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장]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by 손재호 posted May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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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손재호
성경본문 고전 6:12-20
성경본문내용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13)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6)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강설날짜 2013-05-29

2013년 고린도전서 공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고린도전서 6:12-20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6:1-11절 말씀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내에 함께 형제된 교인들 간에 있었던 송사문제로 인해 안타까워하면서 권면하는 말씀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인들 간에 세상 법정에 송사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말론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종말론적인 인생관이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손해를 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6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이 가하다’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죠. 진정으로 자유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무엇이나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진정으로 자유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어느 정도로 자유한 자였습니까? 우상에게 받쳐진 음식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자유를 자기의 유익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형제를 위하여서라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당시 우상에게 받쳐졌던 고기들이 사장에서 팔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는 것으로 인해 시험에 들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러나 이런 자신의 자유로 인해 어린 형제가 시험에 든다면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면서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하여서는 율법 있는 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처럼 행동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9:19-23절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제재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자유를 자기를 위해 남용하지 않고 형제를 위해서 절제하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음으로 자유케 되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 자유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유에는 방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한 자유입니까? 바울 사도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는데 그 자유를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3-15절 말씀에 보면 육체와 몸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육체 또는 육신이라는 것은 경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반대되는 세상의 쾌락과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경향성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3:14-16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체를 따라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독한 시기와 다툼과 진리를 거스리는 거짓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그런 방향으로 너희의 몸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말씀이 온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성취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사로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힘입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된 자들을 성도라고 하기도 하고, 성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한 몸이 되었기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 12절에서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무엇이나 가하며, 누구에게도 제제를 받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이 자유란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이미 자기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8절에 보면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0:31절에 보면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바울 사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 자신의 육체의 기호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 자유를 주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자유하게 된 자들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우리가 다 죄인인데 별수 있는가 하면서 시쳇말로 배 째라는 식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살아도 나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나를 위하여 죽고 먹어도 마셔도 입어도 전부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아주 정당화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에 여러 가지 봉사할 일들이 있습니다. 식사 서빙도 있고, 설겉이도 있고, 청소도 있고, 예배 환경을 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봉사를 억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서 자원함으로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누가 제제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시 묻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 결정을 누구를 중심으로 결정하신 것입니까? 내 몸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기 몸을 얼마나 잘 챙기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 몸을 챙깁니까? 자기 몸이 최고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싫습니다. 조금이라도 힘이 들면 짜증이 납니다. 그러니 내 몸이 우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리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몸을 위해 삽니다.

 

그러면 이런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13절을 보면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는 이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모든 것에서 감사가 없고 인색해지는 것입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뻔뻔스럽게 살아갑니다.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 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 배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곧 자기의 욕망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이것저것 다 폐하여 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희락과 평강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성도가 자기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섬김으로 맛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형제와 함께 울고 형제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된 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울리다 보니 여러 가지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멀찌감치 구정물에 손 담그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몸만 챙기는 모습입니다.

 

13절을 다시 보면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몸이란 음란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이란 다만 성적인 음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을 위하는 모든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몸의 쾌락과 안일만을 위하여 산다면 그것이 다 자기의 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몸이란 자기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성도의 몸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기쁨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거기에 참여하고 싶습니까? 우리는 자기들의 몸은 담그지 않으면서 무엇은 잘합니까? 마치 경기장에서 관중들이 선수를 보면서 코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만 잘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잘 못하면 당장 갈아 치우라고 난리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는 것은 마음이나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구원이 아니라 몸의 구원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당시 헬라철학의 영향이 많았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이원론이란 것입니다. 정신은 고상하고 물질은 저급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를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철학에서 두 가지의 극단적인 모습이 나오는데 하나는 금욕주의고, 다른 하나는 쾌락주의입니다. 금욕주의란 자기 몸을 괴롭게 해서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금욕적인 고행을 하더라도 육체 좇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고 골로새서 2: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3).

 

또 한편으로는 쾌락주의입니다. 어차피 영혼은 구원 받아 놓았으니 몸이야 어떻게 해도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 영향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기에 음행한 자를 책망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의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 몸 하나 즐거우면 최고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먹고, 나를 위해 입고, 나를 위해 교회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나를 위해 주어야 하고, 예수님도 나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자기의 몸만 챙기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몸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로 주님과 맺어져 있는 것입니까?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부활하게 됩니까? 15절에 보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합하면 그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창기와 합하면 그와 함께 창기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와 한 몸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창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몸이 누구 것이냐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와 합한 자는 주와 한 영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와 합한 우리 성도들은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는 몸 밖에 있지만 음행은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음행은 하나님과 상대방에 대해서만 죄가 아니라 주께 속하고 주를 위해 써야 하는 자신의 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와 합한 우리 성도들은 음행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음행을 행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성도의 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예배당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한 성도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몸 된 성전인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우리는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영광을 돌리는 것을 법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금욕주의나 율법주의가 됩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쾌락주의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 몸이 주님의 피값으로 사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을 더러운 음행에 내어주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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