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2014.04.24 14:2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59문,60문61문) - 이신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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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59-61문
문답내용 59문: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당신은 지금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또한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입니다.

60문 :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답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을 만하지도 않지만 순전한 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또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온전히 복종하신 것처럼 내가 온전히 복종한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의, 거룩하심을 내게 허락하시고 내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61문 :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강설날짜 2014-03-09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3주(59-61문)


이신칭의


말씀 : 롬 3:20-26


59문: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당신은 지금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또한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입니다.


60문 :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답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을 만하지도 않지만 순전한 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또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온전히 복종하신 것처럼 내가 온전히 복종한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의, 거룩하심을 내게 허락하시고 내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61문 :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신칭의를 배우고자 합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복음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근본을 다루는 것이며, 이 교리에 대한 신앙여부에 따라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가 좌우되며, 이 교리를 바르게 가르치느냐 잘못 가르치지 않느냐에 따라 참된 교회냐 거짓된 교회냐가 결정됩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지만, 오늘 다시 한 번 복습하는 의미로 배워보겠습니다. 우선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시키는 하나님의 방편


59문: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당신은 지금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며, 또한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입니다.


59문은 앞의 사도신경의 내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의 핵심은 사도신경의 내용 전체입니다. 사도신경에 있는 것 중 어느 하나라도 부정한다면 그 믿음은 구원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삼위일체입니다. 우리가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 함을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을 이신칭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 중에서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무슨 믿음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하는 이야기가 틀립니다. 소위 “신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사람의 의로운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즉 내가 믿어주어서, 나의 믿은 의로운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의롭다고 칭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제시합니다.


“(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3)


이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보면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저에게 의에 이르는 것으로 그는 여김을 받았다.”


즉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의에 이르는 것으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이 구절이 위치한 문맥에서 분명히 증거 됩니다.


“(4)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사람이 열심히 일을 했으면 그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회사가 직장인들에게 주는 월급은 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빚지는 것으로서 안주면 고발당합니다. 그러면 선물이 무엇입니까? 어떤 돈이나 대가를 지불하거나 어떤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공짜로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도 바로 그렇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일을 하고 그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의롭다 하신 게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호의를 입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께 제시해야 하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내가 이미 하나님의 호의를 입었음을 확인하는데서 오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나의 인격적인 반응이 믿음인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결단으로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1문을 보십시오.


61문 :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믿음이란 값없는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받아들이는 결단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다음에 배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은 바로 그 믿음이 성령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합니다.


65문 :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런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답 : 성령님으로부터 옵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생각할 때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한편으로 믿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니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명령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이 믿지 아니할 때에는 자신들의 완악한 마음으로 거부한 것이므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자신의 결단과 선택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켜주셔서 우리가 믿은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이 믿은 것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믿음에 대해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비유할 때 의도하지 않게 잘못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믿음이란 은혜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수단과 도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사직전의 사람에게 누군가가 빵을 줄때에 그 빵을 받아먹는 손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이 없으면 빵을 먹을 수 없으니 손이 중요하면서도 또한 우리가 살게 된 것은 손이 아니라 빵 때문에 산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공로라고 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 따지고 보면 알미니안적인 해석입니다. 똑같은 것인데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트에서 로프를 던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 로프를 잡았고 보트에 있는 사람이 당겨주어서 그 사람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보트에 있는 사람이 구해줘서 살았습니까? 자기가 로프를 잡은 것 때문에 살았습니까? 당연히 보트에 있는 사람이 구해줘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로프를 잡는 것은 그 구원을 받는 수단으로서 꼭 필요한 것이죠. 이 믿음을 붙잡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바인데, 앞의 예와 동일한 것입니다. 알미니안을 반대하는 개혁신학자들이 의도하지 않게 적절하지 않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함으로써 알미니안적인 관점을 옹호하게 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을 우리가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누구의 수단입니까? 하나님의 수단입니까? 우리의 수단입니까? 개혁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 점이 많이 엇갈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알미니안은 믿음을 우리의 수단으로 보아서 비유하기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다 내려주셨는데, 자신이 믿고 결단해서 잡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고 잡지 않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는 다 영적으로 사망한 자들로서 그 동아줄을 잡을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전적타락한 인간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교회로 불러들이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감화하사 우리 안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역사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마치 귀신들린 사람처럼 난 안 하고 싶은데 귀신이 억지로 고개를 돌아가게 만드는 것처럼, 나는 믿기 싫은데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믿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인격과 신비롭게 그리고 퍼펙트하게 조화를 이루어 역사하셔서 우리로 억지로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로 하여금 감격가운데 감사하면서 값없는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신 믿어 주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이고 우리의 수단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인격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에 보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과 상호교환적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구원은 절대로 은혜이고 선물이지, 내가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그렇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수단인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뭔가 보태거나 하나님의 은혜에 잘 협력했다던가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홀로 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아서 이 시대의 알미니안적인 사상들을 물리쳐야 하고, 또 우리 안에 있는 알미니안적인 생각을 물리쳐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구원이 오직 은혜임을 알고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2. 칭의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칭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칭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칭의를 이야기하려면 칭의의 법정적인 성격에 대해서, 그리고 칭의의 효과에 대해서, 그리고 칭의와 관련한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차이에 대해서, 그리고 의의 전가 교리에 대해서, 로마가톨릭과 알미니안의 칭의 교리에 대해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등 여러 가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칭의의 핵심적인 이야기만 다루고자 합니다.


