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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4.03 14:07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Ⅱ(56문) - 죄 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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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56문
문답내용 56문 : “죄 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나 내 일생 동안 투쟁해 나갈 필요가 있는 나의 죄악 된 본성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강설날짜 2014-02-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주Ⅱ(56문)


죄 사함


말씀 : 롬 7:23-8:2


56문 : “죄 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나 내 일생 동안 투쟁해 나갈 필요가 있는 나의 죄악 된 본성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 대한 첫 번째 고백으로 교회와 성도의 교통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영원 전 언약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세움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바로 이 일을 실질적으로 이루어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제일 먼저 거룩한 보편적 교회를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어서 나오는 고백이 바로 죄 사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흐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거듭남에서부터 칭의와 성화, 영화까지 모든 구원론의 내용이 다 성령님의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는 사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그 구원론 전체를 다 언급하지 않고, 죄 사함만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는 구원의 은택의 핵심이 죄 사함임을 말해줍니다. 물론 죄 사함이 우리의 구원의 모든 면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죄 문제야 말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하고, 우리 인생을 가장 비참하게 하기 때문에,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함 받고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구원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6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56문 : “죄 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나 내 일생 동안 투쟁해 나갈 필요가 있는 나의 죄악 된 본성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죄 사함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기억치 아니하시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셨다는 것은 죄의 형벌인 율법의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범죄 했고,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야 하는데,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지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대신 보혈을 흘려주셔서 내가 천국가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대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을 치르셨다.”고 하는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대신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을 갖게 됩니다. 진정한 속죄의 은총을 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답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한 “보답의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위해 살고 싶고,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2012년에 중국에서 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 식구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한 청년이 강으로 뛰어들어서 그 세 식구를 구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를 다 구해주고 나서 이 청년이 체력이 다해서 강위로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구조 받은 사람들이 그 청년이 강위로 올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워야 할 텐데, 이 세 가족이 청년이 빠져 죽고 있는데도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구조현장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사라지면서 한 말이 더 충격인데, “나랑 무슨 상관이 있냐”라고 말하고서 현장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중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죽은 청년의 가족들은 분개했고, 곧바로 신문에 광고란에 이 배은망덕한 사람을 찾아달라고 글을 냈고, 결국 7일 뒤에 이 가족이 나타나서 그 청년의 가족들에게 사죄하고 감사의 뜻을 전함으로 사건이 일단락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자기를 구해준 사람에게 마땅히 감사를 표하고 사례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인데, 그 자리에서 그냥 떠났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아니면 아주 양심불량의 사람이죠. 그런데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토록 형벌 받을 운명인데, 예수님이 우리를 거기서 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까? 정말 주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마음이 있어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 복음 들어도 아무 감격도 없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고, 도리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 원망불평이나 하고, 그리고 죄를 고집하면서 불경건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인격이 똑바르고 양심이 있는 자라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너무나 쉽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루하루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배은망덕한 중국의 세 가족과 다를 바 없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차갑고 냉랭하게 신앙생활 한다면 그것만큼 배은망덕한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배은망덕한 죄인지를 깊이 깨닫고 참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베푸신 은혜를 다시금 깨달아 알고, 그 은혜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은혜임을 알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신경에서 “죄를 사하여주시는 것을 믿사오며” 라고 고백할 때 신자의 마음에 있어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가 양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죄 사함은 주님의 대리희생을 통해 주어졌음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대리속죄를 통해 우리가 죄 사함 받았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일절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죄 사함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죄 사함이란 우리 내면에 일어난 어떤 변화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의 어떤 변화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적인 용어로 ‘유화(propitiation)’라고 하는 것인데, ‘유화’란 “달래다,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서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형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거기다가 인간적인 지혜를 써서 선물을 보낼 때도 여러 떼로 나누어서 마치 굉장히 많은 선물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옛날에 형한테 잘못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형의 진노를 좀 누그러뜨리고 달래기 위해서 선물을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에서가 결국에는 야곱을 용서하고 용납했습니다만, 그것은 야곱의 선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이 사건에서 죄와 진노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A와 B, 두 사람이 있는데, A라는 사람이 상대방 B에게 잘못을 하여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B의 마음속에는 A가 잘못한 것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서 A에게 적절한 처벌이 내려지거나 또는 A로부터 적절한 보상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A가 죄에 대한 적절한 처벌을 받거나 또는 A가 B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면, B의 마음에는 A를 향한 분노가 가라앉고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A의 죄 사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은 내 내면에 이루어진 어떤 변화를 의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에 이루어진 어떤 변화를 의미합니다. 죄 사함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사라지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회개하고자 하는데, 그 회개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대부분 자신의 심령이 죄책감으로 괴로워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회개해야 주님과 화목하고, 내 마음이 평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죄 사함 받고 천국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이기적인 회개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고 죄책감과 양심의 번뇌와 여러 가지 내적인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또 반대로 회개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게 될 때에는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는 일차적인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회개의 목표는 내 마음 편해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한 진노를 달래고 가라앉히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하나님의 마음을 무한히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무한한 액수의 피해를 입혀드렸고, 하나님의 종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하여 대적하는 반역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공의의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무한히 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분노는 우리의 범죄에 대한 충분한 처벌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돈 크라이 마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그 영화에 보면 자신의 딸이 동료 남자 친구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해서 결국 자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미성년자들이라는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자, 그 엄마는 분노하여 자신이 직접 복수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즉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복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절대로 그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들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끓어오르는 무한한 분노와 진노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인생들이 지금 살아 숨쉬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것일 뿐이지 그분의 진노가 사라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와 죄 사함은 바로 이 하나님의 무한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달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절대로 내 마음 편하려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일평생 눈물로 참회한다 하더라도, 다윗의 표현처럼 눈물로 침상을 띠운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분노는 절대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여전합니다. 수천마리의 동물로 희생제사를 드려도 가라앉지 않고, 심지어 자기 아들을 희생제사로 드려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7)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 6:7)


