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방문자 : 
    1,074
  • 어제방문자 : 
    1,129
  • 전체방문자 : 
    1,194,824
조회 수 763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최상범
제25조
문답내용 제 25 조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Christ, the Fulfillment of the Law

우리는 율법의 의식들(ceremonies)과 상징들(symbols)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끝났고, 그 모든 그림자들이 성취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폐지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의 진리와 본질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생활을 규정해(regulate)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취해진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합니다.
강설날짜 2015-06-21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5조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제 25 조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Christ, the Fulfillment of the Law


우리는 율법의 의식들(ceremonies)과 상징들(symbols)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끝났고, 그 모든 그림자들이 성취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폐지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의 진리와 본질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생활을 규정해(regulate)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취해진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합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이신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제까지 배운 내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결국 우리는 오직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되고 성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만으로 충분하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배울 26조도 결국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배울 25조는 이러한 흐름을 벗어나서 갑자기 율법을 언급합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구원론을 다루는 이 시점에서 율법을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적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른 구원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바른 율법관을 정립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더브레 당시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로마가톨릭의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로 거의 반율법주의적 나아가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브레는 신약의 성도들에게 여전히 율법이 의미 있다는 것을 변론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동시에 또한 로마가톨릭을 향해서 자신들이 결코 율법을 무시하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변론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 같고,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는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율법관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율법에 관한 내용을 구원론 중간에 첨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의식들(ceremonies)과 상징들(symbols)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끝났고, 그 모든 그림자들이 성취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폐지되어야 함을 믿습니다.


더브레는 먼저 율법의 의식들과 상징들이 폐지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결코 더브레는 율법의 모든 것이 다 폐지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습니까? 그 다음 문장을 보시면...


그렇지만, 율법의 진리와 본질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즉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은 폐지되었고, 율법의 본질과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우선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이라고 표현된 부분은 율법의 의식법을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냥 ‘율법’이라고 하면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입니다. 의식법은 성막식양이나, 제사제도, 제사장 제도, 정결예법, 음식법, 절기, 할례와 같은 의식을 위한 규례들을 말하고, 시민법은 신정국가인 이스라엘 가운데 지켜져야 하는 여러 가지 민사법과 재판법을 말하고, 도덕법은 십계명처럼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례들을 말합니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성경신학자들은 이러한 구분을 반대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러한 믿음의 선배들의 이해가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서를 보면...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히 8:13)

“(9)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10)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9-10)

“(8)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9)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8-9)


여기서는 분명히 율법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폐하여졌고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율법 전체가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여기서의 율법은 문맥을 보면 성막식양이나, 제사제도와 제사장 제도, 정결예법,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의식법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손가락질하여 가리키는 모형이요 그림자이기 때문에 실체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다 성취하신 이상 이제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에는 항상 율법 전체라는 의미로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처럼 율법의 의식법에 초점을 맞추어서 율법을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고, 또 조금 있다가 다른 본문들도 살펴보겠지만, 도덕법에 초점을 맞추어서 율법을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는 말 그대로 율법 전체를 염두에 두고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가 있고, 또 때로는 율법의 어떤 기능들을 염두에 두면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가 있고, 또 때로는 그냥 단순하게 구약성경을 의미하는 뜻으로 율법을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율법’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드시 그 문맥을 잘 살펴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율법을 의식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으로 명시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암묵적으로 이러한 구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벨기에 신앙고백서로 돌아와서... 율법의 의식과 상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끝이 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그 율법을 사용하는 것이 폐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신 시각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제사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유대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합니까? 제사를 그만두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찢으신 휘장을 다시 꿰매서 달아놓고, 다시 짐승의 피를 들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는 그러한 제사행위가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였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후부터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아니라 신성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한 30년 가까이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아예 성전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제사제도를 다 폐하신 것입니다. 제사제도만 폐하신 것이 아니라 할례나 음식법, 정결예법, 절기 같은 모든 의식들을 다 폐하셨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성취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붙잡으면서 예수도 믿고 그러한 의식도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그렇게 저주를 내리면서 정죄한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때때로 할례를 행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몇몇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 의식법의 의미를 가지고서 한 것은 아닙니다. 의식법은 예수님께서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행해져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면 의식법이 다 폐하여졌으니 그 의식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의식법이 나오는 성경구절들을 구약에서 찢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주일예배 때 배우고 있는 성막의 식양에 대한 출애굽기 말씀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오늘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내용대로 말하면, 의식법의 문자는 폐하여졌지만, 그 의식법이 가르쳐주는 본질과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가 없으면 우리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백성들에게 그 의식법들은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법을 자세히 배움을 통해서 십자가 복음을 더 풍성히 깨닫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의식법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배웁니다. 구약의 수많은 의식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배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의식법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배웁니다. 다시 말해 의식법에 도덕법의 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제사제도와 성막식양, 제사장 제도, 정결규례, 할례 등의 모든 의식들은 단지 십자가 복음만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복음을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어떻게 헌신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또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율법의 본질과 진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의미로서 의식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생활을 규정해(regulate)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취해진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합니다.


