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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강설날짜 2014-01-01

◆ 2014년 신년사경회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

 

 

● 일 시 : 2014년 1월 1일(수)

● 발 제 :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

 

“심방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장로 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

 

 

창 원 한 결 교 회

<사경회 일정>

 

◆ 2014년 1월 1일(수) 오후 3시 ~ 오후 9시

 

오후 3시-4시 : 팀별 감사제목 및 신년 기도제목 나눔.

4시-6시 : 제1강 -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손재호 목사).

6시-7시 : 저녁식사.

7시-9시 : 제2강 - 심방의 성경신학적 이해(손재호 목사).

 

<제목 차례>

 

[1강]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1

[2강] 심방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22

[부록1] 장로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35

[부록2]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39

 

 

2014년 신년 사경회(1월 1일)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장로의 심방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장로의 심방’이라는 말이 이상한 말이 되어 버렸다. 심방은 부목사나 여전도사가 하고 심방하는 장로는 별로 없다. 그러나 장로의 심방은 장로교회의 헌법이나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와 임직 예식문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장로가 심방을 하면서 교인을 영적으로 돌보는 것은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방하는 장로에 대한 교회법의 규정을 살피고, 그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우리교회가 앞으로 장로를 세워 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한 공부는 여러 면에서 유익할 것이다.

 

1. 장로교교회 정치와 개혁교회 장로 임직 예식문

 

 

1) 장로교의 전통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은 1884년이고, 독노회를 결성한 것은 1907년, 총회를 구성한 것은 1912년이다. 독노회를 구성하기 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규칙”을 1904년에 작성하여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는 장로가 한 지역 교회에서 목사와 함께 신령한 일을 살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규정하였다.

 

 

“장로는 지교회 교인들에게 택정함을 받고 또 목사에게 안수함으로 세움을 받아 목사로 더불어 지교회의 신령한 일을 살펴 다스리는 자라.”

 

 

1915년부터 14인의 위원이 “웨스트민스터 장로교 교회 정치”(1645년)를 기준으로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919년에 총회에 제출하였다. 한글 맞춤법에 따라서 개정한 1934년판에서 ‘장로의 직무’로 명기한 부분을 인용하겠다.

 

 

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대표자가 되여 목사와 협동하야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 지교회 혹 전국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하며 주께 부탁을 받은 양무리가 도리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키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대 회개치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할 것이며 교우를 심방하대 특별히 병자와 조상자(遭喪者)를 위로하며 무식한 자와 교회 내 유아를 양육하고 간호할 것이니 평신도라도 애(愛)의 법칙을 행할 의무가 있거든 장로는 신분상 의무와 직무상 책임에 더욱 중하니라. 장로는 교인과 함께 기도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교인 중에 강도(講道)의 결과를 찾자보며 질병과 애척(哀戚)을 당한 자와 회개하는 자와 특별히 구조 받을 자가 있을 시에는 목사에게 보고할 것이니라.

 

 

장로의 직무를 밝힌 이 부분은 대부분 장로가 어떻게 심방을 하고 영적으로 다스릴 것인가를 규정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과 고신측이 연합하여 작성한 1962년 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작은 제목으로 위의 내용을 정리하였다.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3)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한다.

4) 교인의 신앙을 살피고 위하여 기도한다. 교인중에 강도의 결과를 찾아본다.

5)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다섯 가지 제목으로 장로의 직무를 잘 요약하였는데, 교회의 신령한 면을 살피고 돌보기 위하여서 심방을 하고, 목사가 전한 말씀이 교인들 가운데서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장로의 중요한 일이었다. 복음의 도리를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 아니라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무식자]과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 곧 요리문답의 교육도 장로가 사랑으로 행하여야 할 일로 지적하였다.

 

그런데 초기의 장로교 헌법들을 비교하면 1934년판의 처음 문장은 두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1922년 판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치리 장로란 교인의 택함을 받고 대표자가 되여 목사와 협동하여 치리와 권징의 사(事)를 관리하며 지교회 혹 전국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통솔하나니라.

 

1922년판에는 치리 장로가 목사와 함께 ‘치리와 권징의 일’을 담당하는 직무라고 밝힌다. 그런데 1934년에는 ‘행정과 권징’으로 바뀌었다. ‘치리와 권징’, 즉 영적인 다스림이 ‘행정’으로 바뀌어서 정착하였다.

 

또 하나 차이가 있는 구절이 있다. 1955년판에는 “장로는 교회의 택함을 받고 치리자가 되어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며”로 시작한다. 그런데 1955년판에는 ‘교인의 대표자’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첫 문장에서 이렇게 두 부분이 바뀌었다. 1919년에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면서 1645년의 “웨스트민스터 장로교교회 정치”를 토대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거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 두 구절이 있는가를 살펴보자.

 

유대인 교회에서 백성의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데서 제사장과 레위인과 연합하였듯이, 교회에 정권(政權)을 세우시고 교회적인 치리자를 두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사역자 외에 그의 교회의 몇 사람에게 다스리는 은사를 주시고, 그들이 그 일로 부름을 받았을 때 교회를 다스리는 일에서 목사와 연합하여 그 일을 수행하도록 위임하셨다. 개혁교회에서는 그러한 직분자를 보통 장로라고 부른다.

 

 

“장로교교회 정치”에서는 장로를 ‘목사와 연합하여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가르치고 ‘행정’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장로를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 곧 ‘선물로 주신 직분’으로 이해했지 ‘교인의 대표’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논란이 된 두 부분 즉 장로가 행정의 일을 관리한다는 것과 교인의 대표자라는 말이 이후 한국 장로교회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장로직은 원래 심방을 하는 영적인 직무로 규정되어 있지만 후에는 행정의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 되었다. 또한 교인의 대표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라는 생각이 약해지고, 목사와 함께 영적인 직책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인 편에서 목사를 견제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영적으로 돌보면서 심방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에서 소요리문답을 가르쳐야 할 것을 이야기하고, 가르칠 사람으로는 부모뿐 아니라 ‘장로’와 목사를 들었다. 장로가 교리를 가르치고 영적으로 감독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심방하는 것이 헌법에는 규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초기에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가르치는 일이 있었지만 그 전통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고,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시행도 되지 못하고 사문화(死文化)하였다.

 

 

2) 개혁교회의 전통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장로의 직무에 관하여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도르트 교회법, 장로의 임직 예식문에서 다룬다. 신앙고백서에서 원칙을 밝히고 교회법에서는 시행 원칙을, 그리고 예식문에서는 구체적인 시행의 방법을 밝혔다. 세 문서를 각각 살펴보겠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 30조에서는 ‘교회의 통치’에 관하여 고백하면서 목사와 장로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이 참된 교회는 우리 주께서 그의 말씀에서 가르치신 영적인 질서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함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할 목사가 있어야 하며 또한 목사와 함께 교회의 회의를 구성할 장로와 집사가 있어야 한다.

 

 

그 신앙고백을 근거로 도르트 교회법에서는 ‘장로의 직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장로 직분의 특별한 의무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회원들이 복음에 따라서 교리와 생활에서 정당하게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감독하는 것, 회중의 성원들을 충실히 심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교훈하고 훈계하며 부적절하게 행하는 자는 책망하는 것, 믿지 않고 불경건하며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기독교적 권징을 시행하는 것, 성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살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이므로 회중에서 모든 것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되도록 주의하며, 그들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한다. 끝으로, 좋은 조언과 충고로 말씀의 사역자를 돕고 그들의 교리와 생활을 감독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신앙고백서와 교회법에 근거하여서 “장로 임직 예식문”을 사용하는데, 그 예식문에서는 영적 감독과 심방을 장로의 첫째 직무로 꼽는다. 독립개신교회에서 확정하여 채택한 예식문은 장로의 직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예식문은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교회를 영적으로 감독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첫째, 장로는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감독하는 과업을 맡았습니다. 모든 교우 하나하나가 복음의 말씀을 따라 교리와 생활에서 단정하게 생활하는가를 감독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회중의 집을 성실하게 방문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가르치고 권면하며, 단정하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책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그리스도적인 권징을 행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이 예식문에서는 장로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첫째로, ‘감독하는 과업’을 꼽는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명령하셨는데, 장로는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을 교우들이 잘 간직하고 살아가는지를 살펴야 한다. 감독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관련이 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징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1-12).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이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에 장로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교우를 권면하고 위로하고 징계하여야 한다. 특히 회중의 집을 성실하게 심방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가르치며 훈계하고 단정하지 않게 행하는 사람은 책망하여야 한다(딛 1:9).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권징을 행하여서 성례가 정당하게 시행하도록 감독할 책임이 장로들에게 있다.

 

둘째, 장로는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로서 회중이 모든 것을 단정하고 질서 있게 행하게 하여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서 그들은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교회의 치리회를 구성한다.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떼를 목양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도 교회의 강단에 서는 일이 없도록 지켜야 한다.

 

 

장로는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모든 것이 단정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청지기’는 집안의 보물을 지키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복음을 잘 관리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도록 해야 한다. 장로는 또한 ‘목자’로서 말씀의 사역자와 함께 주님의 양떼가 주님의 말씀을 잘 먹고 장성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셋째, 장로는 말씀의 사역자와 좋은 의논도 하고 조언도 하여서 치리와 목회를 도와야 하며, 동시에 함께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목사의 교리와 행동을 감독할 책무가 있다. 그들은 그릇된 가르침이 전파되지 않고 회중이 모든 면에서 복음의 순수한 가르침으로 세워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선한 목자의 양 우리 안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양떼의 목자로서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려면 장로는 경건에 이르기를 스스로 훈련하여야 하며,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하여야 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행하도록 갖추어 준다.

