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6.09 09:4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Ⅱ(76문) - 성찬의 의미(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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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76문
문답내용 76문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또한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이는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에 더욱더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그래서 마치 한 영혼에 의해 우리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살고 다스림을 받듯이, 또한 한 성령에 의해 우리가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
강설날짜 2014-05-0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8주Ⅱ(76문)

 

성찬의 의미(Ⅱ)

 

요절 : 요 6:55-57

 

76문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또한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답 : 이는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로써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에 더욱더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그래서 마치 한 영혼에 의해 우리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살고 다스림을 받듯이, 또한 한 성령에 의해 우리가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 구속을 다른 무엇도 아니고 자기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또 그 은혜를 표하고 인치도록 하기 위한 의식도 떡과 포도주를 먹는 성찬식으로 제정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실 매우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빨간색 십자가 목걸이를 한다든지, 아니면 이마에 빨간색 십자가를 그린다든지, 아니면 구약의 유월절처럼 집 문설주에 빨간색을 칠한다든지 등등의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먹는 의식으로 그것을 표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왜 하필 먹는 것으로 표현하셨을까요?


예전에 먹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체를 지으시고 그 생명체로 하여금 다른 생명체를 먹어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돼지고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 고기를 맛있게 먹지만, 돼지는 무슨 죄입니까? 쓸데없이 돼지 걱정인가요? 물론 참 쓸데없는 걱정이긴 한데 생각해보면 해볼수록... 좀 그렇습니다. 제가 조물주라면 저는 이 세상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같으면 생물을 먹고 살게 하지 않고, 무생물을 먹고 살아가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생물이 죽는 일이라든지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어리석은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다 무한한 지혜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은 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을 지으시면서 처음부터 생물을 먹고 살도록 지으신 것일까요?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몇 가지 힌트를 발견합니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먹는 것에서 희생의 섬김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맨 처음에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로 하여금 식물을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식물도 생명체입니다. 식물이 자신의 생명력으로 땅의 양분을 흡수하고 광합성작용을 해서 1년 내내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며 일해서 만들어낸 그 열매를... 식물에게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그 열매를 동물들의 먹이로 값없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식물은 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끝내서 다른 생명을 살게 하는 희생의 섬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생태계에 큰 변화가 있게 됩니다. 동물들이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나뉘어져서 동물들 간에도 서로 먹고 먹히는 복잡한 먹이사슬의 피라미드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이 그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사람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요? 모든 동물들이 노아 때문에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동식물들은 다 사람의 식물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먹으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베어그릴스처럼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다 먹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처럼 까다롭게 이것저것 가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먹고 먹히는 이 복잡한 먹이사슬의 생태계에서, 어떻게 보면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그러다 재수 없으면 천적에게 잡혀 먹히고... 그러는 것 같지만,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각 개체들이 다른 종족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서로 생명적으로 얽히고설키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으로 오히려 다른 생명체가 살게 되는, 그런 죽음과 생명의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이 커다란 생태계가 완벽한 조화 가운데 형성되어 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을 때, 우리의 먹이가 되기 위해 도살당하는 돼지 입장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참으로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돼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 돼지를 맛있게 먹고, 배부르고, 기쁘고, 즐겁고, 또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하고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행복과 만족과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 주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음식으로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생태계에 녹아들어져 있는 이러한 희생의 섬김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생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염낭거미라는 생물입니다. 이 거미는 알을 낳을 때, 잎사귀로 감싸서 방을 만들고, 거기서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알에서 새끼들이 나오면, 그 새끼들이 어미를 먹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미는 가만히 있습니다. 반항할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새끼에게 먹이로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에서 깨어 나온 새끼는 힘이 없고 연약하기 때문에 그 상태로 밖에 나가면 곧바로 천적에 의해 희생될 확률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미는 새끼들의 생존률을 높이기 위해 자기 자신을 새끼들에게 양식으로 주어 힘을 얻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것이 “정말 잔인하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먹음을 통해 표현되는 희생의 섬김의 원리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인 것입니다.


