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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3.04 17:3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주(53문) - 성령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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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53문
문답내용 53문 : 성령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또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강설날짜 2014-02-0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주(53문)


성령 하나님


요절 : 요 14:16-17


53문 : 성령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또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배우고 있는데,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관련된 신앙고백을 배웠고, 오늘부터는 성령 하나님과 관련된 신앙고백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배웠듯이 “성령을 믿사오며” 이후에 나오는 모든 사도신경의 고백은 다 “성령 하나님을 믿사오며” 라고 하는 한 문장에 걸려 있습니다. 즉 아래의 내용들은 다 성령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모든 고백의 내용이 성령 하나님께 대한 고백인 이유는, 교회와 성화와 죄사함과 부활과 영생...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창조와 섭리를 고백하고, 성자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성육신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사역에 대해 고백하며, 성령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그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 안에 적용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빼놓고 교회를 논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리고 교회 성도들 간의 교제와 교통도 성령 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란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고, 성령님이 주신 은사로 서로 연합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시켜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비단 죄 사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거듭남에서부터 시작해서 성화와 부활, 영화와 영생까지 모든 구원의 여정이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롬 8:11; 고후 3:18참조). 그래서 성경을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영으로”, “성령을 통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우리가 이런 표현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참되고 바르게 배워서 그 성령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53문 : 성령님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또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1. 성령님은 하나님이시다.


“성령을 믿사오며”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그분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합니다.


“(3)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이 말씀에 보면 아나니아가 땅을 팔고 일부를 헌금하면서 마치 다한 것처럼 속여서 헌금하다가 정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말씀 가지고 오해해서 “헌금할 때는 다 바쳐야지 절반만 바치면 안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전부를 바치든, 절반을 바치든, 1/3을 바치든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절반을 바쳐놓고, 또는 일부만 바쳐놓고 마치 다 바친 것처럼 거짓을 행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다 바친 자의 영광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일인데, 그런 일을 통해서 자기 영광을 취하려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심으로 아주 무서운 징계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치신 것은 아주 계시적인 성격이 강한 징계입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진행되어 가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거짓되게 예배하고 헌금하는 것과 관련해서 한번 크게 징계하심으로 온 교회에 경종을 울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본보기의 성격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교회 가운데 거듭 반복하신다면 아마 오늘날에도 매주 예배 때마다 한 두 사람씩 죽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경계는 되겠지만,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게 되죠.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교회가 잘못했을 때는 징계하시지만, 매번 그렇게 죽이심으로 징계하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어쨌든 참된 신자라면 이 사건을 통해 여러 가지로 교훈을 받습니다. 즉 교회는 그냥 사람들이 모이는 동호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의 행태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그것이 성령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끝에서는 다시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에게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다 하는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주님께로부터 직접 배운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베드로가 주제넘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전에 베드로에게 아래와 같이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도록 명하심으로써, 이 세 위격이 동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의미로 아래와 같이 삼위일체적으로 성도들을 소개합니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 1:2)


그리고 그 외에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격으로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22)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


특별히 아래의 구절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


사도바울은 어떤 한 사람과 그 사람의 영혼과의 관계를 가지고서 하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이 곧 그 사람이듯이 성령님도 바로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영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다 통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음은 측량할 수 없는 무한대의 것인데, 성령이 다 통달하시니 그분이 무한하시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되심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2. 성령의 인격성


오늘날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말하면서 어떤 신의 힘이나 감화력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님이 인격적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인격적이라는 말은 그분이 인간성을 지니셨다는 말이 아니라 그분이 물체나 또는 하나님의 힘이나 감화력처럼 어떤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마치 사람이 지성이 있고, 감성이 있고, 의지가 있을 때 그것을 인격이라고 하듯이. 그런 면을 성령님도 갖추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도 의지가 있으시고 지성이 있으시고 감성이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이 구절들에서 보는 것처럼 성령님은 지성이 있으시고, 자신의 뚜렷한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리고 감정이 있으십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여기서의 탄식은 신음과 한숨을 의미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파하시며 탄식 가운데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5)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 4:5)


여기서도 보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벗하고 죄를 고집할 때 마음 아파하시고 근심하시며 심지어는 질투하십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질투심이 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힘이나 감화력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신성 모독적이고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하나님이시며,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더불어서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3.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라


그런데 오늘날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참 많습니다. 성부하나님에 대해서는 워낙 고래로부터 다 잘 알고 있는 것이고,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4세기만에 모든 기독론이 의문의 여지가 없게끔 정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론에 대해서는 이단인지 아닌지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런데 성령론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2세기 때 몬타누스라는 신비주의자의 등장으로 교회가 이 그릇된 성령론으로 말미암아 한바탕 난리를 치렀기 때문에, 이제는 성령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주장하기가 꺼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뭔가 뚜렷하게 정립된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모든 시대에 그런 이단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시대가 가면 갈수록 잘못된 성령론이 판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별하기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빙자하여 나타날 것이다. 그때에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바로 분별하도록 성령께서 친히 성경을 증거로 주셨다.”(칼빈, 기독교 강요 1.9.2)