 

다스리는 장로는 말씀의 사역자인 가르치는 장로와 서로 의논도 하고 조언도 하여서 치리와 목회를 돕는 직책이다. 동시에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 봉사하는 목사의 교리와 생활을 감독할 책임이 있다. 이상한 교훈이 교묘한 방식으로 회중에게 전파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하고, 선한 목자의 양 우리에 흉악한 이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지켜야 한다.

 

다스리는 장로가 가르치는 장로를 감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장로가 그러한 훈련을 받은 목사의 교훈을 예민하게 식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임할 수 있는 장로는 없을 것이다. 예식문은 ‘경건에 이르기를 스스로 훈련하여야 하며, 성경을 부지런히 상고 하여야 한다’는 말로 그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친숙히 알고 주님에게서 배운 장로만이, 생명을 주는 꼴이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지 아니면 독초가 나누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항상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자란 장로가 지금 선포되는 양식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장로는 이러한 방식으로 목사의 교훈을 감독한다.

 

장로와 목사가 서로 감독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감독’이라는 말 때문에 목사와 장로의 우월성을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장로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1-4). 베드로 사도는 자기를 장로로 칭하면서 동료 장로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목자장’이 되심을 말하고, 주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로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고 한다. 목자장 되신 주님 앞에서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함께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다. ‘직분의 동등성’은 주님 앞에서 서로 섬기면서 봉사하는 것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말이다.

 

3) 종합

장로교회에서나 개혁교회에서나 장로의 주된 임무로 교회를 영적으로 감독하고 그 일환으로 회중의 집을 심방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장로가 심방을 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외적으로만 모방하여 심방을 한다고 하여서 개혁교회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좋은 조문이 사문화한 현실에서 제도만 갖추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심방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펴보고, 거기에서부터 메마른 땅을 기경하는 심정으로 교회의 제도를 갖추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동토에 파종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성경의 교훈

 

 

1) ‘감독’이라는 용어와 심방

장로는 성경에서 여러 용어로 불린다. 나이가 많고 지혜가 있고 권위가 있다는 의미에서 ‘장로’라고 하고, 교인들의 생활을 살핀다는 의미에서 ‘감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집의 살림을 돌보기 때문에 ‘청지기’라고도 하고 교인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인도자’라고도 한다.

 

2세기 이후에는 장로들 가운데서 더 뛰어난 사람을 ‘감독’으로 불렀지만, 성경에서는 장로와 감독이 같은 직분이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였는데(행 20:17) 그들을 ‘감독자들[감독들]’(행 20:28)이라고 불렀다(참조. 딛 1:5, 7). 디모데전서 5:17절에서는 교회에서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와 ‘가르치고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를 구분하여서 이야기한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서 ‘다스리기를 잘하는 장로’를 ‘(다스리는) 장로’라고 부르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장로’를 ‘목사’라고 부른다. 말씀대로 다스리는 것이 목사와 장로의 공통 직무이다.

 

장로를 ‘감독’이라고도 부르는데, 감독이라는 말은 우리의 주제인 심방과 연결된다. ‘감독’ 곧 ‘에피스코포스’(ejpiskophvς)라는 말은 ‘본다’ ‘살핀다’는 말에서부터 ‘검사한다’ ‘방문한다’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감독은 다스리는데 특별히 ‘심방하면서 살피는 사람’을 가리킨다. 장로는 ‘심방을 하면서 감독하는 직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 구절들을 살필 때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2) 구약의 용례 - 파카드(dq'P)

감독(ejpiskophvς-에피스코포스)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dq'P’(파카드)이다. ‘파카드’는 ‘보다, 살피다, 방문하다, 군대를 소집하다’ 등과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어가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하나님께서 임명하신다’ 하는 독특한 뜻을 갖는다.

 

첫째, 여호와의 방문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21: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사라를 권고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고 보살피셨다고 번역하였는데,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사라를 방문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였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찾아오셨으나(창 17장) 사라가 여전히 믿지 않았을 때 사라를 믿게 하시려고 두 번째로 찾아오셨다(창 18장). 여호와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말씀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언약을 이루시는 또 다른 예는 요셉의 유언이다. 창세기 50장에 보면 요셉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권고’[파카드]하실 것을 말하면서 자기의 유골을 가지고 올라갈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창 50:24-25). 여호와께서 언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어서 출애굽의 소식을 전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파카드]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다(출 4:31). 출애굽의 구원은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일이라고 가르친다.

 

둘째, 여호와의 방문은 심판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우상을 만드는 사람에 대하여서는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파카드]” 하시고(출 20:5),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파카드]”하신다(출 32:34. 참조. 사 10:3).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을 치라고 하시면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파카드]”한다고 하셨다(삼상 15:2). 여기에서는 추억(追憶)한다고 의역하였지만, 원문대로 하면 아말렉이 대적한 일에 대하여서 여호와께서 이제 친히 ‘방문하여서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사울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울은 이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야 하였다.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시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고, 사무엘에게서 폐위의 선언을 들었다.

 

셋째, 여호와의 방문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과 관계가 있다. 아말렉을 방문하실 때에 사울을 세워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것도 여호와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방문하신다는 예가 된다. 좀 더 현저한 예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후계자를 구할 때이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파카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방문하시는데, 이것은 곧 직분자를 ‘세우시는’ 것이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의 심방을 대신하면서 구원과 심판의 사실을 전할 직분자를 세우신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3) 신약의 용례 - 에피스코포스(ejpiskophvς)

‘파카드’(‘dq'P’)에 대응하는 헬라어 ‘에피스코포스’(ejpiskophvς)의 용례를 찾아보면 구약의 용례와 놀랍게 유사하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의 돌아보심/찾아오심’으로 찬송한다. 사가랴의 찬송은 여호와의 찾아오심에 대한 찬송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에피스코포스] 속량하시며”(눅 1:6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에피스코포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눅 1:78-79).

 

예수님의 탄생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심으로 이해하고 찬송하는 것은 구약의 뜻을 잘 깨닫고 표현한 것이다. 출애굽의 구원도 여호와의 찾아오심으로 이해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실 더 큰 구원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찬송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다음에도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생각하였다(눅 7:16).

 

둘째,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셨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서는 심판을 선언하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할 때 그 근거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오심을 거부하는 것을 들었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眷顧)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4). 여기에서 권고 받는 날은 직접적으로 심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에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으로 가르친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찾아오실 때에는 사람을 도구로 쓰신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 사도의 보고를 이렇게 요약한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에피스코포스]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행 15:14). 고넬료를 찾아간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베드로가 혼자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찾아가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면(벧전 2:8-9) 이방 사람들이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에피스코포스]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가르친다(벧전 2:12).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는 신약의 백성을 통하여서 다른 사람을 찾아가셔서 구원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찾아오심은 직분자를 세우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사도행전 6:3절에서는 일곱 사람 곧 일곱 집사를 세워서 그들에게 봉사의 일을 맡기는 것을 ‘찾아오심’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 집사는 성신과 지혜가 충만하여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그릇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다.

 

 

3. 예배와 하나님의 찾아오심

 

신약과 구약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 곧 ‘심방’에 대한 성경 구절을 살펴보았는데, ‘하나님의 찾아오심’은 오늘날에도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상 숭배자는 자기들이 만든 신에게 헛되게 절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의 진리를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경배한다. 하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시고(요 4:23-24), 우리가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 하나님 안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신다. 하나님과 만남이 없는 예배는 헛된 예배이다(사 1:12-13). 따라서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이 시간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오냐, 너는 참말로 나한테 예배를 잘한다’고 하실 만한 그러한 예배를 드리게 해 주시옵소서. 제가 스스로 하기가 어렵사오니 하나님의 성신으로 저를 이끄셔서 반드시 그것을 하게 합소서” 하고 기도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찾아오셨고, 임마누엘로서 이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하시면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효과가 있게 사용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28:18-20). 성자께서는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4문은 이 내용을 아주 잘 담아서 가르친다.

 

문: 거룩한 복음의 강설을 통하여 어떻게 천국이 열리고 닫힙니까?

답: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마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사실이 신자들 전체나 개개인에게 선포되고 공적으로 증언될 때 천국이 열립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문을 여시고 우리로 하여금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나아오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순종하면서 나아오도록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배우면서 주님과 언약의 교제를 누린다. 주님께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찾아오시면 우리는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께 나아간다. 이것이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러서 신약의 성도가 드리는 예배이다(히 12:22).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이야기하면서 ‘예배’를 이야기하였는데, 이것이 다음에 논의할 ‘장로의 심방’의 기초가 된다. 구원의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예배에서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장로가 심방하는 것에 큰 열매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장로의 심방이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빈약하고,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나아오시는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배에서 목사를 통하여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장로가 심방하여서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초를 놓지 않으면 그 위에 건물을 세울 수 없는 것처럼, 예배에서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약하면 장로의 심방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다.

 

4. 장로의 심방

 

1) 장로의 심방의 성격

삼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이 과거의 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하여서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말씀의 사역자를 사용하셔서 예배 때마다 찾아오신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찾아가서 살피는 직분’ 곧 ‘감독/장로’의 직분을 더 신중하게 생각한다.

