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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2조
문답내용 제 2 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방법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압니다. 첫째는 우주의 창조와 보존(preservation)과 통치(government)에 의한 것인데, 이 우주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가장 아름다운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은 아주 많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롬 1:20)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명상하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여 사람들이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적인 말씀을 통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그의 영광과 구원에 대하여 보다 더 분명하고도 충분하게(dearly and fully) 자기 자신을 알리십니다.

제 3 조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서) 말한 바대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특별한 돌보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맡기셨으며, 그는 친히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록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강설날짜 2015-01-18

벨기에 신앙고백서 강설 제2,3조


특별계시와 성경


오늘부터 성경론에 대한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성경론을 설명하는데 무려 6개 조항을 할애합니다. 그만큼 그 당시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한 신앙고백이 중요했고, 또 이 부분이야말로 로마가톨릭과의 최대 논쟁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톨릭은 로마교황이 성경보다 큰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했고, 그로인해서 성경진리가 사라지고 온갖 그릇된 성경해석과 오류들이 난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으로 회복되기 위한 종교개혁은 바로 성경론을 개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귀도 더브레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믿고 고백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 2 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방법


우리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하나님을 압니다. 첫째는 우주의 창조와 보존(preservation)과 통치(government)에 의한 것인데, 이 우주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가장 아름다운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은 아주 많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롬 1:20)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명상하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여 사람들이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적인 말씀을 통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그의 영광과 구원에 대하여 보다 더 분명하고도 충분하게(dearly and fully) 자기 자신을 알리십니다.


먼저 더브레는 제1조에서 유일하신 하나님, 단순하시고 영이시며 영원불변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무한하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더브레는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더브레는 이러한 사실을 결코 철학적으로 사색하여 알았거나, 또는 추측한 것이거나 또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바람을 따라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어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셔야 합니다. 사람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 사람이 마음을 열고 나에게 진심을 보여주어야 우리가 저 사람을 알 수 있지 자신을 꼭꼭 숨겨놓고 말 안하고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의 진심을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숨기신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길이 전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그럴 마음이셨다면 아예 이 세상을 창조하시지도 않으셨겠죠. 왜냐하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자신을 사람의 눈에 보이게끔 계시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써 교제와 나눔을 갖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을 아는 첫 번째 방법으로서 온 우주의 창조와 보존, 통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창조된 그 상태만 봐도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주의 광대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의 거대함과 삼라만상의 아름다움, 수많은 생명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이 신비는 너무나 신묘막측해서 도무지 사람의 언어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 창조된 세계를 말씀으로 붙드심으로 보존하시고 또 친히 통치하심으로써 모든 만물이 일정한 질서를 따라 운행되도록 하셨는데, 사람이 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과 영광이 어떠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이 우주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가장 아름다운 책과 같고 그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피조물들은 아주 많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을 통하여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롬 1:20)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이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가 명상하도록 인도함을 받습니다.”


피조세계 하나하나가 글자와 같고, 모든 만물들이 하나의 거대한 책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적타락한 사람들도 자연만물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또 인류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거룩한 신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의 거대함과 변화무쌍함을 보고 어떤 신성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게 되죠. “저 바다 속에 뭐가 있는 것 같다. 용왕님이 계신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다에는 그렇지만, 산속에 사는 사람은 또 산속에서 그 신비함을 느낍니다.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자욱 끼었다가 또 순간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계절을 따라 만물이 소생했다가 또 사그라지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사람들이 어떤 신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신령이 있다고 생각하고, 산의 정기를 받아 우리가 생활하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또 태양의 강력한 힘과 에너지 앞에서 신성을 느끼고, 달과 별의 운행의 신비함을 보면서 신성을 느껴서 해달별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백 년 된 나무에서 어떤 신성을 느끼고 그 나무를 숭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엮이면서 거대하고 웅장한 자연 그 자체가 신이라는 생각도 가집니다. 이러한 신성에 대한 인식은 자연만물뿐만 아니라, 특별히 사람 자체만 보았을 때 더욱 뚜렷하게 갖게 되는 인식입니다. 사람의 존재 자체를 깊이 생각할 때,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인 도덕성이나 살면서 경험하는 신비한 영적 체험들, 이 세상을 살면서 경험되는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역사...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고민들을 하면서 사람들은 모든 인생들의 생사화복과 그 운명을 주장하며 마지막 때에 심판하셔서 자신의 공의를 실현하실 절대자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기를 직접적으로 계시하지 않으셨다 할지라도, 이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고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에 충분하여 사람들이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확실히 알았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섬겨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안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부패한 본성이 그 진리를 억누르고 조작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9)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18-23)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분명한 진리를 억누르고 또 왜곡하여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형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의와 교만이 극대화되면 이제는 위대하고 거대한 자연을 보고도 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유물론자들, 진화론자들은 다 교만중의 교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진화론자들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창조세계를 통해서 자신의 신성과 능력과 성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여주셨을지라도, 그것은 신의 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 정도까지만 효과를 줄 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에 궁극적으로 이르게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말씀의 안내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셔서 자기를 계시하여주셨습니다. 이것이 특별계시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아담에게 일반계시, 특별계시 두 가지로 자기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는 이러한 일반계시의 한계 때문에 더욱 특별계시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둘째는 그분의 거룩하고 신적인 말씀을 통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그의 영광과 구원에 대하여 보다 더 분명하고도 충분하게(dearly and fully) 자기 자신을 알리십니다.”


