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7장] 에피소드1 - 종교적 타락상(1)

by 최상범 posted Feb 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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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상범
성경본문 삿 17:1-13
성경본문내용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2)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3)미가가 은 일천 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4)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5)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7)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8)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9)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10)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11)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으니 이는 그 소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12)미가가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매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거한지라(13)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강설날짜 2012-12-12

2012년 12월 12일 한결교회 수요모임강설
사사기 제26강

 

에피소드Ⅰ-종교적 타락상(1)

 

말씀 : 삿 17:1-13

 

예전에 스타워즈라는 영화가 인기가 있었습니다. 1편에서 3편까지 나왔는데, 한 10년 정도 지나서 스타워즈의 새로운 시리즈가 나왔습니다. 이름하여 스타워즈 에피소드 1,2,3가 나와서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10년 전에 했던 스타워즈 3에 뒤이은 이야기인가보다 하고 봤더니, 그것이 아니라, 스타워즈 1이 있기 이전에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였습니다. 스타워즈 1에 악당 ‘다스 베이더스’라는 인물이 어떻게 해서 악당이 되었는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스토리가 에피소드 1,2,3인 것입니다. 스타워즈는 옛날에 스타워즈 3로 해서 이미 완결된 이야기인 것이고, 다만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을 에피소드라고 하여 영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강설의 제목도 “에피소드Ⅰ-종교적 타락상(1)”입니다. 에피소드란 국어사전을 보니깐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줄거리에 끼인 짤막한 토막 이야기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즉 사사기도 삼손으로 해서 모든 사사들의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17-21장은 삼손이 죽은 후에 있는 일이 아니라, 옷니엘부터 삼손까지의 전 사사시대 가운데 어느 한 시점에 있었던 사건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기드온 이후에 얼마 있지 않아 있었던 일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사기 초창기에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시점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시기에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어난 사건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사기 17장부터 21장까지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읽어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정말 황당하고 기괴하며, 매우 모순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사사기 저자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보여주고자 하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타락상을 보여 주고,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스라엘의 도덕적인 타락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두 에피소드의 공통적인 특징은 이 17-21장에서 종교적인 용어들이 집중해서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장들에만 제사장들이 등장합니다. 이 장들에만 ‘벧엘’이나 ‘실로’ 같은 주요한 예배처소가 이스라엘 전체가 모이는 장소들로서 역할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만 우리는 레위인들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만 1-3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온 지파가 연합합니다. (물론 그것이 자기 형제 베냐민을 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17-21장에서 가장 종교적인 언급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의 가장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이야기는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뚜렷한 공통점들이 나타납니다.

 

에피소드Ⅰ : 17:1-18:31

종교적 타락

에피소드Ⅱ : 19:1-21:25

도덕적 부패

(1) 한 레위인이 개인 제사장으로 있다가 결국에는 단 지파의 제사장으로 됨.

(2) 레위인이 단-베냐민 지파 지역을 지나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으로 이동

(3) 단 지파의 이주(600명 병사)

(4) 실로 성전에 대한 언급으로 종결

(1) 한 레위인의 첩 사건이 발단이 되어 지파간의 전쟁으로 확대됨.

(2) 레위인이 단-베냐민 지파 지역을 지나 에브라임에서 유다 베들레헴로 이동

(3) 베냐민 지파의 사라짐(600명 생존)

(4) 실로에서 여인 납치 사건으로 종결

 

특히 둘 다 레위인이 연관되어 있고, 둘 다 개인의 일에서 민족전체의 일로 확대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두 에피소드는 아래의 핵심 문장으로 카이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A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17:6)

B (1)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 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삿 18:1)
B' (1)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삿 19:1)

