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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65-68문
문답내용 65문 :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례의 집행을 통해 성령님은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66문 :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 성례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신 거룩한 표와 인호입니다. 성례의 집행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며, 또한 그 약속에 대해 더 분명하게 확증해 주십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67문 : 그러면 말씀과 성례 이 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답 : 예, 참으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해 성령님은 다음 사실을 가르치시며, 또한 성례를 통해 그 사실을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 제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68문 : 그리스도께서 신약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 거룩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뿐입니다.
강설날짜 2014-03-3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5주(65-68문)

 

말씀과 성례

 

요절 : 롬 10:17

 

65문 :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례의 집행을 통해 성령님은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66문 :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 성례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신 거룩한 표와 인호입니다. 성례의 집행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며, 또한 그 약속에 대해 더 분명하게 확증해 주십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67문 : 그러면 말씀과 성례 이 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답 : 예, 참으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해 성령님은 다음 사실을 가르치시며, 또한 성례를 통해 그 사실을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 제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68문 : 그리스도께서 신약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 거룩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뿐입니다.

 

1. 믿음은 자기 결심이 아니라 자기 의가 깨진 전적의존감정

 

오늘은 은혜의 방도로서 말씀과 성례에 대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보통 은혜의 방도라고 하면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은혜의 방도로 말씀과 성례만 이야기하고, 기도는 감사의 규범 부분에서 다룹니다. 이것이 사실 소요리문답 하고 많이 다른 점인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기도를 감사의 규범에서 다루는 이유는 기도에 있는 감사의 측면을 보다 강조하고자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말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다루고 넘어갑니다. 한편 성례에 대해서는 소요리문답보다 훨씬 많은 문답을 할애하여 설명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방도로서 말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논쟁점의 핵심이 성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성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오늘 내용을 배워보겠습니다. 65문을 보십시오.

 

65문 :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례의 집행을 통해 성령님은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말씀과 성례가 은혜의 방도인데, 말씀과 성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를 주기 때문에 은혜의 방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으로부터 모든 구원의 은혜와 은덕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주의 깊게 읽어가다 보면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한다.”는 문구를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이 중요한 것인데, 바로 그 믿음이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생겨나고 강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다고, 성례에 참여한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께서 그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도로 사용하실 때에만, 그래서 그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령님이 친히 우리 마음 안에 은혜를 주실 때에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고 이미 있는 믿음은 더 굳세지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부터 믿음이 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애쓰면 믿음 생기고 우리가 쥐어짜면 믿음이 생기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결심하고 결단하는 것이 믿음 아닙니까?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알미니안과 개혁신학이 딱 갈라집니다.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냐 아니면 나의 의지적 결단이냐 하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도대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혼란스러워합니다. 많은 경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자기 결단과 자기 결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결단하고 결심해서 신실하게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그것이 잘 되던가요? 만일 그렇게 해서 잘 되면 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되면 정말 예수 믿기 힘든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펠라기우스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자기 힘으로 잘 믿은 사람입니다. 펠라기우스는 테레사 수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천사처럼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깐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납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선하게 살 수 있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붙잡고 살아갈 수 있는데, 왜 은혜를 이야기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편 펠라기우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교부인 어거스틴은 은혜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자주 펠라기우스와 논쟁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와는 다르게 아주 개망나니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룩하게 살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직 은혜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아무리 전적타락교리와 오직 은혜의 교리를 외쳐도 펠라기우스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의지와 결단이 대단한 사람은 오히려 복음을 대단히 믿기 힘든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신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고 전적으로 무능하며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신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전에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바로 우리의 자신감부터 거둬 가시는 것입니다. 자신감이란 나를 믿는 것이죠. 내가 믿을만한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쓸 만한 존재이고 나도 상당히 괜찮은 존재이며 나 자신이 ‘something’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거둬 가시는 것인데, 이 과정이 뼈를 깎는 것처럼 아픕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의 심리학과 상담학은 반성경적임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세상의 심리학과 상담학은 인간사회에서의 모든 문제, 곧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어려움은 모두 건강하지 못한 인격에서 나온다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 건강하지 못한 인격이란 부정적인 자아개념, 또는 자존감의 결여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심리학과 상담학의 목표는 자존감의 회복에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심리학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그 수업을 듣고 저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심리학 수업을 통해 비로소 제 자신을 정직하게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존감이 매우 낮고 건강하지 못한 인격을 소유한 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 성격이 매우 의기소침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건강하지 못한 인격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을 원망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한동안 슬픔 가운데 살았습니다. 기도를 해도 이 자존감과 자신감을 회복해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성경과 정반대로 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자존감의 회복이 목표가 아니라 자신감의 파괴가 목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뭐라고 합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기자도 아래와 같이 고백합니다.

