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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교회아특강
강설날짜 2010-05-21

2010년 교회아 특강(3)


교회아 의식과 말씀


말씀 : 딤후 3:16-17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교회아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다운 생각을 하며, 교회아로 살아가야 한다. 이 시간 우리는 교회아 의식과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신자 개인의 생활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정당한 교회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와 세상이 도전해 오는 것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참된 교회라는 것을 나타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유치한 신자이지, 절대로 장성한 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밤낮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다움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 내실 때 우리를 한 개인으로 건져 내어서 개인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우리를 건져 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이다. 곧 우리를 교회로 건져 내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개인의 구원을 강조하는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특별히 교회라는 그 신성한 아이디어(idea)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불교를 보더라도 개인이 득도해 가지고 올라가면 된다. 이처럼 이 세상의 많은 종교가 개인 구원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까지 이런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예수 믿고 나와서도 ‘신앙을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 일로 생각하고 항상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길을 걸어가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의 특색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그 복음 신앙이 그를 자연스럽게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놓아서 ‘신비한 일체성’(unio mystica)을 이룬 데 있다. 그리고 이 신비한 일체성은 필연적으로 교회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쓴다. 그래서 항상 보이는 이 종교 집단을 교회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교회론에서 배운 것과 같이 보이지 않는 참 교회(invisible church) -본질적인 교회-는 그리스도와 신비한 일체성의 근거 위에서 각각 생명이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참 교회는 반드시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교회가 보이지 않는 사실만 가지고 있으면 보이는 형식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개인적으로 신령한 생활로써 도덕적인 생활의 길과 또 바른 인생관에 의한 바른 목표를 향한 생활의 행진이란 것이 절대로 필요한 까닭이다. 그런데 신령한 생활을 하기 위한 바른 인생관과 세계관의 사상적인 근거는 하나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그 통치를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빼놓고 개인의 성화와 개인의 완성과 개인이 구원받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서 큰 부분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강조하지 않으니까 많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한쪽만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만 잘 믿어 죄 안 짓고, 어떻게든 주님을 의지하고 살 것만 생각하지, 교회아로서 ‘나는 어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의 자기의식이 거의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절름발이 신앙생활인 것이다. 두 다리를 가지고 완전한 걸음을 걸어야 할 사람이 다리 하나밖에 없는 걸음을 걷는다는 것은 절대로 성한 사람의 걸음이 아닌 것이다. 이런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 마땅한 싸움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교회라는 것이 하나의 조직된 사회 형식을 취하여 나타나는 것입니까? 사람이 개인적으로만 한 종교인이 되고 교회 의식이 없을 것 같으면 그 개인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갈지는 몰라도 그 생각은 사상적으로 심한 결핍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안 믿는 사람을 놓고 보더라도 개인인 동시에 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인생을 살아갈 때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무인도와 같은 고립된 경우는 그 생명이 있는 한 혼자 살아갈 수 있겠지만 인간인 이상 사회아로서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그의 인격의 발휘가 심히 불충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혼자 살도록 만드시지 아니하셨다. 사회아로 살아가도록 지으셨다. 창세기 2:18절에 보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하신 것은 베필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사회라는 것이 있음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회아라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부조리와 부정과 사람의 죄악이 뒤섞여 있는 부패한 사회다. 이 부패한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의식을 가져야 할 것인가? 이 때 교회가 표준이 되는 것이다. 보이는 교회, 즉 그것을 크게 말 할 때 ‘하나님 나라’가 표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보이는 하나의 사회 단체로서 교회가 가장 구체적으로 잘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 나라의 표준이라는 것은 사람이 세상에서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활동, 즉 정치, 경제, 문화의 그 모든 역사적인 활동이 거기에 생기는데,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고, 무엇을 표준으로 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된다. 그 표준 가운데 심히 중요한 것은 ‘정의는 최후에 이긴다’는 막연한 생각을 떠나서 그보다 더 명백한 것은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벧후 3:7).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은 결국 완전한 정의가, 완전한 공의가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확연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아 의식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개인 신자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교회아 의식이 결핍되어 있고, 다만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의식만 가지고 있다면, 결국 개인으로도 그 사상 상의 큰 결함 때문에 한 인격으로서도 정당한 생활조차 못하는 것이다. 이 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교회아 의식이 없이도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고, 그것으로도 족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심히 부족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항상 개인주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선이냐’하고 기독교 윤리를 따지고 보면 개인이 도덕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최고의 선이 아니다. 