그러므로 앞으로 사람들이 성령... 성령... 하면서 나타날 때에 무엇을 통해서 그 성령이 진짜 성령인지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이 성경하고 맞으면 진짜이고, 성경하고 안 맞으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전방초소에서 밤을 새우며 보초를 서는데, 당직을 설 때마다 암구호가 있습니다. 밤에 누군가가 초소 앞을 지나갈 때 보초는 암호를 묻습니다. 그런데 만일 암호를 대지 않고, “나야 나! 나 사령관이야 사령관... 나는 사령관이기 때문에 암호 필요없어...” 그렇게 말하고 걸어 들어온다면 총구를 내리고 인사해야 합니까? 아니면 쏴야 합니까? 사령관이라고 말한 거에 쫄 필요 없습니다. 암호 안대고 들어오면 곧바로 쏴 죽여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진짜 사령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암호를 들어보면 아는 것입니다. 그날 암호는 사령관이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사령관일지라도 그 사령관에게 암호 물어보는 것이 무례한 게 아닙니다. 암호 물어보면 오히려 사령관이 좋아해서 포상휴가 보내줍니다.


사람들이 성령... 성령... 하면서 무슨 체험을 말 하든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성령님이 하셨다고 하니깐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고 곧이곧대로 들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 펴놓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성령 하나님께 무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분별해서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 그렇게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4.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


이제 성령 하나님에 대한 두 번째 고백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53문 : 성령님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첫째,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성령님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또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둘째부분을 보시면 “또한”, “나에게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졌는데, 그와 같이 나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는 체험은 개인적인 체험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생각할 때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성령 받은 것, 곧 교회가 성령을 받은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나의 성령 받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체험은 교회적인 체험이고 교회 안에서의 체험입니다.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있는데, 교회 밖에서, 혼자 산에서 또는 기도원에서 성령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받은 영은 사단의 영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교회 밖에서의 모든 영적 체험은 사단 마귀의 역사입니다. 교회 밖에서 구원이 없는 것처럼 교회 밖에서는 성령님의 은혜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 고백을 계속해서 보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하여 오셨고, 또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참된 신자라면 반드시 그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나고도 놀라운 은혜와 특권입니다. 모세가 자신을 위해 시기하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28)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29)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민 11:28-29)