 

“(14)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15)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6)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4-16)

 

흙은 ‘아파르’라는 단어인데 일반적인 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때로 티끌, 먼지, 쓰레기라는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본질이 그러한 부정적인 의미의 먼지이며 티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가 먼지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살아갑니까? 아닙니다. 다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자기는 먼지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 사람은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는 바로 이것부터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신감들을 하나씩 거두어 가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자신감을 빼앗으신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의가 깨트려진 자만이 값없이 주시는 칭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영적인 거지로서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고, 하나님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전적의존감정이 바로 믿음이고, 이 믿음을 소유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감정, 이 생각, 이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은덕을 공급받아 우리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의지나 결단력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자신의 의지와 결단력이라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내 의지와 결단으로 살게 된다면 우리는 성화되기는커녕 도리어 우리의 삶 속에 정죄와 절망만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펠라기우스 같이 탁월한 결단력과 실천력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반대로 결단력과 실천력이 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면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짓고 실패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기대를 해야 실망을 하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먼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은혜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뭔가를 해내기를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자신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먼지라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의 생명임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실망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틀린 생각이고, 사실 하나님이 실망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망한 것입니다. 왜요? 스스로 절망에 빠졌다는 말은 자기는 자기한테 뭔가를 기대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먼지라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기 자신이 먼지임을 알고 주님만을 나의 생명으로 삼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사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먼지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만 온전히 의지하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말씀과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시는 성령님의 수단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를 밖에서부터 불어넣으셔서 아담으로 살게 하신 것처럼, 믿음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호흡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6)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그러면 성령님은 그러한 믿음을 무엇을 수단으로 해서 우리 안에 창조하십니까?

 

답 :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성례의 집행을 통해 성령님은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성령께서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믿음을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통상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때때로 어떤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믿게 하실 때에 아무런 방편이나 수단 없이 하실 때가 예외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 그리고 통상적으로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단순히 ‘말씀’이라고 하지 않고, ‘거룩한 복음의 선포’가 은혜의 방도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성경말씀만이 믿음을 일으키는 은혜의 방도인데, 그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은혜를 목회자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목회자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그 설교를 듣는 자의 마음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거룩한 복음의 강설이 성령님이 사용하시는 수단이지, 믿음을 가져다주는 자판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 가져보겠다고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믿어야지..”하고 집중해서 듣고, 설교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이 그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사용하셔야지만, 그래서 성령님이 은혜를 주셔야지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깁니다.

 

“(4)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5)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4-5)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위의 구절에서 보는 것처럼 복음을 깨닫고 믿는 것은 오직 그 강설 가운데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셔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즉 “믿음은 교육으로 나며”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나서 “너희는 말씀을 사모하고 나한테 교육받았으니 너희들 다 구원받았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말씀을 귀로 듣는 것이 듣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씨 뿌린 자의 비유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만, 결국 성령께서 들을 귀를 주신 자만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시지 않으면 암만 말씀을 많이 배우고 성경지식을 쌓아도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님이 사용하시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설교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설교가 듣기 싫은 호통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 목사의 설교가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그 날은 내 영혼을 송두리째 밑바닥부터 쥐고 흔들고 나를 완전히 발칵 뒤집어 놓는 권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말씀만 듣고 있을 것이 아니라, 들을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가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은혜 가운데 바르게 서 나가기 위해서는, 말씀도 회복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도모임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역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것은 곧 복음의 사역을 사람의 말과 지혜와 교육으로 해나가겠다는 것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려고 했지, 말씀에만 전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말씀을 잘 연구하고 선포할 수 있도록, 그리고 듣는 모든 성도들에게 들을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설교시간 졸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려서 성령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생길뿐만 아니라, 또한 믿는 자 안에서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즉 들을 귀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니 우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성령의 은혜주심을 바라면서 (기도하면서)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것이 신비인데,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놀랍도록 완벽하게 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목회자의 설교를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아멘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습니다. 결국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람들이 자기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만 아멘 하는 경우입니다. 설교가 재미있고 감동이 되면 듣고 재미없고 감동이 없으면 안 듣습니다. 그것이 다 설교를 사람의 강연정도로 생각하고 듣는 것입니다. 또 목회자의 허물을 생각하면서 “너나 잘하세요...” 라는 생각으로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설교자는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도 결국은 은혜로 구원받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허물과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못하는 것을 성도들에게 ‘하라’고 설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도들은 목회자의 허물 때문에 말씀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럴지라도 그 말씀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다” 생각하고 아멘으로 수납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를 평가하는 자세로 듣는 것도 그 설교를 사람의 말로 듣고 있다는 것의 반증입니다. 특히 설교를 판단할 때 설교의 스타일을 문제 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 메스를 갖다 대자, 환자가 의사의 옷이 맘에 안 든다고 하면서 수술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을 듣기 싫어서 안 듣는 것을 목회자의 설교 스타일을 빌미삼아 핑계 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회자가 어떤 스타일로 설교하든,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스타일로 설교하더라도 그 내용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말씀에 대한 소원을 충만히 허락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역사를 위해 온 성도가 한 마음이 되어 합심하여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거룩한 복음의 강설이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 성례

 