그러면 의식법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시민법과 도덕법도 그리스도께서 다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이 우리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구약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듯이 그렇게 지켜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율법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취된 율법의 적용이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이 각기 다른 것입니다. 우선 의식법의 성취된 의미는 그 의식이 폐지되고 그것이 상징하는 본질과 진리만 우리에게 유효한 것입니다. 시민법도 신정국가라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상황을 전제하기 때문에 의식법과 마찬가지로 본질과 진리만 유효하고 문자는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덕법 역시 문자는 의미 없고 그 본질과 진리만이 유효한데, 그 본질과 진리라고 하는 것이 의식법이나 시민법처럼 문자의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된 계명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율법은 선지자와 함께 언급되기 때문에 모세오경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구약성경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즉 의식법 뿐만 아니라 도덕법과 시민법도 다 친히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취하셨습니까? 그 모든 계명의 말씀을 우리를 위하여 다 지켜 행하심으로써 그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입니다(롬 10:4).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19절을 보시면...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앞에서는 율법과 선지자가 언급되었는데, 여기서는 갑자기 ‘계명’이 언급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셔서 구약성경전체를 말씀하셨을지라도 그분의 주된 관심이 지금 구약성경전체가 가르쳐주는바 율법의 교훈, 특별히 도덕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산상수훈 전체문맥을 통해서 쉽게 확인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신약의 성도들이 도덕법의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고 다 지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덕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명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도덕법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인 예를 드시면서 도덕법을 완성하여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계명을 “미운마음도 품지 말라”는 계명으로 완전케 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음욕도 품지 말라는 계명으로 완전케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온전한 순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바로 이 성취된 율법을 준수할 의무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율법 준수하는 것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병든 우리를 고쳐 온전한 율법을 지키도록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법이든 시민법이든 도덕법이든 전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증하는데 사용되며, 전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랑 안에 율법이 다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율법 준수의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안 되고 사랑을 행할 의무가 있는 줄 알고, 힘써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매순간 우리에게 명해진 이 사랑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소원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것을 우리의 마땅한 의무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순종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그런 소원 없이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이런 오류에 빠지기 대단히 쉬운데,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자주 자신의 서신에서 우리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래의 구절들과 같은 것이죠(각 구절에 대한 해설은 한글파일 참조).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6:7)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14-15)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 2:13-14)


이런 구절들을 잘못 오해하면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인 오해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문맥에서 해석해야 하고, 또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봐야 합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해방이란 율법의 정죄의 기능에서의 해방이지 율법준수의 의무에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20)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1)


