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1,102
  • 어제방문자 : 
    1,129
  • 전체방문자 : 
    1,194,852
조회 수 332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54-55문
문답내용 54문 : “거룩한 공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의 교회를 자기에게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 교회가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나는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이 교회의 지체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든 신자는 개별적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지체들은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강설날짜 2014-02-16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Ⅰ(54-55문)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


요절 : 요 10:16,28


54문 : “거룩한 공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의 교회를 자기에게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 교회가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나는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이 교회의 지체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든 신자는 개별적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지체들은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1. 거룩한 보편적 교회


사도신경의 성령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신앙고백으로 교회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은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에베소서 말씀에 보면 모든 택함 받은 총수로 구성된 교회가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흠 없고 거룩한 교회가 되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범죄한 인생들을 구속하시며(엡 1:7-12), 성령께서 그 구속을 적용하고 인치사 삼위 하나님의 영원전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이 바로 이 삼위일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성령하나님이 실질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일이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성령하나님의 사역으로 대표격으로 돌려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교회를 제일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대한 사도신경의 고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입니다. ‘공회’라는 말이 참 어렵습니다. 개정개역은 “거룩한 공교회”라고 해서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지만, 그래도 ‘공(公)’이라는 한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여기서의 ‘공’은 ‘공평할 공’자입니다. 즉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교회, 보편적 교회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the holy catholic church”인데, “카톨릭 처치”라고 해서 로마가톨릭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로마가톨릭은 이단이지 “카톨릭 처치(보편적 교회)”가 아닙니다. 사실 이 “카톨릭”이라는 단어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인데, 로마교회가 자기들 교회의 이름으로 갖다 쓰는 바람에 이 단어가 거의 로마카톨릭을 지칭하는 관용적인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마치 신천지라는 단어의 경우처럼, 그 단어의 뜻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세 글자로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긴요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를 이단이 사용하고 있어서, 교회 내에서 ‘신천지’라는 용어를 쓸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카톨릭 처치”라고 하면 다들 로마카톨릭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절대로 거룩한 보편적 교회가 아닙니다. 부패한 이단적 교회일 뿐입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의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하면 교회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속성에는 3가지 또는 4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①거룩성 ②보편성 ③통일성 (④사도성)입니다. (사도성은 통일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3가지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속성이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하는 고백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하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또 churchs(복수) 가 아니라 church로서 단수입니다. 즉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통일성).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하나님께 대한 첫 번째 고백으로서 교회의 속성 세 가지를 고백합니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보여줍니다.


54문 : “거룩한 공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의 교회를 자기에게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은 그 교회가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나는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입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이 교회의 지체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보편성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의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남자들 가운데서, 또는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서, 또는 모든 서울대이상 나온 사람들 중에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와 학벌, 인종과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속성상 보편적입니다.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옛날에 선교단체시절 대학생들로만 특화된 교회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보편적이어서 남녀노소, 빈부귀천과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시간적으로도 보편적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창세 이래로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교회가 없었던 적은 단 1초도 없습니다. 늘 교회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지음 받아 에덴에 거닐 때도 이 아담부부가 바로 최초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후에도 아담에게 아벨 대신 여자의 후손으로 주신 셋과 그 후손들, 그리고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계보의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고 국가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구약의 교회가 완전히 망한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선지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다닐 때, 엘리야는 “이세벨이 주의 모든 선지자들을 죽였고 이제 나 혼자만 남았는데 나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절망하고 낙심할 때에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일지라도 하나님의 교회는 여전히 든든히 서 있는 것입니다. 중세 1000년 동안 거짓진리가 왕성하게 지배하고 영적으로 매우 어두웠던 그 시대에도 자료를 뒤져보니 참된 신앙의 명맥을 이어오던 적은 무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단 1초도 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처음부터 세상 끝날까지 택하신 백성이 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시간적인 보편성을 그 속성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속성으로 통일성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보면...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도 예수님의 양들이 있습니다. 보편성이죠. 그렇게 예수님이 그 양들을 하나하나 모으시는데, 그 모은 양무리들을 한 무리로 만드셔서 자신 안에 있도록 하셨습니다. 곧 통일성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의 핵심은 한 목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데 있어서 한 무리인 것이지, 자기들끼리는 잘 연합하고 단합하는데 주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그것은 참된 하나 됨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말씀과 성령의 통치입니다. 말씀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온 교회 성도들이 잘 배우고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잘 받들어 나아가는 교회가 참으로 하나 된 교회인 것입니다.