 

장로의 심방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일의 일부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가르침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키게 하는 것’과 연결된다(딛 1:9). 따라서 전파된 말씀이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것은 복음 사역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바울 사도는 2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에피스코포스]하자”(행 15:36).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어떠한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것이 직분자로서 심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공적으로 선포되면 그 결과를 살피는 것이 직분자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일이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고 가르치고”라고 말하면서 3년의 사역을 회상하였다(행 20:20). 사도는 공적인 예배에서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각 가정을 심방하여서도 가르치고 말씀이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폈다.

 

따라서 장로는 다른 사람을 찾아갈 때 개인적인 자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 일을 감당한다. 성도의 고충을 알기 위하여서 심방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부족한 것이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자로서 교인의 형편을 살피고 당회에 보고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역시 부족한 생각이다. 장로는 개인적인 친밀함을 이용하여서 설득하는 ‘상담자’도 아니고 ‘고충 처리 위원’도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냥 하늘로 돌아가는 법이 없고(사 55:11), 구원의 열매를 맺든지 아니면 심판의 열매를 맺는다. 풍부한 말씀을 받았으니까 좋다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심방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서 말씀과 함께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시고, 장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각 가정을 심방하여서 그 열매를 확인한다. 1934년 장로교 헌법의 표현을 인용하면 “교인 중에 강도(講道)의 결과를 찾아보며” 심방한다.

 

장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이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를 살피는 직책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이해하면 장로의 직분은 교회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세례를 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이 있다(마 28:18-20). 따라서 가르치는 것뿐 아니라 ‘지키게 하는 것’ 곧 장로가 목사와 협동하여서 심방하고 영적으로 감독하는 것은 교회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바울 사도가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었다(딛 1:5). 장로가 없는 것은 교회의 ‘부족한 일’이고 채워져야 할 일이다. 이 직분[장로직]을 활기차게 행사하는 일이 없이는 교회가 제대로 움직이거나 꽃피울 수 없다.

 

2) 심방의 여러 가지 면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말씀의 열매를 확인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 감독[에피스코포스]의 자격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을 보면,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딤전 3:2),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하고 가르친다. 성령 하나님과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손발 노릇을 하려면 먼저 말씀을 잘 알고 가르칠 수 있어야 감독[에피스코포스], 곧 ‘심방하는 장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대리하여서 심방하는 것은 공적인 예배와 다르고 따라서 심방할 때 설교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말씀에 대한 감독은 ‘목자’로서 하는 것이다. ‘감독’이라는 말이 ‘목자’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목자와 감독’이시다(벧전 2:25). 그분이 직분자를 세워서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게 하신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목양하게] 하셨느니라”(행 20:28). 감독과 목자라는 말이 함께 사용된 데에서 우리는 교인을 돌보는 것이 목자의 심정으로 하는 것임을 배운다. 감독의 다스림은 목자의 섬김에 의한 다스림이다. 여호와께서 목자로서 양을 안고 구원하셨다(사 40:11). 선한 목자는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서 인도하여 내신다(요 10:3).

 

셋째, 장로의 심방은 ‘신령한’ 다스림이다. 따라서 다루는 주제도 신령한 것이어야 하고 다루는 방법도 신령하여야 한다. 물론 찾아가서 심방하는 장로가 인생의 선배로서 할 이야기도 있겠지만, 심방의 목적은 교회에서 내려주신 말씀을 어떻게 받아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다스리는 방법도 신령하여야 한다. 사람인 직분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직분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므로 직분자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셨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도와 함께 갔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기도하셨고(눅 9:18),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것을 고백하였지만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혈육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하였다(마 16:17). 사람인 장로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분자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가시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 점에서 장로의 심방은 신령한 다스림의 일부이다.

 

넷째,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방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게 돌아가는 법이 없고(사 45:23),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을 행한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구원과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슥 10:3) 장로도 두 가지 목적을 위하여서 심방한다.

 

5. 우리의 현실과 과제

 

1) 우리의 현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심방하는 장로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장로가 별로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을 목사와 장로와 교인의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목사들이 바쁘다고들 한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발로 목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하지 않고 ‘발로 목회한다’는 심정으로 사역하는 것은 목사 직분의 타락이다. 물론 목사도 말씀을 바르게 받는가를 살피기 위하여서 심방을 하지만, 목사의 주된 임무는 말씀의 식탁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목양(牧羊)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양에게 꼴을 먹이고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는 것이다. 말씀을 풍성하게 전하지 않고 빈약한 식탁만 제공하면서 발로 목회하는 것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전하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심방하면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만을 맺게 된다. 목사와 교인의 개인적인 관계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공적인 문제로 비화하게끔 되어 있다. 심방은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이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장로가 심방하려면 먼저 말씀을 배우고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대로 사는가를 영적으로 감독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를 ‘장로들의 교회’(elders church)라고 이해한다고 한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로 자임하면서 교회 행정을 총괄하려고 하고 목사와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대립 구도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교회에서도 장로로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사람이 교회에 경제적으로나 여러 면으로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직분의 세속화이고 교회의 세속화이다. 불신자에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의 장로가 될 수 없지만(딤전 3:7), 불신자에게 좋은 평판을 얻는다고 하여서 곧 장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로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감독하고 은혜의 복음으로 위로하는 일을 맡는다. 따라서 교인들의 영적인 필요를 모르거나 자기의 일에 바빠서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장로교회가 취하는 헌법을 따르면 장로가 심방하도록 되어 있으나 장로교회의 현실을 보면 장로가 심방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장로가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배에서도 맛보지 못하고, 직분적으로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심방을 받는 교인들에게도 생각할 점이 있다.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다 꿰뚫어 보시고 드러내 보이실 때(히 4:12-13), 우리는 그 말씀과 함께 찾아오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나아가야 한다.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받지 않으면서 목사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를 무시하는 일이다. 부목사나 심방 전도사의 심방보다는 담임 목사의 심방을 선호하는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기에도 역시 직분관에 문제가 있다. 담임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나 부목사가 전하는 말씀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차이를 두면 안 된다. 심방을 온 목사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 못 되고, 촌지(寸志)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과 같은 두려운 일이다(참조. 행 8:20).

 

목사와 장로와 교인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공통된 것은 ‘공적 예배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고 ‘직분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의 개혁과 직분의 개혁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바르게 알 때 올바른 직분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2) 예배의 개혁과 직분의 개혁

종교개혁은 말씀과 예배의 개혁이고, 처음부터 직분의 개혁이었다. 성경적인 장로관이 중세에서는 잊혀졌다가 종교개혁과 함께 제네바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말씀과 예배에서 시작한 개혁은, 단순하게 말하면, 장로의 심방으로 열매를 맺고, 개혁된 장로를 통하여서 더욱 힘 있게 전진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우상 숭배적인 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장로가 없고 성직 위계적(位階的)인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자들은 먼저 말씀을 전파하여서 예배를 개혁하였고 장로를 세워서 성경적인 제도를 갖추었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장로가 영적인 감독을 충실히 하였다. 그때 지역 교회가 튼튼히 섰고, 로마 교회도 그러한 교회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 교회의 목사를 투옥시키면 장로가 교인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였고 그 장로를 가두면 다른 장로가 그 일을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막강한 조직과 힘을 갖춘 교황이지만 장로들이 돌보는 작은 교회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종교개혁의 모범을 생각할 때, 말씀과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장로의 심방을 도입하는 것은 별무소용일 것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맛보지 못하면서 제도만 꾸리는 교회는 새로운 문제를 만날 것이다.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1936년)의 창립 목사였던 에이레스(L. E. Eyres)는 “새로 세워져 교회의 연륜이 깊지 못하다면 회중들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장로가 과연 누구인가가 분명히 판단될 때까지 교회의 체제를 완전히 정립하는 일을 연기해야만 할 것이다”고 말하고, 또한 “교회가 장로를 잘못 선출하게 되면 마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소란을 피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언제나 마귀가 승리하고 교회는 패배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심방하는 장로’는 없고 대신에 ‘무임(無任) 장로’나 ‘호칭(呼稱) 장로’와 같은 모순적인 현상이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한국 교회사를 생각하면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3) 개혁된 심방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내려 주셨다. 교우들은 예배에서 선포되는 강설(講說)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열복(悅服)하며,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께 성령 하나님과 진리로 경배한다.

우리교회도 때가 되면 곧 하나님께서 장로의 직분을 행하기에 합당한 자가 준비되면 장로를 임직하고 위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단계에서 직분자를 통하여 찾아오시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이다. 말씀을 통한 예배의 개혁이 교회 조직의 형태로 열매를 맺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임 시점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우리교회가 이러한 일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다. 장로로서 생각할 점이 있고, 교인으로서 생각할 점이 있다.

 

① 장로의 측면

장로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통해 자기를 세우셨음을 확신하여야 한다(행 20:28). 장로 임직 예식문에서 임직자에게 첫째로 묻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님의 회중을 통하여서 이 직분으로 부르셨다고 마음으로 확신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실이 교인의 투표를 통하여 확인되었을 뿐이지, 교인이 선거로 장로를 세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장로는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장로는 말씀을 통하여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심방하기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야 한다. 추수하는 일꾼이 먼저 곡식을 받는 것처럼(딤후 2:6)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야 한다. 자기의 직무를 잘 감당한 사람은 구원을 이룰 것이다(딤전 4:16).

 

둘째, 말씀을 바르게 받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경험하는 장로는 목사와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야 한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사인 딕슨의 말처럼, “모든 점에서 목사의 손을 붙들어 주는 것은 우리[장로]의 의무이고 특권이다. 목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분에 대하여서 좋은 점을 말하고 그분의 사역의 열매를 거두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미국 남부 장로교회의 신학자 쏜웰의 말을 인용하자면, “말씀의 종은 교회의 입이요 장로는 교회의 손”이다.