어떻게 보면 이 구절이야말로 바울의 율법관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에 20절에서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은 “율법에서 명하는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쏟아 붓는...” 그런 율법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편 21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한 것은 이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율법을 순종하는 새로운 차원의 율법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0절의 옛 언약의 율법이나 21절의 그리스도의 율법이나 계명의 내용상에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는 점에서)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한 의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순종여부에 따라 상벌이 주어지느냐 아니냐 하는 점과 어떤 마음으로 순종하느냐 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옛언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형벌이 있기 때문에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천국가기 위해서 율법을 순종합니다. 즉 마음은 전혀 아닌데 억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으로 말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이 치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마음 밖에서 돌판이 형벌의 위협을 가하면서 억지로 이끄는 것이 바로 옛 언약의 율법 아래서의 순종입니다. 로마가톨릭이 바로 이런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그런 노예의 자세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서는 형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징계는 있을지언정 결코 정죄는 없습니다. 그러면 형벌이 없으니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의 은혜가 감사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해서 자원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내가 남편을 심히 사랑하여 그 남편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법과 의무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요 즐거움이 됩니다. 이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새 언약의 핵심입니다. 예레미야에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율법을 새기셨다는 말이 바로 이 사랑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잘못된 율법관을 배격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신약의 성도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생각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참된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율법 준수가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준수할 때 또 조심해야 할 것은 옛 언약의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순종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배격해야 할 잘못된 율법관입니다. 사랑하는 마음 없이 순종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기 사랑이라는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고, 또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의 의지와 선택과 결단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갈 5:16-18)


여기 보는 것처럼 우리가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할 때에만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만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옛 언약의 율법 아래 있는 것처럼 율법을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회개하면서 성령을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달라고...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령체험을 해서 내 마음이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서 참되게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참되게 성도를 사랑하며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 수가 있었습니까? 오순절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 세례 받고 성령 충만함을 받음으로 그들의 삶이 변화되고 참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바로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없이는 우리는 그 어떠한 순종도 성화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은 결국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힘써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 외에는 다른 유가 없기 때문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의 제자들이 합심하여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듯이 우리 모두가 합심해서 온 교회의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온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으면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말씀을 읽고 배워서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고, 또 수시로 기도에 힘써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충만함이란 “샬라샬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율법준수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습니다(물론 육체의 방해가 여전히 있지만...). 성령충만함을 받으면 먼저 율법을 간절히 배우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소원이 일어납니다. 율법이 꿀처럼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우리가 요즘 출애굽기 말씀을 통해서 율법의 의식과 상징들을 배우고 여러 가지 규례들을 배우고 있는데, 만일 그러한 내용들이 지겹고 따분하고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지금 신앙의 궤도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율법을 터부시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가르쳐주는 바른 율법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율법의 의식과 상징은 폐지되었지만, 율법의 본질과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알아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또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설교자 조회 수
15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9조,제10조,제11조 강설 - 삼위일체(2) file 제9-11조 최상범 1384
15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직 신앙고백서) 강설 제8조- 삼위일체 file 제8조 최상범 681
15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강설 제6조, 제7조 - 성경의 충족성 file 제6,7조 최상범 747
152 돌트신조 2018년 도르트 신조 공부(제4장 오류 논박) file 제4장 다섯 번째 교리 오류 논박 손재호 128
15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조, 제4조 강설 - 정경 file 제4,5조 최상범 691
15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7조 - 최후 심판 file 제37조 최상범 572
149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7조 - 최후 심판(2) file 제37조 최상범 732
14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6조 - 시민 정부 file 제36조 최상범 719
14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5조 - 주의 만찬의 성례(1) file 제35조 최상범 540
146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신앙고백서) 제35조 - 주의 만찬의 성례(2) file 제35조 최상범 580
145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4조 - 세례의 성례 file 제34조 최상범 657
144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3조 - 성례 file 제33조 최상범 618
143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2조 - 교회의 질서와 권징 file 제32조 최상범 710
142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1조 - 교회의 직분자들 file 제31조 최상범 734
141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30조 - 교회의 정치 file 제30조 최상범 675
140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조, 제3조 강설 - 특별계시와 성경 file 제2조 최상범 859
139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9조 -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 file 제29조 최상범 862
138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8조 해설 - 교회에 가입해야 할 모든 사람의 의무 file 제28조 최상범 679
137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7조 - 보편적 교회 file 제27조 최상범 730
136 벨기에 신앙고백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26조 - 그리스도의 중보 file 제26조 최상범 60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Nex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