A' (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래서 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왕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정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강력하게 강조함으로써 이후에 이어질 사무엘상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그러면 이런 배경을 생각하면서 첫 번째 에피소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1절에 미가라고 이름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글성경은 ‘미가’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로 보면, “미카예후”입니다. 이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겠느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름자체만 보면 너무나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가의 삶은 그러한 이름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주 모순적인 모습인데, 사실 이 ‘모순’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의 핵심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등장인물들의 모든 행동들이 온통 모순덩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2)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 미가가 하루는 어머니 돈을 몰래 훔쳤습니다. 그것도 아주 거액을 훔쳤습니다. 은 1100세겔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110년 치 연봉에 해당됩니다. 매년 연봉이 2500만원이라고 쳐도 30억에 달하는 금액입니다. 미가가 무슨 심보로 이렇게 큰 액수를 어머니 몰래 훔쳤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거액의 돈이 없어지자, 즉시로 그 훔쳐간 사람을 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미가가 그 저주가 임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어머니께 돌려줍니다. 잠언 말씀에 보면 까닭 없는 저주는 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는데(잠 26:2),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아주 미신적이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면 그 저주가 그대로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주를 두려워하여 어머니께 자기가 돈을 훔쳤다고 이실직고 하면서 돈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지금 와서 보니 자기가 자신의 아들을 저주할 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주를 없애기 위해 아들을 축복합니다. 축복하면 저주가 상쇄되어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아주 미신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주 망령된 행실입니다. 자기에게 나쁜 일이 찾아올 때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사람들을 저주하고, 또 다시 일이 해결되었다고 축복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일말의 경외심도 없었고, 하나님을 마치 이방신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하면 그 하나님이 자신의 말에 의해 조종되어서 결국 그 사람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매우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머니는 그 도로 찾은 그 은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매우 여호와를 존숭하고 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 드릴 것처럼 해놓고서는 거기서 900세겔은 자기가 닦아 먹고, 200세겔만 여호와를 위해서 드렸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여호와께 드리되 자기 아들을 위하여 조각상과 부어 만든 상을 만든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한다고 하는데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입의 고백과는 모순되는 행동입니까?


여기에 우상의 두 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는 새긴 우상이고, 하나는 부어 만든 우상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자주 짝을 지어 나오는데, 하나의 우상을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두 개의 다른 우상을 각각 표현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단 지파가 말하는 것을 보면 두 개의 우상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각각은 다른 것인데, 먼저 새긴 우상은 나무, 돌을 새겨서 거기에 보석과 금으로 장식한 조각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아세라 목상과 같은 이방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부어 만든 우상은 금으로 입힌 우상으로서 이 단어는 즉시로 우리로 하여금 아론의 금송아지와 벧엘과 단에 있었던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금송아지를 사람들이 만들고 섬길 때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호와라 이름하며 섬겼습니다.


이방신도 섬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서 그것을 여호와라고 하면서 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형상에 새겨 섬긴 것도 가증할 우상숭배의 죄악인데, 하나님과 더불어서 다른 신도 함께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여호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호와로부터 복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혼탁하고 타락한 모습입니까? 입의 고백과는 너무나 모순되고 혼란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 어머니가 그렇게 만들고서 그것을 자기 아들 미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미가는 그것과 더불어서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집에 두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이 에봇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가는 성소에서 일할 제사장을 위해 에봇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자기 집에 둘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을 만들었습니다. 드라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던 손쉬운 우상입니다. 라헬이 자기 아버지 집을 떠날 때 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깔고 앉아서 숨길 수 있을 만큼 작은 것도 있고, 사람만큼 큰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뱀 형상을 해서, 사람들이 병이 났을 때 치료하는 능력을 발하고, 또 장래 일을 말해주는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접 자기네의 장래의 문제라든지, 특별히 병이 있어서 병을 고침 받고 싶다든지 할 때는 멀리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성막에까지 가서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 지키면서 하나님께 구할 필요 없이, 바로 옆에 있는 드라빔에게 손쉽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새긴 우상과 부어만든 우상, 그리고 에봇과 드라빔을 가져다가 자기 집에 두고 자기 집을 에브라임 신전으로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방신을 마구 혼합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미가 한 사람의 모습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종교적인 타락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서 온갖 잡신들을 집에 갖다 놓고 섬겼던 것입니다. 여기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같이 겸하여 섬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었습니까? 미가나 미가의 어머니나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모든 행동을 하고 있고, 또 여호와를 위하고자 하며, 그래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고, 그래서 이제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모습입니까? 5절을 보시면,