 

셋째, 교인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장로가 심방하는 것은 그가 교인들 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교인이 어리기 때문에 심방하는 것도 아니다. 교인들은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고(골 3:16), 어떤 문제에 대하여서 교회에 이야기하기 전에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서 권고할 수 있고,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이야기할 수 있다(마 18:15-16). 모든 교인이 그렇게 신령하게 행동할 때에 교회에서 권징의 일을 바르게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마 18:17-18). 그러므로 성도들도 서로 ‘돌아보아서’[에피스코포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펴야 한다(히 12:14-15).

 

가정을 방문하여 이야기할 때 경우에 맞게 지혜롭게 이야기하여야 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의 금 사과’와 같다(잠 25:11). 나단이 범죄한 다윗을 심방하여 지혜롭게 이야기한 것은 좋은 모범이다. 그 심방의 결과로 다윗은 회개하였다. 다윗이 나단에게 죄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도록 인도한 점에서 나단의 심방은 성공이었다(시 51:4).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심방한다고 하였는데, 잘못하면 심방하는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강요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쌍방 간의 다툼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서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면, 장로도 기다려야 한다. 어느 때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이 떠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돌아올 때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② 교인의 측면

교인들은 예배에서 말씀을 바르게 받고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를 내어 놓고, 심방하는 장로에게 집안 문을 열어 주면서 그를 하나님의 직분자로 환영하여야 한다. 장로를 개인적으로 대하여도 안 되고, 나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마음에 두고 대하여도 안 된다.

교우들은 심방하는 장로에게 자기의 잘못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야고보 선생은 교회의 장로를 청하라고 하고,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고 가르친다(약 5:14-16). 제가 목사이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교제 속에서도 늘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방하여 질문하면 ‘모범 답안’만을 이야기 하기 쉽다. 집안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그 밑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혁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큰 노력이 필요하고 어느 경우는 몇 세대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 될 것이다.

 

4) 새로운 일과 선한 일

심방하는 장로,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는 ‘새로운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잘 나타내는 일이다. 목자의 심정으로 교인을 돌보고 말씀으로 권고하고 기도하면서 붙들어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는 말씀처럼(딤전 3:1), ‘선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 가운데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온전하게 이루시기를 소망하며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김헌수(독립개신교회-대전 성은교회) 목사의 글을 조금 편집하고 정리하였다(「성경이 가르치는 집사와 장로」성약출판사. 8장).

 

 

 

 

2014년 신년 사경회(1월 1일)

 

심방에 대한 성경신학적 이해

 

 

어떤 목사는 “무릎으로 목회한다”고 한다. 기도에 힘쓴다는 말일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심방 목회”라는 말도 쓴다. 아마 심방을 중시하는 목회라는 뜻일 것이다. 목회에 수반하는 심방은 봄과 가을 대심방 외에 환자 심방과 같은 다양한 심방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심방을 수행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어떤 목사는 심방을 시간 낭비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은 한국 장로교회의 특성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장로가 심방을 하기보다 목사가 심방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분의 타락이다. 목사는 양무리들을 풍성한 꼴로 먹이는데 힘써야 한다. 그리고 심방은 장로가 힘써야 할 일이다. 이 말은 목사가 심방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필요시 목사가 심방을 해야 한다. 그러면 장로에게 있어서 심방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이며, 그 성경적 근거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장로가 과연 어떤 자세로 심방을 해야 할 것인가? 심방은 단지 교회부흥의 수단이기만 한 것인가? 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심방의 성경적인 근거를 찾아보고, 이어서 교회사적인 증거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1.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근거

 

 

1) 성경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는 구절은 마태복음 25:36절의 말씀이다.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했다. 여기서 ‘돌아보았고’라는 이 동사는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자비로운 방문의 의미로 종종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종교개혁 이후의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환자와 갇힌 자를 심방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하여 시행해 왔다. 여기에다 더하여 성찬을 앞두고 교리공부를 하거나 성도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심방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단락의 말씀은 심방만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심방과 아울러 함께 생각하여야 할 말씀으로 여겨진다. 마태복음 25:35-36절을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했다. 이 같은 일들은 비단 장로만 힘쓸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힘써야 할 일로 여겨진다.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늘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이런 일을 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같은 삶의 방식은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물었을 때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대답해 줄 내용이다.

 

칼빈도 이 면을 중시하며 조심스럽게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만약에 우리의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이었다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여기서 우리의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말이 될 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하고 올바른 행동을 격려하는 데 있었으므로 이 말씀의 의미를 행위의 공로라는 면에서 억지로 짜내는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다. 나아가 선행에 대한 보상과 관계하여서도 “우리는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저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여기 언급된 내용과 관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의 전체적인 특징을 자세하게 나열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열중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몇 가지 사람의 임무를 예를 들어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도 물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높으며,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진정한 의의 실례를 추켜세워 주시고 있다고 한다.

 

2) “돌아보았고”와 같은 단어를 야고보서 1:27절에도 쓰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다(약 1:27). 칼빈은 “곤궁한 경우에 ‘돌아본다’는 것은 압박 받고 있는 자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편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이 본문은 굳이 장로가 아니라도 성도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일반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삶이 이러하다면, 장로들에게 요구되는 삶은 오죽하겠는가? 장로로서 우리의 시선이 무엇을 향하고, 어디를 향하는가가 참으로 중요하다.

 

3) 성도 서로 간에 돌아보도록 권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5절을 보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라고 했다. 여기서 굳이 ‘방문’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의미적으로 서로 연관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게’라는 이 단어는 신약에서 19번이나 쓰였음에도 거의 대부분 ‘염려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본문에서처럼 쓰인 경우는 거의 유일한 경우이다. 빌립보서에서는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한다”(2:20)는 의미로 쓰였다.

 

4) 교회의 감독으로서의 일 중에 중요한 일이 교회를 돌아보는 일이다. 디모데전서 3:4-5절을 보면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라고 했다. 여기서 ‘돌아보리요’라는 말은 ‘무엇을 염려하다’ 혹은 ‘누구를 감독하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내용과 관련하여 목사와 장로의 심방이 고려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칼빈은 이 구절을 주로 다스림의 의미로 해석하였는데, “자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모든 백성을 통치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한 논리이다”고 하였다.

 

5) 목자의 표상(렘 23:2; 겔 34:4; 슥 11:16; 요 10:11-15, 10:10; 벧전 5:2-4). 유사한 의미의 단어가 구약 여러 곳에서 목자의 표상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예레미야 23:2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다. 칼빈은 여기서 ‘돌아보지 아니하였다’와 ‘보응하리라’는 말씀을 “et non visitastis eos”와 “ego visitans(hoc est, visitabo)”로 번역하였으며, “이것은 분명히 양무리를 돌보지 아니하고 기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으며, “여기에서 ‘돌본다’는 것은 감독하는 모든 직무에까지 확대되는 것으로, 그는 그들이 양무리를 방치하고 배신하고 버렸다는 것을 말한 듯하다”고 덧붙였다.

 

에스겔서 34:4절을 보면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고 했다. 여기서는 직접 visit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으나, 목자로서 양을 “돌아보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내용들이다.

스가랴 11: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고 했다. 칼빈은 ‘마음에 두지’라는 이 구절을 “non visitabit”로 번역하고 있으며, “세심한 목자들은 양떼로부터 떨어지거나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 이것이 선지자가 ‘찾지 아니하며’라고 말하면서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양떼로부터 없어진 양들을 돌아보리라는 것이다”고 하였다.

 

이러한 목자의 표상은 다시 신약에서 우리 주님께서 쓰신 목자의 비유와 만나는데, 요한복음 10:11-15절과 10:10절을 참고할 수 있겠다. 요한복음 10:13절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라고 했는데 여기 쓰인 ‘돌아보지’라는 말은 ‘돌보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신약에 10회 정도 쓰인 단어이다. 이런 구절들은 참 목자가 할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스승이신 주님께로부터 이런 교훈을 받은 사도가 함께 된 장로들을 향하여 같은 정신으로 교훈하였다. 베드로전서 5:2-4절을 보면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했다. 이 구절은 목자장으로부터 양무리를 맡은 작은 목자로서 어떤 자세로 목양에 임하여야 할 것인지를 잘 깨우쳐 주고 있다.