60문 :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답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을 만하지도 않지만 순전한 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또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온전히 복종하신 것처럼 내가 온전히 복종한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의, 거룩하심을 내게 허락하시고 내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칭의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과 하나님의 공명정대한 공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법아래 인간을 만드셨고, 법을 지키며 살도록 하셨고, 장차 마지막 때에 그 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든 무시하든 말든... 하늘 위에는 의로운 심판자가 참으로 살아계시며, 우리 모든 사람은 죽음 이후에 그리고 주님의 재림의 때에 불신자나 신자나 할 것 없이 다 그 앞에 서서 우리의 모든 행실을 이실직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주께서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확정 선고할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문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 하였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고 선고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칭의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는 사실, 그리고 비참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칭의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전적타락과 부패, 우리의 죄를 지적합니다.


답 : ...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


나의 양심이 내가 죄인임을 고소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강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양심이 하나님 앞에 이실직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고소하는 게 아닙니다. 또는 마귀가 와서 고소하는 게 아닙니다. 마귀는 이미 심판받아 지옥 불에서 불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놀랍게도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우리가 뭘 했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몰래카메라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를 다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검사가 되어 우리의 죄를 인정사정없이 다 까발려 놓고 고소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세 가지를 고소합니다. 첫째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어겼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도둑질 했습니다.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는 날마다 탐심가운데 살아갑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는데 매 순간을 자기를 숭배하며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을 양심이 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다고 고소합니다. 이것은 앞에 것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모든 계명을 어겼다는 점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자 관원은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켜 행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것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십계명을 열심히 지켰을 것입니다. 어떤 복음서에서는 이 부자관원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 청년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그가 참으로 열심히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것을 예수님이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이 부자관원은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율법의 문자는 지켰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모든 계명을 어긴 것이나 다름없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율법이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해야 할 것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두 계명이라기보다는 계명을 지키는 정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계명을 이 두 가지 동기에 의거해서 지켜야만 그것이 온전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그것이 율법의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부자관원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만 취하고 의(재판에서의 정의)와 인(사랑)과 신(믿음과 충성)은 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율법 순종이 하나님의 기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잘못한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온전히 지키지 못한 것도 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 번째로 지금도 모든 악으로 기울어서 그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음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는 말은 신자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여전히 모든 악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죄악된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신자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무수한 실패와 범죄, 그리고 내면의 부패로 인해서 매일 매일을 신음하며 보내는 양심적인 신자들이 전 세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이것을 늘 하나님 앞에 고소하고, 또 최후의 종말의 때에 궁극적으로 고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각성된 참된 신자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양심의 고소 앞에서 절망하고 낙심하며 탄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의로운 자인데, 모든 사람이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 또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은 성경에서 세 가지 의미가 있고, 이 세 가지 의미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공의란 하나님의 본래적인 속성으로서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고 공명정대하신 무한히 의로우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공의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언약관계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공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언약관계에서 공의란 쌍방 간의 의무를 온전히 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에는 쌍방 