 

(5)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여기서 신당은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의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증한 잡신숭배소를 갖다가 하나님의 성소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중 한 사람을 제사장으로 기름 부어 세웠습니다. 자기 집안이 레위지파 사람도 아니고, 또 실로의 성막이 아닌 자기 개인 성소를 섬길 제사장을 임의로 세운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인데, 이것이 물론 자기가 복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도 있지만, 마을 전체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교장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불교를 믿는 어떤 사람이, 그가 여자일 것 같으면 보살이 되었다고 하고, 자기 집에도 돌을 주어다가 탑을 쌓고, 벽에다가는 부처상을 그려놓고. 사람들에게 “우리 집에 재를 지내러 오라...” 그렇게 선전하면, 불교를 좋아하는 부인네들이 멀리 절까지 갈 필요 없이 손쉽게 그 집에 들어가서 그림을 보고 절하고 거기에다 무슨 공전을 갖다 놓고 불공을 드리는 것입니다. 미가의 행동은 이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앞서 기드온이 자기 집에 에봇을 갖다 놓았더니 자기 집만 섬긴 것이 아니라 모든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음란히 섬겼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그 당시 성막은 실로에 있었는데, 실로까지 거리가 있었으므로 “이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하나님의 성소에 와서 예배드려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사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호칭된 것만 따지고 보면 그 어느 사사기 본문보다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만 보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는 것 같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 같은데, 하는 짓을 보면, 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법칙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율법의 규칙들을 다 짓밟아 무시해 버리고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무지하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아래 신명기 말씀을 보면 분명히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저주받을 행위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15)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신 27:15)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말씀에 무지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한 것은 진실로 자신에게 저주가 임할 줄 알고 두려워 떨고 무서워하면서, 이러한 가증한 행위를 한 것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임할 여호와의 저주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한 암매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시면...

 

(6)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결국 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왕이 있었다면 이들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왕이 없어서 그들을 통제하고 깨우치고 이끌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사사기의 중심주제입니다. 그들에게 정말 왕이 없었습니까? 왕이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계셨습니다. 그것을 사사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그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직후에는 반짝 여호와의 왕 되심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사사가 죽고 살만하면 다시 돌아서서 자기가 왕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인간 왕을 통해서 강제적으로 강력하게 통제되어야지만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에게는 근본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는 왕이 칼을 들이대면서 강제로 이끌지 않으면 다 자기 마음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왕이 필요한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사사기 마지막 강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어쨌든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 부패하고 완전한 암매가운데 있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종교까지도 이용해먹는 데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타락은 미가가 레위인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고용하는데서 절정으로 나타납니다. 레위지파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지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고, 그들을 12지파가운데 구별하여 좀 더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1장에서 레위지파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땅은 없지만, 살집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요구해서,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서 48개 성읍을 얻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는데, 레위지파 중 일부는 계속해서 성막을 섬기는 일을 했고, 또 흩어진 대다수는 자기가 있는 지역에서 그 지파들의 종교적 리더로서 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소위 목양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생업을 가질 수 없었는데,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의무적으로 자기가 얻은 1년의 전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떼어 가지고 레위 사람에게 주어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가 대략 장정 남자만 60만명이었고, 레위인들은 대충 2만명 정도 되었는데, 계산해보면 이스라엘 백성 40명이 레위인 한명에게 십일조를 내는 식이 됩니다. 그러면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평균적으로 4배 이상의 수입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규례대로 지켰다면, 레위지파들은 아주 풍족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일조 내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순종해서 레위인을 후대하면 크게 복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한 레위인이 자기 먹고 살길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8)이 사람이 거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행하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이 레위인은 유다 베들레헴에 거했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레위인이 거할 48개 성읍 중에 유다 베들레헴은 없습니다. 그러니깐 이 레위인을 포함한 그 가족(가문)은 자신이 거해야 할 곳을 이탈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탈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 주니깐 먹고 살길이 없어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베들레헴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레위인은 자기가 있던 곳에서 딱히 먹고 살길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거할 곳을 찾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9)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뇨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10)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벌과 식물을 주리라 하므로 레위인이 들어갔더니