“(20)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이 구절에서처럼 예수님은 가장 중심 되는 모통이 돌이 되시고, 그 위에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가 놓이고, 그 위에 온 성도들이 연합해서 하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통일성은 “무조건 하나 되자, 무조건 조직을 하나로 만들자, 교단을 합치자”라고 하는 운동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온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한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개교회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각각의 개교회들이 말씀의 본의를 가르쳐가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 “교회는 하나다” 라고 하는 통일성을 잘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교리들까지 포기하거나 타협해가면서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려는 WCC운동은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결코 바른 하나 됨이 아닙니다. 반드시 믿는 바의 일치 하에서 조직적인 하나 됨을 외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실 통합(장신)을 제외한 합동(총신), 고신, 합신, 개혁 등의 교단들은 조직적으로 합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는 바로 고백하고 공식적으로 개혁신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교단간의 통합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교단간의 연합은 사실상 성사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서로의 믿는 바가 갔다면 (그리고 교회의 표지를 갖추고 있다면 비록 소속 교단은 달라도) 같은 주님의 몸 된 교회이며 하나 된 교회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하나 됨을 진정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자기 교회만 잘되면 된다고 하는 개교회주의와 교회의 수평적 이동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직 자기 교회만 부흥되고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다른 교회는 망하든 말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 교회 부흥을 위해서 다른 교회 성도들을 빼가는 일을 하거나, 성도들이 이명증서 없이 교회를 옮겨 다니는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믿지 아니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 됨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어떤 목사가 예수님의 동정녀탄생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온 성도들이 당장에 들고 일어나서 그 목사에게 항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통일성을 부인하고 개교회주의를 외쳐도 성도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모르고 오히려 그것에 동의하고 지지하면서 개교회주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이고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입으로는 교회의 하나 됨을 외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국교회가 잘못되든 말든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 우리 교회만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세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결국 사도신경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믿사오며”의 고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도 다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아무리 잘 세워져가고 있어도 다른 주변의 교회가 잘못되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의 어려움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병적인 문제들이 우리의 문제이고 그것으로 인해 아파하고 애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한결교회를 위해서만 기도해서는 안 되고, 한국교회와 더 나아가 전 세계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전 세계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참 복음위에 굳게 세워지고 부흥되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땅의 교회가 세상을 이기며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재림의 때에 모든 성도가 하나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완성될 시온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실제로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렸고 심지어는 식사기도 할 때에도 (자기가 목회한 교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있는) 시온의 부흥과 영광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그 모든 교회를 다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생각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교회의 참된 표지인 복음의 바른 선포, 성례의 올바른 시행, 권징의 바른 시행이 잘 나타나는 교회만을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바른 선포인데, 이것은 세밀한 부분에서 잘못 해석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본질만큼은 바르게 선포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신경의 교리와 더불어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 성령론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적 복음의 핵심 도리를 웨스트민스터 신조나 개혁신학의 교리들이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교리들이 그 교회의 바른 복음 선포 여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이 공식적으로 어떤 교리를 취하는지 살펴보면 그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감리교나 성결교, 오순절교의 경우는 공식적으로 알미니안의 가르침을 주장하기 때문에, 만일 거기에 소속된 교회가 교단의 공식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며 그같이 가르친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불건전한 교회에서도 거듭난 사람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이고, 거듭남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만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의 구원론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참으로 거듭난 신자는 그 교회에 계속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와서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로 와야 합니다. 벨직 신앙고백서 27-29조항을 보면 참된 신자는 주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에 가입할 의무가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이명증서 없이도 교회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공식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고백하고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장로교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바른 말씀에서 벗어난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은 특히 교회 간판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워낙 초교파적으로 모든 교회들이 다 통일되어서 그 교회가 소속된 교단의 신학적 특색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어느 교회를 가든 가르침이나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오순절장로교”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간판가지고 참된 교회냐 거짓 교회냐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장로교 소속이라도 알미니안을 주장하거나, 신사도운동을 주장하거나, 은사운동 또는 치유목회를 하거나, 삼박자축복 또는 오중복음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씀에 무지하고 경배와 찬양만 강조하거나, 성경적이지 않은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돌아가게 한다면, 그 교회는 바른 말씀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교회로서 심리학과 마케팅에 물든 기독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는 바로 고백하므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참된 교회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소속된 참된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단 표면적일지라도 그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믿는 바로 고백하므로, 교회로 하여금 그러한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가르침으로 자꾸 나아가도록 목회자를 돕고 성도들을 자꾸 섬겨가는 일을 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지 못하다고 해서 무조건 나올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성도로서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도울 의무가 참된 신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자신의 영적 상황이 도무지 그것을 섬길만한 여력이 없거나 상황적으로 그 교회의 그릇된 흐름을 도무지 고쳐나갈 수 없다고 판단될 경우, 그 교회를 떠나 바르게 가르치는 교회로 오는 것 역시 참된 신자가 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입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든 성령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장로교에 소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가르침에서 벗어난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교회들이 바른 말씀의 가르침으로 돌아오도록 모든 방안들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이 점차로 교리에 관심을 가지고 바른 말씀의 가르침을 추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열망을 모든 교회에 더욱 충만히 부어주시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주님의 말씀을 잘 가르침 받아 감으로써 세상을 이기고 교회의 하나 됨을 이 땅에 드러내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 번째 교회의 속성으로서 거룩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거룩’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많은 경우 ‘구별됨’이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반만 맞는 것입니다. ‘거룩’의 정확한 의미는 “구별되어져서 하나님께 바쳐짐”을 의미합니다.