간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공의가 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언약을 깨트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홀로 언약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구약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면서 기도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의 공의란 (두 번째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온 인류의 불순종으로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공의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이루신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시고, 또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심으로써 율법을 온전히 만족시킨 것, 곧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지시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킴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선 로마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는 세 가지 의미 중에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의 신실함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그러한 해석이 오늘날 인기가 있지만, 그러나 그 해석은 21절에서 그 타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로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언약관계에서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의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었어야 할 의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이루신 의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율법의 공의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행위로는 의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 외에 또 다른 길을 통해서 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대신 율법을 만족시키셔서 이루신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 두 가지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확실하게 이 개념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소극적인 측면의 칭의 - 죄사함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을 의미합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즉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르신 것이 율법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모든 계명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못 지킨 죄에 대해서 그에 합당한 형벌을 받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가 죽음의 형벌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이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명정대함이 나타납니다. 택자들의 죄악을 처벌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 처벌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칭의란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는 것입니다. 칭의란 죄사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냥 그 죄를 눈감아주심으로 간과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본래적인 공의(공명정대함)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공명정대함)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죄인들에게 구원의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자도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냥 독약을 먹고 죽으셨다든지, 아니면 단두형으로 잠깐만 고통을 겪는 죽음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끔찍한 채찍질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에 달려 있는 쇳조각으로 인해서 맞을 때마다 예수님의 살점과 신경이 뜯겨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정신이 돌아버릴 정도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끔찍한 채찍질을 맞으면서 나무를 등에 지고 처형 장소에까지 가셨습니다. 그리고 양손과 발에 못이 박혀 십자가에 고정되어 매달리셨습니다. 그리고 옷이 발가벗겨진 채로 매달림으로 대중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엄청난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 피를 쏟는 가운데 말라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의 영혼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천벌을 여과 없이 정확하게 다 예수님께 쏟아 부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값없는 은혜이지만, 값비싼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우리의 죗값을 다 치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킨... 곧 율법의 공의를 만족시킨 것의 첫 번째 측면입니다.


2) 적극적인 측면의 칭의 -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살인자가 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죗값을 다 치렀으니깐, 이제 그 사람을 생각할 때, “그전에는 그렇게 미웠는데 죗값을 다 치루고 나니깐 너무 그 사람이 그립고 사랑스럽고 보고 싶어...” 이런 마음이 듭니까? 형벌 받고 죗값을 다 치렀어도 그 사형수는 여전히 죽일 놈입니다. 죗값을 다 치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기억되려면 정말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처럼 살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용납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것에 있어서 단순히 죗값을 다 치르고 형벌을 다 받은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십자가 처형을 당해 죽었으면 이제 율법적인 공의의 한 측면만 완성되었을 뿐이지, 그것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영생으로 보상하시는 그러한 관계로 이끌어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의 두 번째 측면인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우리의 순종으로 여겨주시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시는 칭의의 개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의상 죄사함을 칭의의 소극적인 측면이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칭의의 적극적인 측면이라고 말합니다.)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물론 위의 구절 중에서 로마서 말씀의 경우는 논쟁이 되는 구절이지만, 그 앞에 스가랴 말씀과 고린도후서 말씀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증거 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이 두 가지는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로 연합해 있습니다.


칭의의 두 가지 측면.jpg

 