 

6) 기타 성경적 실례들 :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 외에도 우리는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집을 방문하여 거기 유숙한 일(왕상 17:8-24)이나, 엘리사가 수넴 여인을 방문하여 거기서 식사를 하고 쉬기도 한 사실(왕하 4:8-37)이나, 우리 주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을 즐겨 찾으신 것이나,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의 집을 찾으신 것(요 11장), 그리고 베드로가 다비다의 집을 방문한 것(행 9:36-43) 등을 심방의 좋은 예로 들 수 있겠다. 이 경우들은 단순히 방문하는 정도를 넘어서 그 집에 유하며 지내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그 집에 적절한 은혜를 더해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심방

 

히브리어 ‘dq'P’(파카드)는 헤아리다, 간주하다, 방문하다, 벌하다, 지명하다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방문하다’는 의미로 쓰인 경우에 ‘하나님의 방문하심’이란 맥락에서 이 주제와 연관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 단어가 ‘방문하다’는 의미로는 KJV에서는 57회나 나오는데, 이 경우들을 보면 방문하여서 그 상대방에게 좋게든 나쁘게든 크게 변화가 있게 되는 경우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방문은 많은 경우에 유익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윌리엄즈도 ‘dq'P’(파카드)에 관한 아티클을 쓰면서 구약 전체에 303회나 나오는 이 단어가 문맥에서의 뜻을 확정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말하면서 이 단어가 자주 조심스럽게 시험하다든가, 참여하다, 조심하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데 때로 사람이 주격이 되어 참여하다 즉 방문하다의 의미로 쓰인다(삿 15:1; 삼상 17:18). 이것이 가장 자주 쓰이기는 하나님이 주격이 되어 쓰이는 경우라고 한다. 신약에서의 이에 해당하는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ejpiskoph’(에피스코페)인데, 주로 누가복음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보호하시거나 개입하시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오며, 베드로전서 2:12절에 “권고하시는 날에”(on the day of visitation) 하나님께 영광 돌릴 이방인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으며, 구약에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이 거의 대부분 심판의 때(a time of judgement)를 가리키지만,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하나님의 방문하심(God's visitation)은 축복과 심판의 날이 된다고 한다. 아래에서 몇 가지 구체적인 실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창세기 2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했다. 칼빈 역시 이 구절에 대한 해설에서 ‘권고’라는 단어를 ‘방문’이란 표현을 쓰는데, “모세가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방문이 그분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사실도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2) 창세기 50:24-25절에 보면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고 했다. 이 구절에 대한 강해에서 칼빈은 이사야 8:17절 말씀을 상응시키고 있다.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리라.” 성도는 기다리고 하나님은 그를 찾아주시는 것이다.

 

3) 룻기 1:6절을 보면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들었으므로 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고 했다.

 

4) 사무엘상 2: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했다.

 

5) 시편 8:4-5절에 보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고 했다.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한 강해에서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이 구절의 마지막 단어 ‘dq'P’(파카드)를 ‘방문하다’로 번역하는데, 그것이 이 문맥에 잘 어울리므로 나 역시 그들과 견해를 달리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 단어에는 종종 ‘기억하다’는 의미가 있으며, 그리고 시편 전체를 통해서 그것이 동일한 사상이 서로 다른 말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종종 대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 그것을 ‘기억하다’로 번역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번역일 수 있다”고 하였다.

 

6) 예레미야 15:15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라고 했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권고하사’를 “visita me”로 번역하고 있으며, “여호와여, 당신이 나를 아시오니 나를 기억하시고 내게 찾아오셔서 나의 박해자를 보복해 주소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7) 예레미야 29:10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했다. 칼빈은 ‘너희를 권고하고’를 “visitabo vos”로 번역하고 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심방을 대리하는 역할을 오늘날의 목사나 장로가 부분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이런 근거에서 우리 대한예수교 장로교 헌법에 목사의 직무 중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자를 축복하며, 신자를 심방하며...”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장로의 직무 중에서 “교우를 심방하여 위로, 교훈, 간호하며...”라고 쓰고 있다.

 

3. 교회사적 근거

 

1) 두 종류의 심방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중심으로 보면, 심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평소에 성도를 돌아보는 일반 심방과 병자나 갇힌 자를 찾아가 기도해주고 위로하며 권면하는 특수심방이다. 성경에 근거하여 두 가지의 심방은 부정기적으로, 요청에 의해 혹은 목회자의 판단에 의해 진행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난 세월 동안 교회가 성경에 근거하여 심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심방의 종류나 방법, 시기 등을 다룬 구체적인 기록을 찾기는 어려워 심방에 관한 일정한 이론을 찾기란 쉽지 않다.

 

2)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에서

초대교회의 경우 여성 집사들이나 직분자 ‘과부’들의 주요임무 중 하나가 어려움에 처한 여성 성도들을 돌아보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아, 심방이 장로들이나 남녀집사, 과부들에 의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교회는 세속정부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교구제도와 성직자의 위계질서를 통해 행정적으로 중세교인들의 삶을 통제했을 뿐 아니라, 칠성례전을 통하여 영적으로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생로병사와 결혼, 신앙적 삶)을 지배했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여 보면, 세례나 종유성사를 위한 특수심방의 가능성이 있지만, 정기적인 심방이나 일반심방이 있었을 가능성은 오히려 적어 보인다.

 

3) 종교 개혁기의 교회에서

중세교회의 교리와 관행을 비판하고 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종교개혁가들은 각자가 믿고 주장한 교리에 근거하여 교회를 재정비하였다. 존 칼빈은 제네바 교회를 맡으면서 성도들의 훈련(discipline)의 필요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교회제도의 보완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칼빈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한다고(설교) 믿었을 뿐 아니라, 성도들이 그 말씀을 실제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교회가 감독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확신은 곧 제네바교회가 일반심방제도를 채택하는 근거를 마련해 준다.

 

칼빈이 초안하고 제네바 의회에 의해 수정 통과되어 1541년에 공포된 「교회법(Ecclesiastical Ordinances)」에 의하면, 두 가지 경우에 국한한 심방(환자 심방과 죄수 심방)을 정하고 있다. 환자심방은 병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이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채 사망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 마련되었다. 이 교회법은 누구든지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고 삼일을 병석에 누워있는 것을 금하고 있다. 즉 중환자심방의 경우에는 중세교회가 행했던 종유성사(전례)와는 그 신학적 의미나 방법이 다르지만, 교회가 개인의 죽음을 준비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죄수심방은 주중에 특정 요일을 정하여 다수를 대상으로 교화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 문제발생을 대비하여 두 명의 시의원이 참석하도록 정하고 있다. 죄수들 중에 다른 죄수들과 함께 섞어두는 것이 문제가 되는 자들을 위해서는, 의회의 허락을 받아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위로하도록 하고, 사형을 앞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형수들 역시 따로 만나도록 정하고 있다. 1547년 “제네바 목사회”는 제네바 시에 인접한 지역의 교회들을 심방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1548년 7월부터 목사들이 복음적인 교리들을 잘 전하고 있는지, 설교의 질이 괜찮은 지를 살펴보았다. 이 심방이 목사직 수행을 감독하고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1556년 3월 12일에는 제네바시의 성도들을 위한 일반심방이 제정되었다. 일반심방 법은 컨시스토리(당회)에서 제정한 것으로 제네바시민들의 삶을 살펴보아 성찬을 더럽히지 않는지, 하나님께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고 거룩한 말씀을 듣는 일에 소홀함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심방 시에는 한사람의 목사와 두 명의 방문자, 각 지역의 디지니어(dizenier)가 조를 이루어 다녔다. 컨시스토리가 제네바 시 성도들의 심방을 제정하게 된 배경은 컨시스토리의 설립 목적, 더 나아가 칼빈이 제네바 시를 재입성하면서 추진했던 성도훈련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컨시스토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돕는 교회기구’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성도들 중에 말씀에 준하여 생활하지 못하여 가족간, 혹은 이웃과 불화를 일으키고 사회적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컨시스토리는 이들을 불러 권면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시의회에 처벌을 의뢰하기도 한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심방은 성도들의 신앙상태와 생활양태를 파악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4) 청교도 사이에서

특히 심방과 관계하여 병환자 심방이 주목되는 것은 사람이 병중에 쉬 낙담하게 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는 “낙담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주저함으로 괴로워하며 가장 선한 의무들조차 수행하지 못하는데, 부분적으로 이것은 육신적인 질병 때문인데, 육신적인 질병은 사탄의 악의를 힘입으면 천성을 향해 순례해 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알지 못하게 방해합니다”고 하였다. 목회자는 성도의 이런 영적 형편을 잘 헤아려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십스보다는 조금 후 시대를 살았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그의 책 「참된 목자」(The Reformed Pastor)에서 목회에 있어서 심방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성도들의 신앙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교리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심방을 적극 권장하는데, 그에 의하면 “우리들은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 일에 전념하여 일주일에 십오륙 가구를 심방하며 교구를 돌아다녀 일년이면 팔백여 가구를 심방합니다. 우리의 방문을 거절한 가구는 이제껏 한 가구도 없었으며, 단지 몇몇 사람들만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우리의 방문을 연기했을 뿐입니다. 나는 공적인 설교에서보다 심방에서 성공의 외적인 표적들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고 하여 그 자신 열심히 성도의 가정들을 돌아본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목회자의 심방에 대하여 성도들이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이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구체적인 심방 내용까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데 “만일 여러분이 내게 어떤 순서로 심방하였는지 묻는다면 교리문답서를 전해 줄 때에 교구내의 사람들 명단을 작성하여 사무원이 일주일 전쯤 각 가정을 찾아가 어느 날 몇 시에 우리들이 방문할 것인지를 알려주는 방법을 들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온 가족이 함께 모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다른 가족은 참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병환자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병자들을 심방하여 그들이 좀 더 알찬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또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5) 근현대 교회에서

