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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64문
문답내용 64문 :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들을 선한 일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설날짜 2014-03-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4주Ⅱ(64문)

 

성화는 칭의의 열매

 

요절 : 롬 6:12-23

 

64문 :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들을 선한 일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성화는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우리는 지난주에 칭의와 성화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칭의의 비밀도, 성화의 신비도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칭의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그리스도와 연합했습니까?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3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와 연합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영원 전 삼위하나님의 구원 언약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실 때에 그리스도와 연합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연합한... 그들의 머리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을 객관적인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역사와 시간 속에서 한 성도 한 성도가 복음을 듣는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연합으로서 주관적인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는 주님 밖에 있다가 예수복음 듣고 주님을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다고 하는 원자론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적으로는 우리가 어느 순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으로 들어왔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우리는 사실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주관적인 연합을 통해서 신자는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생동적인 연합의 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관적으로 연합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자신의 몸인 교회에 생명을 부여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지배하고 다스리십니다. 성령의 지배는 기계적이지 않고, 우리의 인격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셔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겉으로 보면 협력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권면하시고 경고하실 때, 우리가 그것을 수납하고 순종하면 성화되지만, 우리가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한 신자라 할지라도 은혜생활을 게을리 하여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잘 처리하지 않으면, 죄가 왕성해지고, 삶이 부패해지고, 복음에서 떠나 자기 의를 주장하는 교만에 빠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부하고 불순종할 때조차도 우리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에서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성령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사 다시금 회심으로 인도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우리가 그 죄에서 벗어나서 다시 믿음을 회복하기 전까지,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자의 의식 속에서 인식되고 누려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단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으시지만, 우리의 의식의 영역에서 우리는 주님을 떠나 주님밖에 거하기도 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 안에 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신자의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신자는 결국 회심하여 주님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의 잠재의식에는 거룩한 생명의 원리가 심겨져 있어서, 비록 지금은 죄 가운데 거해도, 그 거룩한 생명의 원리가 끊임없이 신자의 의식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계속해서 신자를 그리스도께로 잡아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죄 가운데 살면서 결코 행복할 수 없고, 크나큰 내면의 번민과 아픔 속에서 고통 하다가 결국에는 성령님의 탄식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그러한 생명의 원리가 우리 의식의 영역에 강력하게 침투해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자신의 무지와 방종과 오류, 죄와 잘못된 인생의 방향을 후회하고 하나님께로 기꺼이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생의 방향을 180도 전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라고 하면서 돌이킨 것처럼 그렇게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 회심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의식의 영역에서는 늘 상승과 하강의 기복이 있고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질 때도 있지만, 또 자주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2. 의의 종

 

이러한 신자 안에 심겨진 생명의 원리, 거룩한 삶의 원리를 사도바울은 의의 종이 된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보면...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오직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죄인이라는 신분에서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신분만 변하는 게 아니라, 이제 그 마음의 성품도 의롭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의에게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종이 되면 어떤 결과가 있게 됩니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예수님 믿기 전에 어떻게 죄에 종노릇했는지 생각해보면 이것이 분명해집니다.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롬 6:19-20)

 

옛날에 우리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았습니까? 우리는 의에 대해서 완전히 자유로웠습니다. 의가 우리를 잡아 이끈다든지 또는 의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권리를 주정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살았습니다. 도리어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행하고 죄의 열매만을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죄의 종으로서의 모습은 특별히 중독이라는 모습으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무언가에 중독되곤 하는데,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죄의 노예됨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하는 사람이 “이제는 끊어야지. 이제는 절대로 안 해야지”하고 암만 마음을 굳게 먹어도, 유혹이 올 때 결국에는 다시금 마약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종 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기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내면이 근본 새롭게 변화되어서 곧바로 죄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또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1절을 보면...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21)

 

옛날에는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일향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듭난 신자는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고 혐오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처럼 사도바울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나의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막살아도 천국 간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살 수 없게 우리의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향 이러한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게으름과 안일로 말미암아 잠시 세상의 것들을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오히려 우리가 의의 종이라는 사실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마약중독자가 그렇게 마약을 끊겠다고 결심했어도 결국에는 마약의 유혹에 이끌려서 다시 마약을 하게 되는 것처럼, 동일하게 우리의 육체는 끊임없이 그렇게 의롭게 살기를 거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의가 우리를 계속해서 잡아 이끌어서 결국 의의 종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이미 의에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때때로 죄를 범해도 끊임없이 의로운 삶에 대한 부담감이 자신을 짓눌러서 마음속에서부터 “이거는 아닌데...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하는 마음이 자꾸 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이 커지면서 회심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거룩한 원리가 이미 중생과 함께 우리 안에 심겨져 있는 것이고, 예수님과의 연합의 교제에서 누리는 영생수의 희락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에 중독되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우리는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그러므로 신자가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거부할 수 없는,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생명적인 필연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주권적인 은혜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러한 열매를 우리가 만들어내었다고 말하지 않고, 열매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열매를 우리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영생은 오직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로서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고 은사입니다.