그러면 이어서 성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거룩한 복음의 강설은 불신자와 신자를 모두 아우르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불신자들도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신자들도 그 말씀을 통해서 그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반면에 성례는 불신자들에게 아무런 은혜를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례와 성찬예식에는 신자들만 참여합니다. 왜냐하면 성례는 오직 이미 있는 믿음을 굳세게 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66문 : 성례란 무엇입니까?
답 : 성례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신 거룩한 표와 인호입니다. 성례의 집행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의 약속을 더 분명하게 깨닫게 하시며, 또한 그 약속에 대해 더 분명하게 확증해 주십니다. 그 약속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67문 : 그러면 말씀과 성례 이 둘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까?
답 : 예, 참으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통해 성령님은 다음 사실을 가르치시며, 또한 성례를 통해 그 사실을 확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의 모든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 제사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요약됩니다. 세례와 성찬도 결국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그 동일한 복음을 강설로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게 성례로 나타내심은 우리로 더욱 분명히 깨닫고 확신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66문에서 성례는 표와 인이라고 했습니다. 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사실을 눈에 보이게끔 표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깨달아 알게 됩니다. 또한 성례는 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어떤 중요한 계약을 할 때는 구두로만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종이에 도장을 찍어 분명한 증표를 삼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든든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례를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도장 찍어 확증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례를 통해 신자는 복음의 사실을 더욱 분명히 깨닫고 확신하게 되어 그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해오시면서 언약관계 안에서 항상 제정하여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이 성례가 있었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성례는 바로 ‘생명나무’입니다.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인쳐 주는 나무가 바로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 열매 자체에 영생을 얻게 하는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의 상징일 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었고,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기만 하면 영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생명나무는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눈에 보이게 표시하고 상징하며, 또한 영생을 확실하게 주실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약인 노아언약에서의 성례는 무지개입니다.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대한 성례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무지개에 홍수를 막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성례의 특징은 믿음을 견고케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례는 언약 체결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이미 구원받은 언약당사자만을 대상으로 주신 것입니다. 무지개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가 아닐 경우에는 그냥 무지개입니다. 전혀 신비하지 않습니다. 무지개를 봐도 아무런 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무지개를 보면서도 전혀 믿지 못해서 바벨탑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바벨탑은 앞으로 어떠한 재난이 와도 우리 스스로 잘 극복해서 걱정 근심 없는 유토피아를 우리끼리 잘 만들어보자는 의도로 만든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무지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무엇을 떠올리느냐하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언약을 기억하면서 그의 믿음이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에서 하나님은 할례라는 성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가나안 땅과 허다한 민족, 그리고 열왕인데, 이 모든 약속들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로 이 약속을 표하고 인치는 성례로 할례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바로 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아 알게 되고,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 성례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셔서 그들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도록 하시겠다는 것인데, 그 약속을 눈에 보이도록 표하고 또 확신하도록 인치는 성례를 그들에게 셀 수도 없이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성례 중에서 대표격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할례와 유월절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을 표하고 인치는 것이고, 유월절 의식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양의 피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짐을 표하고 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언약에서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옛언약의 할례를 대체한 것이고, 성찬은 옛언약의 유월절을 대체한 의식인데, 그 의미는 사실 옛언약의 것과 동일합니다. 결국 성례의 핵심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로 더욱 분명히 깨달아 알도록 눈에 보이게끔 나타내시고 또 우리로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도장을 찍으시는 하나님의 확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항상 자신의 약속을 말씀만으로 안 하시고 성례로 눈에 보이게 나타내십니까? 보통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말하는데, 사실 꼭 연약함의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연약하지 않은 첫 사람 아담에게도 성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은 영혼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도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만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세계도 있습니다. 사람은 상상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 일뿐 아니라 보고 만지고 맛보는 감각에 의존하는 존재로 처음부터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감각과 물리적인 것들을 터부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타락이후로는 더욱 더 이 성례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하게 되었고, 불신이 만연하면서 눈에 보이는 보증이 없으면 잘 안 믿으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직 말씀만 강조하고 성례를 터부시하게 되면 그것은 크나큰 잘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성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성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은혜의 방도가 됩니다. 이어서 68문을 보십시오.

 

68문 : 그리스도께서 신약에서 제정하신 성례는 몇 가지입니까?
답 : 거룩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뿐입니다.

 

이 68문은 로마가톨릭의 성례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로마가톨릭은 7성례를 주장합니다.

 

세례성사, 영성체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서품성사, 혼례성사, 종부성사

 

즉 로마가톨릭은 성경에서 명한 세례와 성찬을 제외하고 5가지를 더 추가했는데, 이것은 전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와 성찬도 그릇되게 행합니다. 그러므로 로마가톨릭의 7성례는 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톨릭이 이 7성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이 부정되면 사제주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의 생명은 사제주의에 있습니다. 천국가고 지옥가고 하는 것을 누가 결정하게 만들어놓았느냐 하면, 신부가 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종부성사하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대죄는 고해성사를 해야 연옥에서의 형량을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받으면 최소한 지옥은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이 신부님께 목을 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효과를 위해서 7성례를 주장합니다. 모두 자신들의 사제주의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성례론을 경계하면서 참되고 바른 성례론을 정립해야 합니다. 다음 주부터 이 점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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