위 그림은 아래 구절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25)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 구절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칭의의 소극적인 측면이 죄사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 옛사람이 죽음으로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형에 처형되어 모든 죗값을 다 치르고 죽어서 무덤에 묻혔기 때문에 이제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죽은 자에 대해서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기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지 못하다면, 죗값을 다 치렀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함께 죽기만 했다면 우리의 죄책이 다 해소되었기 때문에 무죄상태는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을 받는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나’는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예수의 지체로서 ‘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일부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개별적으로 보지 말고 주님 안에 있는, 주님의 일부로 우리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교회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자아’가 없습니다. ‘교회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일부이고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율법을 온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30살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예수님의 칭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30년 인생을 사시면서 온전히 율법을 지키셨기 때문에, 그리고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음성으로 칭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예수님이 온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기뻐하시고 예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의 머리는 좋아하는데 몸은 싫어하실 수 있습니까? 어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의 머리에다가는 뽀뽀를 하고 너무 잘해주는데, 그 몸은 마음이 안 든다고 매일 때리고 발로 차고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머리가 사랑스럽다면 몸도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머리와 몸은 모두 그 여자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는 우리를 개별적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일부로 보십니다. 우리를 예수로 보시고, 예수 대접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모든 계명을 어겼고, 또 우리의 양심이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음을 우리에게 고소하고, 지금도 하나님을 거스려 모든 악으로 향하는 죄악된 본성이 여전히 우리 마음에 있어서, 날마다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절망하고 고통을 당하지만, 그러나 내가 받을 만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붙어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예수 대접해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또는 온전히 율법을 순종한 자인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의 은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을 보십시오.


60문 :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습니까?
답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비록 나의 양심이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반해서 심각하게 죄를 지었음과 그 어느 하나도 결코 온전하게 지키지 못했음에 대해서 나에게 가책을 주고 또한 지금도 나에게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을 만하지도 않지만 순전한 은혜로써 하나님께서는 마치 내가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것처럼 또 죄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또한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온전히 복종하신 것처럼 내가 온전히 복종한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 의, 거룩하심을 내게 허락하시고 내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31)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0-31)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속함이 되셨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예수의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을 우리가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얻으신 모든 지위와 권세와 특권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예수 안에서 교회가 똑같이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전혀 받을 만하지 않는데도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거저 주신 것입니다. 다른 구절에도 보면...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인 측면의 칭의입니다.


3) 칭의의 은혜를 받았으면


그러므로 우리의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것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을 우리의 것으로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는 죄용서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상속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은 죄사함은 인정하지만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부정합니다. 알미니안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온전히 순종해주셨다는 교리가 신자의 성화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오해로서 참으로 이 칭의의 은혜를 받은 신자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감사의 열망은 반드시 성화의 열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살펴보겠습니다.


참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신자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만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무수한 실패와 범죄, 그리고 내면의 부패로 인해서 매일 매일을 신음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서 율법의 종노릇하며 살아갑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소망이 없다”고 하거나 “이제는 하나님께 나아갈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감당치 못할 죄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은 무한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살든 못살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내가 전혀 받을 만하지 않는데도 나를 예수 대접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를 깨달아서 자신이 선하게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입겠다고 하는 교만과 자기 의를 버리고 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해야 합니다. 수거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오직 예수님께 나아옴으로써 그 짐을 내려놓고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님 안에서 참 쉼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 쉼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목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러한 칭의의 은혜에 우리가 푹 잠겨 살아갈 때에 놀랍게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죄가 죽어져서, 궁극적으로 성화의 삶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 1:22-23)


끝까지 믿음으로 살고, 칭의의 은혜를 붙잡고 살면, 우리가운데 거룩하고 흠 없는 성화의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말입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7)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그 안에서 행하라는 말은 이 칭의의 은혜를 늘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라는 말입니다. 이 은혜의 이신칭의 교리에 뿌리를 박고 거기에 굳게 설 때만이 우리 안에 감사함이 넘치고, 그리하여 그 감사가 성화의 열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생명력과 성화의 열매와 헌신의 삶의 모든 토대는 바로 이 이신칭의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로 이 이신칭의 교리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 마귀와 거짓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표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골로새서 말씀을 보면...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바울 당시에 교회에는 항상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신율법주의가 끊임없이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이 가르침에 대해서 경고하고 대적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로마가톨릭의 행위구원론적인 가르침, 알미니안적인 가르침이 교회 가운데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으로 그런 가르침들을 분별하여야 하며, 거짓선지자들과 그들의 가르침들을 교회 가운데서 끊임없이 내어 쫓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거짓선지자들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장 지독한 바리새인의 율법주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자기 의를 내세우기 위해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려는 바리새인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회심해서 이 이신칭의의 은혜 안으로 다시금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이 이신칭의 교리를 묵상하면서 이 칭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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