 

“(23)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3. 칭의는 성화로 확신한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칭의는 반드시 성화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칭의 없이는 성화도 없습니다. 즉 성화는 오직 칭의 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 중에서 성화가 잘 안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화가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다양한 이유로 성령을 소멸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성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화가 눈에 가시적으로 두드러지게 안 나타났을 뿐입니다. 감지가 안 되는 것이지 궁극적으로 성화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다 성화되는데, 어떤 사람은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성화가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감지가 안 될 정도로 미미한 성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가 미미한 신자는 불행하게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칭의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노골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성화이기 때문에, 성화가 감지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때 “내가 정말 거듭났구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과 감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주일예배 때 암만 은혜 많이 받아서 확신했어도, 밤에 개콘 보고 재밌게 웃고 나면 싹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꾸 헷갈리는 것입니다. 은혜 받을 때는 거듭난 것 같은데, 은혜가 없을 때는 자신이 구원 못 받은 것 같습니다.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도 어떤 설교 들으면 거듭난 것 같은데, 어떤 설교 들으면 거듭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꾸 왔다 갔다 합니다. 왜요? 성화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확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원리가 거짓선지자들을 판명할 때도 쓰이지만, 또한 우리 스스로의 구원의 여부를 점검할 때에도 쓰이는 원리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통해서 우리의 칭의를 확신합니다. 그래서 성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확신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로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내가 구원 받았나? 구원 못 받았나?” 하는 기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패스한 사람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면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거룩한 삶이 나타나고,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예수의 흔적, 곧 십자가의 ‘스티그마’를 날마다 삶에서 찍어주시니깐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신앙의 상담을 해보면 가장 많은 신앙의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에 성화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직 칭의가 안 되어서 성화가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칭의는 되었지만 성화가 미미하게 나타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를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 가운데 있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라지 뽑다가 알곡도 뽑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둘이 비슷하니까요. 문제는 참된 신자에게 성화가 잘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 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화 없이는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17)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18)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이 원리가 사실상 산상수훈의 해석의 열쇠이고 토대입니다. 이 말씀을 토대로 산상수훈을 해석하지 않으면 반드시 율법주의나 행위구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신자의 거룩한 삶을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의를 행치 아니하면 천국에 갈 수 없고, 형제를 미워만 해도 지옥 불에 떨어지며,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음행죄를 범한 손발을 잘라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여기서 주의 뜻은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모든 율법의 계명과 제자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에는 산상수훈의 결론으로서 건축비유가 나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구원받지만, 듣고도 행치 아니하는 자는 심판받는 것입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이 말씀가지고 결국 저주받을 행위구원론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성경은 행위구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나무와 열매의 원리로 이 산상수훈을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은 안하셨지만, 결국 행함에 대한 강조에는 그 행함을 가능케 하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전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가 막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성화는 감사의 열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십시오.

 

