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신앙고백서
2015.03.22 17:46

벨기에 신앙고백서(벨직 신앙고백서) 제15조 -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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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제15조
문답내용 제 15 조 원죄
Original Sin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죄(original Sin)가 인류 전체에 퍼져 있음을 믿습니다. 원죄는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이며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들에게까지도 미치는 유전적인(hereditary) 악입니다. 근원으로서의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하며 혐오스러워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원죄는 없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세례로도 근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샘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전가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정죄에 이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이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부패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로 하여금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탄식하면서 간절히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죄가 다만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오류를 배격합니다.
강설날짜 2015-03-22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5조

원죄

제 15 조  원죄
Original Sin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죄(original Sin)가 인류 전체에 퍼져 있음을 믿습니다. 원죄는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이며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들에게까지도 미치는 유전적인(hereditary) 악입니다. 근원으로서의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하며 혐오스러워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원죄는 없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세례로도 근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샘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전가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정죄에 이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이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부패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로 하여금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탄식하면서 간절히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죄가 다만 모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는 펠라기우스파의 오류를 배격합니다. 

오늘은 원죄에 대해서 배워보겠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내용을 보시면...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원죄(original Sin)가 인류 전체에 퍼져 있음을 믿습니다. 원죄는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이며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들에게까지도 미치는 유전적인(hereditary) 악입니다.

원죄라는 말은 최초의 죄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이 바로 인류역사상 최초의 죄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를 원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원죄의 죄책과 결과는 아담홀로 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태어날 모든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미치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유전적’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부모의 유전정보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태어나듯이, 모든 인류의 부모인 아담으로부터 영적인 유전정보인 원죄를 그대로 물려받아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아담의 범죄의 책임과 결과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온 인류의 대표로 세우셔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아담의 범죄를 온 인류가 같이 짊어져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질서를 정하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우리로서는 왈가불가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사실로 인해서 원망불평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비참하게 된 현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죄와 비참함 가운데 우리를 버려두셨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어떤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는가, 만일 열어놓으셨다면 그 길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하면서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로 걸어 나아가는 것이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인류가 꼭 나쁜 짓 해서 죽일 죄인들이 아니라, 아예 태어날 때부터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하며 혐오스러워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 곧 군인들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특히 노약자와 임산부와 갓난아기까지 다 칼로 쳐 죽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행사가 납득이 되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본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은 잔인해... 어떻게 갓난아이까지 죽이시는가?”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펠라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펠라기우스는 사람이 태어날 때 죄가 없이 깨끗한 상태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자식이 악한 부모로부터 후천적으로 영향을 받아 죄짓는 것을 모방하기 때문에 죄인이 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다 수긍할만한 합리적인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듯하고 합리적이어도 성경에 비추어서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의 견해는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우리는 원죄를 인정하고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비참하게 대우하시고 처분하실지라도 그것이 마땅한 것이고 또 공의로운 것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원죄에 대해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장에 온 세상을 끝장내시고 모두 다 지옥으로 심판하셔도, 사람은 할 말이 없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가 무엇이냐 하면, 곧바로 다 심판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에게 잠시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에게도 해와 비를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일반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이 사실 가당치 않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죄인들 가운데서 일부를 지옥형벌에서 구원해주신다고 하시니 그것은 더욱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땅히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는커녕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아는 것처럼,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매한 인간의 크나큰 착각이요 교만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깐, 조금만 힘들거나 사람들의 인권이 무시되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하나님이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 있나?” 그러면서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죄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입니다. 절대로 우리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아담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원죄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담이 따먹었고 나는 안 따먹었다”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의해서 이미 아담의 허리 안에 있었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나도 거기서 아담과 더불어 그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 이 대표성의 원리가 잘 나옵니다.

“(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히 7:9-10)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브라함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후손을 허리에 차고서 한 행위이기 때문에, 레위인들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표성의 원리가 우리와 아담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의 허리 안에서) 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했다”는 죄책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지은 자범죄에 대해서만 죄책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지은 죄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성의 원리에 의해서 나의 범죄가 된 이 원죄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탓’, ‘아담 탓’ 하지 말고 ‘바로 내 탓이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대표성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원리도 결국 이 대표성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온전히 의롭게 사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홀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신구약의 모든 교회를 자신의 허리에 차고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허리에 있는 교회는 예수님의 행위가 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순종한 적 없지만 오히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말할 수 있고, 나는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처형당해 죽거나 부활한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부활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오히려 비참한 죄인인데, 예수의 허리에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를 예수 대접해주시는 그 한량없는 은혜를 우리가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신자에게는 두 조상이 있고 두 가지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아 허물과 죄로 죽어있는 상태로 태어나 살아가는 이 육적인 생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지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지 아니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의 모든 공로를 물려받아 태어나는 새로운 영적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생명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데,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대표성의 원리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참으로 놀랍도록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원망과 불평의 제목이 아니라 찬양과 경배의 제목입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보겠습니다. 