교회아로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나의 생활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이 최고의 선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선이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인 생활만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어떻게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 선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자기 의무란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이 땅 위에서 거룩한 교회로, 즉 하나님 나라의 표준 하에서 살지 않고,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거룩한 표준이 있는데 그 표준 하에서 시민의식을 가지고 살지 않고 자기 개인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종교주의자이냐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까닭에 교회아 의식은 참 필요한 것이다. 교회아 의식은 어떻게 필요하냐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다른 교회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는 어떤 정의(情誼)를 가지고, 어떤 사랑을 가지고, 어떻게 바로 늘 나타내고 사느냐 하는 것을 주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대조할 만한 대척점이 있는 까닭에 거기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한다는 반응을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무엇보다도 이런 교회아 의식이라는 것은 ‘나는 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이 생명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된 사람과 더불어 같이 움직이는 까닭에 그것이 정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말씀이 정당하게 성령 하나님으로 역사해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을 먹는 일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들이 교회아 의식을 가지고 함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정상으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에서는 말씀이 첫째로 중요히 다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회관에 대척하여 새로운 교회관 위에 교회를 확고히 세운 프로테스탄트의 개혁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오직 말씀’을 강조했던 것이다. ‘말씀이 첫째다.’ 그런고로 교회는 조직되어서 말씀을 잘 옹호하고, 말씀이 잘 창달(暢達)해 나가도록 지지하고 나가는 것이 당연한 자기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자기 의무를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제 의무도 못하면서, 뭘 잘 믿겠다고 한다면 그게 잘 믿어지는 것인가? 그 의무를 아주 태만히 하면서도 자기를 잘 믿는 양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선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 의무가 있는데, 믿는 자로 나왔으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의무를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는 한 혈맥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땅 위에서는 하나의 거룩한 통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역사해서 말씀이 생명의 양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말씀이 창달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제도를 잘 유지하고 지지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가 마치 무엇을 기부나 해주고 행하(行下)나 해 주는 것같이 생각하고 나가는 이런 오만한 정신은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런고로 항상 주의해서 교회 의식이라는 것 곧 교회아 의식이라는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그 생활과 사명의 표준이 항상 자기 마음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 나라의 생활이란 무엇이고, 그 사명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의무인 까닭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의무에서 도망갈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자기 혼자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기 의무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미숙한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와 왕이 되셔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요구하시는 바를 내가 바로 알고 더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바로 사역되고 창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이 바로 창달되기 위해서는 나는 나로서 하나의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 신약 성경이 증거하는 바르고 정당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란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의 도전과 공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른 교회가 나타나야겠다는 것은 나의 신성한 의무이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바른 교회로 나타나야겠다는 신성한 의무가 없다고 한다면 기독교인으로 자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 바른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있든지 없든지 교회는 교회이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있어야만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되려면 말씀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 말씀의 사자는 멀리 있든지 가까이 있든지, 언제든지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것도 말씀의 본의를 잘 드러내야 한다. 바울 서신들을 보면 바울은 감옥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교회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이 사람끼리 모이기만 하면 절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거기는 제도가 있어야 하고, 그 제도가 명확히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교회로 출발하면서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가 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참으로 있어야 할 교회의 바른 자태를 수가 많든지 적든지 드러내야 하겠다는 것이다. 곧 신약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교회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지체들이 적든지 많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수가 앉아서 그 의식만은 최후까지 똑똑히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신약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 늘 교회아 의식을 가지고 교회에 대한 자기 의무를 다 해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배우는데 힘써 왔다. 이 일을 한 번도 포기한 일도 없었고, 흐지부지 없앤 일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한 늘 교회아 의식을 가지고 말씀의 본의를 배워 나가는데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온 교회가 교회아 의식을 가지고 늘 교회답게 생각하며, 말씀의 본의를 배우는데 힘쓸 수 있기를 바란다. 이를 통해 우리 교회가 신약 성경이 증거하는 참된 교회로 세워져 가며,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증시하는 교회로 나타나길 소망한다. 아멘!

 

# 토의 내용

1. 교회아 의식을 덧입어 가기 위해 온 교회가 말씀을 힘써 배워가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2. 말씀의 본의를 배워나가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으며,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온 교회가 말씀의 본의를 배워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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