땅의 것을 찾는 삶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본성이 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참으로 위엣 것을 찾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은헤로만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의 방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매일의 새벽기도, 밤기도, 경건서적의 탐독, 교회 공적예배에 신실하게 참석, 예배말씀 묵상 및 복습 등의 경건생활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직장생활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경건생활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쁜 직장이라면 당장 사직서 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썩어질 것을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어떤 업적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썩어질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먼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면서 경건생활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가 이미 하늘에 계시고 우리도 장차 부활하고 승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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