좀 더 잔인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여러분의 부모와 여러분이 어떤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을 때, 부모가 “나는 네가 굶어죽게 나둘 수 없다. 내가 지금 죽을 테니 내 살을 먹거라.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너는 나를 먹고 꼭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여러분은 그 죽은 부모의 살을 먹을 자신이 있습니까? 웬만한 사람은 굶어 죽었으면 죽었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먹을 수 없다 그러지만 결국은 먹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굶주려서 죽게 될 때에는 이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어서, 생존을 위한 강력한 욕구에 의해서 부모를 먹게 되는데, 그때라도 맨 정신으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죽은 그 부모의 살점 하나하나 뗄 때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씹으면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성찬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밤에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멸망 받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가 내일 죽을테니, 내가 죽고 나면 꼭 내 살과 피를 먹어라. 너희가 살려면 나를 먹어야해. 나를 먹고 꼭 살아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 예수님의 시체를 갖다놓고 그 살점을 떼서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성찬식은 그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사실 굉장히 잔인한 의식인 것입니다. 그만큼 떡과 잔을 마시는 성찬식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희생의 섬김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덤덤하게 이 의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성찬식의 본의를 알면 그 떡을 받을 때 손이 부들부들 떨릴 수밖에 없고, 눈에서는 눈물이 안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로 영 죽을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예수님을 내가 먹음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제까지 자기를 위해 살았던 것을 참회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이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죄를 짓는다고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을 먹고 생명을 얻은 자가 어떻게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어떻게 자기를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희생의 섬김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의 인격은 반드시 감사와 헌신으로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온전히 허비해서 우리를 살리시는 그 주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날마다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먹는 것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녹아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찬의 은혜를 신약의 성도들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도 동일하게 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의식을 제정하실 때 단순히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어린양을 먹는 것도 함께 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의 희생제사를 드릴 때도 그 바쳐진 제물을 제사장이나 그 제물을 바치는 예배자들이 먹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장차오실 구속의 수단이 죽을 때, 그 살을 먹음을 통해 자신들이 살게 될 것임을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예수를 먹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제 누구를 위해 삽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사람을 하나님께 바쳐질 열매로, 산 제물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이 구조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노아로 말미암아 모든 동물이 구원을 받게 되어졌을 때에, 모든 동물이 노아의 식물이 되었던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주님의 식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잡수시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잡수실 열매입니다. 복잡한 먹이사슬의 제일 꼭대기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생명체를 먹음”이라고 하는 데에는 희생의 섬김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개념이 함께 있느냐 하면, 바로 연합한다는 개념이 함께 있습니다.

 

답 : ...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에 더욱더 연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우리가 돼지를 먹을 때, 돼지는 죽어서 우리가 먹음을 통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뱃속에서 소화되어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돼지가 나의 일부가 되고, 나의 생명을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돼지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 나의 살과 피라는 새로운 형태로 내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와 나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을 때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으로 주셨을 때, 그 예수님의 몸과 피는 우리 영혼의 영양소로 소화되어서 우리 영혼의 살과 피가 되었고, 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거기서 영적인 에너지와 양분을 얻어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먹음으로 예수님과 내가 분리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음은 곧 연합이고 교제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18)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20)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16-21)

 