“(2)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 13:2)


애굽에 내려진 10번째 재앙인 장자재앙은 애굽에만 내려진 재앙이 아니라 이스라엘 진영에도 내려진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모든 초태생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우리가 ‘거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성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자기에게로 모으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면...


답 : ...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 모든 인류 가운데서 선택된 하나의 교회를 자기에게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십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일차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헌신해 드린 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교회를 개척할 때도 자기 힘으로, 자신이 가진 수완을 최대한 활용해서 사람들을 뽑아다가 하나님 앞에 교회로 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전도하는 수고를 하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을 교회로 불러 모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말씀선포를 사용하셔서 택자들을 자기 품으로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수고한 것이 있어도 표현하기를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실 때에는 말씀과 성령으로 신자 안에 역사하사 거듭남과 회심의 역사를 통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6)


물은 성령의 씻으시는 사역, 곧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을 적용하셔서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듭나게 하시는데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고전 6:11참조). 그리하여 단순히 소속만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도 변화되어 우리 안에 있던 죄의 권세가 파괴되어지고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의 거룩한 열매들이 교회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7)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의 생명과도 같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버림을 받아 사람들에 발에 밟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교회를 목적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목적으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어 가시는 것이고, 이 일에 우리의 노력과 애씀, 순종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날마다 말씀과 성령을 따라 죄를 죽이고 회개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며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교회의 거룩성을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불러 자기 소유로 삼으셨으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거룩하고 흠 없는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를 계속해서 다스리시고 또 보존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바쳐졌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고,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교회를 끊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고 할 때에 바로 이러한 교회의 거룩성과 통일성, 보편성을 고백하는 것이고, 바로 자기 자신이 이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지체로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소속되어 있을 것을 믿음을 고백합니다.


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든 신자는 개별적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지체들은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과 관련한 두 번째 고백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거룩한 공교회에 대한 고백에 이어지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서로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하나 됨을 인식했으면, 이제 그 하나 됨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연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원어로 보면 “상크토름 커뮤니오멤”이고, 영어로 보면 “the communion of saints”입니다. 한마디로 성도들 간의 커뮤니티인 것입니다. 그것을 교제(fellowship)라고 하지 않고, 교통(communion)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차원의 교제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단순한 교제의 나눔이 아니라 서로 무언가 통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교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자들로서 각 지체들이 서로 서로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교제, 교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파생된 교제입니다.