우선 특별계시는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내용이고, 둘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둘은 따로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에 달려있고, 또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우리의 구원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또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무한하신 분을 우리 유한한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고, 또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비밀의 경륜 전체를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자신의 영광과 구원에 관한 계시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구원의 길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모세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특별계시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다 소지하고 읽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택하셔서 거듭나게 하신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넬리우스 반틸은 특별계시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빛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새로운 빛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력까지 포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셔야 하고, 또 자신이 택하신 자를 중생시켜주셔서 그 계시를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해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해서 감사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신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하며, 그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만 보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과 능력과 성품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은 열심히 배우고 연구하는데, 이 세상만물을 보면서는 아무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좀 이상한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물론 특별계시가 가장 중요하지만, 일반계시도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시편 19편이 잘 보여줍니다.


“(1)(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4)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다윗은 바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과 능력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보고 연구하고 배우면서 하나님을 깨닫고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과학자가 되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를 망치는 것입니다. 왜 자녀들을 과학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까? 자연만물을 연구함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을 깨닫고 그분께 경배 드리기 위해서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강조하면서 그 이유로 “공부 잘해야 취직도 하고 먹고 살 수 있어...”라고 말한다면...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게으른 자들은 굶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질서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아이들한테 경각심을 심어주어서 그들로 게으르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첫 번째 이유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학생들이 왜 공부해야 합니까? 공부하는 시간은 일반계시를 받는 시간입니다.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교회에서는 성경책을 통해서 배우고 예배하고, 학교에서는 일반계시라는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 선생님이 하나님 얘기 하나도 안 해도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공부는 예배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공부하는 첫 번째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모든 학교와 가정과 직장의 모든 삶의 현장은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영역이 아니라, 일반계시와 접촉하는 현장으로서 우리는 이 세상과 인간사회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거기서 하나님을 배우며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일상에서도 배우고 예배하는 삶은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먼저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으로 가르침을 잘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7절 이하부터 특별계시인 성경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11)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 19:7-11)


율법을 읽으면서 그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과 쾌락을 주었는지, 다윗은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말씀을 사랑합니까?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사랑하고 읽고 배운 자만이,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찬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제 3 조  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서) 말한 바대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특별한 돌보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맡기셨으며, 그는 친히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록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제3조는 특별계시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특별계시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실 때는 4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거나 또는 천사나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거나 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또 구원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의 섭리의 통치에 의한 여러 가지 일들이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비뽑기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도 하시고, 또 요셉의 경우와 같이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발견하도록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종들을 사용하셔서 성령으로 감동하게 하사 예언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네 가지는 각기 따로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성 속에서 하나의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네 번째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의 예언사역은 앞의 세 가지 특별계시를 기본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특별계시의 최종적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별계시와 관련해서 네 번째 것에 모든 관심을 기울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서) 말한 바대로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후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여기서 ‘감동하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어로 ‘페로’라는 단어인데, “몰다, 인도하다, 이끌다, 지도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수동태니까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아” 또는 “성령님의 지도하에”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즉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님에 의해 이끌림을 받고 지도를 받아서 성령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 바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신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과정이 기계적이거나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기계적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사도에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라” 또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전해라”라고 그들이 할 말을 모두 일러줌으로써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저 그것을 받아 적거나 또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역할만 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일러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비인격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선지자와 사도의 인격이 완전히 무시되고 무당이 접신하듯이 신내림 하여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그들의 입을 사용하여 직접 말씀하신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어떻게 임했습니까? 매우 인격적이고 유기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유기적 영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인격과 교감하시면서, 그들의 지식, 묵상, 재능, 경험, 말투, 억양, 습관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다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어떠한 인간적인 생각들이나 오류가 그 말에 섞이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점무오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선지자와 사도들로 하여금 말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당대 사람들과 후대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특별한 돌보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맡기셨으며, 그는 친히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특별계시를 후대를 위해 글로 남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이 특별계시를 주시면서 또한 그것을 기록 하도록 자주 명하신 것입니다.