사도바울은 우상숭배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요?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그 우상에 참예하는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예함’과 ‘참여함’은 원어로 보면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 공유, 연합, 상호교류, 공동체”를 뜻합니다. 즉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사단마귀와 ‘코이노니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를 먹어서 주님과 ‘코이노니아’ 하고서는, 밖에 나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음으로 귀신과 ‘코이노니아’ 하고... 그렇게 동시에 ‘코이노니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과 연합한 자는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의 바울의 논지가 복잡해지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희생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그 희생 제물에 참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먹음이란 참여이고 교제이고 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음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만 있게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우리가 또 예수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를 삼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었는데,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자신의 생명 안으로 삼켜버리시는 것입니다.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이 구조가 뭐하고 비슷하냐 하면 (적절한 비유는 아닙니다만) 죽음이 그리스도를 삼켰을 때,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예수의 생명을 삼켰는데, 죽음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이 안에서부터 죽음을 쌈 싸먹어 역으로 죽음을 삼켜버리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14)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하나님은 사망을 그냥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리도록 하심으로 없애셨습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어지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진바 된 것입니다(고전 15:54;고후 5:4). 그 비슷한 구조로 주님이 죽으셨고, 우리가 주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셨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못 박혀 죽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예수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죠. 주님이 죽었고, 우리가 주님을 먹었는데, 그 안에서 그 예수의 생명이 역으로 우리를 통째로 삼키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없고 예수만 살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셔서 먹히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결과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우리가 예수님 먹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일부가 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일부가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의 한 지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몸 된 지체가 됩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있는,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예수님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을 행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셨구나.. 그 은혜로 이제 내가 천국가게 되었구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말은 맞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어 천국 갑니다. 그러나 천국 갈려고 예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복 받으려고 예수 믿는 것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정말 제대로 성찬식에 참여해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자기가 죽게 됩니다. 즉 회개가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슨 고백이 나옵니까? “내가 천국가게 되었다”가 아니라, “내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사십니다. 나는 주님의 몸 된 지체이고 주님의 것입니다. 이제 나는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이고(204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93장). 그 고백하면서 하루하루를 예수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7)

 

정말 주님의 생명으로 이 세상을 사십니까? 혹시 내 안에 내가 펄펄 살아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말 주님의 살과 피를 날마다 먹고 마셔서 내가 죽는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시겠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연합을 바로 부부관계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답 : ... 비록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 위에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입니다. ...

 

부부의 관계는 삼위일체의 연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됨의 본질입니다. 즉 삼위가 세 위격이지만, 그러나 하나이듯이 부부도 둘이지만 한 몸인 것입니다. 부부관계의 본질은 연합입니다. 부부는 늘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싸우기도 하고, 사이가 좋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이가 좋고 마음이 딱 맞을 때, 그것이 심리적으로도 실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리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 성관계입니다. 이것은 정말 진하게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바로 부부의 성관계에 해당됩니다. 주님은 늘 우리와 영적으로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심지어 부인할 때도, 의심할 때도, 느끼지 못할 때도, 주님은 우리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늘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때때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묵상을 통해, 그리고 예배를 통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식은 그것보다 훨씬 더 진하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연합하여 계시는 것을 온 몸과 영혼이 생생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교회가 성찬식을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될 수밖에 없습니까? 더 믿음이 견고하고 은혜가 넘치고 성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찬식을 해도 그런 것이 없다고 한다면, 뭔가 우리의 신앙이 지금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연합의 의미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고백으로 표현합니다.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라는 고백은 아담이 하와에게 했던 사랑고백입니다. 하와는 실제로 아담의 갈비뼈입니다. 여자는 모든 피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지음 받았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말씀하셨을 때 그냥 생겼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빚은 후에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흙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생령이 된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와는 100% 아담입니다. 아담의 갈비뼈에다가 다른 요소를 첨가하여 하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내었더니 하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담과 하와의 연합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하와는 바로 교회의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즉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예표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이 땅에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비뼈로서 그분의 살 중의 살이고 뼈 중의 뼈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연합에는 역할의 차이와 질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의 머리뼈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머리고, 하와는 아담의 갈비뼈로서 아담의 머리에 지시에 따라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합니까? 아닙니다.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역할적인 면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분이십니다. 비굴한 굴복이 아니라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온전히 순종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아들을 심히 사랑하시고 그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바로 이러한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죠. 남자는 머리이고 여자는 죽기까지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순종하는 여자를 통해 영광을 받습니다(고전 11:7). 그래서 남자는 이 여자를 심히 사랑하고 여자를 칭찬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관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갈비뼈로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을 머리로 모시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신부입니다.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교회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래서 교회를 심히 사랑하시고 교회를 높이사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주님과 연합하여 주님을 머리로 모시는 주님의 갈비뼈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분의 신부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아내답게 세속에서 자기를 지켜 정절을 유지하고, 정결하고 순결하고 거룩한 믿음과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자기를 단장해야 하는 것이고, 주님과 일체를 이룬 아내로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하셨을 그 일을 이 세상에서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뜻과 의지가 나의 뜻과 의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초토화 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먹고 잘살고 자기 인생사는 것밖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연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과 연합한 신부로서 주님께 복종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한 주님의 사랑스러운 갈비뼈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신부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보겠습니다.