모세의 소원은 70인 장로들에게만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속사적으로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잠재적이고 은밀하며 특별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모든 남녀노소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요엘서의 예언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의 완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대로 오셨고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당연시 하는데,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꿈만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성령 받은 신약성도로서 그 누리는 은혜의 풍성함과 확신이 구약성도들의 영적체험에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이 월등히 뛰어넘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이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크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이며 특권인지 우리가 생각해야 하며, 또 그와 아울러서 성령 받은 신약의 성도로서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령이 거하시는 줄 모르고, 교회의 지체로서 함부로 죄짓고, 음란을 행하고, 교회를 허무는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경고하기를 교회를 허무는 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허물어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그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시며 자기 안에 계심을 진정으로 깨달아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늘 조심스럽게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이 성막과 성전에서 얼마나 두렵고 떨림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의식을 수행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마음이 바로 그 성전인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렸었는데, 제가 진해 자원봉사센터에서 공익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시장이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시장방문이 한 달 전에 공고가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한 달 내내 비상근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리젠테이션 할 거 준비하고, 대청소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날에 진해시장이 방문했습니다. 옛날에는 시장하면 우습게 봤는데, 직접 보니 그 위력을 알겠더라구요. 자원봉사센터 소장님은 그 앞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발을 조금씩 떠셨고, 말에나 행동에나 혹 실수하지는 않을까 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개 시장이 와도 이러한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 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 어찌 우리가 막 죄짓고 살고, 나쁜 생각을 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린도 교회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음란을 행하고 서로 분쟁하고, 경쟁하고, 서로 간에 법정 소송을 걸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상황파악을 못하는 우매하고 어리석은 행위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하시는 줄 알지 못하느냐?” 그렇습니다. 성령 받았는데도 그것을 까먹게 되는 순간 우리는 미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우리도 똑같이 경거망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고, 우리의 몸은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에 음행을 회개하고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5. 나에게 주어진 성령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성령님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수동태로 말합니다. 성령님은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했을 때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마술을 행하던 사람 시몬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고 그들이 와서 안수하며 기도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마술사 시몬은 돈을 주면서 “나도 이 권능을 주어서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면 성령이 임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돈으로 하나님을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일들이 중세에 일어납니다. 돈으로 하나님의 성직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직매매를 시모니즘이라고 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성직매매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시모니즘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들, 그리고 성령충만의 은혜를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곧 나의 행위와 노력과 열심을 지불해서 그것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방언의 은사 받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받는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혀 틀린 생각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시모니즘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고 자신의 내적인 결핍과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데, 영성주의자들은 이런 신자들에게 어떤 방법들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여러 가지 규칙들을 제시하는데, 예를 들면 금식기도와 철야기도, 새벽기도, 하루에 3시간 이상 기도하기, 기도원 가서 기도하기, 산에 가서 기도하기, 말씀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하기, 침묵, 고행, 금욕 등을 말하면서, 그렇게 자기를 힘껏 쏟아 붓는 열심과 노력을 행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말은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데 사실상 자기가 대가를 지불하고 그 은혜를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성주의자들을 다 싸잡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한 말들 중에 맞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영성운동가들이 시키는 대로 해서 받은 모든 은혜를 전부다 사단마귀가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되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성운동가들이 주장하는 것이 결국 말씀과 기도로 요약되고 이 말씀과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고, 사실 그것은 영성운동가가 말하기 전에 교회가 처음 있을 때부터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힘써 해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그 마음의 동기에서부터 대가를 지불해서 획득한다는 식의 어떤 자기 공로로서의 행위로 덧붙여질 때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즉 말씀과 기도에 대한 강조와 규칙들이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은혜의 방도입니다. 내가 은혜를 획득하는 내가 가진 수단이나 방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가지신 은혜의 방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말씀과 기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은혜 받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결국 말씀과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말씀과 기도에 착념합니다. 이것이 말이 어렵고 외관상 구분이 잘 안되지만,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동기의 차이가 결국 시모니즘이냐 은혜의 방도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정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진 사람만이 은혜의 방도에 복종하는 마음으로 말씀과 기도에 힘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는 것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오, 우리가 은혜의 방도에 힘을 써서 성령님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은혜를 받는 것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6. 보혜사, 진리의 영


둘째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답 : ... 둘째, 성령님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와 복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를 위로하시며, 또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로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7)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다락방에서 여러 가지 강화를 말씀하시는 내용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분위기가 매우 어둡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근심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이 보혜사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보혜사는 ‘파라클레토스’, 곧 변호해주고 도와주고 옆에서 항상 함께 있으면서 위로해주는 변호사나 친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기간 내내 제자들에게 파라클레토스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늘로 가시게 되었고, 이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시는 보혜사는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잠시 있다가 하는 거 보고 맘에 안 들면 떠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영원히 거하시면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중요한 역할이 감성이 아니라 지성 쪽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날 성령운운하면서 사람을 감성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성경에서 이탈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찬양예배나 경배와 찬양이 없습니다. 그것은 찬양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찬양 정말 좋아합니다. ccm 좋아합니다. 저는 찬양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안배우고 찬양하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성경 안배우고 사람 노래 부르고 춤추게 만들고 방방 뛰게 만들고 눈물 흘리게 만드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저도 옛날에 찬양집회 따라다니면서 해보았지만, 그런 신앙은 너무 얕습니다. 그렇게 사람 방방 뛰게 만들고 눈물 흘리게 만들고서는 스스로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고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경험했다고 스스로 속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국에 처음 선교사들을 통해 소개된 기독교는 그런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청교도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기독교는 철저하게 성경의 기독교였습니다. 깊은 교리를 배우고, 부흥회를 하면 오늘날과 같이 찬양예배 두 시간씩 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경 한 파트를 정해서 그 성경을 계속해서 강설해가는 사경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진리를 깨닫고 회심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신앙 감성입니다. 찬양부르며 눈물 흘리는 것이 신앙 감성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이 지성적인 부분, 곧 알고 배우고 익히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힘써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진리를 가르치십니까?


7. 그리스도의 것을 말하심


“(13)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4)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15)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요 16:13-16)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데,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말하십니다. 그리고 장래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 장래일은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에서 보면 그것이 장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리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성령의 거룩한 수줍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숨기시고 예수를 높이고 예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성령...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짜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의 핵심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믿음을 갖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혜의 공효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을 잘 배워가는 것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예수님의 은혜의 영광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우리가 성령충만, 말씀충만, 예수충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다움, 거룩함, 순결함을 이 세상가운데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날마다 탄식하시며 기도하시고, 우리가 힘들고 낙심할 때마다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다시금 소생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온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시는 분이십니다.


“(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 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통해서 이 성령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아 누리고, 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늘 진리가운데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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