심방이 치리장로의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프린스턴(Princeton) 신학교의 교회사와 교회정치 교수였던 사무엘 밀러(S.Miller)는 치리장로에 대한 그의 글에서 성도와 그 가정을 방문하는 일을 치리장로의 “그 의무”라고까지 표현한다. 심방할 때, 목사가 원하면 함께 할 수 있으며, 목사가 원치 않으면 목사 없이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무식한 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기도 하고, 흔들리는 자들을 확고히 세워주기도 하며, 경솔한 자들에게 주의를 주기도 하며, 방황하는 자들을 선도하기도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기도 하며,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의무를 신실하고 넉넉히 수행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아버딘(Aberdeen)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헨더슨(G.D.Henderson)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치리 장로에 대한 그의 글에서 특히 병환자 심방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장로의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용되는 것을 포함하는데, 권하고(exhort), 책망하고(rebuke), 위로하고(comfort), 회복시키고(restore), 화해시키고(reconcile),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고(pray for the brethern) 병환자와 괴로워하는 자를 심방하는 것(visit the sick and distressed)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멜빌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제 이 권징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가 제 일 권징서(First)보다는 더 분명한데, 장로직과 관계하여 바른 질서와 권징의 정상적인 배려에 덧붙여 성찬을 받는 자들을 시험할 것과 병자들을 방문하는 것, 총회가 가르치는 바를 실시하는 등을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1563년 12월에 총회는 장로와 집사가 병자를 심방하는 일에 필요하다면 목사를 돕도록 지침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엘진 기록물(the Elgin records)에 의하면 1631년에 집사들이 병자를 방문하도록 지정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헨더슨에 의하면 환자 심방은 장로의 기능(function)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예를 들어 1563년 12월에 총회에 의해서나 제 이 권징서(the Second Book of Discipline)에서 그러하다고 한다. 1660년 카녹(Carnock)에서 “장로들은 병자들을 더 자주 심방하도록 독려되었는데, 이는 목사가 말하기를 환자들이 장로들이 그들을 거의 심방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로 인해서 그들이 신랄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650년 인베라레이(Inveraray) 회의(Session)에서 병자는 그들의 장로와 가까워서 그는 목사에게 알려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1644년 패티(Petty)에서의 기록이 있는데, “이 날 목사는 장로와 집사들에게 그들의 교구에 어떤 병환자가 있는지 물었으며 ... 목사는 월요일에 그들을 심방하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핸더슨은 신실한 병자 심방의 한 예로 윌리엄 챔버(William Chambers)가 그의 할아버지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그는 기꺼이 다가가는 친구요, 조언자요, 위로자였다. 주일 저녁이면 그는 그의 종교적 업무로 인하여 거의 탈진하여 돌아오곤 하였는데, 수많은 병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문하고 각각의 경우에 적합한 기도를 원고 없이 즉석에서 해 주곤 하였다.”

 

핸더슨은 심방과 관계하여 자기 시대(1930년대)의 문제와 가능성에 대하여 논하면서 “가정 심방은 선전의 목적에도 잘 맞는데, 선전이 오늘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며, 그래야만 성도들이 세속적인 데로 깊이 빠져들지 않고, 지속적으로 교회 일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심방이 상당히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예를 들어 굳이 목사나 장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동역자들(assistants)이 있을 수 있는데, 오히려 그들이 각 집에서 보다 더 환영을 받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나눌 수도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아예 심방 자체를 제목으로 하여 나온 소책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1948년에 더 종(Peter Y. De Jong) 박사에 의하여 Taking Heed To The Flock이란 제목으로 나온 책인데, A Study of the Principles and Practice of Family Visitation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표지의 책 소개 글에서도 말하듯이 그 책은 당시 “가정 심방만을 다룬 것으로 최근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내용 목차 중에 가정 심방의 성경적 근거를 다루는 장도 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성경적 근거를 명쾌하고 풍성하게 다루지는 못하고 있다. 주로 교회론 중심으로만 논의하고 실제 심방과 관련된 성경적 근거는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이 소책자가 가정 심방만을 주제로 한 책이라는 사실과 심방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나가며

 

이처럼 심방은 성도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장로가 성도들을 심방하는 일은 장로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다.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말이다. 심방은 장로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이며, 만약 장로가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책망을 들을 만한 일로 간주된다. 심방이 단지 교회부흥의 수단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이 아니다. 교회부흥은 신실한 심방의 결과로 주어질 수는 있겠으나, 그 자체가 심방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심방의 목적은 교회부흥이 아니라, 성도를 돌아보고 위로할 자를 위로하고, 격려할 자를 격려하며, 세울 자를 세우는 것이다. 때문에 장로는 심방을 수행할 때, 하나님을 대행하여 가장 중요한 일을 수행한다는 자세로 임하여야 하겠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인 심방을 위하여서는 여러 심방대원들의 집단 심방보다는 장로에 의한 개별 심방이 되어야 하겠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목회자의 책임 하에 성도들의 심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김성봉(신반포중앙교회) 목사의 글(성경신학회에서 강의)을 조금 편집하고 정리하였다.

 

 

 

 

 

2014년 신년 사경회

 

 

장로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

 

 

한국장로교회에서 장로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 이로인해 장로들로 인해 교회 가운데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가기 위해서는 직임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 중에 특히 장로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시간에는 장로의 직분의 사역과 그 범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장로는 성경에 명시된 자기 직분 이외의 기능을 집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장로교 헌법에는 장로의 직무에 대한 규정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위 항의 헌법, 제47조). ①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 ② 교회의 영적 관계를 살피는 일 ③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④ 교인을 권면하는 일 ⑤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⑥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⑦ 교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⑧ 목회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 등이다.

 

우리시대 한국교회에 있어서 가장 우려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장로의 직분사역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이다. 즉 장로들은 많이 있는데 장로직분을 제대로 감당하는 자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교회가 장로를 세우는 이유는 장로가 감당해야 할 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장로가 자신의 고유한 직분을 멀리하고 도리어 집사들이 행해야 할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목사와 장로를 하나로 묶어 감독이라 일컫기도 하며, 장로라 칭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보아 목사와 장로는 동일한 직분의 범위 안에 들어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직임을 가진 목사와 말씀으로 치리하는 장로들의 직분 모임을 당회라 하여 공동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장로직이 말씀사역자인 목사의 직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장로는 목사와 마찬가지로 목회사역의 일부를 감당하게 된다. 물론 목사와 장로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있다. 공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연구하여 설교하는 사역이 목사의 단독적인 직임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장로의 사역은 공동사역적인 성격이 강하다.

위에서 언급된 장로교 헌법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장로의 사역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것은 목사의 설교를 감독하는 일과 그 설교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삶을 감독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장로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목사의 설교를 선하게 감독하는 사역이다. 이는 물론 설교를 감시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장로가 목사의 설교를 감독한다는 말의 의미는 선포되는 말씀이 교회에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관심을 가지고 온전히 말씀에 참여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가 잘못 선포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당회를 통해 조심스럽게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신학적 논쟁이나 다툼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교리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직분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만일 목사의 입을 통해 선포되는 설교 내용 가운데 깊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공교회 즉 교단의 신학부나 신학교 교수회를 통해 그것을 확인받아야 한다. 물론 그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의 성실한 대응을 통해 교회가 진리를 보존하며 영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장로들은 성도들이 목사의 입을 통해 선포된 말씀대로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말씀의 열매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 말씀을 통해 교회의 영적인 면을 돌아보며 권면하는 가운데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몸된 교회 가운데 지속적으로 행해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장로들의 사역이다.

 

이 일을 위해 장로들은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게 된다. 장로들이 심방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지도하며 보살피기 위함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에 순종하여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그렇지 못한 교인들이 있다면 말씀으로 권면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엄중한 책망을 동반하기도 한다.

 

장로는 교인들을 심방한 결과에 대해 당회에서 목사와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 이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올바르게 잘 지도하기 위한 소중한 방편이 된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목사와 더불어 심방함으로써 저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도움을 준다.

 

현대교회 가운데는 심방의 본질적인 의미가 매우 퇴색되었다. 심방은 결코 교인들을 관리하는 방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심방은 원칙적으로 장로들의 사역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할 일이 아니다. 현대의 대형교회들에서 부목사들이 심방을 담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여전도사와 권찰제도를 두어 그들로 하여금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게 하는 것도 재고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감독으로서 장로들이 감당해야 할 직분 사역을 가로막는 매우 위험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물질적인 부분과 재정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결정을 하려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더 중요한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직분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재정에 관한 문제는 당회가 할 일이 아니라 집사회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교회에서는 일반 장로들이 생업으로 인해 심방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그것은 여간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교인들을 말씀으로 지도하며 심방하기 어려운 형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장로직분이 맡겨져서는 안된다. 직분을 이행하기 어려운 교인들에게 소중한 직분을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장로직분이 가지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삶을 직접 보살피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장로의 직분 사역이 온전히 잘 이루어질 때 비로소 교회가 든든히 서가게 된다. 이는 당회가 항상 스스로 검증해야 할 사항이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장로의 직분이 온전히 회복됨으로써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 이 글은 이광호(실로암교회) 목사의 글을 조금 편집하고 정리하였다.

 

 

 

 

 

2014년 신년 사경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

 

 

1. 들어가며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 스위스 제네바는 프랑스 사람 존 칼빈에 의해 참된 교회 건설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유럽의 수많은 개혁 지도자들은 이 곳 제네바 교회와 그 교회의 지도자 칼빈으로부터 개혁 신앙과 생활을 배우고 몸에 익힌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그들의 교회를 개혁했다. 바로 이곳은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산실이다. 이 두 교회는 각각 대륙과 스코틀랜드(혹은 영국)에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두 교회의 뿌리는 하나다.