 

답 : ... 그래서 마치 한 영혼에 의해 우리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살고 다스림을 받듯이, 또한 한 성령에 의해 우리가 영원히 살고 다스림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성도들 간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18)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 11:18,20)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해서 책망하면서 갑자기 성찬을 이야기합니다. 분쟁하고 성찬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찬식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연합했다면 필연적으로 무엇이 성립하느냐 하면, 한 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우리 각 사람은 그분의 몸 된 지체들이 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시키는 대로 몸이 안 움직이는 경우가 있죠. 그것을 우리가 소아마비라고 합니다. 몸하고 머리가 따로 놀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보면 정신분열증에 해당되는 것이고, 자기 몸을 스스로 해하는 사람은 귀신들린 사람이든지 자기학대증에 걸린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가 많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교회, 오히려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가는 교회, 오른손이 자기 배를 때리고, 오른발이 왼발 발등을 찍고, 심장이 자기 열 받았다고 펌프질을 멈춰버리고, 간하고 위가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교회... 그런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서로 싸우고 분쟁하고, 빈부차별을 하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성찬식에 나와서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 가증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1장에서 손에 피가 가득한 채로 나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불화하면 반드시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형제에 대한 독한 시기와 미움의 마음을 품고서, 정죄와 판단과 쓴뿌리와 악감정을 품고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장 금기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성찬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성찬에 참여하면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가 아니라 도리어 독이 되고,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되어서, 스스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을 행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도록 해야 합니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성찬식에 나아오기 전에 먼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여 화해한 후에 성찬식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성찬식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미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용서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깐 그 안타까운 마음 부여잡고 울면서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연약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허락해 주신 것이지 완벽한 자가 참석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찬식은 회개의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고, 회개가 안 되면 회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참여하면 주님이 회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연약한 신자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소원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성찬식을 행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잘 인식할 뿐만 아니라, 이 성도간의 연합의 의미를 의식적으로 잘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한 떡, 하나의 잔을 나누는 의식으로 성찬식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16)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오늘날 교회 가운데 성찬식을 할 때, 카스테라를 미리 다 잘라놓고, 또 잔도 미리 다 부어놓고서 그냥 갖다 주는 식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이 성찬식의 의미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생략한 것입니다. 서로가 보는 가운데서 떡을 찢고 잔을 나누는 것이 성찬식의 필수적인 의식입니다. “귀찮다. 잘라놓자. 시간이 많이 걸린다. 미리 부어놓자.”라는 생각은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고 성찬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떡을 찢고 잔을 나누는 것을 보고 만지고 맛봄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를 위해 몸이 찢기고 피를 흘렸다.”고 표하고 인쳐주시는 것이고, 또한 “너희는 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신 한 몸 된 지체요, 형제자매다.”하고서 우리의 하나 됨을 표하시고 또 인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식에 참여해서 은혜를 받게 되면 개개인의 신앙이 성숙해질 뿐만 아니라, 또한 온성도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몸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일사분란하게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의 본의를 잘 생각하고 믿음으로 참여하여 이러한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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