“(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3)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1-3)


요한이 먼저 사도로서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이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된 복음을 수신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무엇이 일어납니까? 사도요한과 수신자들 사이의 사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참된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게 될 때에 그것은 곧 다른 지체들과의 연합과 교제를 파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6절을 보면...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7)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7)


빛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는 말은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의 사귐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빛 가운데 있는 삶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는 빛 가운데 있을 때에만 성도 간의 서로 교통함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듭나서 주님과 연합했어도 불신앙에 빠져서 죄 가운에,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도의 사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게 살 수 없기에, 그래서 날마다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날마다의 회심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만 비로소 우리 가운데 참된 사귐도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주님과 연합하지 아니한 자, 회개하지 아니하고 말씀을 거부한 자들이 교회에 있는데,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19)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교회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이 교회에 올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내면서 떠나게 됩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조금의 손상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거룩성이 드러납니다. 숫자는 줄었지만, 오히려 교회의 거룩을 해하는 요소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부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귐은 아는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귐입니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제일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각자가 그리스도와 교제 나누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55문 :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 첫째,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든 신자는 개별적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보화와 은사들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지체들은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접붙임 받아서 내가 먼저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을 누리고, 주님을 즐기며, 또 은혜로 주님이 이루어놓으신 모든 특권과 지위와 모든 신령한 복들을 믿음으로 받아 누릴 때, 그 받은 은혜와 은사를 가지고서 성도들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아들까지 주셨는데, 뭔들 아끼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분이 아들과 더불어서 모든 신령한 은사들(선물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나눠주실 때에 누구에게 주십니까? 그 수혜자의 인칭이 어떻게 됩니까? 1인칭 복수로서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퍼펙트하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은사는 많은데 저 은사가 적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저 사람에게는 저 은사가 많고 이 은사는 적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서로 나누게 해서 온 교회가 부족함이 없이 든든히 서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 하면 무조건 방언, 예언, 치유와 같은 신령한 은사나 또는 섬김과 봉사, 믿음의 은사, 권위 하는 은사 등과 같은 재능과 관련된 것만 생각하는데, 물론 그것도 은사지만, 사실 그렇게만 한정지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주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과 몸과 영혼, 하나님께 돈 주고 샀습니까? 여러분의 재능과 물질, 모든 소유, 심지어는 시간까지 하나님께 돈 주고 샀습니까? 다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것을 내 것 인양 주인노릇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거듭남으로써 그것이 워낙 주님의 것이었음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값주고 사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더더욱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성령님이 강림하시고 교회가 탄생되어졌을 때, 제일처음 나타난 모습이 바로 재물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몇몇 사람에게 부를 집중해서 선물로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을 주셨습니다. 왜요? 그것을 나누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 부자면 나눔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령충만 했을 때, 자기가 가진 부를 마땅한 의무로, 그리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함으로 팔아서 교회의 재정을 평균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은사를 아낌없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온 교회가 체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은 다 교회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재산뿐만 아니라 예수님 믿기 전에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이 갈고 닦은 재능, 기술도, 예수님 믿고 거듭나는 순간 주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로 바뀌게 되고, 그것으로 교회의 형제 자매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에는 이러한 물리적이고 일반은총적인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다가 플러스해서 주님을 믿는 순간 특별한 은사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십니다.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8)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9)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10)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9-11)