 

미가는 레위인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여호와를 위해 신당을 열자마자 레위인을 이렇게 자기에게 보내어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십일조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가운데는 최소한 레위 사람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식의 정서는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을 후대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당시 레위인의 숫자가 매우 적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레위인을 만난다는 것이 매우 드문 일이었고, 또 레위인들은 사람들로부터 뭇 존경을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나를 위해 아비와 제사장이 되어 달라”고 말하는데, ‘아비’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부르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레위인과 하나님과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기꺼이 자신의 제사장으로 고용한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다 책임져주고, 그 외에도 일 년에 은 10개를 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작은 금액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레위인은 뜻밖의 제안에 기뻐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그 레위인을 자기 아들처럼 데리고 있으면서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미가는 이렇게 레위인을 대접했고, 그 레위인이 자기 집 신당의 제사장으로 있으니 하나님께 더욱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3)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가증한 우상숭배를 행하면서 죄책감이나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복 주실 것으로 기대하는 미가의 모습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가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가의 요청에 순순히 응한 레위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었는지도 모르고 또 자기 사명도 모른 채, 그저 돈 주고 재워주고 먹여준다고 하니깐 미가 집의 제사장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미가의 모습과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모두 “자기”가 있다는 것이죠. 미가는 자기가 복받기 위해 모든 여호와의 이름과 성소와 에봇이며, 제사제도며, 제사장과 레위인이며 다 끌어다가 이용해 먹고 있는 것이고, 레위인도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밥 벌어 먹고자 미가의 집에 고용된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모두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고, 여호와를 위해서 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제도의 형식들까지도 다 취하고 있는데, 실상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과 모든 형식들은 다 껍데기일 뿐이고, 모두 각자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종교적인 장치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상입니다.


사실 성소나, 제사장 제도, 제사제도는 모두 하나님께서 영적인 암매 가운데 있는 인생들로 하여금 계시의 비췸을 받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신 구원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소와 제사장 제도를 통해서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 자신들을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 삼으셔서 이렇게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자원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기억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 모든 제도와 형식과 규례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패함과 암매는 어디까지 미치느냐 하면, 그렇게 주신 바 거룩한 제도와 거룩한 규례 자체를 우상화한다든지, 암매로서 칠을 해서, 주신 그것을 가지고 오히려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과 종교와 모든 거룩한 제도까지도 다 취해서 이용해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타락입니다.