 

그러나 수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두 교회는 각각 다른 전통을 생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와 생활 모두에서 그 사이는 크게 벌어져 갔다. 특별히, 두 교회 모두 각 나라에서 단일한 교회로 보존되지 않고, 여러 교파로 분열된 현금의 상황에서는 교리와 생활이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개혁교회라고 이름하는 교회들도 많이 있고, 장로교회라는 간판을 내건 교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 교회들이 원래의 순수한 교리와 생활을 계승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화란의 개혁교회 중에서 국가개혁교회와 소위 총회파 개혁교회와 기독개혁교회가 그렇고, 미국의 장로교회의 경우 미국연합장로교회는 전통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었다. 그래서 이 강의에서 각 나라별로 분열된 역사를 다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략하고, 참된 교회로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리와 생활을 보존해 온 교회들을 다루고자 한다.

 

이것은 당연히 두 교회의 교리표준과 교회질서를 다루는 것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잘 알다시피 개혁교회는 벨직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을 3대 일치신조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일치신조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양 교회는 각각의 교회질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강의에서 양 교회의 신앙고백서와 교회질서를 일일이 비교 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캐나다 개혁교회가 미국의 정통장로교회와 자매교회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토론되었고, 또 여전히 두 교회 사이에 토론이 되고 있는 7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그것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 더 순수하고 덜 순수한 교회의 구별, 신앙의 확증, 선택과 언약, 10계명의 해석, 주의 만찬에 울타리를 치는 문제, 교회 정치 등이다. R. E. Pot, 정통장로교회: 개혁교회와의 에큐메니칼 관계, 특별히 캐나다 개혁교회들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 연구, 1995(이 글은 www.spindleworks.com에서 얻은 자료임을 밝혀둔다).

 

2. 전개하며

 

 

1) 구원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구원론에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양 교회가 그 개혁의 기치인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붙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교회들은 분명히 로마교회의 신인 협동설을 반대하고,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정했던 펠라기아니즘과 알미니아니즘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또 17세기 부흥운동의 주자였던 존 웨슬레의 ‘선행은총’ 사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행은총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기초하여 불신자들에게 그 이성과 양심을 회복시켜 주신 은혜를 말한다. 그래서 율법이 선포되면 죄를 깨닫고, 복음이 선포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이 존 웨슬레의 주장이다(한국웨슬리신학회 편, 웨슬리와 감리교 신학,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그러므로 분명히 양 교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적 신앙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양 교회 차이점의 문제는 선택과 언약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1944년은 화란의 자유개혁교회가 총회파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진 해였다. 그 멍에는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와 그 추종자들의 주장이었다. 카이퍼는 칭의, 교회, 언약과 같은 신앙고백의 내용이 영원에서 작정되었고, 시간 내에서 집행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미 영원에서 작정된 칭의에 대해서 신자는 단지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 역시 영원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으로써 이미 완전하고 완결된 것이며, 그것이 투영된 모습이 현 세상의 교회 모습이다. 또 언약도 영원에서 중보자이며 동시에 택자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이미 세워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택자들은 중생하기로 되어 있는 인류이다. 그러나 경험상 (화란의 상황에서) 유아 때 세례 받은 언약의 자녀가 모두 참된 신앙에 이르지 않는 것을 볼 때, 이 언약에 참된 참여자가 있고, 단지 외관상의 참여자가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언약을 표하고 인치는 세례가 외관상의 참여자(비택자)에게 시행될 때, 그것 역시 외적인 세례일 뿐이다. 즉 사람들에게 가짜 임신이 있을 수 있듯이, 비택자에게 시행되는 세례는 가짜 세례가 되는 것이고, 사이비 임신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가짜 세례를 받은 비택자 유아는 중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카이퍼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실패가 없으며, 주권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례 그 자체가 효력을 산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즉 세례는 필연적으로 중생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카이퍼의 사상이었다. 따라서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은 외적인 표징만 갖고 있을 뿐, 중생한 내적인 능력을 받지 못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이퍼는 교회의 회원 전체가 포함되는 외적 언약과 오직 택자들로 구성되는 내적 언약을 구분하고, 오직 택자들만 중생을 얻어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다. 카이퍼가 원한 바는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출발점을 갖도록 하는데 있었고, 또 모든 자녀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증명되기까지는 중생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세례의 기초는 가정된 혹은 예상된 중생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다(롬 9장, 엡 1장). 따라서 우리는 이 선택을 부인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그대로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 안에 들어 온 모든 자들이 선택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실례로,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서 나은 아들 이스마엘은 분명 언약의 자녀이었으나 그는 언약의 상속자 이삭을 조롱함으로 말미암아 언약의 울타리에서 쫓겨났다(창 15-16장). 또 이삭의 아들 ‘에서’도 언약의 자녀이었으나 성경은 분명히 그가 택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창 25:23, 말 1:2-3, 롬 9:9-13).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는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고(딤전 1:19-20),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기도 한다(딤전 4:1). 또 어떤 자들은 믿음을 배반하기도 하며 저버리기도 한다(딤전 5:8,12). 사도는 어떤 이들을 사단에게 내어주기도 하였다(고전 5:5, 딤전 5:15).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딤후 4:10).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4:1, 5-6; 6:1-6; 10:26-31; 12:26). 이처럼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택자의 총수에 포함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두 개의 언약과 두 개의 세례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언약과 하나의 세례를 말한다(행 2:39).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택자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은혜 언약은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와 그 자녀들과 맺은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을 외적 언약의 백성과 내적 언약의 백성으로 구별하지 않고, 단지 한 언약의 백성으로 다루신다. 그리고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표하고 인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의 기초는 하나님의 약속이지 결코 가정된 중생에 있지 않다. 개혁교회의 (유아)세례 예식문을 이것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다. 즉 우리가 성령 안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 성례를 통하여 보증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을 우리의 소유가 되게 하시는데, 곧 죄의 씻음과 날마다 우리의 삶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결국 완전히 정화되어 영생 안에서 택하신 언약 백성들의 회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입니다(찬송의 책, 58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3장(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성경을 따라 선택을 명백하게 고백한다. 그러나 7장에서 은혜 언약을 설명할 때, 그 언약을 선택자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3절). 대교리문답은 “은혜 언약은 누구와 맺어졌습니까?”라는 질문에 “은혜 언약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그의 씨인 모든 택자와 맺어졌습니다”라고 답한다(31문답). 그러나 위에서 간단히 살펴 본 대로 선택은 언약과 동일하지 않다. 언약은 선택보다 그 범위가 넓다.

 

한편 최근 성경신학의 공헌을 빌려서 말하자면 성경의 언약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쌍방간의 계약이다. 이에는 약속과 의무가 있으며, 또한 그 언약을 파기하였을 경우 위협이 있다. 야웨 하나님은 창조시에 사람과 세우신 관계로서 그 언약의 첫 번째 당사자는 하나님이시고, 두 번째 당사자는 아담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류였다. 이 언약은 영생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 것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불순종할 경우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위협이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아담은 이 언약을 파기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시고, 은혜 언약으로 이 언약을 유지하실 뿐만 아니라 은혜로서 영생을 약속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요구하시고, 영원한 죽음으로서 언약의 위협도 살아 있다. 이 언약의 당사자는 하나님과 신자와 그의 자녀들이다.

 

개혁교회의 목사들은 회중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언약의 복음을 선포한다. 즉 약속과 의무를 말하고, 순종할 때 축복과 불순종할 때 언약적인 저주가 있을 것임을 가르친다. 반면에, 장로교회 안에는 바로 이 언약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과 지옥의 고통은 단지 불신자들의 몫일 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을 것임을 보장하는 설교만 한다.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회개의 설교는 없다. 즉 장로교회는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자동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설교한다. 왜냐하면 은혜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택자들과 세워졌기 때문이고(대교리 31),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과 맺으신 것이기 때문이다(고백서 3장 3절).

 

그러나 선택은 하나님께 숨겨진 ‘오묘한 일’에 속하고, 영구히 우리에게 ‘나타난 일’은 언약이다. 하나님은 분명 선택의 하나님이시나 우리와 상관하실 때는 언약으로 하신다. 그는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우리와 언약을 세우시고, 그 언약을 따라 우리를 다루신다. 이것이 주께서 선포하신 천국 복음이다. 언약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반더발의 성경언약연구(나침반)를 읽어보라. 그리고 선택은 우리가 그 언약 안에 머물러 있을 때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므로, 칼빈이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선택의 거울이다.

 

2) 교회론

 

 

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 중에 두 번째 큰 문제는 교회론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25장에서 두 보편적인 교회를 말한다. 즉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가 그것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과거, 현재, 미래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지는 ‘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며(1절), 보이는 교회는 전세계를 통하여 참된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다(2절)고 말한다. 또 대교리문답 역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며 장차 모일 택한 자의 총수’로 설명한다(64문답).

 

반면에 개혁교회는 이러한 두 교회론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벨직신앙고백서 27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또 28항에서 ‘이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한다. 이 교회는 이 땅에 있는, 현재의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 죽어 주님과 함께 있거나 장차 태어나 이 교회에 연합할 자들이 아니다.

 

성경이 ‘교회’를 말할 때, 그것은 택자와 관련되지 않고, 언약의 백성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교회는 택자들의 총수가 아니라 언약 백성들 전체이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는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말한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신자들이 함께 모인 모임이다(고전 1:2).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며, 각 처에서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다. 구약에서 ‘카할’(총회)과 ‘에다’(회중)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기 위해 하나님 앞에 모인 언약의 백성들의 모임이며, 그 언약을 갱신하기 위하여 성전에 모인 무리들이다(신 5:22; 왕상 8:22; 느 8:2). 더 자세한 것은 유해무의 개혁교의학, 제3부 교회론 III. 교회를 읽어 보라.