이런 특별한 은사를 주실 때도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자신의 뜻대로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은사 나눔을 통해서 교회는 유익을 얻고 세움을 입고 자라가며 결국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답 : ...둘째, 각 지체들은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각 지체들이 가진 이러한 은사들은 성도들의 유익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도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의 은사 나눔이 필수적입니다. 구원은 천국티켓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사함과 칭의와 영생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구원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아서 처음 예수님 믿는 것은 생명의 씨앗이 심겨진 것과 같고, 그 씨앗이 싹을 내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 전체가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의 자라남에 있어서 그리고 장성해가는 과정에 있어서 교회의 은사나눔이 필수적입니다.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교회의 은사나눔이 없으면 교회는 어린아이수준에 머물러 버립니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고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게 됩니다. 옆의 동역자의 은사는 나의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여기에 은사 없는 사람 없고, 그래서 우리 교회에 한 사람도 필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중하고 귀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을 교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나를 위해 쓰고자 하는 이기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교회가 잘 보여줍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물질적이고 일반은총적인 은사뿐만 아니라 신령한 은사까지도 자기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방언과 예언이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그것을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참 놀라운 것이 이기적이고 악한 마음을 품고서 예언할 때에 예언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기명예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언의 은사나 치유의 은사를 행사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떻게 평가하기 쉽냐 하면, 저 사람에게 주어진 그 신령한 은사는 성령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단 마귀가 준 것이라고 평가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 사단의 역사일수도 있지만, 성령의 은사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도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너희들이 잘못된 은사를 받았다 하지 않았습니다.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은사를 사용하는 너희들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께서 주신 모든 은사는 특히 신령한 은사들조차도 반드시 그 사람의 인격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격이 성숙하지 못할 때 얼마든지 그 은사를 잘못 사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은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자기 자랑을 위해서 그것을 마구 사용했고 그로인해서 교회가 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질서를 따라서 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은사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우열은 없지만 질서는 있습니다. 같은 성령이 주시는 은사지만, 교회에 더 큰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과 별로 유익을 끼칠 수 없는 것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계급적인 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각자의 분량대로 섬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작은 은사는 큰 은사에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의 은사는 통역의 은사의 제재를 받아야 합니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할 수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방언을 주셨는데 참을 수 있습니까? 참을 수 있습니다. 그 인격의 제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통역이 있을 때라도 예언이 있을 때는 통역도 방언도 다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예언이 있으면, 이전에 하던 예언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언을 가장 큰 은사로 말하는데, 그런데 예언보다도 더 큰 은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은사입니다.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모든 은사는 이 사랑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은사뿐만 아니라 나의 일반은총적이고 물질적인 은사까지도 사랑의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의 핵심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고 오직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시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 받을 수만 있다면 십자가에서 그 진노가 자신에게 쏟아 부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직 상대방이 유익을 얻어서 은혜의 복음위에 굳게 서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도록 세워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망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성령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성령의 은사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 육체를 주님께 쳐 복종시키고 성령을 따라 살 때에, 곧 성령충만하게 될 때에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올 한해 무슨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웠든지 다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꿈꾸고 계획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도 그것은 결국 다 없어질 것입니다. 오직 무엇만 영원히 남습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항상 있을 것인데”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죽지 않고 남아 있는다”는 말입니다. 곧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없어지고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무슨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어떤 학력과 지위를 가졌으며,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만 남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았던 그 믿음,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이 땅을 소망치 아니하며 살았던 여러분의 소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제를 사랑한 삶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영광입니다.


“(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과 은사는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해주시는 것인데, 그 중에서 우리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은 가장 놀라운 특권이요 선물입니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단언컨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랑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살아야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오늘을 사랑하며 살기로 결단하고 밤에 잘 때는 오늘 하루도 사랑하며 살지 못한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하며 잠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기적인 마음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에 힘써서 성령충만 받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사랑하기를 구하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요,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3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주(86문) - 신자가 선행을 행하는 이유 file 86문 최상범 2645
3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Ⅱ(85문) - 천국열쇠(2) file 85문 최상범 2293
3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1주(83문,84문) - 천국열쇠(1) file 83-84문 최상범 2622
3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0주(80문,81문,82문) - 성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file 80-82문 최상범 2536
3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9주(78문,79문) - 성찬론에 대하여(화체설,공재설,기념설,영적임재설) file 78-79문 최상범 2583
3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Ⅱ(76문) - 성찬의 의미(Ⅱ) file 76문 최상범 1952
3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75문,76문,77문) - 성찬의 의미 file 75-77문 최상범 2790
3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주(72문,73문,74문) 세례의 의미와 유아세례 file 72-74문 최상범 3107
2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주(69문,70문,71문) - 세례와 성화론 file 69-71문 최상범 5251
2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65문,66문,67문,68문) - 말씀과 성례 file 65-68문 최상범 2474
27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Ⅱ(64문) - 성화는 칭의의 열매 file 64문 최상범 2487
26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Ⅰ(62문,63문) - 성경적인 성화론 file 62-63문 최상범 2881
2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59문,60문61문) - 이신칭의 file 59-61문 최상범 2811
2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2주(57문,58문) - 부활과 영생 file 57-58문 최상범 2906
2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Ⅱ(56문) - 죄 사함 file 56문 최상범 3087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Ⅰ(54문,55문) -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통 file 54-55문 최상범 3328
2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0주(53문) - 성령 하나님 file 53문 최상범 3351
2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9주(50문,51문,52문) -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의 재림 file 50-52문 최상범 3642
1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8주(46문,47문,48문,49문) -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file 46-49문 최상범 3462
18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7주(45문) -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유익 file 45문 최상범 348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