이사야 시대 때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사제도를 자기를 위해 이용해 먹었습니다. 물론 이 때는 오늘 본문처럼 율법 규례 다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제사 드린 것이 아니라, 율법을 좇아 성소에서 정해진 대로 잘 제사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제사를 잘 지낸 목적이 정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장차오실 구속의 수단을 바라본다든지 하는 그런 선한 동기가 아니라, 다만 자기를 자랑하고 또 하나님의 복을 보장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삶 속에서 드러나는데,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불의한 재물을 모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우상을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도 심각한 종교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역사가운데 종교적 타락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선조들이 율법에 무지하여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였음을 알고서는 철저하게 율법을 배우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우상숭배도 철저히 배격했고, 율법의 어떠한 작은 규례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잘 지키기 위한 세세한 구전율법들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모든 민중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바리새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뭇매를 맞았던 자들이었고, 심지어는 예수님이 유일하게 저주하시기까지 한 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바리새인들만큼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율법에 박식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탁월했으며, 영적으로 어두움 가운데 있는 민중들을 진리가운데로 이끄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역사상 가장 종교적으로 타락한 자들이었고, 실상은 사단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섬긴 것이 아니라, 모든 형식과 행실 들은 다 껍데기일 뿐이고, 실상은 종교를 가지고서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탐심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며 종교 활동 한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규범이요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조차도 부패한 인간은 악용해서 자기를 자랑하고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을 정죄하는데 사용하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딤후 6:5), 자기 배를 신으로 삼아 살아갔던 것입니다(빌 3:19). 이것이 바리새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요, 철저한 암매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기독교의 형식을 취하여서 매주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교제 나누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껍데기일 뿐이고, 실상은 다른 어떤 유익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즉 종교를 자신의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면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아서, 감사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동기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각자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뭔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복 주심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불꽃같은 눈으로 늘 지켜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섬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고 헌신하고 충성하면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재물의 복과 건강의 복과 자식들이 잘되는 복과 형통의 복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목사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에 좋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목회자 마다 자기 교회 부흥을 이루어서 자기 이름 내고자 하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설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다 하나님과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종교적인 타락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 공동체에서 인정과 영광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그릇된 동기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장로나 집사가 되고 싶은데, 장로나 집사로 안 세워줄 때, 상처받고 교회 떠나는 사람이 많은데, 바로 그런 경우가 인정과 영광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경우입니다.


아니면 좀 더 고차원적으로 자기를 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지옥 안가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 그렇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 믿어 천국 갑니다. 그러나 천국가기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뜻대로 헌신해서 살기는 싫고 다만 천국 입장권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신앙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적당히 헌신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주 예배 와서 천국보험 잘 있는 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교회 나오고 예배드리고 하는 것입니다.


또는 보다 교묘하게 죄를 범해서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우니깐, 심신의 위로와 평안을 얻기 위해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이 세상이 힘들고 고달프니깐 뭔가 의지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 교회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좋은 말 듣고 심신의 위로와 평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종교적 타락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종교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자기를 위해서 종교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바로 우리 한국교회의 부패한 모습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가 매주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고, 또 교제 나누고, 많은 기독교적인 형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 안에 정말 예수님이 왕으로 계십니까?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까? 예수님을 알고 그 은혜를 알고 사랑함과 감사함이 동기가 되어서 이 예배와 의무들을 행합니까? 만일 이것이 우리 마음에 없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른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종교마저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것이 특별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한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여전히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위해 살고자 하는 죄악 된 본성이 남아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암매 가운데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늘 깨어서 그렇게 종교적 타락으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적 타락에 떨어지는 근본 원인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죄악된 본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죄악된 본성을 깨트리고, 주님을 내 맘 중심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아래서 사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나 자신이 더 이상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주님께 항복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고, 주님께 온전히 자기를 드려 복종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날마다 임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의 존재 목적은 개개인의 영달이나,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모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우리의 유일의 존재의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의 지체가 되어서 하나의 거룩한 몸으로 완성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하고 신령한 몸의 한 세포들이 되어서 서로 연락해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요 우리의 존재목적이고 우리의 욕망, 우리의 야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큰 목적을 위해서 교회를 두신 것이고, 교회 안에서의 모든 활동들... 곧 말씀, 기도, 예배, 헌상, 전도, 봉사 등 모든 교회의 일들이 다 이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고, 주님이 우리의 왕이신 줄 알고, 기꺼이 자원하여 순종함으로 주님의 통치를 받아 이 교회와 모든 거룩한 규례와 제도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고, 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워가야 하는 것이고, 또 날마다 성령 안에서 회개하며 성령을 의지하여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맘을 고쳐먹고, 회개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로는 우리가 미가가 저지른 실수를 피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배워나가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라서 교회의 여러 가지 예배와 의무들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은혜 아래서, 주님의 통치를 받아갈 때,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순종하고자 애쓰며 살아갈 때, 비로소 교회가 자라가게 되고,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자태가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혜를 우리 각자 각자에게 충만히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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