“(2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출 34:27)
“(19)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19)


이것이 특별계시가 시작된 이래로 늘 그런 것입니다. 물론 특별계시가 아담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특별계시를 주신 후에 그 말씀을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얼마든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담부부가 창조와 선악과 금령 언약, 그리고 자신들의 범죄와 여자의 후손 언약을 부지런히 자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전하고 가르쳤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가 ‘구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글자가 없었을 때는 구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후대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전이든 글의 기록이든 특별계시의 전승이 없으면 하나님은 매번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계시하실 때 이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시대건 특별계시를 주신 후에는 그 특별계시가 구전이든 글의 기록된 형태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후대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하셔서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구속사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축적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글자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구전전승으로만 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도 바로 그런 식으로 후대에게 전수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 당대쯤 이르러서야 글자라는 것이 있게 되어서 글로 기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학술에 능한 모세에게 비로소 특별계시를 기록하라고 명하신 것이고, 모세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이미 있었던 ‘구전’과 몇몇 글로 기록된 문서들을 참조하여 성령의 영감 가운데 창세기를 기록함으로써 성경기록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글의 기록이 시작된 이상 이제 구전전승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전전승은 전승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대단히 많기 때문에 지양해야할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하나님은 언제나 특별계시를 주시면서 그것을 글로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전까지 신구약의 모든 교회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두 가지 형태, 곧 전대로부터 전승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서 지금 새롭게 임하는 특별계시가 늘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마지막으로 모든 직접적인 특별계시와 예언사역이 종결되고, 이제는 오직 이 기록된 성경만이 모든 신자들에게 유일한 신앙의 규칙이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합니다. 오늘날에 하나님은 성경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신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경험했던 놀라운 특별계시의 체험처럼, 현현을 통한 직접 계시나 꿈이나 환상이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를 통해서 더 이상 계시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을 들으면, 굉장히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도 좀 선지자들과 사도들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특별한 돌보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 곧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셔서 당신의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맡기셨으며,...”


오늘날 성경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의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성경기록과 직접적인 특별계시가 공존하는 상황은 언제나 한 가지 심각한 보안 취약점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의 역사입니다. 즉 사단 마귀가 거짓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고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여, 자신의 종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과 꿈과 환상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거짓된 복음을 선포하도록 했을 때, 교회는 거기에 미혹될 위험성이 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성경기록이 시작된 모세 당시에도 벌써 있었습니다.


“(20)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21)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22)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0-22)


성경기록과 특별계시가 공존했던 신구약의 교회는 늘 이런 어려움 앞에서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하는 거짓 교사들 때문에 자신의 사도권을 변명하고 참된 복음을 변증하느라 한참 애를 먹었습니다. 이런 보안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특별계시와 성경이 공존하는 상황을 언젠가는 끝내시고 오직 성경으로만 말씀하실 것을 처음부터 목적하셨던 것입니다. 특별계시를 글로 기록하게 하신 것 자체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별계시를 글로 기록하게 하신 데에는 이처럼 놀라운 뜻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첫 기록을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모세가 모세오경을 기록하기 전에 최초의 성경기록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두 돌 판에 쓰신 십계명입니다. 이것은 마치 건물을 짓기 전에 준공식하면서 그 건물의 주인이 먼저 벽돌하나 옮기는 상징적인 의식을 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는 친히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록들을 거룩하고 신성한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계시가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충분히 그리고 분명히 축적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 모든 특별계시를 종결하시고 오늘날에는 성경으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든든한 보장과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느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어도, 천국에 갔다 와서 예수님 말씀을 집접 듣고 왔다고 지껄여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그냥 그들을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붙들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특히 이러한 특별계시가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여전히 특별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그런 무리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려는 모든 경향들을 우리는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목숨 걸고 성경만이 유일하고 일점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이 사실을 고백하는데, 일주일 내내 성경 한 구절 안 읽고 살다가 주일날 되면 비로소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성경을 후~ 하고 털어서 교회에 나온다면, 그 사람은 사실 성경이 일점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다윗처럼 성경을 사랑하고, 열심히 읽고 배우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자라갈 수 있고, 또 이 땅에서의 구원의 길을 완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성경에 대한 고백에 대하여 입으로는 시인하나 삶으로는 부정하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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