물론 칼빈 또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별했고(강요 IV. I. 7), 종교개혁 당시 다른 많은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도 이를 구별한 것은 사실이다(제네바 교리문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영국교회의 39개 조항 등).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다른 두 개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교회의 두 양상을 보여주려고 한 것뿐이다. 즉 하나님이 보시는 것으로서 교회와 우리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의 교회가 그것이다. 루터가 말한 바 타락하고 부패한 그 결과 배교한 로마교회 안에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는 교회,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던 7천명과 같은 개념이다(왕상 19:14, 18).

 

그러나 장로교회가 교회를 두 개로 구별함으로써 생기게 되는 문제는 첫째로, 현재의 교회 안에 벌써 보이는 교회에 속한 회원과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회원으로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대교리, 68문답). 두 번째는 언약 안에서 약속된 구원의 은덕들이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회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69문답). 칭의(70-73문답), 양자됨(74문답), 거룩하게 하심(75-78문답), 견인(79문답), 구원의 확신(80-81문답), 현재와 심판과 그 이후 미래에서 누리게 될 영광(82-90문답) 등 이 모든 것이 보이는 교회가 아닌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한 회원들에게만 약속된 것이다. 이것은 심각하게 ‘나타난 일’에 속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처사이며, ‘오묘한 일’에 속한 하나님의 선택의 관점에서 구원의 약속을 설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교회를 인위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구원의 약속은 언약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지 결코 선택의 영역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문제는 설교의 선포와 그 복음의 약속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심각한 고민을 안겨주게 된다. 즉 누가 선택된 자들인가?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② 순수한 교회와 순수하지 않는 교회

교회론에서 두 번째 문제점은 ‘순수한-덜 순수한 혹은 순수하지 않는 교회의 구별’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4절). 이 표현을 100보 양보하여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별과 같은 용어로 본다 할지라도, 이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너무도 크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 표현을 사용할 때, 신자들의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교리와 규례와 공예배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자들의 삶이 어떤 교회는 순수하고, 다른 교회는 덜 순수하거나 혹은 순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교리와 규례가 그렇다는 말이다. 복음의 교리에 관한 한, 항상 모든 것이, 가감 없이 가르쳐지고 배워져야 한다(마 28:19-20).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규례 역시 모든 것이 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거짓 교회일 뿐이지 참된 교회인데 단순히 덜 순수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비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자가 아브라함 카이퍼도 아니며, 또 그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교회의 다원성 이론에 문을 열어 줄 위험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 곧 교파들로 나타난다는 카이퍼의 이론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에 나타난 모든 교파들을 그리스도의 보편교회의 한 모습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마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 교회 등 모든 교회들과 실제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거짓교회가 아니라 참 교회로서 단순히 좀 더 순수하고나 좀 덜 순수한 교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교회는 복음이 항상 순수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규례들(성례와 권징 등)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교회는 좀 덜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거짓 교회일 뿐이다(벨직 29항).

 

3) 교회질서

 

① 개교회의 본질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은 교회질서에서도 크게 차이가 난다. 가장 큰 차이점은 개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 교회를 보편 교회에 속한 지체로 보는 반면(신앙고백서 25:4), 개혁교회는 개 교회를 완전한 보편 교회로 본다(신앙고백서 27항). 이 때문에 장로교회는 당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대회 그리고 총회까지 치리회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오직 당회만을 치리회로 본다. 왜냐하면 개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완전한 공교회이기 때문이다.

 

② 교회와 교회의 관계

장로교회는 개교회를 보편교회의 지체로 보기 때문에, 당회(혹은 교회)와 노회, 노회와 총회의 관계는 상회와 하회의 관계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그것들의 관계가 대회 혹은 광회의 관계일 뿐이다. 각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이 교회들의 권세는 동일하다. 그러므로 각 교회 위에 있는 권세로서의 어떤 개인이나 교회나 교회들은 없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각 지역에 독자적인 권세를 가진 교회를 세우셨다. 이 교회들은 오직 사도적 신앙의 일치 안에서 한 교회로 연합한다(엡 4:3이하, 고전 12:13).

 

③ 장로회 정치의 본질

장로교회는 ‘노회’를 감독교회의 관구로 해당한다고 찰스 핫지가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개혁교회의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감독 정치이다. 장로회 정치는 독립(회중)정치와 감독(교황)정치 사이에 위치해 있다. 즉 교회들의 연합을 무시하고 개교회의 독자적인 치리를 절대시하는 독립교회와 개교회의 독자적 치리를 무시하고 교회 위에 있는 더 높은 권세에 의해 치리되는 감독(교황)체제를 주장하는 로마교회나 감리교회 사이에 있는 것이 장로회 정치를 하는 장로교회이다.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독자적인 독립교회도 반대하고, 교회 위의 감독정치도 반대하기 때문에, 노회나 대회, 총회를 신앙의 일치 안에서 보편적 교회의 연합을 이루는 모임으로 본다.

 

④ 노회

장로교회는 특별히 지역별 ‘노회’가 중심에 서 있다. 이 노회는 본래부터 노회 회원인 목사들과 각 교회의 대표자인 장로들로 구성이 된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목사는 결코 개 교회의 회원이 아니며, 하나님이 특별히 개 교회에 보내시는 파송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는 개교회가 지체로 있는 보편교회가 바로 노회라는 생각이 그 중심에 서 있다. 따라서 노회는 목사를 임직시킨다. 그러나 개혁교회에서 목사는 개교회의 회원이다. 따라서 목사 임직식도 그 교회에서 하게 된다.

 

⑤ 삼직분

장로교회는 삼직 즉 목사, 장로, 집사를 인정한다. 이는 개혁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목사를 노회의 회원으로 보고 장로와 집사는 평신도로서 개 교회의 회원으로 보기 때문에 직분간의 계급이 있다. 반면에 개혁교회는 모든 직분이 개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직분상의 어떠한 계급의식이 없다. 로마교회로부터 개혁된 개혁교회는 언제나 교회 안에 교권이 들어오는 것을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는 벌써 교권적 직분관을 형성한지 오래다. 목사의 직분에서 위임목사, 임시목사, 부목사 등으로 구별한 것과 장립집사와 서리집사를 구별한 것과 준직원으로 강도사, 전도사를 첨가한 것, 임시직분으로 권사, 권찰 등을 만든 것 등은 원래 장로교회의 직분관에서 상당히 이탈한 것이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여자는 직분에 봉사하지 않는다. 이는 전통적 장로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성경과 그 개혁의 원리를 벗어나 감독교회체제로의 회귀임과 동시에 시대의 조류를 따름이다.

 

4) 기타

 

① 주의 만찬

주의 만찬은 성례로서 은혜 언약의 표와 인침이다. 이 언약의 표징은 참된 교회의 표징이기도 하다. 이 표징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시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모두 로마교회의 화체설이나 루터교회의 공재설 그리고 쯔빙글리의 기념설도 부인하고, 칼빈을 따라 소위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그러나 양교회의 차이점은 ‘합당하게 참여하는 것’에 있다. 사도는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 주의 떡과 잔에 참여하라고 하였고, ‘주의 몸을 분변’하고 먹고 마시라고 하였다(27-29절). 그렇지 않을 때, 언약적인 저주가 교회와 신자 개인에게 임한다(30-32). 개혁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 함부로 아무에게나 주의 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주의 만찬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소위 울타리를 친다. 주의 만찬을 분변하지 못하는 자와 범죄한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 뿐 아니라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자도 참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의 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고백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개혁교회는 장로들이 부지런히 심방을 하여 살피고, 주의 만찬 예식서에 구체적인 죄목을 들어 범죄한 자들이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이에 반대 장로교회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개인의 의사에 맡겨버린다. 따라서 아무나 함부로 주의 상에 참여하게 된다. 성찬을 분변하지 못하는 자와 범죄한 자들도 참여하게 되고, 심지어 신앙고백이 전혀 다른 교파의 신자들도 참여하게 된다. 이는 성례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시행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일년에 한 두 차례 시행하는 주의 만찬은 전혀 울타리를 치지 않기 때문에, 언약적인 저주가 가득 한 만찬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② 교회회원권

익히 아는 대로, 개혁교회는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 신경을 일치신조로 고백하고,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한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이 신앙고백서를 단지 직분자들에게만 서약하게 하고, 일반신자들은 그 멍에에서 자유롭다. 즉 일반 신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 이 신조를 따라 살 것을 서약하지 않고서도 교회의 회원이 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직분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까지 모두 이 일치신조를 따라 믿고 살아갈 것을 고백하며 서약한다.

 

신자는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전 12:13). 한 몸은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님, 한 믿음 안에서이다(엡 4:3이하). 우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따라서 신앙고백서를 받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지 않는 장로교회는 과연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장로교회를 보라. 장로교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으면서 정작 그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우지 않음으로, 교회 안에 얼마나 다양한 신앙과 생활로 나뉘어져 있는가? 그런 교회가 과연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가?

 

3. 나가며

 

 

정말 간단히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 짧은 글에서 더 자세히 말하지 못한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 강의를 발판을 삼아 제기된 문제들에 관하여 더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선택과 언약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이는 우리 신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도 교회생활도 잘못 된다. 또한 바른 교회론은 신자의 교회생활과 직분과 치리회를 바로 이해하는 초석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을 확실하고,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요구한다. 부디 참된 교회의 표지를 잘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가도록 하자.

 

 

# 이 글은 김영환 목사의 글을 조금 편집하고 정리한 것이다(2008년 10월 30일 천안고신대학교에서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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