원죄는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이며 심지어 모태에 있는 유아들에게까지도 미치는 유전적인(hereditary) 악입니다. 근원으로서의 원죄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죄를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악하며 혐오스러워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기에 충분합니다. 원죄는 없어지지 않으며 심지어 세례로도 근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마치 샘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것처럼 이 무서운 근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원죄란 인간 본성 전체의 부패입니다. 나의 존재 가운데 부패하지 않은 부분은 없습니다. 나의 전 존재가 죄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이 말씀들을 보면 죄의 근원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정적이지 않고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뭔가를 생산하고 만들어서 배출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그것을 샘물에다가 비교했습니다. 샘물이 무엇입니까? 비가 오면 땅이 물을 흡수하고 그 물이 땅속 깊숙한 암반지대로 내려가는데, 그 물이 계속 차올라서 갈 데가 없게 되면, 그때는 땅을 뚫고 위로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샘물입니다. 그래서 지하수처럼 모터로 끌어올리지 않아도, 샘물 스스로 물을 계속해서 솟아내는 것입니다. 더욱이 샘물은 한번 터져 나오면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힘을 주고 샘물 입구를 막으면 물의 부피가 줄어서 짜그러지는 것이 아니라, 물의 압축률이 거의 0에 가깝기 때문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다 써도 결코 물의 부피를 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아낼 수 없고 설사 막아내더라도 그 물은 또 다른 곳을 뚫어서 결국에는 땅위로 물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으려고 노력해서 죄 짓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서부터 끊임없이 더러운 욕망을 생산해내고, 그 욕망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말과 행실로 더러운 죄들이 배설되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의 도덕성이나 금욕이나 노력을 통해서 절대로 막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근원이 그냥 근원이 아니라 무서운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무서운 근원에서부터 모든 악독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악한 욕망 곧 음란한 마음, 돈에 대한 사랑,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원죄 이야기가 예수님 안 믿는 불신자들만의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예수 믿고 세례 받은 우리 신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전가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정죄에 이르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이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세례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여전히 죄악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것이죠. 그래서 신자도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날마다 말과 행위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으니 구원이 취소되고 다시 형벌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와 우리의 죄악된 본성 곧 원죄까지도 다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정죄에 이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굳세게 믿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은혜를 육체의 기회로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신자는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니 마음대로 죄 짓고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가겠구나.” 라고 하는 논리로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이 죄 가운데서 평온하게 지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 부패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로 하여금 이 죽을 몸에서부터 구원받기를 탄식하면서 간절히 기다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면 그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제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님 뜻에 자원해서 즐거이 순종하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과 본성이 우리 안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영광, 그리고 그분과의 교제에서 오는 달콤한 희락을 경험하게 되면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이전에는 그렇게 좋게 보였던 세상의 것들이 다 배설물처럼 느껴지게 되고 그래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이 불일 듯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소욕이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이 강력해지면 강력해질수록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잡아 이끄는 강력한 저항을 경험하는데, 그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신자의 마음은 주님이 좋은데, 신자의 육체는 여전히 세상이 좋고 죄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체가 끊임없이 죄로 우리를 사로잡아서 주님을 위해 살지 못하도록 막고, 또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고, 우리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져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냉냉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참된 신자는 탄식하게 되는 것이고, 이 육체를 벗지 않는 한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히 죽어 이 죄에서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몸의 구속을 간절히 바라며, 빨리 죽어 주님 품에 안기고픈 마음이 있습니까? 없다면 우리는 지금 죄의 지배아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의 말씀 앞에 우리는 회개하여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의 의무에 부지런하여 은혜를 받아 죄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택한 성도를 죽도록 내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반드시 강력한 경고를 통해 책망하셔서 우리의 위태로운 상황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두들겨 패서라도 회개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렇든 저렇든 반드시 죄로 인해 탄식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죄 가운데 평온하게 계속해서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원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에게 여전히 원죄, 곧 부패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부패한 본성과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하고, 늘 이 부패함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궁극적인 몸의 구속을 간절히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비참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여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를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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