64문 : 그러나 이 교리는 사람들을 선한 일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답 :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알미니안이 우리를 비판할 때 주로 하는 말입니다. 알미니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제거하신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우리 대신 온전히 순종하여 이루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셨다는 교리는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대신 다 순종했다고 하는 교리가 신자의 거룩한 순종의 열망에 차가운 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너무나 감사해서 자원해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항상 행위를 언제 요구합니까?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도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주신 다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십계명도 그 서문에서 먼저 출애굽의 은혜를 상기시킨 후에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사도바울도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되셨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내어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고후 5:7).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복음을 데이터적인 지식으로 아는 자들은 듣고도 행치 아니하겠지만,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은혜를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암만 하라고 해도 안 합니다. 그냥 적당히 남의 눈치 보면서 욕먹지 않을 정도로만 합니다. 교회 봉사를 해도 인색하게 합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기 인정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사람은 항상 자원할 뿐만 아니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 합니다. 봉사를 해도 인색하게 하지 않고 생명을 다해서 합니다. 교회 청소를 해도, 주님의 몸을 닦는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청소합니다. 이것은 율법으로는 결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는 목사가 전도하라고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으로 돌리거나 사람들의 공명심을 자극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전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보니깐 이전의 삶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북한에 계속적으로 ‘삐라’를 살포하고 있는데, 그 일을 누가 주축이 되어서 하느냐 하면, 바로 탈북자들이 주축이 되어서 이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탈북해서 남한에 와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보니 그동안 김씨왕조에 속아서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자신과 같이 북한에서 비참하게 고통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그들에게 전도용지 보내는 것이 바로 대북삐라 살포인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입장에서는 사실 ‘삐라’가 가장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매일 방송에서 삐라를 살포하면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협박합니다. 그런데도 탈북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삐라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일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목숨 걸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단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탈북 하셨습니까? 탈북하고 나면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전도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전도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것이고 핍박해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사람은 암만 옆에서 하라고 해도 안 하고, 프로그램으로 돌리면 마지못해서 하고, 혹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기 인정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삶이 있습니까?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어찌하든지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려고 애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거룩한 순종과 거룩한 삶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억지로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참된 믿음으로 칭의의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제를 누리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사단마귀와 거짓선지자들은 바로 교회 가운데 이 칭의 교리를 흐려서 우리 마음에 감사를 사라지게 하는 데에 모든 총력을 기울입니다.

 

“(3)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4)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3-4)

 

여기서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는 부패는 다름 아닌 교리적인 부패를 의미합니다. 즉 사도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 행위구원론을 영접하는 것이 곧 교회의 부패요 타락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교리에 뿌리내려서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가 넘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자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 성화의 노력 속에서 느끼는 율법적인 죄책

 

그러면 실질적으로 칭의와 성화가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영위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받고 감화를 받아서 자원해서 순종하고자 합니다. 얼마만큼 순종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처럼 온전히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같이 자기도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순종하려고 하는데, 그때 신자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자신을 잡아당기는 육체의 강력한 방해를 직면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와 싸우면서 성령을 온전히 의지하고자 하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결국 죄의 방해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의 기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왜요?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내가 이전보다 더 나아졌구나...”가 아니라, 주님의 온전하신 뜻이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니깐, 이전보다 더 거룩해진 것은 사실인데, 하나님의 기준이 더 높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이전보다 더 비참한 죄인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되면 성화될수록 자신 안에 있는 죄의 깊이를 더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막 박수를 쳐주는데, 그 칭찬을 견딜 수 없어하고, 오히려 스스로 너무나 부끄럽고 죄인 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가장 깊은 회개를 하고, 가장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선명하게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은 신자의 마음에는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 강력한 욕구도 있지만, 그와 함께 죄의 법이 자기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또한 강력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육체의 방해로 인해 잠시 은혜가 사라졌을 때 느끼는 영적인 곤고와 갈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전기를 통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던 사람에게 전기를 하루만 끊어보십시오.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얼마 전에 SK Telecom에서 통신이 하루만 마비되었는데도 온 나라가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영생수를 맛본 사람은 그것이 잠시라도 끊어지면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곤고 속에서 사도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한 사도바울이 막 죄 가운데 살고, 적극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서 그렇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기를 잡아끄는 육체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탄식 속에서 더욱 구원을 부르짖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를 더욱 의지하게 되며, 그리하여 오히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히 이 육체를 벗고 몸이 구속 될 날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여전히 우리 안에 죄를 남겨두시고 우리로 실패를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이 세상을 소망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는 신자들, 곧 오랫동안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도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도, 그래서 순종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주일예배만 나와 줍니다. 그리고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기준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자신이 벌거벗었고 영적으로 핍절하고 비참한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절실하게 은혜가 필요한데도 그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평생 전기를 써 본적이 없는 아프리카 미개인한테 하루 전기 끊어봤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전기 없이 그동안 잘살아왔으니까요. 죄 가운데서 은혜 없이 살아온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니깐 은혜 없어도 살만한 것입니다. 그러니깐 기도안합니다. 기도 안하니깐 결과적으로 더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없으니깐 더 순종하고 애쓰는 삶이 없습니다. 계속 이것을 반복하면서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계속 그렇게 가면 그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 없는 타락의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자는 더 받아 풍성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사람이 더 은혜를 갈망하고, 기도의 맛을 아는 사람이 더 기도하게 되며,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 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11)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후자의 경우라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그 책망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그리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아서 참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더욱 주님과 더 온전히 연합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 거함으로 감사함이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자원하여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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