이런 인간의 노력들은 거대한 산불을 한 바가지의 물로 끄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의 불길은 홍수가 엄몰해도 끌 수 없는 것입니다(아 8:6-7).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가 죽임당할 뿐만 아니라 이후에 몸과 영혼이 영원한 지옥의 불길에서 고통당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이 무한하고 잔인한 하나님의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달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길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우시게도 하나님이 친히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유화의 수단을 베풀어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완전히 가라앉히는 참된 유화의 수단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사형형벌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의 죽음이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가 예수님의 몸과 영혼에 쏟아 부어진 지옥의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한 모든 분노를 예수님께 다 풀었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충분한 처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분노하거나 진노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죄 사함이요, 용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그 값없이 베풀어주신 죄 사함의 은혜를 확인하는데서 오는, 곧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으로서 자신의 죄에 대해 참회하고 아파하며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정죄함이 없습니까? 이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을 보십시오.


답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나 내 일생 동안 투쟁해 나갈 필요가 있는 나의 죄악 된 본성도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결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 그리고 심지어는 일평생 싸워 가야할 죄의 본성까지도 다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가톨릭의 견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 이전의 죄는 용서받으나, 세례 받은 이후의 죄에 대해서는 그 죄로 인한 지옥형벌은 없지만, 일시적인 형벌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속행위가 필요하고, 현세에서는 고행과 선행의 공로를 통해, 그리고 죽어서는 연옥에서의 고행을 통해 해결함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알미니안도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알미니안은 하나님이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해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방종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죄 사함의 은혜는 우리의 과거의 죄에만 한정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의 견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죄 사함의 문제를 시간의 관념 속에서만 이해하려는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사함의 은혜를 이야기할 때 그것이 시간을 초월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증거합니다(민 23:21, cf. 롬 5:10; 민 23:25; 시 32:1,2; 롬 4:7; 골 2:13; 미 7:18; 사 43:12; 시 32:1,2; 단 9:24).


“(25)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사 43:25)
“(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17)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12)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24)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성경은 자주 죄 사함에 대해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으로, 등 뒤로 던지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은 죄사함이란 영원하고 불변하는 영구적인 효과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에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구분이 전혀 없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은 마치 하나의 펼쳐진 책과 같은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는 우리의 전 인생의 모든 죄에 대한 무죄방면과 사면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죄사함을 이야기할 때 칭의와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답 :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에 ... 오히려 하나님은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십니다.


칭의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영원히 불변하는 단회적인 선언으로서, 우리에게 무죄를 선언하시고 도리어 온전히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을 말합니다. 이 칭의는 다음에 배우겠습니다만, 아래의 구절이 증거해주는 것과 같이 시간을 초월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33)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0,33,34)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러므로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증거가 참됨을 확신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고, 심지어는 일평생 싸워 가야할 우리 안에 있는 죄성까지도 다 용서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첫 번째는 이 교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방종으로 가게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강의들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참되게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는 주님과 함께 죽고 사는 체험을 한 자인데, 주님과 함께 죽고 산 체험을 한 신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할 수 없고, 도리어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의의 종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성경에 보면 신자도 날마다 죄 용서를 구하고 죄를 사함 받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신자도 날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사함을 받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14)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4,15)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이런 구절들은 분명히 우리가 매일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의 죄를 자백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미래의 죄들은 사함 받지 못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요? 이것이 참으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미래의 죄까지도 이미 다 용서받았다는 사실과 날마다 짓는 죄를 자복하고 사함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한 가지를 취하기 위해서 다른 한 가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파는 그런 점에서 실수를 범했습니다. 구원파의 경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구원파는 이미 사해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며 회개하는 것은 도리어 불신앙의 행위이며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라고 하면서 회개를 부정합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반대로 로마가톨릭처럼 날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으니 미래의 죄는 사함 받은 게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공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초월하여 선언하신 무죄선언하고, 시간의 흐름 안에서 날마다 죄 사함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상황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적절한 설명은 전 인생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함 받은 우리는 이 값없는 은혜를 날마다의 죄용서의 기도 속에서 실질적으로 누려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교만하고 뻔뻔한 구원파의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되고, 날마다 죄 때문에 절망하며 좌절하는 로마가톨릭의 율법주의적인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이것을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로마서 7장과 8장을 보아야 합니다.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3-8:2)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의 탄식이 참된 신자의 탄식이냐 하는 점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참된 신자의 탄식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 7장과 8장은 바로 참된 신자의 내면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자신 안에 있는 죄와 눈물겹게 싸워가지만, 그러나 때때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으로 인해 죄책감과 양심의 번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절망만 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즉시로 예수님께 피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피할 그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대고 의지하면서 그 공로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더 이성 형벌과 정죄가 없음을 확신하면서 도리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같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앞에 것(7장)만 있고 뒤에 것(8장)이 없습니다. 로마 가톨릭적으로 신앙생활하면 날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여전히 진노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범죄한 노예가 주인의 벌을 두려워하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하며 신앙생활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날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면서 결단코 영적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한편 구원파는 뒤에 것(8장)만 있고 앞에 것(7장)이 없습니다. 나는 의인이며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심각한 결핍과 죄의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교만과 뻔뻔함 속에서 점차로 양심이 마비되어 멸망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애통이 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함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더 이상 형벌이 없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현재에도 죄를 짓고,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향해 더 이상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면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죄사함 받았으면 더 이상 형벌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성령을 힘입어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을 참으로 깨달아서, 일평생 빚진 자의 심정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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